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여덟. 군대를 다녀온 기간을 포함한다면 많은 나이는 아니다. 대학 입시 재수도 안했고, 대학 재학중 군휴학을 제외하고는 휴학도 한번도 안한 채 내리 달려왔다. 2005년 2월에 졸업하여 딱 1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한번쯤 휴학하는 친구들은 이제 졸업하기도 한다. 그러니 늦은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불안증세를 느낀다. 주변에 잘 풀린 친구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면 불안하다. 이러다 나만 계속 이 짓하고 있는거 아냐? 물론 지금의 내 상황은 그 사람에 비하면 매우 약과인 경우도 있다.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몇 차례 시험에 낙방, 계속 기간제 생활과 시험 준비생으로서의 몇 년을 겪다보면 폐인이 된다. 사법시험이나 행정고시와 마찬가지다. 모든 국가시험이 다 그렇다. 하다 안되면 그만 해야 하는데 지금까지 한 게 아깝고 내가 할 줄 아는건 이거 밖에 없고, 하고픈 것도 이거 밖에 없다. 그러면 내리 계속 달리는 거다. 아직 시험 볼 자격 조차 주어지지 않은 나에게는 어쩜 지금 이 상황은 행복(?)한 순간인지도 모른다.

  어머니 친구분들의 자제나 아는 사람들의 아들 딸들 중에도 교사준비생이 꽤 있다. 아니 교사준비생이 아니다. 이미 교사가 된 사람들이다. 얼마전까지 교사준비생이었다가. 그리고 대부분 사립으로 갔다. s여대 사범대를 나와서 일년 시간강사, 일년 기간제, 그리고 올해 정교사 발령난 사람도 있고, S여대에서 K대 편입 후 여고에 응시해 교사로 간 여자분도 있다. 정교사가 되지 못한 어떤 이는 듣기로 건너 건너 교육청에 아는 이가 있어 부탁해서 기간제 자리를 봐줬다는 사람도 있다.

  그래. 학벌이 안되도 다 되는 사람은 되는구나. 지금 난 정교사가 될 기본요건, 자격증이 아직 안나왔기 때문이다, 라고 생각해본다. 마음먹기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며칠간 계속되는 컴퓨터 앞 폐인질에 면접낙방에 미칠 것만 같았지만, 지금 날 보면 정말 미친거 같다. 아예 초월했다. 때되면 부르겠지. 아직 개학 하려면 멀지 않았냐. 더 기다리자. 이러고 있으니 내가 정상인지 비정상인지 나도 모르겠다.

  같은 학부 대학 출신, 그리고 다른 대학 교육대학원에 졸업 혹은 재학 중인 다섯 선배가 있다. 세 선배는 H대 교육대학원에(단지 학비가 싸다는 이유로), 두 선배는 S 교육대학원에 있다. 그리고 내가 있는 K교육대학원에 나를 포함 세명이 있었으나 선배 둘은 논술 학원을 차려버렸다.

  H 교육대학원 - A선배(학부에서 장학금 휩쓸음. 내가 전과후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배운 선배. 남자. 95학번)
                             B선배(잘 모르는 선배. 94학번(?), 남자)
                             C선배(잘 모르는 선배. 95학번. 여자)

 S 교육대학원 - D선배(이미 교육대학원 오기전 중국철학석사 취득, 학과 조교, 4.5의 신화, 남자, 93학번)
                            E선배(군입대전까지 친하게 지냈던 선배, 97학번, 여자)

 K 교육대학원 - F, G 선배(둘다 대학원와서 알았음 선배인줄. 96학번. 남자)

  F,G는 제외하고, 지금 제일 잘 풀린 선배는 셋. 첫번째는 B선배다. 열심히 공부해서 교육대학원 졸업 후 바로 임용시험 합격 현직 교사. 얼굴만 아는 선배. 교사 지망생 선배들 중에서 유일하게 시험으로 교사된 선배다. 가장 부러운 선배. 두번째는 E 선배. 졸업후 나같이 일년간 기간제 생활을 전전하다, 경기도의 어느 한 사립중학교에 기간제 된 후 3년째 하고 있는데, 올해 정교사 발령해준다 한다. 대단하다. 아니 어디서 그런 자리가 들어왔지. 1년짜리 기간제만 구하기도 쉽지 않은 판에 같은 학교에 3년째 있으면서 또 우연히 사립이 되어 그곳에 정착하게 됐으니. 세번째는 D선배. 석사 두개를 갖게 되는 선배인데, 능력있다. 이 선배는 충분히. 서울의 유명 사립 고등학교에 철학 기간제 교사로 갔는데 아마 정교사 발령 분위기라고 한다. 철학 석사 학위의 힘.

 제일 마음이 안쓰러운 선배가 A선배다. 성적도 좋고, 게다가 조기졸업도 했고, 성실함의 대명사다. '도덕교사'라는 이미지를 떠올렸을 때 가장 부합하는 사람이다. (나는 아니다. 나는 일반적인 이미지의 '도덕교사' 상은 아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에게 '도덕교사'의 이미지를 씌우는 것이 부담스럽다. 흔히 생각하는 그런 착하기만 하고 순수하고 준법정신 투철하고 온갖 도덕논쟁에 있어서 교과서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되려 교과서에 반대되는 도덕교사라고 할까.) 이 선배는 기간제는 곧잘 구해 계속 1년짜리 기간제 생활을 해왔다. 3년째인가 지금이. 시험을 두번 쳤으나 두번 다 안됐다. 본인이 노력하지 않아서라고 하지만 아니다. 이 선배 열심히 한다. 그만큼 지금 이 바닥에 사람들이 몰린다는 이야기.

  주변의 누구 이야기를 하면 뭣하는가. 내가 열심히 하면 언젠간 되겠지, 라는 생각을 해본다. 결국 안풀린 사람들 이야기 듣고 좌절하고, 잘풀린 사람들 이야기 듣고 희망을 가진다. 선배들이 열심히 해주니깐 같은 학력 배경을 지니고 있는 나도 희망을 가지고 하려한다. 올해는 내가 바라보는 이상적인 교사상의 모습에 좀더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는 한해를 만들어보자. 일자리는 기다리면 들어온다. 3개월 짜리 정도는.

  학벌이 안돼도, 백이 없어도 될 사람은 다 된다. 우선 스스로 노력하자. 가장 필요한 건 지금 나 자신의 노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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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2-24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2-24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 여기 오셔서 좌절을 하시면 어쩐답니까. 희망을 찾자고 한건데. 님 마음을 편히 가지세요. 모든 것은 마음먹기 마련.

Kitty 2006-02-2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조건 화이팅입니다. 화이팅팅팅팅!!!!!!!!

panda78 2006-02-24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첫문단에 완전 공감입니다. ^^;;; 에효효...
아프락사스님, 열심히! 힘내세요!

마늘빵 2006-02-24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티님 / 감사합니다!
판다님 / ^^ 네!

토트 2006-02-24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기운 내실 줄 알았어요..^^
 

요며칠 뜸했습니다. 아프기도 했고, 무엇보다 주요원인은 다음 3월부터 나갈 학교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절 잘 아시는 분은 알다시피 정식 교사가 아닙니다. 시험을 못 봅니다. '철학'을 전공했다는 죄로. 그리하여 대학원을 졸업해야 하는데 대학원 등록금은 우리나라 같은 계열 대학원의 최고가를 달리고 있고 - 돈 없으면 싼 대학원 다녀야하는건데 무리해서 여기 왔다 왜 이 고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등록금은 다행히 분할납부가 가능하다 하여, 지금 현재 다음학기 등록금 까먹으며 살고 있는 저로서는(있을 때 조금이라도 저축을 안해놓은게 죄다), 계약할 학교를 구해 얼른 계약서에 도장찍고 마음 놓아야 합니다.

20여군데, 나오는 족족 다 이력서 넣고 전화걸고 냅다 달려다가 문방구에서 팩스 넣고, 몇군데 전화도 와서 집에서 한시간 반 거리, 두 시간 거리 힘들여 면접도 가고 했지만, 아직까지 묵묵부답. 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서 뭐가 문제인건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내가 국내 최고 3인방 대학을 나오지 못했기 때문이 하나요, 남자샘들 치고 나이가 어리다가 또 하나요, 경력이 거의 없다가 또 하나요, 집이 멀다가 또 하나.

계약직 교사를 뽑는 학교들의 유형은, 1. 집에서 가까운 샘을 모신다(주로 국공립학교들) 2. 경력이 빵빵한 샘을 모신다(주로 사립학교들. 허나 국공립도 따짐) 3. 학력을 본다(주로 사립) 4. 나이를 본다(담임을 맡길 계획 등의 이유로 본다. 거의 이런 학교는 없지만)

이렇게 네 가지 정도로 분류되는 바, 우리집 근처 학교선 전혀 전혀 공고가 올라오질 않고 있고, 작년부터. 집에서 멀더라도 기꺼이 가려고 했지만 학교에서 집 먼 샘은 싫다하고, 경력이 빵빵하고 싶지만 뭐 시켜줘야 경력이 쌓이지 누군 처음부터 경력이 있나. 학벌이 안된다? 그래서 국내 최고價 대학원에 다니고 있지 않냐. 어떻게든 메꿔보려고.

 이젠 지친다. 정말. 피말리고 머리아프고 가슴은 답답하고 소화도 안되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혹시 걷다가 진동 못느껴 전화오는거 못받을까봐 주머니에 손넣고 다니고, 잠깐 나간 사이 인터넷에 구인공고 뜰까봐 밖에도 못나간다. 컴퓨터는 하루종일 켜놓고 실시간으로 새로고침 버튼 누르며 공고 찾고 있다. 그래야 겨우 면접까지 갈 수 있다. 왜냐면 한번 공고 뜨면 수백명씩 넣기 때문에 이력서도 안본다. 나중에 내면. 대부분 그렇게해서 놓쳤다.

오늘 본 학교는 다행히 공고 뜬지 30분만에 메일을 보내 어제밤 10시 넘어 교감샘으로부터 연락받고 오늘 힘들여 갔는데 아직 연락이 없다. 땡이지 뭐. 교감샘은 맘에 들어서 부른거 같은데 교장샘이 나이어리고 경력없어서 별로였나보다. 휴. 정말 먹고 살기 힘들다. 이제 우리집에 돈도 없다. 다음 달 생활비가 없어 어머니도 나갈 곳 구하고 계신다. 내가 얼른 계약해서 어머니에게 빌린 돈도 값고, 대학원  등록금도 내고, 생활비도 조금 보태야할텐데. 정말 돈 없으면 공부도 맘놓고 못한다.

리뷰고, 영화평이고 뭐고 다 팽개쳤다. 책도 안읽는다. 보고픈 영화가 뭔지도 모른다 이제.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건 6개월짜리든, 1년짜리든 올해를 버텨낼 학교를 찾는 일이다. 자기전까지 컴퓨터는 끄지 못한다. 밤에 또 급한 공고가 올라올 수 있으니까. 국어, 영어, 수학 같은 흔한 과목도 아닌 내 건 하루에 한건 찾아보기 힘들다. 경제학부에서 철학과로 전과한게 잘못인가 처음 오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싫어도 경제학과에서 버티는건데 그랬나. 그렇담 그냥 무역회사 같은데라도 들어가 있을거 아냐. 최소한 먹고 살 걱정은 안할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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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중가인 2006-02-23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학교로 와주세요~~~ ㅎㅎ 경기여고에 젊은 남자 쌤이 없어서 완전 인기 최고이실텐뎅..ㅎㅎㅎ

마늘빵 2006-02-23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고프지만 안불러주네요. 흠. 이런 페이퍼 학생이 보면 안되는데. ㅡㅡ;;;

미미달 2006-02-23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래서 기운이 없어보이셨군요.
근데 나이 보는건 좀 이해가 안가는군요 ;

비로그인 2006-02-23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 먹고 사는게 뭔지;; 님 힘내세요~
음...책음메님은 경기여고 다니시는구나

2006-02-23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토트 2006-02-24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운 내세요...
이런 말 해두 될진 몰겠지만, 제가 들은 말인데, 공고만 내구 아는 사람 뽑는 경우가 많대요. 아는 샘들에게 부탁해보시는게 더 빠르지 않을까요?

사마천 2006-02-24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부 전공이 중요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에서 결정적인 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단 동창은 꽤 영향력이 큽니다. 자기를 자리매김하는 준거기준이 됩니다. 그러기에 과동기에만 한정 짓지 말고 다른 과 출신들과도 교분을 가져가는게 좋습니다. 고교동창 모임이 효과적이죠.

마늘빵 2006-02-24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달, 나를 찾아서님, 숨은님 / 감사합니다...
토트님 / 저도 들어 알고 있지만 아는 샘들이 몇 없답니다. 다 연락해봤죠. 그 몇 안되는 샘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을 듯 해요.
사마천님 / 제가 경제과에서나 철학과에서 홀로 놀아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는 딱 한명 연락하고 지냅니다. 되려 학원애들과 중학교 친구들을 연락하고 지내죠. 그다지 발이 넓지 않은 관계로 인맥에 의해 뭔가를 하는건 제겐 어려울 듯 합니다.

하늘바람 2006-02-24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힘내셔요. 같은 철학도로서(우왕 밝힘이 되버리고만) 응원합니다

사마천 2006-02-24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수록 발을 넓혀야 하지 않을까요? 인생은 긴대... ^^

2006-02-24 14: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2-24 14: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코마개 2006-02-24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생계의 압박과 별개 문제인데..
리니지 명의도용피해 소송하거든요....
'로마켓'에서 해줍니다.
비용은 1만원, 배상청구액은 100만원.
한번 하시죠.

마늘빵 2006-02-24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사마천님, 속삭이신 두분 / 감사합니다...
강쥐님 / 저 바로 삭제했는데 저도 할 수 있나요? 증거물이 남아있으려나...

코마개 2006-02-24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안내문 잘 보시고 하시면 됩니다.

승주나무 2006-02-25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에서 철학으로 트셨군요. 공대에서 철학으로 튼 저도 근근히 버티고 있답니다. 철학이 아직은 '사회적 학문'으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하는 것 같군요. 저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말과 아이디어를 퍼뜨리고 다니는 '유세가'가 되고 싶습니다^^

마늘빵 2006-02-25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승주나무 님도 전과자이시군요. 전 전과 2범입니다. 고등학교 때 한번, 대학 때 한번. 반갑습니다. 돈 안되고 불러주지 않는 소외된 학문이죠.

승주나무 2006-02-25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전과 2범입니다. 철학과 전과에 국문학/철학 양다리 전공 전과도 가지고 있습지요^^ 이제 돈 되는 학문의 시대가 찾아오지 않을까요. '지식사회'의 '지식'은 앤지니어적인 '지식'도 있지만, 나머지 반의 '지식'은 우리들의 것이지 않습니까.

마늘빵 2006-02-2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랑 동률이시군요. 그럴까요. 흠... 이공계의 위기다 말들 많은데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당연한걸로 간주하고들 있죠. 당연히 버리는게 맞다는 식의 인식들.
 
책상은 책상이다
페터 빅셀 지음, 이용숙 옮김 / 예담 / 2001년 10월
구판절판


"언제나 똑같은 책상, 언제나 똑같은 의자들, 똑같은 침대, 똑같은 사진이야. 그리고 나는 책상을 책상이라 부르고 사진을 사진이라고 하고, 침대를 침대라고 부르지. 또 의자는 의자라고 한단 말이야. 도대체 왜 그렇게 불어야 하는거지?"-26쪽

"아마 이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고 싶어서 열차를 타는 건지도 모르죠." 내가 말했다.
"그것도 사실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사람들 대부분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죠. 심지어는 매일 아침 여기서 기차를 타고 매일 저녁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력이 나쁘다는 거죠."
그리고 그는 역에 있는 사람들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 등 뒤에 대고 외쳤다. "이런 바보 멍청이들! 그렇게 기억력이 없다니!' 그는 그들에게 계속 소리쳤다. "이 차를 타면 헤겐도르프를 지나간다고!"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그 사람들 기분을 망쳐놓았다고 믿었다.-67-68쪽

그리고 아내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모르게 된 게 뭐에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나는 아직 모든 걸 다 알고 있어." 아직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주 슬퍼했다.

...중략...

아내가 다음번에 "아직도 알고 있는게 뭐에요?"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했다.
"나는 전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날씨가 좋고 나쁜게 어떤거라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는 바깥 날씨를 모른다는게 어떤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잖아. 그리고 방 안이 아무리 어두워도 완벽하게 어두운 건 아니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어."-90-91쪽

"내가 무엇을 알고 싶지 않은 건지, 먼저 그걸 알아야겠어" 남자는 이렇게 외치고 창문에서 종이를 뜯어버리고 덧창을 열었다. 창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고 그는 비를 바라보았다.

...중략...

"하지만 아직도 나는 아는 것도 부족해. 나는 모든 것을 알아야겠어. 모든 것을 알고 나야만 그 모든 것을 더 이상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테니까." -9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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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사상가들 -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공자. 예수
카를 야스퍼스 지음, 권영경 옮김 / 책과함께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칼 야스퍼스가 이런 책을 썼는줄은 몰랐다. 야스퍼스라면 보통 실존주의 철학자로 분류되는 이인데 3년간 대학에서 철학을 했지만 야스퍼스에 관해서는 서양철학사 개론서 만큼의 지식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실존주의로 분류되는 이들 중에서 니체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대학 강단 철학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듯 하다. 야스퍼스는 특출나게 주목받는 저서를 낸 것도 거의 없다. 기껏해야 제목만 알고 있는 <이성과 실존>이나 <철학적 신앙> 정도 뿐.

  <위대한 사상가들>은 야스퍼스의 철학을 모르고서도 충분히 읽을 수 있는, 또 야스퍼스 뿐 아니라 철학일반에 대해서도 아예 모르더라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일종의 입문서 역할을 한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이 책은 철학서가 아니다. 그래서 제목이 '위대한 철학자들'이 아니라 '위대한 사상가들'이다. 원래 책은 '디 그로센 필로소펜' (독일어를 자판으로 어떻게 쳐야할지 모르겠다) 으로 '위대한 철학자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나, 본 책에서는 번역서에서 다루고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철학자로 분류되는 이들을 다루고 있기에 제목이 그러했던 것이고, 번역서는 그 중 단 네 명만을 뽑아놔 따로 책을 만들었기에 '철학자들'보다는 '사상가들' 어울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역자가 야스퍼스의 '위대한 철학자들'로부터 뽑아낸 네 명의 '사상가들'은, 소크라테스, 불타, 공자, 예수 이렇게 네 명이다. 하지만 선택은 역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야스퍼스는 이미 그의 저서에서 이 네 사람에 대해서 따로 언급하고 있다. 야스퍼스의 원저에는 이 네 사람을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철학의 기본모델로 제시하고 있었다. 그는 네 명을 모델로 제시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고찰한 네 명의 위인 외에도 아브라함, 모세, 엘리야, 조로아스터, 이사야, 예레미아, 마호메드, 노자, 피타고라스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만큼 역사적으로 깊이 있고 지속적인 영향을 준 인물은 없다. 유일하게 마호메드만은 역사적 영향력에서 네 명의 위인과 어느 정도 견줄 만하지만 인간적인 깊이에서는 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칼 야스퍼스)

  어떤 철학이나 사상으로서 후대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서 선정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함하여 인간적인 면모까지도 살펴봤던 것이다.

  이 책은 하나의 잘 만들어진 네 명의 사상가에 대한 레포트이다. 그만큼 매우 쉽고, 간결하고, 정리가 깔끔하게 되어있다. 이 책을 보면서 야스퍼스니 실존주의니 떠올릴 필요도 없고, 자연스럽게 떠오르지도 않는다. 또 한편으로 대단한 내용을 담고 있지도 않고 있다. 되려 야스퍼스를 떠올리며 그가 썼으니 뭔가가 있을거야 라고 기대하는 것은 절대금물. 혹시라도 그런 기대를 품고 이 책을 들췄다간 실망할 것이다. 정말 아무 내용도 없으니.

  야스퍼스는 네 명의 위인들의 생애와 철학사상을 실제 그들이 한 말과 예를 통해서 사실감있게 보여주고 있다. 절대로 소크라테스와 불타, 공자, 예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이가 봐도 쉽게 느껴지는 책이다. 야스퍼스의 주관은 배제된 체 단순히 이들을 소개하고 이들이 왜 철학자들의 모델이 되어야 하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더 쉽다.

 

**
중학교 도덕 교과서에 보면 인물탐구 라고 하여 네번에 걸쳐서 각각 두명씩 위대한 인물에 대해서 알아보는 단원이 있는데, 이 책은 학생들이 인물 탐구를 위해 따로 가볍게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야스퍼스에게서 뭔가를 기대하고 읽는 철학 관심자들은 기대를 거두고 중고등학교 학생용이라고 생각하고 읽으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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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 경고

  이번달에는 별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고픈 괜찮은 작품들은 꽤 있었지만 한번 외출에 쓰이는 비용과 현재 해야만 하는 일의 압박, 또 여러가지 신경써야하는 것들 등 정신적 여유의 부족에 기인한다. 오랫만의 가족들의 나들이. 아침에 운동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영화볼까, 그러신다. 당연히 영화 좋아하는 나는 귀가 솔깃, 분명 어제 해야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보고 갔다와서 하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승락. 택한 영화는 뮌헨이었다. <홀리데이>를 볼까 했는데 롯데씨네마에서도 이 영화는 저녁 몇 타임 밖에 상영하지 않았다. CGV랑 갈등을 일으키더니 이번엔 롯데씨네마? 보고픈 영화가 극장을 점거하고 있는 자본의 힘에 따라 간판을 올렸다 내렸다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1972년 9월 5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날, 전 세계는 침묵했다. 그러나 2006년 지금 전 세계는 흥분한다. 왜 그때 세계가 침묵을 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 벌어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작고 큰 충돌들, 아랍권 국가 사이에서의 수많은 다툼은 더이상 특별할게 없는지라 뉴스감이 될 수 없다. 자동차가 처음 생겼을 때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은 뉴스감이 되었겠지만, 자동차가 사람숫자에 버금갈(?) 지금에 와서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는 것은 동네에서 보던 익숙한 고양이가 어느날 길거리에 죽어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은 언제나 있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는 않을 듯 하며, 여기에 관심 갖는 이도 소수일 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이라고, 에릭 바나가 나온다고 해서 섣불리 이 영화를 봤다간 실망감과 짜증과 지루함이 엄습하리라. 이 영화는 절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이가 재미삼아 볼 건 못된다. 테러영화라고, 액션이라고 해서 헐리우드 특유의 화려한 총격장면이나 전쟁씬이 등장하진 않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 밋밋하고 지루하게 진행되는 이 영화가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건 재미를 기대한 관객들에겐 고역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별 하나가 수두룩하다. 아무리 유명한 감독과 배우가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관객들에겐 '따분'과 '지루' 가 현실을 지배한다.  

  나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심지어는 스타벅스 10% 할인되는 신용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의 회장이 유대인이며(그건 죄가 아니다), 두 나라간의 전쟁에 이스라엘측 무기구입비를 대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다. 촘스키의 수많은 미국비판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책들에도 관심(만) 있어 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 아브너에겐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 막 태어난 아기가 있다. 그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국가의 평화를 위해 테러단의 대장이 되지만, 그것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 아브너의 이스라엘 테러단. 왼쪽에서부터 차량 도주 전문 스티브, 대장 아브너, 뒤처리 전문 칼, 폭탄제조가 로버트, 문서위조 전문 한스. 저들 중 살아남을 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72년 뮌헨 올릭픽 선수촌에서 테러가 발생, 이스라엘 선수단 9명이 사살되었다.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은 이곳에 침입, 선수단 9명을 인질로 잡았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모두 살해했다. 이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후의 사태를 다룬다. 물론 여기까지만 사실이고, 뒤의 이야기는 허구다. 11명의 검은 9월단이 모두 생존한 것으로 보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복수를 가한다. 아브너(에릭바나)는 이 테러단(?)의 대장이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장난감 제조자에서 폭발물 전문가로 변신한 로버트, 차량도주전문가 스티브, 뒤처리 전문가 칼, 문서위조 전문가 한스로 구성된다. 총 5명의 소규모 테러단은 11명 중 6명에게 복수를 가하는데 성공한다.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 그리고... 테러는 끝이 없다. 살육은 살육을 부른다. 피는 피를 부른다. 검은 9월단을 하나하나 찾아 복수에 성공하기만 하던 아브너에게도 두려움은 찾아온다. 나의 사랑스런 아내와 태어난 딸이 위험하다는 생각, 내가 도청을 당하고,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 그래서 그는 침대를 들추고 찢고, 전화를 분해하고, 텔레비젼 뒤를 뜯는다. 자기 조직이 테러에 성공했던 방법들로 똑같이 당할까봐.

  테러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테러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내가 누군가를 테러하면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테러당할 수 있다.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 해도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군가 나를 죽일 거라는 두려움에 떨며, 내가 죽인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가야한다. 죽음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복수는 정의로운가?

  이스라엘 아브너의 테러단은 정의실현을 위해 복수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복수는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정의의 문제는 몫의 문제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성지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내가 상대에게 불의를 입었을 때, 나는 상대에게 불의를 돌려줘야하는가? 만일 돌려준다면 그것은 복수가 될 것이요, 돌려주지 않는다면 불의는 나에게서 그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이라는 불의를 당했지만, 이에 불복하거나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탈옥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 하여. 나는 아테네로부터 불의를 당했지만, 내가 불의를 당했다고 상대에게 불의를 되돌려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나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므로.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 + dikesis 의 합성어이다. ek는 영어 from을, dikesis는 justice를 의미한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복수는 정의 실현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정의실현의 많은 방법 중 하필 복수를 택하게 된다면, 나는 상대에게 당한 불의를 갚기 위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불의를 행한 상대와 내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이고, 내가 상대를 같은 인격체로서 대하지 않는 순간 나 역시 그가 된다.

  그들은 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에게 똑같이 갚으려 한다면, 그와 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도 테러를 한다. 복수를 한다. 왜냐면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해서. 결국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테러일 뿐인데도. 이 영화는 끊임없는 복수의 참상을 잘 보여준다. 내가 테러의 영웅이 되었다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브너는 뒤늦게 깨닫는다. 절망감과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두 나라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테러를 중단해야한다. 상대와 같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을 테러하는 것을 영화 줄거리로 삼고 있다. 영화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시작했고, 이스라엘인들은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 뿐이라고. 그러면서 아브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단과 이스라엘에 면죄부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잘생긴 에릭바나의 테러단에게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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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2-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생각보다 별루었었죠. 스필버그의 지나친 휴머니즘 강조가 넘 역력해서.
가족애 부분도 그렇고. 아무리 중립적이려고 해도 이스라엘인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어서 더욱 그러했구요. 쩝.

마늘빵 2006-02-1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각보다 별로였어요. 그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려주는 정도였죠. 전 이걸 재료로 삼아 테러와 복수, 정의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본거구요. 원래 그럴 의도로 영화를 봤지만, 그렇지 않은, 재미를 찾기 위해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크게 실망했을거에요. 저도 실망했어요. 지루했고.

balmas 2006-02-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포일러 경고 때문에 페이퍼 본문은 안읽고 댓글만 읽는 나의 센스~~ ㅋㅋ

마늘빵 2006-02-22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발마스님 영화 보세요. 생각할 거리는 좀 있습니다. 박진감이나 흥미, 재미를 기대할 순 없지만.

balmas 2006-02-2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까요? 사실은 한번 보려고 했던 영화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