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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밥
오카모토 카노코 지음, 박영선 옮김 / 뜨인돌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식민지 문학, 특히 소설에 있어 예술지상주의라고 지칭되는 이는 김동인과 최근 주목받은바 있는 임노월을 들 수 있다. 사실 내가 문학 전공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계기라는 것이 있다면, 이는 김동인과의 만남이다. 학부 1학년때, 나는 '내가 필요한 것은 나를 속여줄 시나 소설 뿐'이라고 끄적이고는 했다. 예술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술만이 우리를 속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 지겹고 사기같은 삶에서. 일종의 마약과도 같은 예술.
그러나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목적문학'에 빠져들었고 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지금 논문을 쓰고 있는 주제 또한 선전 선동 문학에 가까운 태도로 문학을 '한' 시인인 주요한에 대해서 탐구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안창호를 정신적 지주로 모시고 있는 사람으로서, 식민지 상황 속에서 문학은 독립을 위한 문학일 수 밖에 없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런 나는, '미'를 위한 문학, 또는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에 대해서 부르주아적인 예술관이라고 ('미'라는 것은 계급적으로 규정된다고, 부르주아적 미란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고) 말하고는 했다.
그러나 내가 계속 김동인에게 끌리는 이유와, 이 소설집 <초밥>이 매력적인 이유는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카모토 카노코는 저자 소개에 따르면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서 유명한 화가와 결혼하고 자식 또한 일본미술계에 길이 남을 화가이다. 소위 '부르주아 여성'인 셈. 그리고 소설 또한 '예술지상주의'를 표방하거나 그 도장이 찍혀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이 주는 느낌의 원천은 무엇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유한한 삶이라는 것의 쓸쓸함에 대해서 예술지상주의적 포즈로 이를 넘어스려 하고 있는데서 감동을 준다. 계급에 상관없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유한성에 대해서, 그 늙음과 병듬과 추함에 대해서, 그 쓸쓸함에 대해서 작가는 예술이라는 또다른 쓸쓸함으로 치환시킨다.
다른 단편들에서도 이런 쓸쓸함이 잘 나타나 있지만, 백미는 역시 가장 긴 <식마>에서 잘 나타난다. 요리선생 베츠시로는 탐미주의자로 여러 동양예술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요리라는 예술에서 자신의 재능을 찾는다. 물론 그렇다고 크게 성공한 요리가도 아니고 동네에서 지방 유지에게 말동무가 되어주고, 그 유지의 딸들에게 요리를 가르칠 뿐이다. 그럼에도 오만한 미청년은 적은 월급에 사랑하지도 않는 아내와 함께 지방 유지에게 빌린 집에서 근근히 살아갈 뿐이다. 이 미청년을 알아주었던 그의 친한 친구는 암에 걸려서 죽어간다. 그 친구 또한 베츠시로와 마찬가지로 여러 예술에 통달하여서 서로 감탄하는 사이였다. 그는 목 뒤에 커다란 종기가 나서 죽어가는데, 그 종기에다 사람 얼굴을 그려달라고 베츠시로에게 부탁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그 몸부림을 일종의 춤으로 만들고, 흉측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전신 거울에 비쳐가며 웃는다. 죽음을 예술화함으로서, 그 쓸쓸함을 넘어서는 것.
베츠시로는 알아챘다. 히가키 주인은 이 괴로움의 절정에서 즐기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통증에 대항하려는 육체의 몸부림에 필사적으로 리듬을 주어 춤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조금이라도 통증을 덜어낼 수 있는 걸까. 그렇지 않으면 그가 평소에 말한 '절륜(絶倫)의 예술'을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것일까. 그는 다시 춤췄다. 꿈틀꿈틀, 으흑 으흐흑, 기절하듯이 흠. 그것은 회교도의 기도 모습과 닮았지만 실은 밖에서 들려오는 삼류 극장의 악대 리듬에 맞춘 것이었다. 베츠시로가 더욱 경악치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런 상태이면서 반대쪽 벽에 그 모습을 비추는 거울을 세워 놓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비참한 춤을 스스로 보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영상을 더 멋있게 하려고 거울 안에 자신의 모습과 동시에 비취게 하려고 파란 벽걸이와 침대 옆에는 여름 꽃을 꽂은 항아리까지 준비해 두었다. (142-143)
유독 예술지상주의적 작품에서는 죽음을 넘어서는 예술이라는 모티프가 많이 등장한다. 김동인의 <광염소나타>의 천재는 방화, 살인, 시간을 통해 영감을 얻는다. 이는 '예술지상주의'라는 것이 삶을 넘어설때, 삶의 비참함, 고루함, 천함을 인식하고 그것 너머에 있는 '예술'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김동인의 작품보다 오카모토 카노코의 이 작품이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는 예술을 보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는 일본과 조선의 죽음의식에 대한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할복 문화나, 죽음에 대한 찬미의 문화. 비교적 최근의 히라노 게이치로의 등단작 <일식>에서도 일식의 순간 화형당하며 사정하는 죄인 또한 마찬가지의 미학을 보여준다. 죽음의 순간에 이를 예술화함으로서 이를 넘어서는 것. 쓸쓸함을 화려함으로, 허무를 영원으로, 죽음을 예술로 전환시키는 것. 여기에 이 "예술지상주의"자 들의 미학이 존재하고, 여기에 보편적 울림이 담겨 있다. 메멘토 모리, 카르페 디엠. 이 문구를 극단으로 추구하면 우리 또한 예술지상주의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ps. 왠만해서는 별 다섯개를 주고 싶었지만, 마음에 걸리는 번역 때문에 망설여서 별 네개를 준다. 두 번째 단편 <집 유령>에서 '추어탕'이라고 미꾸라지 요리를 번역했는데, 우리가 아는 '추어탕'이라는 것은 미꾸라지를 갈아서 만드는 한국 음식이다. 여기서 '추어탕'은 미꾸라지 형체가 있고 이를 끊어먹는 등의 이야기가 나와서, 최소한 각주라도 달아주었으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조금 야박한 것 같지만, 별 다섯개는 정말 '완벽'에만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