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이산의 책 9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 이산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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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은 '마르크스'를 표나게 강조했지만, 글을 읽는 내내 눈에 띄는 것은 '소쉬르'의 이야기들이다. 기의와 기표의 관계는 자의적이라는 것과 또 보다 중요하게 의미는 '차이'의 체계라는 구조들에 의해서 생성되고 '본질'이나 '내재적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본질이나 개념이라는 초월론적인 것이 전도에 불과하다는 것(38면)

이를 '자본'의 관계에서 파악한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이고, 그의 <<자본론>>이다. 즉 '가치생산적인가 아닌가는 무엇을 생산하는가가가 아니라 차이를 생산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15면)는 것. 맑스는 <<자본론>>에서 노동가치설을 유지하지만, 고진이 새롭게 읽는 맑스는 상품들에 '내재한'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화폐'에 대한 물신성 분석을 통해서 꿰뚫고 있다.

한 상품의 '가치'는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상품과의 가치관계로서 존재할 따름이다. 하지만 화폐형태를 취하게 되면 그것은 수량적으로 표시된다. 같은 상품이라도 어떤 지역에서는 싼데 다른 지역에서는 비싼 것은 각각의 지역에서 다른 상품과의 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뜻할 뿐 그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화폐형태에 의해 사라져 버리면 마치 그 상품에 독자적으로 내재하는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곧 관계의 체계로서의 차이가 화폐에 의해 양적인 차이로 나타난다. (52~53면)

그렇다면 어떻게 '이윤' 즉 '잉여가치'가 생산되는가? 노동자는 자신의 교환가치 만큼을 자본가에게 임금으로 받고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한다. 이 때는 잉여가치가 발생하지 않는다. 등가교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가는 노동자들의 협업을 통해서 초과생산을 발생시킨다는 것. 이를 '체계'로 설명하자면, 시간이 다른 두 축의 이동으로 인해 '차이'가 발생하고 이것이 바로 잉여가치의 비밀이라는 것이다.

두 개의 다른 시스템이 매개될 경우에만 부등가교환 또는 잉여가치가 비로소 필연성을 갖고 존재한다. (58면)

노동생산성의 향상은 분업이나 협업의 강화에 의한 것이든 기계의 개량에 의한 것이든 노동력의 가치를 잠재적으로 저하시킨다. 이것은 이렇게 바꾸어 말해도 좋다. 자본가는 이미 더 싸게 생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산물을 기존의 가치체계 속으로 들여보낸다. 결국 잠재적으로는 노동력의 가치도 생산물의 가치도 상대적으로 하락하지만, 이것은 곧바로 현재화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현존하는 체계와 잠재적인 체계가 여기에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산업자본도 두 개의 상이한 시스템 중간에서 잉여가치를 얻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상인자본이 이른바 공간적인 두 개의 가치체계--더욱이 거기에 속하는 인간에게는 불가시적인--의 차액에 의해 발생했음을 분명히 밝혔지만, 산업자본은 그런 의미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여 시간적으로 상이한 가치체계를 만들어 내는 데 기초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68~69면.)

이렇게 고진이 말하는 '읽는다'는 것은 '맑스'가 의도했듯 안 했듯, 작품 속에 내재한 '내적인 체계'를 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자본론>>에 대한 독해를 통해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 <<브뤼메르 18일>>까지 읽어내는 젊은 고진(이 책이 쓰일 당시 37살)의 자유분방함과 창의적 독해는 뛰어나다.

이러한 '소쉬르'의 재발견은 다음 글 <역사에 대하여- 다케다 다이준>에서도 이어진다. 화폐가 상품이란 무엇인가를 은폐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서 고진은 '죽음'과 '역사'에 대해서 말한다.

죽음의 관념은 언제나 죽음이 어떤 것인지를 은폐하고 있다.(126면)

맑스를 읽어낸 것과 똑같이 다음과 같이 사마천의 <<사기>>를 읽은 다케다 다이준을 읽는다.

<<사기>>라는 텍스트의 구조만을 문제삼은 것이다. 그는 어쩌면 사마천이 의도하지도 않았을 문제를 거기에서 발견했다. 하지만 나 역시 <<사마천>>이란 비평작품에서 다케다 다이준이 의식하지 않았을 문제를 발견한다. (131면)

이러한 방법을 통해 사마천의 <<사기>>는 죽음 또는 진공에 대한 공포를 구조의 중심에 갖고 있는 텍스트로 '읽힌다.' 이는 진시황의 죽음에 대한 사마천의 기록에 대해서 다케다 다이준의 해설에 대한 고진의 독해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죽음' 뒤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하나의 관계의 체계가 다른 체계로 변형되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즉 장례가 끝나고 죽은이의 부재에 사람들이 익숙해져 갈 때 사람들은 살아있는 자로 이루어진 재편성한 관계의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시황과 같은 절대 권력자가 그러한 '체계' 속에서 사라졌을 때는? 극도의 진공상태가 형성된다. 그가 죽었을 때는 그가 죽었을 때가 아니다. 진시황이 죽는 것은 '누군가가 시황제를 대신하는 관계의 질서를 형성할 때이다' 이러한 인간의 죽음과 진공에 대해서 다시금 고진은 소쉬르를 인용하여 언어에 대한 비유로서 설명한다. 이는 단지 비유가 아니다. 모든 체계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진공을 상상하는 데 그렇게 큰 무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언어라는 체계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쉬르가 언어를 차이짓기의 체계로서 파악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은 음성과 의미(관념)의 결합은 자의적이고 의미(시니피에)는 단지 음성(시니피앙)의 차이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상이한 음성의 '사이'에서 생겨난다는 것이다. 의미는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일종의 '진공'에서 생겨난다. 그것은 무(無)가 아니다. '존재와 무'(사르트르)는 거기에서 파생한 데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자의성이란 사람이 임의로 바꿀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의성이란 말은 시니피앙의 선택이 전적으로 화자에게 맡겨져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일단 그것이 언어공동체에서 확립되면 화자는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다"(소쉬르). 그렇다기보다 언어가 언어로서 존재할 때는 이미 '진공'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미 세계는 의미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개(犬)라는 개념은 각 국어마다 음성이 다르기 때문에 개(犬)와 이누(일본어로 개- 기인)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만 해서는 불충분하다. 그러면 개(犬)라는 개념이 원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 개(犬)라는 개념 자체가 차이에서 생겨난 것이고, 그래서 그것이 개념이 되자마자 '진공'을 닫아 버리는 것이다.(127면)

이 책의 말미에 붙어있는 고모리 요이치의 해설은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글(책과 동일한 제목이고, 책의 절반 가량의 양을 차지한다.)에 대한 해설로, 잘 되어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읽기'로 가득차 있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을 비롯해서, 다케다 다이준, 나쓰메 소세키, 예수 등등을 읽어나간다. 이에 대해서 고모리 요이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 의미로서의 말이라면, 그 체계 속에 있는 이상 아무리 '주체적'으로 저항한다고 해도 우리는 더욱 깊이 그 체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그 체계에 수고적(受苦的)으로 지배되고 있는 결여로서 스스로가 존재하고 있음을 느꼈을 때, 그 결여를 과잉으로 만회하려고 하는 운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여를 만회하는 운동, 그것은 쓰인 것에 대하여 늘 뒤늦게 이루어지는 읽는 것일 따름이다. 읽는 것이란 결코 기원이나 근원에 갈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끝없는 이송과 양도를 되풀이하면서 사소한 편차를 만들어 내고 오로지 계속 변환하는 것이다. (256면)

읽는다는 것, 비평한다는 것의 의미. 아리송하다. 너무 당연한 말이라서 그러한가. 왜 읽는 것일까. 우리는. '차이'를 생성하기 위하여? 이는 다시 말하면 기존의 우리가 '던져진' 지배적 '상징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즉 '주체'로 서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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