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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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법률가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남들이 모두 진리라고 믿어 온 것도 반드시 자기 머리로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지요.-5쪽

제 기대는 병역거부가 더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 저의 경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는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전쟁이 분쟁 해결의 중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이런 세계에 살면서 평화를 모색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뿐이 아닌 평화의 실천을 고민하다보면, 어느새 병역거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변한 것처럼 여러분도 이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다 보면 언젠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런 날도 오겠지요. 이 책은 '그들'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나'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 저의 지적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35쪽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둘러싼 이런 오해는 용어의 번역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입니다. 서양에서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미로 쓰이는 '양심' 개념이 번역되어 우리 일상에서 쓰일 때 '다른 사람의 평가'와 관련된 객관적인 의미로 확장되었고, 거기에 '적'이라는 일본식 표현까지 덧붙어 그 의미가 매우 불분명해졌습니다. 물론 우리말에서도 '양심'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하려는 마음'을 뜻합니다. 적어도 사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국어사전이 알려주는 의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관계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양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 사람 참 양심적이야"라는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야"가 아니라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야"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오해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38-39쪽

'a good conscience'란 자기 마음에 비추어보았을 때 떳떳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좋은 양심'이냐 아니냐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 지니고 있는 거울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적 감각과 관련 있기는하지만, 보편적인 윤리나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각자 나름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스스로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떳떳하다면 그것은 'a good conscience'입니다-40쪽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제19조가 이야기하는 양심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헌법학자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입니다.-40쪽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가 진지하고 절박하고 구체적인 마음의 소리를 뜻한다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행동에는 충분히 '양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이 그저 남들이 다 가는 군대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징병에 응한다면 그것은 굳이 양심의 자유와 연결시킬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내가 군대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 때문에 견딜 수 없어 군대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진 않을 테니까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영 행위는 '비양심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과 크게 상관없는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40-41쪽

'양심에 따른 거부'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개인이 행사하는 광범위한 거부권을 의미합니다. 자기 양심에 따라 국가의 요구를 거부하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표현이지요. 여기에는 자기가 동의할 수 없는 이념이나 정책을 펴는 국가에 반대해 세금을 내지 않는다든지, 독재 정권에 대항해 투표를 거부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포함됩니다. -42쪽

'양심에 따른 거부'란 매우 광범위한 시민불복종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나라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로 번억해 쓰는 co는 정확히 번역하자면 '양심에 따른 거부'가 맞고, 거기에는 병역거부뿐만 아니라 세금 거부, 투표 거부, 화폐 사용 거부, 집총 거부 등 국가를 상대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거부가 포함됩니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양심에 따른 거부의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가 병역거부라는 걸 이해하고 나면 '비양심적 병역이행'같은 기괴한 반대 논리가 자리 잡을 여지는 전혀 없지요. –-49쪽

pacifism은 처음 쓰일 때부터 반전주의를 의미했습니다. 지금도 대개의 영어 사전들은 "전쟁은 잘못된 것이며,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도 잘못이라는 믿음", "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 또는 폭력에 반대함, 윤리적 또는 종교적 이유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함"등으로 평화주의를 정의하고 있지요.-50쪽

'평화주의'라는 단어를 드을 때 퀘이커나 메노나이트, 아미시 같은 특정 기독교 교파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 중에도 국가에 의한 징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므로 평화주의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충실한 사람도 역시 평화주의에 속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복잡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평화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 정의하기 어려운 여러 평화주의에서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것 뿐입니다. 다행히 그 공통 분모를 찾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거부한다'는 점이지요. 일단 이 책은 그 공통분모에 기초하여 평화주의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평화주의를 '전쟁에 반대하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 또는 종교적 믿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51쪽

평화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 전쟁만은 '필요악' 또는 '정당한 전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며 찬성표를 던집니다. 심지어 전쟁터에 나가 사람을 죽이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평화주의자 범주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평화주의자가 되려면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강한 확신이 필요합니다.-52쪽

평화주의와 구별해야 하는 개념으로 '비폭력주의'가 있습니다. 비폭력주의는 평화주의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평화주의가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비폭력주의는 '폭력'을 거부하는 입장입니다.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부모나 교사가 드는 회초리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평화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비폭력주의자는 아닙니다. 기독교 교파 중에는 전쟁에 절대 반대하면서도 가정 교육에서 일반인들보다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비폭력주의자는 대부분 평화주의자입니다만, 평화주의자가 되려고 비폭력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평화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동물에 대한 폭력까지 반대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가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에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이보다 훨씬 범위가 넓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을 묶는 유일한 공통점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반전주의자가 되려고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반전주의자가 되려고 반드시 비폭력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52-53쪽

사실 "강도가 네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이라는 질문도 여러 차례의 변형을 거쳐서 나온 것입니다. 질문자들은 왜 "강도가 너를 죽이려 한다면"이라거나 "강도가 너를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 같은 질문을 들고 나오지 않았을까요? 이미 그 질문의 답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정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저는 강도를 죽이고 자신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제 생명을 포기하겠습니다"같은 대답을 듣는 것은 질문자에게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신념을 위해 자기 생명도 포기할 수 있다고 결단한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평화주의자들이 그런 존경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씌우려고 말이지요.

이 질문은 그런 악의에 찬 의도로 고안되었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토론을 지향하기보다는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만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논의 대신에 '강간'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써서 이 문제를 남성성의 문제로 전환해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빈다. "네 여자가 강간을 당할 상황인데, 가만히 있다면 너는 사나이가 아니다"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전쟁터로 남성들을 유혹해내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바로 '강간'입니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또 위의 질문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네 여동생', '네 아내', '네 여자친구' 등 모두 '너의 OO'입니다. 그들이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소유권 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67-68쪽

우선 전쟁은 '무죄한 사람의 죽음'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방위와 구별됩니다.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내 방위행위의 대상은 분명합니다. 바로 강도 그 사람이 나의 상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 상관없는 제 3자가 피해를 입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다릅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은 '언제나' 무고한 양민들입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그랬습니다. 비행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돌진한 테러범들은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빈 라덴이 주축인 알 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은 알 카에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명분은 테러범 응징을 내세웠지만 결국 고통받은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민중들이었습니다. 강도에게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과 전쟁을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 중략 ...

전쟁이 위 질문의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면 설사 제가 그 질문에 "예, 저는 강도를 죽이고 여동생을 살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병역을 거부할지라도 저의 두 태도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69-71쪽

공론의 장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놓고 팽팽한 논쟁이 벌어져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게 되었을 경우, 누가 논증부담을 져야 할까요? 사람들은 보통 평화주의자들이 논증부담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론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전쟁의 정당성 또는 불가피성을 전제한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네 쪽에서 밝혀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해서 토론 패배를 인정하고 평화주의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관한 한, 잠정적 추정은 평화주의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가져오는 엄청난 인명 손실과 인권 침해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약'이어서, 전쟁을 옹호하는 어느 누구도 감히 전쟁 그 자체를 '선'이나 '정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쪽은 어떨까요?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성경의 입장이 과연 평화주의 쪽이었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평화주의적 입장에 설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았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평화주의 쪽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잠정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면,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기독교 내부의 논증부담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 참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부담해야 합니다. –-83-84쪽

"병억 기피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집중적인 전도 대상이 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대체복무제에 귀가 솔직해 넘어갈 수 있다"는 한기총 정연택 사무총장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물론 대체복무제 같은 그럴듯한 미끼가 있다면 기독교인들 중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되는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봅시다. 대체복무제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허용된다면 이런 걱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신교 신자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하는 걸 막으려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감옥에 보내야 할까요? 기독교인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넘어가는 걸 막는 일은 목사님들이 할 일이지 국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기독교 교육을 통해 막아야 할 일을 국가 형벌을 통해 해결하려는 태도가 과연 기독교 정신에 맞는지 의문입니다.-108쪽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마라.
(<마태복음> 5:38-42, 비교 <누가복음> 6: 29 ) -112쪽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라는 구절에는 '거역'과 '거스르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거역'은 그리스어 '안티타소'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 군사 용어인 이 말은 '전투 태세를 갖추다'또는 '무기를 들고 대항할 준비를 하다'는 뜻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두 번의 '거스르다'는 그리스어 '안티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도 무장반란이나 폭력적 저항을 의미합니다. 즉 위의 성경 구절에 나오는 '권위를 거역'한다는 의미는 국가권력에 폭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국가권력에 대한 '모든' 저항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국가권력에 맞서서 무장반란을 일으키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되고 그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가 되는 것입니다. -120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정당한 전쟁 이론의 핵심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제시한 데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전쟁은 정의를 보장하고, 평화를 되찾는 수단으로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전쟁은 반드시 정당성을 지닌 통치자의 지도 아래 이루어져야 하며, 적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적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비전투요원들은 보호받아야 하며, 학살, 약탈, 방화 등은 절대 금지됩니다. 수도사나 성직자들처럼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집합적으로 또는 법적 권위자에 의해 실현되는 '전쟁'과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폭력(또는 살인)
을 엄격히 구분하였습니다. 앞의 것은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136쪽

최초의 동기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그 방법이 정당하지 않을 때는 나의 행동 자체가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의 정당성과 전쟁에서의 정당성을 구분하려는 입장은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불가분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정당성과 전쟁의 정당성은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150쪽

식민지가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병역을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은 이때 처음 수립된 것입니다. 이 법안을 수용하면서 펜실베니아 의회의 한 의원은 "잠깐 동안의 안전을 위해 본질적 자유를 포기하는 자들은 자유도 안전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눈 앞의 안전을 위해 양심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기억해둘 만한 말이지요. -177쪽

톨스토이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반드시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이든, 이슬람이든, 불교도든 또는 어떤 나라 출신이든지 간에 전쟁을 거부하는 입장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899년 징병을 앞둔 젊은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 시대를 사는 윤리적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면 병역을 거부해야만 합니다."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는 이론적으로 매우 단순한 형태였지만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184-185쪽

"누구든지 양심에 반하여 무기를 들고 전쟁에 복무할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다." (독일 헌법 제 4조) -203쪽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다면 감옥에 갈 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위해서 일어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는 아닙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는 다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소수를 다수로 바꾸는 분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께 의지하여 올바른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당신 곁에 계실 것입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베트남 반전 운동에 나서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설교의 주인공으로 킹 목사를 자주 인용하는 한국 목사님들이 막상 킹 목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사실, 정말 아이러니 아닙니까?

킹 목사는 평화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최고의 자리에서 반역자의 자리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평화의 실천은 그런 것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킹 목사를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평화는 최대한 추상적으로 말로만 떠들어야 하는 것이지, 절대 구체적인 전쟁을 언급하거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지혜입니다.
-227쪽

"내게는 전쟁을 단순화시켜서 생각하고 싶은 아주 개인적이지만 강한 유혹이 있다. 이를테면 제 6계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살인하지 말지니라'의 말 뜻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이 있다. 또한 모든 윤리적인 원리들 가운데 가장 큰 원리인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말의 보편성을 에누리 없이 믿고 싶은 유혹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인간 역사에 더 큰 살상을 막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필요했고 또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았던 순간들이 드물게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이런 결론에 마음이 못내 불편하고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 M 스콧 펙 박사)-248쪽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입영률 100퍼센트 달성 지시를 내림에 따라 병무청 직원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 모든 병역거부자(또는 병역거부가 예상되는 사람)들을 일단 군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부터는 병무청 직원들이 아예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장소인 왕국회관을 포위하여 징집 연령에 속한 사람들을 영장도 없이 군부대로 강제 입소시킨 다음, 군부대 내에서 입영 및 소집 명령서를 발부하는 불법을 자행하기도 하지요. 그야말로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높은 실적을 올리려고 멀쩡한 민간인을 붙잡아 억지로 군인으로 만든 다음 군형법을 적용한 것인데 누구도 그 절차상 하자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270쪽

1990년대 초부터 일부 군사법원(국법회의의 후신)은 상관이 총을 두번 주었는데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두 번 다 거절하면, 각각을 독립된 범죄로 보아 마치 같은 죄를 두번 저지른 것처럼 가중하여 처벌하는 편법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형법상 이른바 '경합범'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를 통해 법정형으로 정해진 징역 2년의 상한선을 넘어 징역 3년을 선고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처음 거부했을 때 즉각 구속하지 않고, 다음날 다시 총기를 수여함으로써 억지로 경합범을 만드는 이와 같은 처벌 방식은 당시 30개월이었던 현역 복무 기간보다 형이 더 길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었지요.-275쪽

동기는 좀 달랐다 하더라도 이들의 행동은 분명히 국가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려는 군사독재정권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단이냐, 아니냐 여부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기독교의 '이단' 정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확대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주류에 속한 특정 집단이 소수파를 '이단'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그 소수파를 '이단'으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입니다. 반공, 애국, 기독교, 독재정권 등이 일체를 이룬 주류 사회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철저하게 결합해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278쪽

양심적,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경우에는 헌법상 기본적 의무로 되어 있는 병역의 의무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적 기본권인 사상, 양심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그 양자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양자를 적절히 조화, 공존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예외 없는 처벌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 외에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각자의 사상, 양심, 종교에 따른 실질적 평등을 보장받을 평등권 등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양심적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하여 헌법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단계에 왔다."는 박 부장판사(2002년 1월 29일 서울 지방 법원 남부지원 박시환 부장판사)의 선언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281쪽

대체복무에 반대하는 분들은 애국심이 남달라 강한 분들입니다. 누구라도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의 애국심이 지금의 수준을 뛰어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애국심은 남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남이 어떻게하든, 남이 돈을 써서 병역 면제를 받든말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든말든, 나는 내 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입니다. 그리고 남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내가 상당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것도 애국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애국자들이 대체복무와 같은, 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들이고도 남을 애국심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314쪽

남북 대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가치 자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모순된 논리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엄청나게 제한했던 유신정권과 논리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어차피 소수자들은 다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체복무 인정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따뜻한 배려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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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아침 네이버 뉴스에 이런 기사가 떴다. 15살 여학생이 45살인가 하는 여교사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폭행했다고. 시작은 여교사가 급식지도를 하면서 여학생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뒤로 가서 서있으라고 한 듯 한데, 이에 불만을 품은 여학생이 뒤돌아선 여교사의 머리채를 잡고 때렸다는 것이다. 현장에 있어봐야 진실여부를 알 수 있겠지만 이같은 기사가 하루에 한건씩 뉴스에 뜨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반대로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했다는 등 문제있는 교사에 대한 기사들도 가끔씩 뜨곤 한다. 어느 집단이건 꼴볼견은 존재하고, 그 배경이 학교와 교실이 되었다고 해서 예외는 될 수 없다. 

  뉴스로만 보고 듣던 사건이 내가 근무하는 그곳에서 벌어졌다. 학교에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나는 당시 수업 중이었던지라 옆반에 있던 선생님으로부터 들었는데, 3학년 여학생 하나가 수업중에 선생님을 향해 글로 담아내지 못할 욕을 퍼붓고 깽판쳤다는 것이다. 두 시간에 걸쳐서. 앞 시간엔 욕을 하고, 뒷시간엔 욕과 더불어 선생님을 향해 의자를 집어던졌다고 한다. 그리곤 경찰에 신고해서 선생님을 데려가라고 했나보다. 작년부터 좀 문제있는 아이다 싶어 말이 많았다. 어르고 달래서 학교에 문제 없이 잘 다니도록 했는데 결국은 한 건 했다. 시작은 역시 꾸지람이었다. 수업태도의 문제를 지적한 듯 한데 기분이 나빴던 것이다.이 학교와서 많이 느끼는 바지만 대개의 많은 아이들이 일단 기분이 나쁘면 자신이 잘못했건 안했건 간에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든 그 사람이 먼저 잘못한 것으로 간주하고 들어간다. 잘못했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적해주면 머리로는 받아들일지 몰라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진 않는다.

  이건 오늘 내게 있었던 사건이었다. 2학년 한 남학생이 내 수업 때마다 환타지 소설을 보길래 오늘은 미리 빼앗고 시간이 끝나면 주겠노라 했다. 그랬더니 이때부터 억지를 쓰기 시작하는데 보다 걸리면 일주일 압수이고, 지금 빼앗고 주면 한시간만 못보는 것이다, 라고 말하며 설득을 했고, 설득이 먹혔다. 이런걸 설득해야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힘겹다. 어쨌든 수업이 끝났고 나는 수행평가와 관련해 앞에 나온 다른 학생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지우개 조가리가 여러개 날아왔다. 맨 앞에 앉은 그 녀석이 저쪽에서 지우개를 뜯어내 던지고 있던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자기가 계속 불러 책을 달라고 했는데 보지 않았다고 내 시선을 끌기 위해 지우개를 던졌다는 것이다. 순간 당황을 넘어서 황당했지만. 옆에 있는 여학생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선생님 얘 아까부터 선생님 불렀어요. 진짜에요. -_-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

  하나 더. 3학년 한 여학생이 수업 시간에 핸폰으로 게임을 하길래 집어넣으라 말했다. 하지만 바로 꺼내어 다시 게임을 하기 시작했고, 초반엔 못본척 했지만 계속 하고 있길래 애초 말했던대로 압수하고 7일 후 돌려준다 했다. 달라 달라 계속 떼를 쓰다가 결국 나를 쫓아와 왜 안주냐고, 그럼 날짜라도 줄여달라고 화를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_- 어휴. 당연히 수업시간에 핸드폰은 안되고, 더군다나 시작할 때 지적해서 넣으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꺼내어 게임을 했으니 당연히 잘못한거 아니냐, 했지만 막무가내다. 자기자신만 빼앗겨서 기분 나쁘고 잘못한건 생각지 않는게다.

  정말 기본이 안된 사례들을 매일매일 경험한다. 나름 학생들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배려한다고 이거저거 다 봐주고 최대한 존중해줬더니 돌아오는건 더 큰 요구다. 내 교육철학이 잘못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집에 돌아와 패닉상태에서 케이블 티비를 돌리며 멍하니 <공공의 적2>를 봤는데, 강철중 검사가 이런 말을 하더라. "우리가 개냐. 개들 그러잖아. (조용히) 저리가, 그러면 좋다고 따라오고, (무섭게) 이리와! 그러면 도망가고." 여지껏 (조용히) 이리와 그랬는데, 새학기가 시작되면 (무섭게) 이리와! 해야될까보다. 결국 아이들이 기본을 지키는건 그나마 무서운 선생님 앞에서니까.  공맹의 덕치보다는 한비자의 법치가 더 끌리는 요즘이다.

*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앞에 있던 선생님께서 본인의 경험을 말씀하시더라. 어떤애가 계속 자신을 부르길래 가봤더니 그 학생이 떨어뜨린 프린트를 주워달라는 거였다고. 왜 불렀는데 빨리 안오고 안주워주냐고 따졌다고. 할 말을 잃었단다. 듣고 있는 나도 숨이 막힌다. 거의 매일 나눠준 프린트가 내 앞에 떨어지면 주워다가 주곤 했는데 어떤 녀석은 두 손으로 받으며 고맙습니다, 그러고 대개의 아이들은 아무 말 없으며, 적지 않은 아이들이 저 같은 반응을 보이니까. 선생님들이 강남지역으로만 가길 원한다는 기사를 봤을 때 속으로 그 분들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는데 이제는 고개를 끄덕인다. 좀 더 나은 근무환경이란 교사들에게 공부는 못해도 기본은 최소한 지킬 줄 아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다. 많은 분들이 강남지역 아이들은 최소한 그건 되어있다고 느끼는 듯 하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학교 내에서 체벌을 금지하는 것이 과연 옳은일인지 의문이 든다. 예전엔 교단에 서면 절대 매는 들지 말아야지 했는데, 대화와 설득이 먹히지 않고 모든 것을 잔소리로 받아들이고 자신에 대한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다수' 의 학생들을 대함에 있어 더 이상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생각한 방법은 모두 동원해봤지만 먹히지 않았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매 인데, 몇 차례 가볍게 한 두대 때려본 바로는 효과 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는데 일단 선생님과 수업시간을 싫어하게 되고 공부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이다. (하긴 공부로부터 먼 건 원래 그런 아이들이니 크게 달라지는건 아니다. 다만 공부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 문제다.) 수업시간에 별 탈 없이 딴짓을 하든 뭘하든 조용히 시킬 수는 있지만 그 학생이 공부하도록 하는 욕구로부터는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즉 그저 무서워서 조용히 있을 뿐이지 자기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뉘우치고 조용히 있는건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 매도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다. 다만.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문제있는 소수를 조용히 시킬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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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19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렌초의시종 2007-06-19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암담하고 답답해요...... 그러고보면 선생이 된다면 아예 아이들에 대해서 많은 걸 포기하자고 다짐하는 저 자신이 한심스럽도록 다행스러울 때가 있어요......

마노아 2007-06-1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학교도 비슷하지만 그곳이 좀 더 심해 보이네요^^;;; 프린트 나눠주고 남으면 저를 불러요. 남았다고..;;;; 그럼 네가 들고와라! 하면 그때 들고 나오죠.
오늘은 한 여학생이 아프다고 했는데, 사실 믿음이 안 가는 녀석이었지만 정말 아플 수도 있으니 엎드려 있으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엠피쓰리를 듣고 있더라구요. 7일간 압수!했더니 자기 것 아니라고 엄청 항의하더군요. 아무튼 뺏어서 갖고 왔는데 여러모로 괘씸했어요. ㅜ.ㅜ

2007-06-19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6-19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 네...
로렌초의 시종님/ 곧 님도 현장을 경험하겠지요? 제가 너무 의욕이 강해서 많은걸 알려주려하고 많은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거나 학생들을 지나치게(?) 인간적으로 대하나봅니다. 갑자기 고등학교 때 '피바다'라 불리우는 젊은 남자선생님이 생각나네요.사실 부드러우신 분 같았는데 학생들 사이에선 악명 높았죠.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었던 '학주'도 알고봤더니 눈물 많고 부드러운 남자였고.

정아무개님 / 저도 생각할 때마다 답답하고 멍해집니다. 오늘은 직업을 바꿔야 하나 생각도 해봤습니다. 나약한 생각이겠죠.

마노아님 / 그래도 들고오라면 들고오나봐요. 지시를 해서 말을 들으면 그나마 낫죠. 그런 학생도 있지만, 언제나 문제는 극단적인 일부에 의해서 발생하는 법이니까요. 거의 대부분이 기분이 좋고 나쁨의 여부가 옳고 그름의 판단 잣대가 되더군요. 옳고 그름과 기분이 나쁘고 좋음을 구분하지 못하는 듯 합니다.

데이드리머님 / 매일 힘겹습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것도 열심히 들으려하는 애들이 많아야 의욕이 생기고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해줄까를 고민하는거지, 순 저런 애들만 있는 교실에 가서는 그런 이야기해줘봐야 듣지도 않는데, 이런 생각이 먼저 앞섭니다. 힘듭니다. 매 말고는 방법이 없는건지. 도덕시간에 아무리 대화와 설득, 합리적 사고 등등을 말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그냥 진도 나가기 위한 설명일 뿐이죠.


멜기세덱 2007-06-19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들을 확 그냥 다 잡아 패부러!ㅋㅋ 아무래도 이건 아니죠? 이런 이야기들 볼 때마다 우리나라 선생님들이 참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됩니다. 모든 아이들을 감싸안고 바람직한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선생님이 되는 길은 참 멀고도 험한길이지만 말이에요.ㅎㅎ

2007-06-19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7-06-19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멜기세덱님 / 정말 심정은 그러고 싶었습니다. 전에 있던 학교는 자연스러운(?) 체벌이 어느 정도 허용되는 곳이었고, 실제로 선생님들께서도 - 주로 남자선생님 - 안되는 녀석들은 불러다가 꽤 아프게(?) 때리곤 했습니다. 그럼 잘못하면 맞을걸 알기 때문에 다음부터는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시인은 하더군요. 잘못을 반복해서 저지르더라도 최소한 시인할 수 있는 정도라면 그 아이는 기본은 됐다고 봐야죠. 매가 무서워서 그러는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그러는건지 모르지만. "모든 아이들을 감싸안고 바람직한 성인이 되도록 도와주는 선생님이 되는 길" 이란건 그냥 이상인가봅니다. 친구처럼 수다도 떨어주고, 최대한 자유를 허용해주고, 청소할 때면 같이 도와주기도 하고 그랬지만, 또 그러면서 제 마음도 편했지만, 최근 그네들을 보면서 이건 아니구나 싶습니다. 벌써 경력이 꽤(?) 되었는데 매번 이렇게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엔 그러지 말아야겠습니다. 결국 통하는건 강제와 매 인가 봅니다.

마늘빵 2007-06-19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종님 / 교생 선생님은 학생들에겐 삶의 활력소지요. 그리고 교생으로 나가 좋은(?) 경험하고 오신 분들은 희망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지요. 꼭 교단에 서려고. 그런데 6개월 이상을 같은 아이들과 접하는 교사가 되면 다른가봅니다. 나름 젊고 부드럽게(?) 생긴 저는 초반엔 아이들에게 신선함의 대상이지요. 하지만 그 기간은 3개월을 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초반에 절 좋아하고 그래서 저도 의욕을 갖고 가르치고 더 자상하게 대해주지만 그게 함정이더군요. 거기 빠지면 이제 복구불가능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됩니다. 지금과 같은. -_-

2007-06-19 2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6-19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아이들 3명을 소위, 특목고에 보냈는데.. 아이들은 선생님들을 존경하고 선생님들께서는 아이들을 존중해 주었습니다. 학교다운 학교였지요. 수준에 맞는 아이들을 모아 가르쳐야 제대로 교육이 됩니다. 외고 과학고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거나 아이들이 선생님께 불손하게 대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실력을 갖춘 선생님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authority'와 아이들의 그런 선생님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아이들 스스로의 자신에대한 자부심이 아이들의 태도를 바르게 하는 듯 했답니다. 저는 그런 풍경을 한 10년간 아이들 학교 보내며 지켜봤답니다. 특목고는 학교다운 학교들입니다.


LAYLA 2007-06-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잘하면 예의도 바를까요? 공부 잘하는 애들은 예의가 바르다기보단 '눈치'가 빠르다고 여겨집니다만^^ 수행평가도 있고..부모님 체면도 있고(학생성적 좋으면 부모님이 사회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는 경우가 많죠 특히 강남이면 ㅋ)선생님에게 잘해서 아쉬울거 없다는걸 잘 꿰뚫고 있는 애들이죠. 모범생 가면이 도움이 많이 된다는거 잘 알고 있고. 제가 너무 비관적인걸까요? 교사의 입장에선 이러니 저러니 가면이든 뭐든 공부잘하고 말 잘듣는 애가 편하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진실된 마음이 없는 교사와 학생 관계라니 좀 안타깝네요.

비로그인 2007-06-20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목고의 특별한 풍경 중의 하나는 '실력이 없는' 선생님은 아이들이 인정하질 않더군요.
실력없는 선생님들은 특목고에서 오래 버텨내질 못합니다.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무시합니다.
또 선생님들은 공부 안하는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잘하는 아이들하고 공부해 나갑니다. 따라올려면 따라오고 놀려면 놀아라지요. 공부에 관하여 철저히 자율에 맡깁니다. 요는 대학 스타일이지요.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물어보고 서로 경쟁하며 함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제대로된 학교 교육이지요..


얼룩말 2007-06-20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다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 애들은..
교사라는 입장에선 그런 애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끌고 가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참..교사 대 학생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한판 뜨고 싶은 애들이군요.

기인 2007-06-20 0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효... 참.. 그 정도까지인지 몰랐네요..

마늘빵 2007-06-20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사님 / 아이들마다 개성이 강하고, 각기 성향이 다른 만큼, 다양한 목적으로 설립된 학교가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봅니다. 현장에 있으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는데, 똑같은 일괄적인 교육은 그 누구에게도 효과를 볼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특목고에서 실력이 있고 없고의 여부에 따라서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차별한다는 건 좀 그렇군요. 교사채용에 대해서 건너 듣고 경험해본 바로는 특목고에 아무나 채용하지는 않습니다. 나름 검증된 사람들을 뽑아 고르고 골라 채용하는건데,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이 그같은 차별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실력이 아니라 성격에 따라 그런 것일수도.

얼룩말님 / 사실은 끝까지 끌고 가야죠. 하지만 매일매일 너무나 지칩니다. 이제 고작 2년정도의 경력을 가진 저부터도 벌써 지칩니다.

라일라님 / 물론 공부 잘하는 것과 기본적인 예의가 갖춰진 것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대략 눈 앞에서만이라도 기본은 지킬 줄 알죠. 말씀하신대로 부모님 체면이건 아니면 평가 때문이건 그 이유가 무엇이됐든, 그 모습이 가면을 쓴 모습이든 진실된 모습이든 일단 문제는 일으키지 않으니까 수업에 방해가 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같아선 이런 거짓된 모습이라도 보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 정도 생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기인님 / 그쵸. 저도 뉴스에서만 봤는데, 현실이죠.

비로그인 2007-06-2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이 이야기중이라 못 들었으면 앞으로 나와서 다시 이야기를 하던가,
기다리던가 해야지. 어디서 버릇없게 지우개를 던져!! 수업시간에 딴짓 하는게
자랑이야!! "

"이게 어디서 선생님을 오라가라야!! 자기 앞에 떨어진 프린트는 스스로 주울 것이지!
내가 니 시종이야? 그런 싸가지는 어디서 배웠어?"

위의 글을 읽으며 제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던졌을 말입니다. 정말 어이가 없군요.
엄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다면 체벌은 굳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도 전에 학원에서 근무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언제나 말로 다스렸습니다.
물론, 그들에게 나는 '무서운 선생님'이었겠지만, 화를 내야 할 때 외에는 엄하게
한 적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저를 잘 따르더군요.

그런 개념없고 버릇없는 학생들을 지도해주는 것이 선생의 몫입니다.
너무 착한 성품의 아프님에게는 무리한 권유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잠시 접고 '나도 화가 나면 무섭다' '더 이상은 봐주지 않겠다' 라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시는게 어떻겠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잘해줄 때 잘했어야 한다'라는 후회를
주는 것도 좋은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예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아프님처럼 착하고 아이들을 좋아하고, 인간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지루해하고 어려워하는 역사를 재밌게
가르치실까 고민하신 노력이 보일 정도로 항상 수업을 온갖 액션과 코믹한 이야기들로
엮어 하셨습니다. 물론, 학생들의 반응은 최고였지요. 그러나 그것은 반년만 지속.
아프님처럼 딱 이 시기에 선생님도 아이들에게 '너무 잘해주기만 했다'라는 것을
깨달으셨습니다. 말을 듣지 않고 버릇없는 녀석들이 나오기 시작한거죠.
그래서 내린 그 분의 결단은, '잘해줄 때 너희들도 잘했어야 한다' 라는 것이었죠.
그 후로 그 분은 농담도 하지 않고 무섭게 아이들을 대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학생들은 굳이 표현을 하지는 않았지만, 후회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것도 인생의 가르침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동에 따라 좋은 환경 혹은 나쁜 환경을 가질 수 있다'라는.


요즘은 선생도 학생들도 잊고 있는 듯 합니다. '선생'의 뜻은 '먼저 선, 날 생'
먼저 태어난 선배가 뒤에 태어난 후배에게 살아가는 법, 사회에서 적응할 수 있는
기본을 가르치는 것이 교과목의 가르침보다 먼저라는 사실을.

날씨도 덥고, 여러모로 힘드시겠지만. 조금은 덕치와 법치의 적절한 조율을 하시면서
힘내시길 바랍니다. ^^
뜻은 반드시 통한다고 하였으니,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반드시 아프님의 가르침의
진심을 알아주는 학생들이 있을 것입니다.

빠샤빠샤 - !!!

마늘빵 2007-06-2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긴 댓글. 한장의 페이퍼군요. 엘신님 감사합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입니다. 제가 느끼고 있는 제 자신의 문제를 지적해주셔서 뜨끔했습니다. :)

홍수맘 2007-06-2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난감하다는 말이 생각났어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이렇게 힘들구나, 아이들과의 신경전이 정말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멋진 아프님!!!. 잘 해내실거죠?

마늘빵 2007-06-20 13:15   좋아요 0 | URL
댓글 달기가 여기 따로 창이 뜨는군요. 이걸 왜 몰랐었지. -_-
감사합니다. 어제는 거의 패닉 상태였는데, 오늘 또 좋아라하는 아이들 반에 들어가서 그나마 좀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네꼬 2007-06-20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선생님이었으면 만날 울고 다녔을 거예요. 누군가는 맡아주셔야 할 교육, 요즘 같은 때 꿋꿋하게 버텨주시는 선생님들께 고맙습니다. 어수선한 곳이라고 도망치지 않으시는 것만으로도요. 아프님, 마노아님, 모두 ♡

마늘빵 2007-06-20 20:41   좋아요 0 | URL
네꼬님 도망치고 싶단 생각 했었는데 부끄럽습니다. 도망치지 않고 딴 맘(?) 품지 않고 자리 잘 지키겠습니다. :) 감사.

logos678 2007-06-2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아이들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반항과 공격성이지만, 내면엔 불안과 우울, 소외감과 절망감이 담겨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에요. 가정에서 신뢰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구요. 어쩌겠어요? "마지막 한 번을 더 용서하는 마음"이 필요한 것을... 기운내세요.

2007-06-20 2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6-20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인생. 2007-06-21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중고생들은 너무 잘해주면 기어오르고. 또 엄하게 대하면 그것을 싫어하고.
참 입장 난처할때가 많은것 같아요.
전 개념없는 애들보면 아이들도 문제지만 부모님 한번 뵙고 싶더군요.
그런집은 늘 교육상문제가 있쟎아요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들에게 들려주는 행복의 길 청소년 철학창고 6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홍석영 옮김 / 풀빛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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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까? 이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대답들은 모두 '행복'으로 모아진다. 행복은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 즉 최고의 선이다. 어떤 사람도 불행해지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무엇일까? 사람마다 추구하는 행복은 서로 다르고, 때로는 같은 사람도 경우에 따라 서로 다른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행복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고유한 일과 기능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고유한 일, 자기에게 어울리는 일을 탁월하게, '매우 잘' 수행할 때 사람은 가장 행복해지며, 그런 행복은 생애 전체에 걸쳐 완전한 덕을 성취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만의 고유한 기능인 '정신의 덕이 있는 활동'을 행복이라고 규정하고, 행복한 사람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탐구한다.
(1부 행복에 대하여) -12쪽

행복이 완전한 덕에 따른 활동이라면, 이제 덕의 본성이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행복에 대해 더욱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덕은 '인간의 덕'이다. 인간의 덕이란 신체의 덕이 아니라 '정신의 덕'을 의미한다. 정신의 덕은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된다. 철학적 지혜나 이해력은 지적인 덕이고, 너그러움이나 절제는 도덕적인 덕이다.

그러면 덕이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이 있는 사람이 되려면 정념, 즉 감정을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념이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중간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중간은 수학에서 말하는 평균과 같은 것이 아니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하여, 마땅한 동기로, 그리고 마땅한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 바로 중간 상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용이며, 또한 참된 덕이다.
(1부 행복에 대하여) -22쪽

국가의 통치 형태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의 타락한 형태에도 세 가지가 있다. 세 가지 통치 형태는 군주제, 귀족제, 그리고 재산 능력에 기초를 둔 유산자제(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국가 형태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화제라고 부름)이다. 이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은 군주제이고, 가장 나쁜 것은 유산자제이다. 군주제가 타락하면 참주제가 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1인 지배의 정치 체제이지만 커다란 차이가 있다. 즉, 참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군주는 백성의 이익을 추구한다. 군주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의 이익을 돌본다. 따라서 참주제는 타락한 정치 형태 중에서 최악의 형태다.

귀족제는 그 통치자들의 악덕으로 인해 과두제로 타락한다. 과두제에서는 국가에 속하는 것을 제멋대로 분배한다. 즉, 좋은 것을 전부 혹은 대부분 자기가 갖고, 관직을 언제나 같은 사람들에게 주며, 무엇보다도 재물에 연연한다.

유산자제는 민주제로 타락한다. 사실 이 둘은 거의 비슷하다. 유산자제는 다수의 지배를 이상으로 하며, 재산이 있는 사람은 모두 평등한 것으로 여긴다. 한편 민주제는 다른 타락한 정치 형태들보다는 덜 나쁘다. 시민들 스스로의 선거에 의해 지도자를 뽑기 때문이다.
(6부 다시 행복에 대하여)-165-1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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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1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리뷰 카테고리 목록을 보시면 금방 아실거에요. :)
전공 맞습니다.
 
몽매한 자를 깨우치다 이이의 격몽요결 Easy 고전 10
김세서리아 지음, 김우정 그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기획 / 삼성출판사 / 2006년 12월
절판


"모를 섬기는 자는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행실이라도 감히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반드시 부모에게 명을 받은 뒤에 그것을 행해야 하는 것이니, 만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도 부모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반드시 자세히 말씀드려서 부모님이 허락하신 뒤에 행할 것이다. 끝애 허락하지 않으신다 해도 곧바로 자기 마음대로 제 뜻을 이루어서는 안된다."
(밑줄그은이 주 : 그 정신은 본받아 마땅하나 언제나 문자 그대로의 말이 옳아보이진 않는다) -89쪽

예전엔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의식의 개념이 들어 있었다면, 요즘의 장례식은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영원히 제외시키는 의식의 절차라는 생각이 듭니다. 장례식장이나 납골당 같은 것이 집 주변에 생기는 것을 꺼리는 것도 그러한 생각의 일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죽음을 자꾸만 삶과 동떨어진 것으로 이해하려는 현실의 세태가 조금은 아쉽게 느껴집니다. -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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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12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내용은 그다지 깊이있진 않습니다. 이이와 관련된 주변머리들을 훑으신다고 보면 돼요. 이지고전 시리즈 네 권짼가 보는데 다른 책에 비해 내용은 별로 없습니다. 워낙 또 <격몽요결>이란 책이, 맹자나 공자 처럼 뭐 말할거리가 많은 책도 아니라. 그럭저럭 볼만해요. <격몽요결>은 1차 서적 붙들고 있긴 힘드니깐.

마늘빵 2007-06-1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사실 잘 모릅니다. :) 그렇담 요 책으로도 괜찮을거 같아요.

2007-06-12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간을 위한 약속 사회계약론 나의 고전 읽기 3
김성은 지음, 장 자크 루소 원작 / 미래엔아이세움 / 2006년 6월
품절


루소에게 독서는 훗날 자기 머리로 생각하기 위한 철저한 훈련이었다. 그는 자기 입맛에 맞는 책 몇 권만 읽고 세상을 모두 아는 양 잘난 척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우선 자신의 입장을 하얗게 비워두고 저자가 전해 주는 지식을 머릿속에 저장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그렇게 수많은 저자들의 얘기를 편견 없이 모두 섭렵한 다음에야 그것들을 비교하고 성찰하여 자신의 독특한 생각을 만들었다. -42쪽

홉스가 보기에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따로 있지 않았다. 선하고 악한 것, 옳고 그른 것은 상대적이며, 국가와 법이 성립되었을 때 비로소 판정 기준이 생긴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기 이익만 끝까지 추구하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하여 이리나 늑대와 다름없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처럼 살아남기도 벅찬 자연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계약으로써 국가를 만들어 자연권을 제한하고 국가를 대표하는 의지에 권리를 양도하여 복종한다. -77쪽

가족은 정치사회의 최초의 모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배자는 아버지에 해당되고 국민은 자식들에 해당된다.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난만큼 그들이 자유를 양도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이다. 다만 가족과 국가에 차이가 있다면, 가족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자녀를 돌보는 것이 자녀들에 대한 사랑 때문이지만, 국가에서는 지배자가 국민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지배의 즐거움 때문에 국민을 지배한다는 점이다. (사회계약론 1부 2장) -101쪽

사회 안에서 인간은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왜냐하면 오로지 욕망의 충동을 따르는 것은 노예적 굴종이지만 스스로 만든 법을 따르는 것은 자유이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 1부 8장) -113쪽

사회계약이 유명무실한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반의지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라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단체에 의해 일반의지를 따르도록 강요되어야 한다는 약속이 사회계약 내에 암암리에 포함되어 있다. (사회계약론 1부 7장) (밑줄그은이 주 : 가장 논란이 되는 부분) -141쪽

영국 국민은 자유롭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다. 그들이 자유로운 것은 오직 의회의 대의원을 선출할 때뿐이며 일단 선출이 끝나면 그들은 노예가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회계약론 3부 15장)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투표일에만 자유롭다. 딱 하루 국민으로서 정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면 나머지 날들은 국가가 어떻게 돌아가든 나 몰라라 살아간다. 그나마 투표일마저도 무관심하게 지나치고 그것을 자랑이라고 떠든다. "누가 되든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그놈이 그놈인데." 그러나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감시를 게을리 하는 국민은 잘못된 정치에 침묵으로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빌헬름 라이히라는 학자는 저서 <파시즘의 대중심리>에서 "가장 심하게 정치를 타락시키는 것은 스스로 비정치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소극적이고 사회에 무관심한 태도다"라고 경고했다. 루소가 일찍이 간파한 대로, 사회에 속한 이상 그 누구도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170-171쪽

본질적으로 전원 일치의 동의를 요구하는 법은 단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사회계약이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협동은 가장 자발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태어나 스스로 다스리고 있는 만큼 어느 누구도 어떤 구실로도 당사자의 동의 없이는 예속시킬 수 없다. 노예의 아들이라고 태어나면서부터 노예로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과 같다. (사회계약론 4부 2장) -202쪽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고 얘기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루소의 후예로서 칸트가 깨달은 것은 모든 인간은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이다. 한 개인이 아니라 '인류'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을 넘어서서 인류의 입장에 설 때 비로소 '진정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었다. -210쪽

"나는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일 가운데 나와 무관한 것은 없다."
(마르크스가 가장 좋아하는 고대 로마의 명언) -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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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1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하면 다섯명?의 자식을 고아원에 버린 것이 생각나요..

마늘빵 2007-06-11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네 정확하십니다. 9살 연하의 여관하녀와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다 내다버렸죠. 그거 때문에 쉬이 비판받죠. 근데 당시엔 그런게 또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여건이 안되는데 아이를 낳으면 고아원에 버리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