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경고

  이번달에는 별로 영화를 보지 못했다. 보고픈 괜찮은 작품들은 꽤 있었지만 한번 외출에 쓰이는 비용과 현재 해야만 하는 일의 압박, 또 여러가지 신경써야하는 것들 등 정신적 여유의 부족에 기인한다. 오랫만의 가족들의 나들이. 아침에 운동을 다녀오고 밥을 먹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영화볼까, 그러신다. 당연히 영화 좋아하는 나는 귀가 솔깃, 분명 어제 해야할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보고 갔다와서 하면 되지, 라는 마음으로 승락. 택한 영화는 뮌헨이었다. <홀리데이>를 볼까 했는데 롯데씨네마에서도 이 영화는 저녁 몇 타임 밖에 상영하지 않았다. CGV랑 갈등을 일으키더니 이번엔 롯데씨네마? 보고픈 영화가 극장을 점거하고 있는 자본의 힘에 따라 간판을 올렸다 내렸다 늘였다 줄였다 하는 것이 영 못마땅하다.

  1972년 9월 5일.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그날, 전 세계는 침묵했다. 그러나 2006년 지금 전 세계는 흥분한다. 왜 그때 세계가 침묵을 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하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곳에서 벌어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작고 큰 충돌들, 아랍권 국가 사이에서의 수많은 다툼은 더이상 특별할게 없는지라 뉴스감이 될 수 없다. 자동차가 처음 생겼을 때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으면 그것은 뉴스감이 되었겠지만, 자동차가 사람숫자에 버금갈(?) 지금에 와서 교통사고로 사람이 죽는 것은 동네에서 보던 익숙한 고양이가 어느날 길거리에 죽어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충돌은 언제나 있어왔고,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는 않을 듯 하며, 여기에 관심 갖는 이도 소수일 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이라고, 에릭 바나가 나온다고 해서 섣불리 이 영화를 봤다간 실망감과 짜증과 지루함이 엄습하리라. 이 영화는 절대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없는 이가 재미삼아 볼 건 못된다. 테러영화라고, 액션이라고 해서 헐리우드 특유의 화려한 총격장면이나 전쟁씬이 등장하진 않는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 밋밋하고 지루하게 진행되는 이 영화가 두시간 반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는 건 재미를 기대한 관객들에겐 고역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별 하나가 수두룩하다. 아무리 유명한 감독과 배우가 영화를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관객들에겐 '따분'과 '지루' 가 현실을 지배한다.  

  나름 잘 알지는 못하지만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또 심지어는 스타벅스 10% 할인되는 신용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벅스의 회장이 유대인이며(그건 죄가 아니다), 두 나라간의 전쟁에 이스라엘측 무기구입비를 대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다. 촘스키의 수많은 미국비판과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문제에 대한 책들에도 관심(만) 있어 하는 나로서는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었다.



* 아브너에겐 사랑스런 아내가 있다. 막 태어난 아기가 있다. 그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국가의 평화를 위해 테러단의 대장이 되지만, 그것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 아브너의 이스라엘 테러단. 왼쪽에서부터 차량 도주 전문 스티브, 대장 아브너, 뒤처리 전문 칼, 폭탄제조가 로버트, 문서위조 전문 한스. 저들 중 살아남을 자는 과연 몇이나 될까.

  72년 뮌헨 올릭픽 선수촌에서 테러가 발생, 이스라엘 선수단 9명이 사살되었다.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은 이곳에 침입, 선수단 9명을 인질로 잡았으나 협상이 결렬되자 모두 살해했다. 이후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는 이후의 사태를 다룬다. 물론 여기까지만 사실이고, 뒤의 이야기는 허구다. 11명의 검은 9월단이 모두 생존한 것으로 보고, 이스라엘은 이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복수를 가한다. 아브너(에릭바나)는 이 테러단(?)의 대장이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은, 장난감 제조자에서 폭발물 전문가로 변신한 로버트, 차량도주전문가 스티브, 뒤처리 전문가 칼, 문서위조 전문가 한스로 구성된다. 총 5명의 소규모 테러단은 11명 중 6명에게 복수를 가하는데 성공한다.

  팔레스타인의 테러와 이스라엘의 보복, 그리고... 테러는 끝이 없다. 살육은 살육을 부른다. 피는 피를 부른다. 검은 9월단을 하나하나 찾아 복수에 성공하기만 하던 아브너에게도 두려움은 찾아온다. 나의 사랑스런 아내와 태어난 딸이 위험하다는 생각, 내가 도청을 당하고, 테러의 대상이 되었다는 생각. 그래서 그는 침대를 들추고 찢고, 전화를 분해하고, 텔레비젼 뒤를 뜯는다. 자기 조직이 테러에 성공했던 방법들로 똑같이 당할까봐.

  테러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테러는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다를 바는 없어 보인다. 내가 누군가를 테러하면 나 또한 언젠가 누군가로부터 테러당할 수 있다. 운이 좋아 살아남는다 해도 나는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군가 나를 죽일 거라는 두려움에 떨며, 내가 죽인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살아가야한다. 죽음과 다를 바가 무엇이랴.

  복수는 정의로운가?

  이스라엘 아브너의 테러단은 정의실현을 위해 복수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복수는 정의로울 수 있는가. 정의의 문제는 몫의 문제이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데서 비롯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가 성지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내가 상대에게 불의를 입었을 때, 나는 상대에게 불의를 돌려줘야하는가? 만일 돌려준다면 그것은 복수가 될 것이요, 돌려주지 않는다면 불의는 나에게서 그칠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이라는 불의를 당했지만, 이에 불복하거나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탈옥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것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라 하여. 나는 아테네로부터 불의를 당했지만, 내가 불의를 당했다고 상대에게 불의를 되돌려주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나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므로.

  복수가 정의 실현의 한 방법임은 틀림없다.  복수라는 말 ekdikesis는 ek + dikesis 의 합성어이다. ek는 영어 from을, dikesis는 justice를 의미한다. 복수는 정의로부터 왔다. 그러므로 복수는 정의 실현의 한 방법이다. 하지만 정의실현의 많은 방법 중 하필 복수를 택하게 된다면, 나는 상대에게 당한 불의를 갚기 위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것은 불의를 행한 상대와 내가 다를 바 없다는 의미이고, 내가 상대를 같은 인격체로서 대하지 않는 순간 나 역시 그가 된다.

  그들은 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에게 똑같이 갚으려 한다면, 그와 나나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도 테러를 한다. 복수를 한다. 왜냐면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분노를 감추지 못해서. 결국 돌아오는 것은 더 큰 테러일 뿐인데도. 이 영화는 끊임없는 복수의 참상을 잘 보여준다. 내가 테러의 영웅이 되었다고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아브너는 뒤늦게 깨닫는다. 절망감과 죄책감과, 두려움에 사로잡히면서. 두 나라 간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선, 테러를 중단해야한다. 상대와 같이 불의를 행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영화는 그걸 보여준다.

 * 스필버그는 유대인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을 테러하는 것을 영화 줄거리로 삼고 있다. 영화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팔레스타인이 시작했고, 이스라엘인들은 그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 뿐이라고. 그러면서 아브너를 비롯한 5명의 테러단과 이스라엘에 면죄부를 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잘생긴 에릭바나의 테러단에게 동정심을 가져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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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02-1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생각보다 별루었었죠. 스필버그의 지나친 휴머니즘 강조가 넘 역력해서.
가족애 부분도 그렇고. 아무리 중립적이려고 해도 이스라엘인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어서 더욱 그러했구요. 쩝.

마늘빵 2006-02-19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생각보다 별로였어요. 그냥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려주는 정도였죠. 전 이걸 재료로 삼아 테러와 복수, 정의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본거구요. 원래 그럴 의도로 영화를 봤지만, 그렇지 않은, 재미를 찾기 위해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크게 실망했을거에요. 저도 실망했어요. 지루했고.

balmas 2006-02-22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스포일러 경고 때문에 페이퍼 본문은 안읽고 댓글만 읽는 나의 센스~~ ㅋㅋ

마늘빵 2006-02-22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발마스님 영화 보세요. 생각할 거리는 좀 있습니다. 박진감이나 흥미, 재미를 기대할 순 없지만.

balmas 2006-02-2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럴까요? 사실은 한번 보려고 했던 영화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