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딸기 > 영국 상원, '600년만의 개혁' 시작되나

영국 하원이 `귀족 집단'으로 운영돼온 상원을 개혁하기 위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섰다.

하원은 상원의원을 전원 선거를 통해 뽑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원개편안을 표결에 붙여 7일 통과시켰으며 앞으로 입법화 과정을 거쳐 개혁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AP통신 등이 보도했다. 상원을 모두 선거로 뽑게 된다면 영국 의정 600년 역사에 획기적인 변화가 오게 되는 셈이다.

 

상원개편안은 이날 하원에서 찬성 337표 대 반대 224표로 통과됐다. 이 개편안은 하원의 개혁 요구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 안이 통과됐다 해서 법제화 절차에 자동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니며 향후 정부의 입법안 작성과 제출, 상하원 표결 등의 절차가 뒤따라야 한다. 영국 정부는 올 연말 상원 개혁과 관련된 법안들을 일괄 처리할 방침이다.

아직 갈길이 멀긴 하지만 14세기 영국 양원제 틀이 굳어진 이래 최대의 변화를 몰고올 개혁안에 발동이 걸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잭 스트로 하원의장은 "수십년간 논의만 벌여왔던 일을 진전시킨 역사적인 발걸음"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상원은 종신직 귀족 의원 500명 가량과 세습의원 92명, 국교인 성공회 성직자 의원 26명 등으로 구성돼 있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상원의원 절반을 선출직으로 바꾼다는 좀더 온건한 개혁안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하원은 `100% 선출직으로 구성한다'는 훨씬 급진적인 방안을 택했다. 여기에는 지난해 터져나왔던 블레어 총리측 `의원직 매매' 스캔들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블레어 총리는 지난 2005년3월 총선을 앞두고 기업가들과 자산가들에게 선거자금을 빌리는 대가로 기사 작위를 수여, 종신의원으로 만들어준 사실이 들통나 곤욕을 치렀다. 이 때문에 지난해 현직 총리로서는 사상 최초로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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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에도 언급했지만, 하비의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의 한국어 번역본은 오역으로 가득차 있다. 역자가 맑스주의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있는지 의심스럽고, 성의없이 번역한 것은 아닌지..

번역본을 사서 보다가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원문을 보다가 하다가, 짜증이 폭발해서 이제는 원문으로만 본다! 라고 하다가 또 진도가 안나가서 번역본을 보다가 하는 작업의 반복.

내 시간도 아깝고 해서 왠만하면 넘어가겠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정반대로 번역해 놓은 것들이 읽다가 눈에 띄면 정말 화난다.

국역 178페이지, 원문 141페이지를 보자.

The consequent slackening of effective demand was offset in the United states by the war on poverty and the war in Vietnam. But declining corporate productivity and profitablitiy after 1966 meant the beginnings of a fiscal problem in the United States that would not go away except at the price of an acceleration in inflation, which began to undermine the role of th edollar as a sable international reserve currency. (141)

그 결과 침체된 유효수요는 미국의 경우 베트남 전쟁이나 가난과의 전쟁에 의해 고갈되어 버렸다. 그러나 1966년 이후 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떨어진 것은 미국에서 재정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인플레이션의 가속화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이러한 재정문제가 사라질 것 같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안정적 국제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이 손상을 입었다. (178)

원래는 "유효수요의 끊임없는 감소는 미국의 경우 베트남 전쟁과 가난과의 전쟁에 의해 상쇄되었다." 즉 보완되었다는 의미. 따라서 뒤에 나온 '그러나'가 논리적이 된다. 유효수요가 아예 고갈되었다는 것, 그것도 전쟁에 의해! 전쟁이야말로 수요의 창출이고, 가난과의 전쟁이 바로 수요 창출 사업이 아닌가;;;

이런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한 챕터에 두 셋의 오역이 끊임없이 나온다. 독자로서, '봐 줄 수 있는' (중의적이다) 역서의 한계는 어디인가? 누구나 그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에게 이 책은 봐주다가도 짜증이 나다가도, 그래도 또 봐주게 되는 그런 경우다.

특히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문학도로, '번역서'라는 것은 '한국어로서 학문하기'에 있어 뗄 수 없는 동맹관계에 있다. 사유를 한국어로, 한국어 개념으로 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번역의 질적 양적 수준 미비에 큰 원인이 있다. 아예 '원서'가 더 쉽다는 것. 박사학위자 이상의 지식-생산자는 국문학의 경우에도 원서주의자가 부지기수인 것이 놀랍지 않다. 그럼 다른 학문의 경우는?

한국에서 여타 학문을 하는 이들이 한국어로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어라는 언어에 큰 결함이다. 한국어 단어, 문장구조 모두에, 번역은 큰 기여를 한다.

일차적으로는 번역 자체가, 이차적으로는 번역에서 들어오는 한국어 개념과 문장구조 사유구조 자체가 한국어 내에서 소화되어, 새로운 사유, 개념이 도출됨으로서!

번역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고,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작업도 아니다.

80여년전에 김동인은 자신은 소설 창작을 머리 속에서 일본어로 하고, 한국어로 옮겨쓴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땅의 지식인, 지식-생산자들은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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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3-0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우선은 '번역본'을 구한다. 쫌 보다가 포기한다. 원서를 본다... 영어 공부나 다른 언어공부를 더 열심히 한다. 이런 구도? 남한은 인구수나 다른 토대의 문제 때문에 책임있게 번역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될 수 없는 것일까? 책임있게 번역할 수 있는 이의 '수준'이면 남한에서는 자기 논문 써야 되고, 쓸 수 있는 유효수요가 있기 때문에?

로쟈 2007-03-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챕터에 두 세개의 오역이라면 '봐줄 만한' 수준 같은데요.^^; 한 페이지에 그 정도 나오는 책들이 부지기수인지라...

기인 2007-03-08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챕터에 두 세개 나오기 시작하면, 더 이상 국역본 안 봐서요 ^^; 다 세어보지는 못했습니다.

비로그인 2007-03-08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은 바이링궐이라서 좋겠어요.

기인 2007-03-08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제 어휘의 한계는 제가 한국에 돌아온 중2입니다. -_-; 요즘 영어 공부 시작했어요;; SAT대비 어휘 보고 있습니다. 이제 어휘를 고딩에서 대학교 입학 수준으로 올리려는 노력 중;;; 그것도 멀었습니다. 근데, 바이링궐이라뇨! ㅋ

2007-03-08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onta 2007-03-08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onsequent를 "끊임없는"으로 해석하신건가요? 이 단어는 "필연적인, 결과로서 일어나는 "정도의 뜻으로 알고있는데..그렇다면 "The consequent slackening of effective demand"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그 결과 유효수요의 감소는" 정도가 더 적당하지 않나요?

기인 2007-03-09 0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offset'에 집중하느라 그 부분 그냥 쓰고 말았네요 ^^ 원래 해석, 윤타님 해석이 옳습니다.
속삭이신 s님/ 관련 정보는 잘 모르겠네는데요. 주위 영문학도에게 물어봐도 모른다고 하고 ^^; 구글을 쫌 검색해보니, 젠더, 장애인 문제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고 하던데.. 잘 모르겠습니다. ㅎㅎ
 
 전출처 : 바라 > '호모 사케르' 미등록 이주노동자 /고병권

[시론] '호모 사케르' 미등록 이주노동자 /고병권

 

이탈리아 미학자 조르지오 아감벤은 주권의 본성을 잘 드러내는 존재로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호모 사케르란 말 그대로는 신성한 인간을 뜻하지만, 실제로는 범죄를 저질렀거나 어떤 불결함을 지녔기에 신성한 제단에 바칠 수 없는 존재였다. 로마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호모 사케르를 희생물로 삼는 것은 합법적이지 않지만 그를 죽이는 자가 살인죄로 처벌받는 건 아니다'라고 되어 있다. 호모 사케르를 죽이는 건 종교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권장되지 않지만, 그들을 죽였다고 처벌받는 건 아니다. 그래서 호모 사케르는 그 사회가 시민에게 부여하는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단지 숨 쉬는 생명체로, 날것의 인간으로 살아간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에 이런 호모 사케르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예가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이다. 현재 전체 이주노동자의 반인 20만 명 정도가 불법체류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어떤 범법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합법적으로 부여된 시간(3년)이 넘었거나, 지정된 공간(작업장)을 이탈했기 때문에 불법 신분이 된 사람들이다.

사실 산업체에서는 이들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게다가 오래된 이주노동자일수록 한국어가 능하고 숙련도도 높기 때문에, 불법인 줄 알면서도 이들을 고용하고 있다. 그런데 산업적 신분으로는 엄연히 존재하는 이들이 정치적 사회적 신분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이들은 어떤 시민권도 보장받지 못한다. 임금 체불을 당해도, 작업장에서 폭력을 당해도, 이들은 경찰서나 노동부를 찾아갈 수 없다. 그랬다가는 출입국관리사무소로 넘겨져 강제 추방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에 만난 어느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구공장에서 일하던 동료가 사장에게 심한 폭행을 당한 뒤, 살겠다며 경찰서로 뛰어들었다. 경찰은 그와 함께 사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사장은 그가 불법 체류자임을 폭로했고, 결국 경찰은 그를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넘겨 버렸다. 임금체불과 폭행을 일삼은 사장은 별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게 호모 사케르다.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선 안 되지만 행사해도 큰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이다.

지난 11일 여수의 외국인보호소에서 끔찍한 참사가 일어났다. 화재로 이주노동자 9명이 숨졌고 18명이 부상당했다. TV 화면에 공개된 보호소는 그곳이 이름과 달리 쇠창살로 된 감옥임을 말해준다. 강원도에서는 실제로 '불법체류자'들을 감옥에 수용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재판을 받고 복역하는 그런 범죄자들이 아니다.

이들의 불법성은 대부분 법과 제도가 정한 시간과 공간을 지키지 않은 데서 기인한다. 그래서 이들의 불법성은 이들의 행위보다는 법과 제도에 더 크게 좌우된다. 실제로 산업연수생제를 운영했던 2002년의 경우 불법체류자의 비율은 80%에 육박했다. 그러나 2003년에 35%로 감소했다. 그것은 이들 행동에 어떤 변화가 있어서가 아니라, 고용허가제로 제도가 바뀌면서 이들의 신분이 합법 체류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용허가제에서도 불법체류자 비율은 계속 늘어 현재 50%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고용허가제 자체도 재검토할 시간이 된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고용 현실을 손바닥으로 가리고, 이런저런 법과 제도로 '불법'이라는 낙인을 찍는 일은 이제 무의미해지고 있다. 사실 세상 어디에도 그 자체로 불법인 존재는 없다. 존재의 어떤 행위를 불법으로 볼 수는 있으나 존재 자체를 그렇게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은 행위가 아닌 존재 자체가 불법 취급을 받고 있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예외적 존재가 권력의 정상적인 작동을 폭로한다고 생각했다. '예외가 정상이다'. 우리 사회의 예외적 존재인 미등록 이주노동자들 역시 우리 사회의 정상성이 무엇인지를 폭로한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바로 우리 얼굴, 우리의 야만이다.

수유&너머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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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없음으로, 나는 '시대'에 뒤떨어지게 살고 있다. 주변에서 하도 '하이킥'이 재미있다고 해서 (대화가 안 될 정도는 기피해야 하겠기에) 보기 시작해서 현재 Ep27까지 봤다. 하루에 3편정도 밥먹을 때마다 보았는데 정말 재미있기는 하다.

Ep27을 보면서는 기분이 언짢았는데, 이는 문화 제국주의와 계급 적대라는 부분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영어를 잘 못하는 '이순재 부부'는 다국적 기업의 외국인 한국 지사장 집에 박해미 부부(며느리-아들)과 함께 초대되는데, 며느리 부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이순재 부부는 영어를 못하는 고로, '발 마사지스트'와 '파출부'로 오해받는다는 설정이다.

보면서 기분이 나쁜 것은 첫째, 외국인 한국 지사장 부부가 전혀 한국어를 못한다는 것과, 이순재 부부가 영어를 못한다는 것이 이번 에피소드에서 '웃긴' 이유라는 것이다. 사실 이는 전혀 웃기지 않는데, 이것이 웃긴 것으로 설정된다는 것 자체가 한국인의 '영어 콤플렉스'를 보여준다.

한국 지사장이야말로 한국어를 배워야 할 사람임에도, 그들은 전혀 한국어를 못하며, 왜 '파출부'가 왜 '발 마사지스트'가 영어를 전혀 못하냐고 화를 내고, 그들을 '종' 다루듯 한다. 나중에서야 이들이 '한의원장'으로 초대받은 손님으로 밝혀져서 너무 미안하다고 한다.

이러한 문화 제국주의적 마인드를 나는 한국에서 5년 이상 영문학을 가르친 '영국' 출신 교환교수에게서도 발견했는데, 그는 전혀 한국어를 못했고 배우고자 하지도 않았다. 무려 5년 동안, 아는 단어라고는 '안녕하세요' 정도이다.

또 이런 '한국 지사장'이라는 중상류 이상 계급이 문화 식민지인 한국에 와서 각 계급마다 다르게 대하는 것 자체도 심히 거슬렸다. 파출부면, 발 마사지스트면, 그렇게 막 대해도 되는 것일까?

이러한 에피소드를 그냥 웃고 넘길 수 없는 것이, 현재 남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백인' 할리우드 스타들에 대한 일방적인 동경이라는 문화 제국주의적 현상들을 이 에피소드가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은 이제, 준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도약하려고 애쓰고 있는 국가로, 중심부에 의한 착취를, 주변부에 대한 착취로 이행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문화적으로는, 중심부에 대한 동경과, 주변부에 대한 멸시로 나타난다. '동남아'나 '아프리카'에 대한 무시와 우월감/ '미국'이나 '서유럽'에 대한 동경과 열등감. 제국주의의 역사를 배운 지식인이라해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에 앞장 서는 것이 바로 '유학파' 지식인들이다.

이에 대해 반성으로, 역사적으로 우리가 큰 빚을 지고 있는 베트남에 대한 관심, 동남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젊은 문인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더욱 증폭되어야 할 것이다.

* 애인이 이제 외교관으로 외국에 나가면, 이것만큼 경계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외교관은 다국적 기업의 해당 국가 '지사장'과는 다른 이데올로기적 목적을 띄기 때문에 '덜' 띄껍게 하는 것 자체에 신경을 많이 쓰겠지만, 별반 다를 것은 없다.

나도 앞으로 한국문학이나 한국어를 외국에서 가르치거나 소개할 기회가 많아질 터인데, 이것이 문화 제국주의적인 방식으로 도입될 우려가 크다. 내가 몽고에 가서 한국문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나는 '몽고문화/몽고어/몽고역사'에 대해 충분히 관심과 노력을 쏟을 수 있을까?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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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 2007-03-0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없이 하이킥은 보고 있으면 사실 기분이 언짢아지는 시트콤인 것 같아요. 그냥 웃긴 듯 하면서도 그 바탕에 깔린 세계관이 좀 비관적이랄까... 말씀하신 것처럼 방현석, 김남일 같은 사람들이 만든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 같은 데서는 아시아라는 계간지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던데 좀더 많이 알려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기인 2007-03-08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그런데, '비관적'이라는 말씀은? 냉소적이라는 뜻인가요?

기인 2007-03-08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생각해보니, 계급 적대의 '폭로'로서의 하이킥이 아니라, 계급 적대의 '은폐'로서의 하이킥이군요. 텍스트는 의도에 따라 정반대로도 읽을 수 있지만, 이 에피소드의 하이킥을 보고 '웃음'을 강요받고 '웃어야' 될 때, 이는 하이킥에서 제시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될 테니까요.

바라 2007-03-08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호나 신지나 준하, 문희 같은 캐릭터들보면 사실 좀 답답하기도 하더라구요. 발버둥쳐봐야 '내가(네가) 뭐 그렇지'식의 분위기가 있어서... 가끔씩 그 관계에 전복이 올 때도 있긴 하지만요; 확실히 봉합이나 은폐 같은 느낌이긴 한데요.

기인 2007-03-0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옹 그네요.. 결국 캐릭터 중심의 시트콤은 성장소설 유형이 되기는 힘들겠죠 ^^; 프렌즈도 결국에는 '성장'이나 관계의 변화를 추구하려고 한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조이는 어쩔 수 없고요 ^^;
 
 전출처 : 로쟈 > 알랭 바디우의 철학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주저 중 한 권인 <조건들>(새물결, 2006)이 번역돼 나왔다. 또다른 주저인 <존재와 사건>과 함께 번역돼 나올 거라는 얘기는 몇 년전부터 있었지만 잊고 있던 차에 뜻밖의(?) 책이 나온 것이다. 그간에 출간되었던 몇 권의 책이 (反들뢰즈주의자로서) '들뢰즈 이후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바디우의 전모를 드러내기엔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졌더랬는데, 이번엔 불식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미권에서 활발하게 번역/연구되고 있는 철학자이지만 바디우의 <존재와 사건>의 영역본이 작년에서야 나왔고 <조건들>의 영역본은 아직 출간되지 않았다(스페인어본 정도가 눈에 띈다). 그러니 <조건들>의 국역본 출간은 얼마간 '사건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역자는 <윤리학>을 우리말로 옮긴 이종영씨이다(역시나 <윤리학> 번역에서의 불만을 말끔히 씻어주기를 기대한다).   

지젝의 적극적인 지지와 찬양에 고무되어 개인적으로 바디우의 책들은 (<존재와 사건>를 비롯하여) 저서와 연구서들을 다수 갖고 있지만 그의 철학을 일람할 기회도 없었도 따라서 몇 마디 덧붙일 만한 능력도 현재로선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길잡이가 될 만한 글 하나를 옮겨놓는 걸로 일단은 소개를 대신해두고자 한다. 바디우 전공자인 서용순 박사의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이란 글인데, 지난 2003년 '동국대 대학원신문'(5월호)에 게재됐던 것이다. 당시 필자는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이었고 바디우의 주저들을 번역중이라고 했다. 이후 바디우의 지도하에 학위논문을 마치고 돌아와 현재는 강의활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알랭 바디우 - 진리와 주체의 철학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든 철학은 시대의 징후이다. 플라톤의 철학이 그리스 공화정 말기의 혼란과 더불어 민주정에 대한 근원적인 불신을 드러내고,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20세기라는 역사적 시점의 지배적인 동력이었던 기술과 그 기술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 것은 모두 시대의 징후로 읽어 내려가야 마땅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대는 어떠한가? 우리 시대는 하이데거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요컨대 수십년 이래로 우리는 사회주의를 포함한, 인간 이성으로 수립된 모든 프로젝트를 의심하고 부정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등을 돌린 것으로 간주된 과학에 대한 불신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를, 나아가서는 세계를 지배했던 큰 흐름인 합리주의는 인간을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한 채, 스스로의 수명을 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양 철학에서 이러한 경향은 1980년대 이래로 지배적인 담론으로 자리 잡았다. 일찍이 리요따르는 건축술로서의 철학, 즉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을 선고하였고, 많은 철학자들이 플라톤 이래 철학에서 배제된 시학(詩學, poetique)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한 이른바 거대 담론은 해체되었고, 전통적인 철학의 영역이었던 진리의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철학은 이제 시학을 비롯한 예술에 자신의 지위를 양도한 채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발견하려 한다. 철학사는 부정되었고 이제는 플라톤에 의해 추방되었던 시인들이 그 자리를 점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철학이 위치하고 있는 지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며, 철학의 시학으로의 투항에 저항하는 한 철학자가 있다. 바로 프랑스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이다. 그의 철학적 여정은 아주 거센 굴곡을 보여준다. 싸르트르에게 감화를 받고 있던 그의 청년 시절, 알튀세와의 만남은 그를 과학적 이론의 추종자로 만들었지만 68년 혁명이 발발하자 그는 프랑스 공산당과 68혁명의 대립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알튀세를 강하게 비판하며 그와 결별한다. 그리고는 실뱅 라자뤼스, 나타샤 미셸, 프랑수와 발메 등과 마오주의 그룹인 예난(Yenan)그룹을 결성해 프랑스 공산당에 맞서 투쟁한다.

이후 80년대에 들어 유럽에 지적 반동의 시기가 도래하자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다른 혁명적 대안을 마련하는 시도를 행하게 되고, 그 결실은 1988년『존재와 사건』의 출간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는 수학적 존재론의 구축을 통해 철학을 복권시키고, 새로운 해방적 프로젝트를 그 존재론에 담아낸다. 오늘날 그는 흔히 포스트모던 철학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프랑스 철학의 중심을 흔드는 철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주요한 무기인 집합 이론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론을 구성해내고, 이를 통해 만신창이가 된 철학에 그 자리를 되돌려준다.

종말을 부정하기

우선 그의 철학을 가로지르는 큰 흐름을 살펴보자. 바디우는 모든 현대 철학의 지배적 경향인 시스템으로서의 철학의 종말이라는 페이소스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이른바 종말이라는 테마는 철학의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 없다. 거대 담론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것은 '거대담론' 만큼이나 거창한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철학은 존재할 수 있고 우리 시대에 그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물론 철학이 항상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 근원적인 위기에 처했던 시대 역시 분명히 있었다. 철학은 항상 불연속적이었고, 철학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하지만 철학과 그 조건들이 가지는 관계에 놓여진 불변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진리'이다. 진리라는 테마만이 철학과 그 조건이 되는 여러 사유를 관계짓는 요소이다. 그런데, 이러한 철학의 조건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절차(공정, procedure)로서만 철학의 조건이 된다. 말하자면 이 조건들은 각자의 개별적 특성에 기반하여 진리를 생산해내고, 진리를 생산해내는 한에서만 철학과 관계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진리 생산의 사유는 철학의 조건인 것이다. 이렇듯 철학은 스스로 진리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다만, 조건들이 생산한 진리를 개입(intervention)을 통해 명명(nomination)해낼 뿐이다. 바디우는 철학의 조건을 이루는 진리 산출의 유적1) 절차(공정, procedures generiques des verites)를 네 가지 정도로 분리해낸다. 정치, 과학(그 중에서도 수학), 사랑, 예술(시학(詩學))이 그것이다.

철학 - 봉합에서 공가능성으로

철학의 조건으로서의 네 가지 진리의 공정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종속시키지 않고, 그 조건들이 모두 공존가능하다는 점을 사유하는 것이 바로 바디우가 정의하는 철학의 작업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네가지 공정이 모두 진리를 생산하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바디우는 이 점을 아주 중요시하여 봉합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 동안의 철학은 이러한 공가능성(compossibilite, 여러 가지 조건이 각자의 영역에서 모두 진리를 생산하는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 동안의 철학은 다른 조건들이 가지는 진리 생산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 중 하나, 혹은 일부에 대해서만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한 것이다. 진리 생산의 다양한 가능 영역은 부정되고 진리는 어느 하나의 영역에 갇혀버린 것이다.

이것을 바디우는 철학의 봉합이라고 명명한다. 그는 다양한 봉합의 실례를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철학이 과학적 실증주의에 봉합된 시기였고, 영미권의 아카데미적 철학은 아직도 이 봉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철학을 정치와 과학에 동시에 봉합시켰다. 이러한 이중의 봉합의 복잡한 구조를 스탈린은 철학,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하이데거는 기술이 되어버린 과학에 반대하여 철학을 시학에 가두어버린 것으로 간주된다. 실증주의나 마르크스주의는 이미 많은 비판을 통하여 화석화된 봉합일 뿐이고, 이제는 제도적이거나 아카데미적인 봉합이지만, 하이데거를 그 축으로 하는 시학(예술)에의 봉합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봉합 형태이고, 전혀 검토된 적이 없는 봉합이다.

철학이 과학과 정치에 봉합되어 있을 당시, 시학은 철학의 역할을 수행하였고 마침내 시인의 시대는 열린다. 그러나 여기서 바디우가 말하는 시학은 모든 시와 시인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는 횔더린(Holderlin)에서 파울 첼란(Paul Celan)에 이르는 시기이며, 문제가 되는 것은 진정한 사유의 모습을 보여주는 시인과 시일 뿐이다. 하이데거가 우리에게 보여주듯이, 시학이 행한 것은 시에 의한 존재의 문제에의 접근이었다. 시인들의 공헌은 대상의 범주를 해체함으로써 탈객관화(주지하듯이 객관화는 과학의 미덕이다)를 실현해낸 데 있다.

여기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객관성(대상성, l'objectivite)의 철학에 대한 비판과 객관적 철학의 시학적 해체를 결합시켜냄으로써 엄청난 강점을 획득한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수학과 시학의 이율배반을 지식과 진리의 대립, 혹은 '주체/대상'과 '존재(Etre)'의 대립으로 엮어냄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다. 그러나 랭보, 혹은 로트레아몽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시학은 항상 수학과 사유를 공유하고 있음을 의식하고 있었다. 시인들은 수학에 대상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대상의 범주를 해체하고 첼란에 이르러 시인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철학이 완전한 탈봉합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시인의 시대가 끝남과 더불어 열리게 된다.

진리의 사건들

우리는 이제 진리가 어떻게 생산되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앞서 말했듯 진리는 진리 생산의 네 가지 절차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나, 이 네 가지 절차가 항상 진리를 생산해내는 것은 아니다. 진리는 사건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요컨대 진리의 네 가지 공정은 진리의 생산이 가능한 영역일 뿐이다. 진리는 사건에 의존적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사건의 진리인 것이고, 만일 이 네 가지 영역 속에 사건이 없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아무런 진리도 발견해낼 수 없다. 이 사건의 진리야말로 바디우 철학의 핵심이다. 우리는 각각의 절차에서 드러난 상이한 사건들을 볼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정치에서의 사건은 언제나 상이한 형태(18세기말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과 20세기 초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의 형태는 동일한 것이 아니다)로 나타났다. 우리 시대에 국한시켜 보자면 정치적 사건은 68년에서 80년에 이르는 역사적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예로는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과 중국의 문화 혁명, 이란 혁명, 그리고 폴란드 연대 노조에 의해 주도된 노동운동을 들 수 있다. 이 사건들은 새로운 명명이 필요한 사건들이다. 폴란드의 노동 운동을 제외하면 그들 정치적 사건은 그 내용의 새로움과는 유리된 낡은 사상 체계에 의해 표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문화 혁명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며, 이란 혁명은 이슬람으로의 복귀, 즉 옛 것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사건을 명명하는 철학적 개입(intervention)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이 정치적 사건은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지식 체계를 교란시키는 것이기에 사건이고, 진리를 생산할 수 있지만, 그것의 명명은 아직 철학의 과제로 남아있는 것이다.

칸토르에서 폴 코헨까지의 현대 집합 이론은 수학에서의 사건이다. 이 집합 이론은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multiplicite indiscernable)에 대한 개념을 수립해낸다. 이로써 집합 이론은 존재-로서의-존재(Etre-en-tant-qu'etre)에 대한 합리적 사유와 언어 사이의 문제를 해결한다. 식별 불가능한 다수성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기존의 지식 체계를 규정하는 언어 체계를 벗어난, 즉 기존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가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바로 진리가 이러한 존재 형태를 갖는다고 바디우는 역설한다.

진리는 지식에 구멍을 내는 것이며, 따라서 진리에 대한 지식은 있을 수 없다. 진리는 단지 생산될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유적(類的, 산출적, generique)이며, 기존 언어를 통한 지칭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기존 언어에서 벗어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은 언어로 결정할 수 없는 부분으로서 기존의 언어에 비추어 초과분(exces)이 된다. 우리는 그것의 확실한 정체를 알 수 없다. 바디우는『존재와 사건』에서 집합 이론을 통해 이 사실을 잘 증명해내는데 이는 '방황하는 초과분'의 존재를 증명해내는 것이고 그 자체로 진리가 존재하는 방식이 된다.

시인의 시대를 통틀어 볼 때, 시에서의 사건은 파울 첼란의 작품이다. 데리다나 가다머 혹은 라꾸-라바르뜨(이들은 바디우의 철학적 대화 상대자이면서 동시에 그의 주요한 논적이다)와 달리 바디우는 첼란의 시에서 시는 그 자체로 충분치 않다는 고백을 읽어낸다. 그의 시는 봉합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시의 권위에서 자유로워진 철학을 원한다. 말하자면, 첼란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시대의 개념적 전유를 다른 영역과 공유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첼란의 공헌은 시를 철학이 그 시대에 행해온 사변적 기생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시를 진리의 나머지 절차들과 공존하게 함으로써 시에게 자신의 자리를 돌려주는 데 있다. 이것이 첼란이 행한 시의 사건의 핵심적 내용이다.

사랑의 사건은 라깡의 저작이다. 사랑에 대한 라깡의 이론은 하나(l'Un, the One)의 지배를 파괴하고 둘(le Deux, the Two)의 문제를 사고했다는 점에서 사건이다. 라깡은 성에서의 둘을 논리적으로 연역해낸다. 이로써 남성(손상된 전체(Tout)의 벡터)과 여성(비-전체(pas-toute))은 서로 전혀 다른 둘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두 개의 성은 전혀 다른 입장으로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만남이라는 사랑의 사건을 통해 둘은 일자(하나, l'Un)의 법칙을 초과하는(넘어서는) 끝없고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을 꾸며낸다. 이것을 바디우는 성차에 대한 진리, 사랑에 빠진 당사자들의 지식에서 벗어나 있는 진리가, 이름없는 혹은 유적인 다수성으로서 도래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사랑이란 만남이라는 사건을 통한 '둘'에 대한 진리의 생산인 것이다.

그렇게 사건을 계기로 생산되어 잠시 나타난(presenter)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적(事後的)으로 표상될(representer) 뿐이다. 이때 진리를 생산해 낸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 그것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다. 그들은 고유한 활동에 전념할 뿐, 진리에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 그 절차들은 진리를 모른다. 그 진리의 명명작업을 해내는 것, 그렇게 다른 곳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는 것, 바로 그것이 철학의 작업이다. 예컨대, 철학은 이미 다른 지점에서 생산된 진리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철학의 임무인 것이다. 이제 철학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갈 수 있다. 네가지 유적 절차들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고 명명함으로써 바디우가 원하는 철학적 행동(acte philosophique)은 이제 가능해진 것이다.

주체의 이론

위의 예에서 보았듯 사건은 진리를 생산해냄으로써 지식(savoir)의 망을 교란시키고(구멍을 내는 것이다), 곧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진리의 흔적은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sujets fideles)를 통해서 밖에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주체는 진리의 담지자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존재가 주체인 것은 아니듯, 주체는 그 충실성을 잃고 배반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의 68년 오월 혁명의 많은 주체들은 그 사건이 생산해낸 진리에의 충실성을 잃고 그 진리를 배반하였고, 중국의 문화 혁명도 같은 길을 걸었다. 때로는 환영(simulacre)을 사건으로 착각하여 그 환영에 충실하기도 하는데, 파시즘의 예가 그 좋은 예이다.) 진리에 의해 호출된 그들은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이다. 그 진리에 충실함으로써만 그들은 주체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주체들은 진리의 담지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디우의 윤리학이 드러난다.

바디우는 구조주의에 의해 부정된 주체를 다시 철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임으로써 객관주의를 벗어나 비로소 주체적 정치(politique subjective)를 가능하게 한다. 구조주의에 의해 단지 구조의 담지자로만 파악되었던 인간은 바디우의 손에서 다시 주체가 된다. 물론 이 주체는 마르크스주의의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선험적인 주체는 아니다. 자신의 이해(intert)에 의해 움직이는 인간 동물(l'animal humain, 영장류 동물로서의 인간)은 진리의 사건을 만났을 때 비로소 자신의 이해에서 벗어난 이해(intert-desinteresse)를 추구하는 주체가 되어 자신의 진리에 충실하게 된다. 이렇게 사건을 통하여 동물이었던 인간은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마침내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 새로운 존재방식을 바디우는 충실성(fidelite)이라고 부른다.

이 주체의 충실성이야말로 진리의 과정이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단 하나의 원칙이다. 진리는 사건과 동시에 나타나 지식 체계에 파열구를 만든 후 즉시 지식 속으로 사라진다. 결국 진리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의 객관성이 아닌 진리가 만들어내는 주체성, 바디우에 의해 충실성으로 표현된 그 주체성의 발현을 통해서일 뿐이다. 주체의 충실성은 진리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오늘날 미디어와 정치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유포된 '인권'과 같은 세론(世論)은 결코 윤리학의 지표가 될 수 없다(우리는 이 '인권'이 미국의 주요한 공갈 협박 수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로지 진리의 변전만이 윤리학의 재구성을 위한 기준일 것이다. 그 윤리학의 금언은 "계속하자!(continuer!)"라고 말한다. 즉 진리에 계속 충실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이른바 진리의 윤리학의 함의가 있다. 다시 말해 바디우의 윤리학은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인 '주체의 충실성'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듯 바디우의 이론에서 주체는 지식의 영역인 객관성의 범주에 포섭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은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가 견지해왔던 주체에 대한 과학적-객관적 문제틀에 정면으로 대립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계급이라는 객관적인 개념을 통해, 혁명적 주체성을 지녔다고 전제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편성을 지닌 역사의 주체로 설정한다. 계급은 이로써 주체성과 객관성을 아우르는 순환적인 개념이 된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주체는 객관적인 수준으로 포섭될 수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파악된 인간, 대상성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은 그저 인간 동물일 뿐이고, 주체는 이 인간 동물에 '무엇'인가가 추가된(supplemente) 것이다. 그 '무엇'은 진리에 다름 아니고, 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 동물은 주체가 된다. 주체는 결코 선험적으로 설정될 수 없고, 인간이 사건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 사건을 통해 드러난 진리를 만나지 못한다면, 주체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바디우의 철학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이다.

우리는 앞서 바디우에게 진리는 기존의 지식망을 교란시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기존의 지식 체계는 객관성의 표현에 다름 아니라고 할 때, 진리는 객관성의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 객관적인 것은 지식 체계일 뿐이다. 물론 진리는 오직 한 순간 빛을 발하고 지식 속으로 사라지지만,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진리의 사건은 주체화 과정(le processus de subjectiv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롭게 열리는 진리의 지평

지금까지 살펴본 바디우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그가 진리의 문제에 천착해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리는 우리가 알고있던 진리와는 사뭇 그 모습이 다르다. 그것은 다수의 진리로서 전혀 다른 진리의 지평을 인정하는, 결코 폭압적이지 않은 열려있는 진리이다. 진리의 공가능성(compossibilite)은 전제적인 일자(一者, l'Un)의 모습을 부정하고 진리의 다수성을 인정한다.

이러한 바디우의 철학은 우리로 하여금 복수의 진리를 서로 다른 영역에서 사고하게 하며, 잃어버렸던 주체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게 한다. 바디우와 더불어 합리적 사유는 마침내 가능해지고, 그것이 포함하는 혁명적 사유는 마침내 펼쳐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그는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철학자가 아닌, 새로운 사고의 지평을 열어 젖히는, 진리의 옹호자인 셈이다. 바디우와 더불어 서로를 인정하는 다수의 진리라는 관념이 수립되고, 진리라는 관념이 편협한 사고로 우리를 인도할 가능성은 제거된다. 마침내 열려진 지평 위에서 진리를 사고하는 일만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다.(서용순/ 파리 8대학 철학과 박사과정)

주1) 유적(類的)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generique라는 말은 논리학적으로 비결정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하나의 개별 원소가 '유적'일 때 우리는 그 원소가 어떠한 구분에 속하는 것인가만을 알 뿐 동일한 구분에 속해있는 다른 개별 원소와 어떻게 구분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개별 원소는 항상 개별적이면서 일반적인 가치를 갖는다. 진리의 서로 다른 절차들은 진리를 생산하는 동일한 구분에 속해 있지만 서로의 관계는 규정지어지지 않는다. 그 절차들은 각각의 진리를 생산하지만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적이다.

0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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