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에도 언급했지만, 하비의 The Condition of Postmodernity의 한국어 번역본은 오역으로 가득차 있다. 역자가 맑스주의에 대해 충분한 이해가 있는지 의심스럽고, 성의없이 번역한 것은 아닌지..
번역본을 사서 보다가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원문을 보다가 하다가, 짜증이 폭발해서 이제는 원문으로만 본다! 라고 하다가 또 진도가 안나가서 번역본을 보다가 하는 작업의 반복.
내 시간도 아깝고 해서 왠만하면 넘어가겠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이 정반대로 번역해 놓은 것들이 읽다가 눈에 띄면 정말 화난다.

국역 178페이지, 원문 141페이지를 보자.
The consequent slackening of effective demand was offset in the United states by the war on poverty and the war in Vietnam. But declining corporate productivity and profitablitiy after 1966 meant the beginnings of a fiscal problem in the United States that would not go away except at the price of an acceleration in inflation, which began to undermine the role of th edollar as a sable international reserve currency. (141)
그 결과 침체된 유효수요는 미국의 경우 베트남 전쟁이나 가난과의 전쟁에 의해 고갈되어 버렸다. 그러나 1966년 이후 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이 떨어진 것은 미국에서 재정문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인플레이션의 가속화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이러한 재정문제가 사라질 것 같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안정적 국제준비통화로서 달러의 역할이 손상을 입었다. (178)
원래는 "유효수요의 끊임없는 감소는 미국의 경우 베트남 전쟁과 가난과의 전쟁에 의해 상쇄되었다." 즉 보완되었다는 의미. 따라서 뒤에 나온 '그러나'가 논리적이 된다. 유효수요가 아예 고갈되었다는 것, 그것도 전쟁에 의해! 전쟁이야말로 수요의 창출이고, 가난과의 전쟁이 바로 수요 창출 사업이 아닌가;;;
이런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한 챕터에 두 셋의 오역이 끊임없이 나온다. 독자로서, '봐 줄 수 있는' (중의적이다) 역서의 한계는 어디인가? 누구나 그 기준이 다르겠지만, 나에게 이 책은 봐주다가도 짜증이 나다가도, 그래도 또 봐주게 되는 그런 경우다.

특히 한국문학을 전공하는 문학도로, '번역서'라는 것은 '한국어로서 학문하기'에 있어 뗄 수 없는 동맹관계에 있다. 사유를 한국어로, 한국어 개념으로 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번역의 질적 양적 수준 미비에 큰 원인이 있다. 아예 '원서'가 더 쉽다는 것. 박사학위자 이상의 지식-생산자는 국문학의 경우에도 원서주의자가 부지기수인 것이 놀랍지 않다. 그럼 다른 학문의 경우는?
한국에서 여타 학문을 하는 이들이 한국어로 사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어라는 언어에 큰 결함이다. 한국어 단어, 문장구조 모두에, 번역은 큰 기여를 한다.
일차적으로는 번역 자체가, 이차적으로는 번역에서 들어오는 한국어 개념과 문장구조 사유구조 자체가 한국어 내에서 소화되어, 새로운 사유, 개념이 도출됨으로서!
번역은 그리 만만한 작업이 아니고,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작업도 아니다.



80여년전에 김동인은 자신은 소설 창작을 머리 속에서 일본어로 하고, 한국어로 옮겨쓴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 땅의 지식인, 지식-생산자들은 얼마나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