인간 생명의 시작은 어디인가 - 배아줄기세포 연구와 생명 윤리, 윤리 이야기 지식전람회 6
최경석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1월
절판


인간 개체복제는 체세포복제배아를 착상시켜 약 10개월 간의 임신기간을 거쳐 출산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동일한 유전자를 지닌 두 사람이 존재하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 개체복제를 '인간 복제'라 부르는데, 어떤 이는 인간 배아복제 역시 '인간복제'라 부르기도 하므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동하지 않도록 '인간 복제'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 명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32쪽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항상 법으로 규정하는 것의 영역보다 크다. 예를 들어, 자선을 베푸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옳고 권장할 만한 일이지만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명시하지는 않는다.

이처럼 법이나 관습 안에서 용인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며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법이나 관습으로 규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윤리적으로 잘못된 것을 법률로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습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따라서 우리도 생명 윤리에 관한 법률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행위를 허용하지는 않고 있는지 검토해 보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그 개정을 논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6쪽

수정논증의 지지자들은 잠재성을 '될 잠재성'과 '산출할 잠재성'으로 나눈다. 정자나 난자는 배아와는 다른 지위를 지니는데, 정자나 난자가 지닌 잠재성은 '산출할 잠재성'인데 비해, 배아가 지닌 잠재성은 '될 잠재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0쪽

만약 이에 대해 인간 개체로 발전할 잠재성의 소유자는 반드시 수적 동일성을 유지한 단일 존재자여야 한다고 답한다면, 이런 생각은 도덕 공동체의 일원은 개별적 개인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도덕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되는 존재자의 범주는 최근 확대되고 있다. 물론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개별적 인간이 아닌 집단이나 법인, 동물, 자연 등도 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착상 후의 배아부터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다소 편협하다고 말할 수 있다. -85-86쪽

샌들은 배아를 사람과 사물 사이에 위치한 존재자로 간주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것을 주장하고자 한 것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나 돼지의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소나 돼지를 인간의 양식으로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배아의 생명도 존중되어야 하나 사람의 생명은 아니기에 인간의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했을 수 있다. -105쪽

그렇다면 착상 전의 배아를 단순한 세포덩어리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배아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내부에 있는 유전적 정보에 따라 자신의 발달 과정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배아가 성숙한 인간 존재자로 발달하기 위한 생물학적 프로그램을 자신 내부에 지니고 있다는 점은 배아를 정자나 난자와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점이기도 하다. -106쪽

또한 무엇보다도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정자나 난자가 23개의 염색체를 지닌 것과 달리 배아는 인간 개체와 동일한 46개 염색체를 지닌 생물체라는 점이다. 배아는 이후 여러 인간 개체로 분화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 개체와 동일한 유전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특성은 이후 발달단계에서 연속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107쪽

'도덕적 지위'라는 것은 상당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도덕적 지위는 어떤 존재자가 지닌 도덕적 권리와 책임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 지위는 생명권이나 자율권의 소유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또 자율권의 소유 여부는 능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이라고 해서 누구나 동등한 자율권을 지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는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만한 판단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자율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어떤 잘못된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어린 아이의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과 성인의 행위에 있어서 도덕적 책임은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는 그 둘의 도덕적 지위가 동등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판단능력을 상실한 환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자율권 행사는 능력에 따라 도덕적 지위는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능력에 따라 어떤 존재자의 도덕적 지위가 달라진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권과 관련된 도덕적 지위에 대해서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명권에 대해서는 동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13-114쪽

최근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요구할 수 없는 동물도 생명권을 지닌다는 주장은 감각 능력을 지닌 존재자에 대한 도덕적 배려를 강조하는 입장에 서 있다. 더 나아가 식물도 그리고 자연도 존중되어야 할 가치를 지닌다는 견해는 생명 일반에 대한 존중을 강조한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권리의 주체가 자기 동일성을 지니고 있느냐, 감각능력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단 기준으로 삼지는 않는다. 달리 말해 도덕적으로 존중해야 할 대상자의 범주가 반드시 자기동일성의 확립이나 감각 능력의 소유여부만으로는 결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134쪽

도덕적 논란에 대한 의견 불일치는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상의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인간 배아연구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낙태에 대한 문제, 안락사에 대한 문제 등,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도덕적 문제에 대해 일치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의견의 불일치는 어느 한편이 잘못된 논증을 사용하거나, 선입견이나 오해가 개입되었거나, 정확하지 않은 논거를 사용하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불일치는 이런 문제점이 없는데도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이다. 즉 서로가 논리적 잘못이나 선입견이나 오해에 근거하고 있지 않고 사실이 아닌 논거를 사용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이다. 이런 종류의 의견 불일치를 철학자 존 롤즈는 이성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의견의 불일치로서 '이성적 불일치'라고 불렀다. -136쪽

위 사례는 기술적인 의미의 도덕 상대주의와 규범적 의미의 도덕 상대주의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도덕 상대주의를 단지 사회와 문화에 따라 예절이나 규범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하는 정도라면 그것은 현재의 사실을 기술하는 기술적 상대주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상황이 그렇다는 기술에서 그치지 않고, 도덕이란 것이 사회와 문화에 따라 다른 것이 하나의 규범이론이라는 식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규범적 상대주의라고 해야 한다. -145쪽

롤즈에 따르면 이성적인 것과 합리적인 것은 구별되는데, 이들의 차이는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주의 깊게 선택된 목적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을 선택하거나 추구하는 것과 관련된 지적 덕목이지만, 이성적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성적인 목적이나 관점에 대한 동등한 또는 공정한 고려를 요구하는 윤리적 덕목이다. -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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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08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을, 어느 순간부터 사람이라 할 것인가?"
논란이 구구합니다. 시점에 대한 시시비비는 별로 의미가 없는 듯합니다.
때때로 '철학함'에 거시적 관점을 취하는 것이 합리적일 때가 있는 듯 합니다.
이를 테면 상기 문제와 같은 논란 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