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0.1kg도 차이가 나지 않고 똑같다. -_-a 오늘은 일찍 일어났는데, 어제 연구계획서를 제출하느냐고 스트레스를 받았으니 하루종일 쉬어야지 라고 나름의 계획 -_- 을 갖고 1시 대학국어 시험감독에 맞추어서 학교에 갔다.

대학원생의 특권이란 이런것이 아닐까. 어찌보면 백수의 특권이라고도 할 수 있다. 논문학기라서 수업도 듣지 않으니, 월요일 저녁과 목요일을 빼면 완전히 자유롭다. 이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는데, 이 공부 또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어느정도는 할 수 있으니, 이 보다 더 좋은 직업이 있으랴!!!

요즘 월수입은 90만원 가량. 장학금과 연구 보조비로 나오는데, 35만원 방세를 제하면 60만원 가량. 책을 최대한 사지 않으면 그럭저럭 버틸만 한데, 요즘은 여자친구랑 자주 만나서 마이너스다. 나도 저축을 해서 결혼준비도 해야되는데 집값은 엄두도 낼 수 없다. 내 평생 모은 돈은 7자리수 -_-a

역시, 대학원생은 민주노동당을 지지할 수 밖에 없다. 대학원생의 권리, 민주노동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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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스승의 날이라서 선생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다음주 수요일에 밖에 나가서 맛있는 거 먹자고 하셨다. 술도 마실 듯. 이번주나 다음주에는 인도에서 귀국한 선생님 때문에 또 술 마실 듯. 그리고 요즘은 매주 목요일마다 선생님과 하는 세미나 때마다 술을 마실듯.

결국 내 다이어트가 안 되는 이유는 '선생님' 때문....

원래 6시쯤 일어나서 간단하게 콘프레이크로 아침을 먹고, 단백질 보충제를 먹은 다음, 헬스를 2시간 가량 한다. 그 후 단백질 보충제를 먹고, 학교에 가서 2번째 아침을 먹은 후에 좀 지나서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집에 와서 자기 직전에 단백질 보충제를 먹는다.

오늘은 두번째 아침을 걸러 보았다. 하루종일 정신을 차릴수가 없었다. 선배에게 내 증상을 호소하니, 설마 당뇨병?이라고 한다. 무섭다. 일년전에 피검사때는 아무것도 안 나왔는데... 내일 보건소 가서 피검사 한 번 더 받아봐야겠다 -_-;

어쨌든 그렇게 어지럽고 공부가 안되서, 빅파이2개에다가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리고 저녁때는 돼지갈비를 먹었다. 배부르고 졸리다 -_-a

집에 와서 몸무게를 재니 76.6!!! 아침에는 항상 75kg 초반 때였는데 이럴수가............

저녁 먹고 바로 잰 것이니 그런거라고 위안을 하자. 어쨌든 이제부터 다이어트 일기는 저녁먹고 바로 재는 것으로 해야겠다. 집에 와서 한문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너무 졸리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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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5-16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목표치의 체중을 유지하고 계시군요...부럽습다

기인 2006-05-16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엇; 저는 키가 작아서요 ^^;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의 책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 이산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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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자연주의 문학은 낭만주의적인 성격을 지니며, 외국문학에서는 낭만파가 수행한 역할이 자연주의에 의해 성숙되었다" (<<메이지 문학사>>)라고 나카무라 미쓰오는 말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유럽의 '문학'을 규범으로 본 시각에 불과하다. 예컨대 구니키다 돗포가 낭만파인지 자연주의파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돗포가 어느 한쪽이라고 하면 대단한 모순이며, 낭만파와 리얼리즘의 내적 연관을 단적으로 보여 줄 뿐이다. 서양의 '문학사'를 규범으로 삼는 한, 그것은 단기간에 서양문학을 받아들인 메이지 일본에서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여 줄 뿐이지만, 오히려 여기에 서양에서는 장기간 계속되었기 때문에 단선적인 순서 속에서 은폐되어 버린 전도의 성질, 곧 서양에 고유한 전도의 성질을 밝혀 내는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할 것이다.-188쪽

명심해야 할 구절이다. 한국문학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소세키가 거절한 것은 서구의 자기동일성(아이덴티티)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거기에는 '바꾸기'가 가능한, 다시 짜기가 가능한 구조가 있다. 하지만 가끔 선택된 하나의 구조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될 때 역사는 필연적으로 단선적인 것으로 될 수 밖에 없다. 소세키는 서양문학에 대비되는 일본문학을 수립하고, 그 차이와 상대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일본문학의 아이덴티티도 역시 의심스럽다. 그에게는 서구든 일본이든 마치 확실한 혈통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연스럽고 객관적으로 보이는 그러한 '역사주의'적 사고에서 '제도'의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문학사를 단선적으로 보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다시짜기가 가능한 것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테면 낭만주의와 자연주의는 역사적인 개념이고 역사적인 순서로 나타난다. 하지만 소세키는 그것을 두 가지 요소로 본다.-184쪽

두 종류의 문학적 특성은 이상(以上)과 같은 데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데 있기 때문에 양쪽 모두 대단한 것입니다. 한쪽만 있으면 다른 쪽은 문단에서 쫓아내도 좋다고 말하는, 그런 뿌리가 얕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이름이 두 종류이기 대문에 자연파와 낭만파로 대립하면서 망루를 지키고 수로를 깊이 파서 적대시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만, 실상 적대시할 수 있는 것은 이름뿐이며, 내용은 양쪽 모두 왔다갔다하여 대부분 뒤섞여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것은 관점이나 독법에 따라 어느 쪽에도 편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세한 구별 운운하면 순수하게 객관적인 태도와 순수하게 주관적인 태도 사이에 무수한 변화가 생길 뿐 아니라, 그 변화하는 각각의 작품과 다른 것이 결부되어 잡종을 만든다면 또 무수한 제2의 변화가 성립하기 때문에, 누구의 작품은 자연파라든가 누구의 작품은 낭만파라든가, 그렇게 획일적으로 말하면 안될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아무개 작품의 이 부분은 이런 뜻에서 자연파 정취라고, 작품을 해부해서 하나하나 지적할 뿐 아니라 그 지적한 곳의 정취까지도 단지 낭만이나 자연 두 가지로 간단하게 열거하지 말고, 얼마만큼의 다른 요소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섞여 있는지를 설명하게 된다면 오늘날의 폐단이 극복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창작가의 태도>)-184-185쪽

소세키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이라면 건드릴 수 밖에 없는 주제인 것 같다. 이광수의 문제도 걸려 있다.

앞에서 나는 '풍경'이 외부세계를 거절하는 '내적 인간'(루터)에 의해 발견된 것이라고 말했다. 주관-객관이라는 근대인식론의 틀 자체가 '풍경' 속에서 성립한 것이다. '풍경' 자체가 하나의 전도물(轉倒物)이지만, 일단 그것이 성립되자마자 그 전도는 감춰진다. 이것이 결정적인 모습으로 태어난 것은 서구의 낭만파에서이며, 거기에서 리얼리즘 역시 확립되었다.-187쪽

이것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리얼리즘에 의해 '묘사'된 것은 풍경 또는 풍경으로서의 인간이지만, 그와 같은 풍경은 낭만파적인 전도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쉬클로프스키(Victor Borisovich Shklovskii)는 리얼리즘의 본질이 비친화화(非親和化)에 있다고 한다. 요컨대 눈에 익었기 때문에 사실상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리얼리즘에 일정한 방법은 없다. 그것은 친화적인 것을 항상 계속해서 비친화적으로 만드는 끊임없는 과정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른바 반리얼리즘, 예컨대 카프카의 작품도 리얼리즘에 속한다. 리얼리즘이란 풍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늘 풍경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까지 누구도 보지 못하고 있던 풍경을 존재케 하는 일이기에, 리얼리스트는 언제나 '내적 인간'이다.
바꾸어 말하면 낭만주의와 리얼리즘을 단지 대립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또 그것들은 과거 '문학사'의 사실에 그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낭만주의를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고, 또 다른 의미에서는 리얼리즘을 빠져 나올 수 없는 것이다.-187쪽

그런데 서양의 '문학사'에서는 낭만파 뒤에 자연주의가 온다. 또 자연주의 뒤에 반리얼리즘이 온다. 그러나 그러한 역사적 사실의 규범화는 이 본질을 놓치게 만든다. 소세키가 형식주의자보다 먼저 그것을 공시(共時)적으로 보려 한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낭만파와 자연주의파를 '비율'로 보는 관점 또한 근본적으로는 낭만파적인 것 위에 있다. 그것은 낭만파-자연주의라는 이원적인 양상의 더욱 깊은 근원에 있는 사태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미 '풍경의 발견'이라는 사태 속에 낭만파와 자연주의라는 대립구조 자체를 파생시키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의 문학을 이질적인 것으로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풍경'에 의해 생긴, 또 '풍경'에 의해 은폐된 사태를 거슬러올라가서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187-188쪽

결국 문제는 '문학사'이다. 이것이 왜 필요한가. 문학사가의 욕망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 끊임없이 재배치를 통해서, 기존 틀을 부수고 새롭게 짜는 것이다. 고진의 작업 또한 '풍경의 발견'이라는 핵심어를 통해서 재구조하는 것. 언제나 작품이라는 개별적인 틀에 대한 폭력으로서 이론이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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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시작한다. 말로만 다이어트 한다고 했지만, 이렇게 나의 20대를 보낼 수는 없다는 굳은 다짐 하에 ^^; 다이어트 일기를 쓴다. 난 일기를 오래 써 본 기억이 없다. 한달 지속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진짜 써야겠다. 최근에 마태우스님의 술일기 글을 읽고 느낀점이 많다. 내 친구의 다이어트 일기와 함께 날씬해진 그의 모습도 부러웠다!!!

다이어트에 대해서, 이것이 자본주의 상품 광고의 놀아나는 수작이니, 성정치학이 개입되어있다느니, 등등 말이 많다. 또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다이어트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여자친구의 잔소리를 줄일 것.

2. 주위 사람들의 '예전에는 한 인물했는데...' 등의 말을 불식시킬 것.

3. 무엇보다도, 가벼운 몸과 함께 상쾌한 기분을 유지할 것 이다.

나는 언제나 내가 '통통하다'라고 생각해 왔는데, 표준적인 각종치수에는 '비만'으로 나온다 ㅜㅠ 정말 빼야겠다. 몸도 무겁고, 다들 턱살이 '켄터키 할아버지'라고 하며, 별명이 '푸우'니 '곰돌이'니 하는 것을 불식시켜야겠다.

원칙은 몸무게 공개(운동후 측정한 것), 그 날 식사량 자기 반성 -_-; 이다.

이번달 목표는 74kg때 유지이다. 처음 목표는 쉽게 잡는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 도전은 시작되었다

우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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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05-14 0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분이셨군요^^ 다이어트 꼭 성공하세요^^ 아자아자 !
(이거 남 얘기가 아닌 ㅠ_ㅠ)

기인 2006-05-15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감사합니다 ㅜㅠ 근데, 첫날인데 대실패에요. ㅜㅠ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의 책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 이산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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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은 '마르크스'를 표나게 강조했지만, 글을 읽는 내내 눈에 띄는 것은 '소쉬르'의 이야기들이다.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것과 또 보다 중요하게 의미는 '차이'의 체계라는 구조들에 의해서 생성되고 '본질'이나 '내재적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본질이나 개념이라는 초월론적인 것이 전도에 불과하다는 것(38면)

이를 '자본'의 관계에서 파악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이고, 그의 <<자본론>>이다. 즉 '가치생산적인가 아닌가는 무엇을 생산하는가가가 아니라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15면)는 것. 맑스는 <<자본론>>에서 노동가치설을 유지하지만, 고진이 새롭게 읽는 맑스는 상품들에 '내재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화폐'에 대한 물신성 분석을 통해서 꿰뚫고 있다.

한 상품의 '가치'는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과의 가치관계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하지만 화폐형태를 취하게 되면 그것은 수량적으로 표시된다. 같은 상품이라도 어떤 지역에서는 싼데 다른 지역에서는 비싼 것은 각각의 지역에서 다른 상품과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뜻할 뿐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화폐형태에 의해 사라져 버리면 마치 그 상품에 독자적으로 내재하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곧 관계의 체계로서의 차이가 화폐에 의해 양적인 차이로 나타난다. (52~53면)

그렇다면 어떻게 '이윤' 즉 '잉여가치'가 생산되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교환가치 만큼을 자본가에게 임금으로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다. 이 때는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 등가교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협업을 통해서 초과생산을 발생시킨다는 것. 이를 '체계'로 설명하자면, 시간이 다른 두 축의 이동으로 인해 '차이'가 발생하고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두 개의 다른 시스템이 매개될 경우에만 부등가교환 또는 잉여가치가 비로소 필연성을 갖고 존재한다. (58면)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분업이나 협업의 강화에 의한 것이든 기계의 개량에 의한 것이든 노동력의 가치를 잠재적으로 저하시킨다. 이것은 이렇게 바꾸어 말해도 좋다. 자본가는 이미 더 싸게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물을 기존의 가치체계 속으로 들여보낸다. 결국 잠재적으로는 노동력의 가치도 생산물의 가치도 상대적으로 하락하지만, 이것은 곧바로 현재화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하는 체계와 잠재적인 체계가 여기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자본도 두 개의 상이한 시스템 중간에서 잉여가치를 얻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상인자본이 이른바 공간적인 두 개의 가치체계--더욱이 거기에 속하는 인간에게는 불가시적인--의 차액에 의해 발생했음을 분명히 밝혔지만, 산업자본은 그런 의미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여 시간적으로 상이한 가치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8~69면.)

이렇게 고진이 말하는 '읽는다'는 것은 '맑스'가 의도했듯 안 했듯, 작품 속에 내재한 '내적인 체계'를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본론>>에 대한 독해를 통해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브뤼메르 18일>>까지 읽어내는 젊은 고진(이 책이 쓰일 당시 37살)의 자유분방함과 창의적 독해는 뛰어나다.

이러한 '소쉬르'의 재발견은 다음 글 <역사에 대하여- 다케다 다이준>에서도 이어진다. 화폐가 상품이란 무엇인가를 은폐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고진은 '죽음'과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죽음의 관념은 언제나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은폐하고 있다.(126면)

맑스를 읽어낸 것과 똑같이 다음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를 읽은 다케다 다이준을 읽는다.

<<사기>>라는 텍스트의 구조만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는 어쩌면 사마천이 의도하지도 않았을 문제를 거기에서 발견했다. 하지만 나 역시 <<사마천>>이란 비평작품에서 다케다 다이준이 의식하지 않았을 문제를 발견한다. (131면)

이러한 방법을 통해 사마천의 <<사기>>는 죽음 또는 진공에 대한 공포를 구조의 중심에 갖고 있는 텍스트로 '읽힌다.' 이는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에 대해서 다케다 다이준의 해설에 대한 고진의 독해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 뒤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하나의 관계의 체계가 다른 체계로 변형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즉 장례가 끝나고 죽은이의 부재에 사람들이 익숙해져 갈 때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로 이루어진 재편성한 관계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시황과 같은 절대 권력자가 그러한 '체계' 속에서 사라졌을 때는? 극도의 진공상태가 형성된다. 그가 죽었을 때는 그가 죽었을 때가 아니다. 진시황이 죽는 것은 '누군가가 시황제를 대신하는 관계의 질서를 형성할 때이다' 이러한 인간의 죽음과 진공에 대해서 다시금 고진은 소쉬르를 인용하여 언어에 대한 비유로서 설명한다. 이는 단지 비유가 아니다. 모든 체계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공을 상상하는 데 그렇게 큰 무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언어라는 체계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쉬르가 언어를 차이짓기의 체계로서 파악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음성과 의미(관념)의 결합은 자의적이고 의미(시니피에)는 단지 음성(시니피앙)의 차이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상이한 음성의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의미는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일종의 '진공'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무(無)가 아니다. '존재와 무'(사르트르)는 거기에서 파생한 데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자의성이란 사람이 임의로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의성이란 말은 시니피앙의 선택이 전적으로 화자에게 맡겨져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 그것이 언어공동체에서 확립되면 화자는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소쉬르). 그렇다기보다 언어가 언어로서 존재할 때는 이미 '진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세계는 의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개(犬)라는 개념은 각 국어마다 음성이 다르기 때문에 개(犬)와 이누(일본어로 개- 기인)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만 해서는 불충분하다. 그러면 개(犬)라는 개념이 원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개(犬)라는 개념 자체가 차이에서 생겨난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개념이 되자마자 '진공'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127면)

이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고모리 요이치의 해설은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글(책과 동일한 제목이고, 책의 절반 가량의 양을 차지한다.)에 대한 해설로, 잘 되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읽기'로 가득차 있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을 비롯해서, 다케다 다이준, 나쓰메 소세키, 예수 등등을 읽어나간다. 이에 대해서 고모리 요이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 의미로서의 말이라면, 그 체계 속에 있는 이상 아무리 '주체적'으로 저항한다고 해도 우리는 더욱 깊이 그 체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 체계에 수고적(受苦的)으로 지배되고 있는 결여로서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 결여를 과잉으로 만회하려고 하는 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여를 만회하는 운동, 그것은 쓰인 것에 대하여 늘 뒤늦게 이루어지는 읽는 것일 따름이다. 읽는 것이란 결코 기원이나 근원에 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끝없는 이송과 양도를 되풀이하면서 사소한 편차를 만들어 내고 오로지 계속 변환하는 것이다. (256면)

읽는다는 것, 비평한다는 것의 의미. 아리송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그러한가. 왜 읽는 것일까. 우리는. '차이'를 생성하기 위하여? 이는 다시 말하면 기존의 우리가 '던져진' 지배적 '상징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즉 '주체'로 서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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