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글로 쓰다가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여기로 옮깁니다. '백수생활백서'에 대한 제 서평은 http://www.aladin.co.kr/blog/mypaper/941892 에 있습니다.

 


우선은 매너님의 원본 글을 인용하겠습니다.


꾸벅. 재미나게 서평 읽고 질문 몇 가지만 씁니다. 호호호;;;


1. 김미현 교수의 평과 김화영 교수의 평이 과연 '극과 극'으로 갈리는 의견이었던가요. 전 둘 다 긍정적 평가로 읽었습니다만.



후기 자본주의의 도도한 위협에 압도되어 멸종되어 가는 듯한 인상을 주는 소설의 독자가 지금 어디로 피난 와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는 듯한 주제가 특히 매력적이었다. 화자는 불필요하게 톤을 높이는 일 없이 나직하고 담담한 어조로 숨 쉬듯이 말한다. 가끔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 엿보이는 깊은 수렁, 그것이 허무인지 무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꾹꾹 눌러서 억제한 어떤 절규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그 깊은 수렁 위를 무심한 표정으로 건너간다. ... 오직 독자의 영역에서 한 바자국도 밖으로 나서기를 거부하는 이 길고 가느다란 삶은 마침내 가장 겸손한 독자를 오늘의 폭력적인 삶에 가늘고 길게 저항하는 치밀한 소설가로 탈바꿈시킨다. - 김화영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그 자체로 불후의 도서관인 소설, 그 옆에 영화관이 있는 소설, 그 속에서 자족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있기에 이 소설은 21세기적 유토피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의 나비가 책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불가능한 이상을 실현 가능한 일상으로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소설은 환상적이면서도 구체적이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만족하는 주인공을 이제 우리 한국 소설에서도 갖게 되었다. - 김미현 (문학평론가, 이화여대 교수)



극과 극으로 갈린다는 것은 전체 맥락에 대한 오독이거나, 일부분에 국한시킨 표현으로 한정되는게 옳다고 봅니다. 오독을 수정하시거나, 어느 부분에 국한되어 '극과 극이 갈리는' 것인지 정확히 표현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2.주인공이 한다는 '치열한 반성'이 어느 부분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버지의 경제적 기반에 기생한다는 자각마저 없이 자신의 환경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고민이 고작 사춘기 소녀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게 그 '허무와 권태'가 아닐련지요?


3. 제가 지적한 부분 이외에도 '자기 자신을 긍정하려는 주인공'이라는 기반 자체를 무너뜨리는 묘사가 나옵니다. 연애에 개시니컬하던 주인공이 괜찮은 남자에게 처음 거리를 두다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이 변화의 과정이 그리 설득력 있어 보이진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백수생활백서의 끝이 어느 남성과의 사랑 - 그것도 남자가 다른 여자에 받은 상처를 치유한다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장치 - 으로 맻어진다는 데 있습니다. 뭐 자신의 삶의 패턴을 바꾼다는 얘기는 없지만 끝으로 갈수록 사랑에 대한 떨림섞인 어조로 그 기대감을 이야기하고 있지요. 스스로 자족하는 주인공상과는 거리가 있는 걸로 생각됩니다.


4. 정말 생각해 볼 건, 이 책이 오늘의 작가상은 물론 '내 맘대로 살테다!'하면서 적잖은 사람들을 낚은 현상입니다. 사회/경제적 고민이 송두리채 도려져내고 만만치 않은 책 구절 몇 개, 문장 몇 개 주어삼기면 '만만치 않은 사람'으로 떠받들어지고 숭상되어지는, 프리터 & 오타쿠 사회화 물결에 적잖은 사람이 동감하고, 심지어는 문학상까지 타냈다는 점에 있다고 봅니다. 문학계(?)가 시대흐름, 타이밍에 쫓아가려는 안간힘을 안쓰러울 정도로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여튼간 50년후 이 종이뭉치가 다뤄질 코너는 문학계간지나 고전 코너가 아니라, 50년전 시대상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의 한 꼭지가 될거라는데 한 표 던집니다.


5. 입대 며칠 안 남기고 날씨 쌀쌀해졌네요. 가시는 날까지 건강 조심하시길. =)




매너님께.


사실 이 서평은 매너님의 백수생활백서에 대한 서평을 읽고 나서 쓴 것입니다. 읽기 시작하면서는 매너님과 비슷한 판단을 이 책에 대해서 했는데, 왠지 남들이 '아니요'라고 하면 다시 삐딱하게 읽고 싶은 반골기질과, 요즘은 문학이란 무엇일까, 특히 소설은 왜 쓰는 것일까 라는 생각과 예전 제 판단들에 대해서 (현실의 재현/운동의 전위/이데올로기 투쟁) 회의하고 있는 중이라서 이 책과 함께 제 회의를 좀 더 밀어붙이려다가 중간에서 멈춘 어정쩡한 글입니다. 결국 철학책이나,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책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이유,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은 무엇일까라는 문제가 저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앞으로 제 진로와도 연관되겠지만요. ^^; 어쨌든 읽어주시고 댓글을 달아 주셔서 감사하네요 ^^



1. 극과 극으로 심사위원들이 평가했다는 것은, 긍정적/부정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족하는 주인공'과 '억제한 어떤 절규'라는 두 평가가 심히 반대에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반성하고 자학하는 주인공이 아니라 스스로 만족하고 사랑하는 주인공'이라는 평가와 김화영 선생의 평가는 정말 다른 것 같습니다.


2. 아버지에 경제적으로 기생하고 있다는 부분. 문제적인 부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책 중에서 주인공이 계속 자신은 경제적으로 자립에 가깝고 돈을 별로 안 쓰기 때문에 알바로 가능하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는 사실 말 뿐이지요. 실제로 독립해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를 포함해서) 이 여인네의 철없음(?)에 조금 어이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주목했던 부분은 그러한 '사춘기 때의 고민'을 일시적인 고민이 아니라 지속한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왜 나는 남들과 같은 삶을 선택해야 할까? 왜 사는 것일까" 등 어찌 보면 유치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내리면서 남들과는 다른 '백수'라는 삶을 선택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주인공에 대한 설정이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오히려 독자로 하여금 여러가지 복잡하게 생각하게 해줍니다. 결국 어떤 것이 선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이 사춘기적 고민들을 연장시킨 것인지, 아니면 사춘기적 고민들의 연장이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 기생으로 말미암았는지 말입니다. 이러한 설정 자체 또한 이 소설의 '심연' 또는 독자들이 해석에 개입할 수 있는 틈을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매너님도 지적하신 것처럼 ‘사회적/경제적 고민이 송두리째 도려내어’있는 것, ‘사회, 경제’를 괄호 속에 묶어 놓은 것 또한 텍스트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작가는 왜 ‘사회, 경제’를 괄호 속에 묶은 것일까요. 왜 주인공으로 하여금 ‘사회, 경제’에서 등을 돌리게 설정한 것일까요. 이러한 질문이 생산적이고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지 않은지 또한 그가 말하는 것보다 그에 대해서 더 많이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까요. (뭔가 탐정흉내 -_-;; )


아버지에게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알바를 하면서 '백수'생활을 하는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와 '사회'를 상당부분 괄호치고, '아버지'에 기생해서 사는 주인공이라는 설정. 이 주인공이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어떤 집단으로 (매너님도 그러한 '집단'을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생각한다면 이 또한 의미심장하지 않을까요? 4번과 관련하여 나중에 더 말씀드릴 테지만, 이를 현상에 대한 재현으로 본다면, 독자로 하여금 이에 대해 의문하고 반성케 하는 것 또한 소설의 기능일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의 기본 설정인 '아버지에 대해 경제적으로 기생하면서 이를 스스로는 별반 반성하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알바로 자신의 하고 싶은 독서로 인생을 채워나가는 여성' 자체가 작가의 의식수준의 미비를 보여주거나 작품 수준의 질적 저하로 나타난다기 보다는, 작품을 읽으며 해석할 여러 여지를 주는 것 같습니다.


3. 스스로 자족하는 주인공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자족하려는 주인공이지만 어떤 심연에 두려워하고 있고 이를 언뜻언뜻 내비치는 주인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연애에 대해서 쿨하게 생각하는 주인공이라는 것에도 동의하지만, 결국 결말에 남성과의 사랑으로 맺어진다는 해석은 제 해석과 좀 다릅니다. 저는 결말에도 그 남성과 이성간의 연애를 하는 것이라고 읽지 않았는데요 ^^; (이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 더 말해보겠습니다.)


4. 4번이 역시 핵심인 것 같습니다. 이는 문학이, 소설이 왜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매너님 말씀처럼, 일본에서는 이미 사회 문제화된지 오래이고, 남한에서도 서서히 현상을 드러내고 있는 프리터&오타쿠 사회화 물결.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할 수 있는 일/ 경제학, 심리학, 사회학에서 그들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 말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예술,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론화되기 이전의 지점을 잡아내는 것이 아닐까요. 더 진부한 말을 해보자면, '가상을 통해 어떠한 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소설이 해야 할 일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프리터 & 오타쿠 사회화 물결'에 대해, 그 '프리터'를 1인칭 화자로 설정하면서 소설을 쓴 이 "백수생활백서"는 그런 점에서 작가 나름의 하나의 문학적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존재에 대해서요.


제목자체도 풍자적으로, 또는 소설의 주인공을 비웃는 (그닥 날카롭지는 않게) 듯한 '백수생활백서'라는 것. 외부의 시선으로는 '백수'에 불과한 우리의 주인공. 그러나 그녀에게도 나름의 고민이 있고, 그녀라는 독립체를 형성시킨 조건 (어머니의 부재, 아버지에 대한 경제적/비자각적 기생)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독자들이 이러한 설정과 이러한 설정이 빚어내는 이야기를 통해서 이러한 주인공을 ‘경험’해보는 것, 이로써 독자로 하여금 오타쿠/프리터에 대한 한 문학적 질문을 하고 대답을 내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이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요?


<세계의 문학> 121호에 작가 박주영에 대한 인터뷰가 실렸지만,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작가 또한 소설을 완성한 이후에는 하나의 독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닥 신경쓰지는 않고 있습니다. 소설의 결말부분을 인용해봅니다.


나한테는 이미 익숙해진 읽기와 이해의 방식이 있다. 책을 읽듯 사람을 읽는다. 그는 한 번 읽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은 책이다. 처음 읽으면 이야기가 보이고, 두 번 읽으면 인물이 살아나고, 세 번 읽으면 배경이 그려지고, 네 번 읽으면 움직임이 읽히고, 다섯 번 읽으면 낱말 하나하나가 다르게 다가와서 세월을 두고두고 읽어야만 하는 책. 나는 그를 다시 읽게 될 그날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나에게 다른 건 몰라도 시간은 있다.


서른 살이 되었지만 내 인생은 여전히 미궁 속이다. 내가 아는 건 시간이 함부로 지나가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나는 세상의 속도를 무시한 나 자신만의 속도를 갖고 있다. 그것은 책과 마주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속도이다. 같은 페이지의 책도 저마다 다른 속도로 읽을 수 밖에 없다. 때로는 느리게, 때로는 빠르게. 그리고 원한다면 언제나 다시, 또 새롭게.


누군가 예수를 믿고 부처를 믿듯 나는 책을 믿는다. (327)


매너님은 '그'와 '나'가 이제 연애를 시작할 것이라고 읽으셨지만, 저는 책 '오타쿠/프리터'인 '나'가 책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사람'을 읽어볼 결심을 하는 것으로 읽혔습니다. 물론 그래도 '나'는 '책'을 믿을 뿐이고 '책'처럼 '그'를 읽겠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이것이 일종의 매개가 되겠지요.


읽으면 읽을수록 새롭게 다시 읽히는 책. 마지막에 박주영이 적어놓은 글귀가, 이 책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런지요. 시간이 나면 저는 다시 책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이 주인공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작가는 왜 이러한 설정을 했을까. 작가는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읽는 것일까. 에서 시작해서, 세상이라는 것은 단일한 것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주인공이 살아가는 세상의 방법과, 이것이 반영하는 세상 현상, 그리고 이를 통해 판단되는 것들. 등. (문득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는 노래가 생각나네요 ㅎㅎ)


어쨌든, 문학의 역할 중 하나는, 이렇게 읽고 다른 해석을 가진 두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일 듯 합니다. 그것이 바로 TEXT라는 것이겠죠. :)


5. 우왕부왕 말이 길었습니다. 훈련소 가기 3일전. 안 그래도 고열과 감기에 신음하고 있는 기인이었습니다. 흑흑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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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하;

돌아오는 목요일이 입소이니, 이정도는 봐주지 않을까? 밤8시쯤 잤다가 11시 반쯤 일어났다.

점심을 1시부터 3시정도 까정 조선호텔 부페에서 맛있게 먹어서 저녁을 안 먹고 잤다. 그것도 나를 위한 환송회 모임을 취소하고 -_-;

제 멋대로 살기. 으아~ 이런게 바로 자유의 울부짖음이려나? ㅋㅋ

 

고작 한다는 것이, 지인들의 환송회 모임 취소하고 잠이나 자고, 새벽에 치킨이나 시켜먹는 자유이지만.

좋다. ㅡ,.ㅡ;

 

드라마랑 대중문학 읽기도 지쳐서, 오늘은 시집을 쫌 읽었는데, 쫌 읽다 내던지고 다시 게임이나 하련다. 오우, 오늘 밤은 길겠다. 그나저나 내일 문제집 회사 미팅과, 오전에는 애인과 놀아야하는데...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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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09-1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먹어도 먹는게 아니야~~ 내가 씹어도 씹는게 아니야~~
라는 분위기잖아요...

LAYLA 2006-09-1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죠...잠만 실컷자는 방콕뿐인 날들이라도..전 그런 자유 좋아하거든요 ㅋㅋㅋ

기인 2006-09-10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네 ㅋ 그렇죠 뭐. 이제는 그냥 연수 다녀온다는 생각으로 ^^;
Layla님/ 맞아요~ 아으 그런 자유. 이제 오늘밤까지 3일밤 남았슴다~

2006-09-12 0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6-09-12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ㅁ님/ ㅋㅋ 한달만 지나면 나옵니다. ^^;;;
 

페이퍼 하나를 이상하게 마쳐놓고도, 끝냈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혼자 두리둥실 어제 하루를 날려버렸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자신을 다잡아가는 의지가 얼마나 약해지는지. 예전의 빠릿빠릿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닐리리야 자세만이 가득하다. 사실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것과 달리, 페이퍼 쓰기는 공부의 목적이나 대상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섀도우 복싱과도 같아서 공부의 질이 엄연히 다르다고 자위하지만, 식어빠진 학구열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학부 시험 감독 들어갔다가 빠릿빠릿 시험지를 채워나가는 학부생들을 보며 가슴이 뻐근하게 부러웠다.

 

첫번째 페이퍼와는 달리, 두 번째 페이퍼는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thesis가 있기에 애정이 남다르지만, 역시나 게을러서 아직 관련 책 한 번 다시 점검해보지 않았다. (이틀이나 남았잖아! 역시나 방만한 자세.)

 

이런 내게 필요한 주옥같은 말씀을 수백 년 전에 정약용 선생님이 남겨주셨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을 읽고 정신이 번쩍 났지만, 번쩍 났던 정신은 그간 놀아오던 관성 법칙에 밀려 다시 혼미해졌다.


시야가 짧은 사람은 오늘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당장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에 뜻이 맞는 일이 있으면 벙긋거리며 낯빛을 펴곤하여, 일체의 근심, 유쾌함, 슬픔, 기쁨, 감격, 분노, 애정, 미움 등의 감정이 대부분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그러나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보면 비웃지 않겠느냐? . . . 요컨대 알아야 할 점은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가을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정약용,『다산문선』97쪽)

 

나는 젊었을 때에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반드시 그 해의 공부와 과정을 미리 정하였는데, 예를 들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책을 뽑아 적어야 하는가를 미리 정해놓은 뒤에 실행하였다. 간혹 몇 달 뒤에 이르러 사고가 발생해서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선을 즐기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뜻만큼은 스스로 숨길 수가 없었다.

(같은 책 156쪽)


아침엔 눈물을 줄줄 쏟고, 저녁엔 벙긋거리는 내 생활을 마치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저 구절을 보며 공부하는 자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양살이의 고통을 일개 대학원 생활의 고통에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식의 기다림도, 외로움도, 가난함도 꺾을 수 없는 기상이 무엇인지를 저 구절이 일깨워주고 있어서 가슴에 찡한 감동이 전해져 왔다.(자기 연민이 극에 달해 폐족이 된 정약용의 아들과, 귀양살이를 하는 정약용에 '동화'되고 있는 듯하지만.) 공부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록 도리어 옹졸해지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는데, 정약용의 글을 읽으면서 제대로 때를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청운의 뜻이라니! 진부하다고 느끼던 단어였는데, 지금은 뭔가 나를 설레이게 만든다. 깊어지자는 다짐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폐족의 신분과 대학원생의 신분 사이에서 analogy의 극치를 만들어낸 문장을 인용하고 글을 마쳐야 겠다.


그 폐족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 뿐이다. 이 독서야 말로 인간의 제일가는 깨끗한 일로서, 호사스런 부호가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또한 궁벽한 시골의 수재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정약용,『다산문선』 113쪽)

 

패러디:

대학원생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 뿐이다. 이 독서야 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일로서, 고시 합격자나 연봉 높은 직장인이나 호사스런 재벌집, 준재벌집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되고, 알지 못하길 바라고, 또한 지적 능력이 한미하거나 좁은 지식인 행세나 하는 무리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 가난한 대학원생이여~독서하라.


그만 책 읽으러 가야겠다.

http://www.cyworld.com/heine80

에서. 귀여운 영문학도 인혜누나의 홈페이쥐에서 펌.

 대학원생으로서 어찌 아니 공감될 소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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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9-10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지적이고 환타스틱한 페이퍼입니다. 정약용도 나오고.... 갑자기 님께 존경심이 왈칵....

마태우스 2006-09-10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근데 다른 분 글 퍼오신 건가요??

기인 2006-09-1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영문학도 누님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ㅋㅋ ;)
 
 전출처 : 비자림 > 대학 시절의 기억

 대학 시절의 기억

 

캠퍼스에는 말끔히 낯을 씻은 사계절이 순환하여 좋았다

남자에 대해선 관계의 빗장을 꽁꽁 걸고 살면서

가장 첨예한 각이 생긴 自意識만 쓰다듬고 살았던 나  

집으로 가는 길에 내 눈동자를 파고 들던  깨진 보도블럭은

4년 내내 내 의식의 촉수를 건드리고 물어 뜯었다 

연극반에 들어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며 나를 잊던 시간들

시시한 배역도 모두 중요했던 무대 위 인생들

알베르 까뮈, 노암 촘스키,  전태일 그리고 또 누구누구누구

우리는 모두 멘토를 열심히 찾으려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시대의 우울은 전염병처럼 퍼져 아침부터 해가 지는 날이 잦았고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정육점 갈고리처럼 허공에 걸리던 외침들 

우리는 막걸리를 마실 때만 서로의 가난한 마음을 부빌 수 있었는데

연애하던 이들이 함께 하면 주점의 인조나무마다 겨울눈이 돋았다

자취방으로 들려오던 기괴하고 흉흉한 밖의 소문들

장마철 빨래처럼 눅눅해진 우리는

결국 쭈그러진 자아를 매만지며 학사모를 쓰게 되었고

저마다 작은 배에 올라 타 재빨리 돛을 세우고 나아갔다 

한 번도 방황하지 않은 사람처럼 서러움을 감추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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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09-09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형도의 <대학시절>이 떠오릅니다. 마지막 구절은 또 다른 느낌이면서, 기형도와의 세대적인 차이와, 그 이미지나 느낌이 와 닿습니다.
 

자다가 새벽에 깨어나면, 가끔 나는 홀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늙고 죽어가고 있구나, 라는 것을 느낀다/생각한다. 궁극적으로 혼자서 판단하고 책임져야 하는 것. 혼자서 늙어가고 추억할 수 있는 것.

절대적으로 혼자라는 것.

외로움과는 달리, 책임감이나 막막함을 부수하는 감정. 아니, 그것보다도 그냥 혼자라는 느낌 그 자체. 유일무이한 것. 나, 혹은 '자아'라는 것의 발견. 별반 특별할 것도 유일할 것도 없지만, 특수하고 개별적인 것.

아, 내 삶은 내가 혼자서 살아내야하는 것이구나 라는 것. 반복할 수도 없고,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세상 사람들 모두 어찌보면 비슷비슷한 고민과 삶의 패턴을 공유하지만, 결국은 각자 하나라는 것.

요즘은 계속 주위 사람들과 군대(?)간답시고 환송회 일정이 잡혀서 피곤했다. 사실, 사람들을 보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도 한 두 번이지, 거진 매일 술자리가 있으니 너무 피곤했다. 오늘도 친한 문학모임 사람들 (거진 학부 사람들 중, 가장 친하다고 할 수 있는 그룹)과 만나는 약속이 있었는데, 일방적으로 미루었다.

오늘 오전에는 10년전부터 알고 지낸 선생님을 찾아뵙다. 조선호텔 부페에서 식사를 했는데 (꽤 괜찮다), 연세 55이신 선생님께서는 삶이 너무 빠르다고 하시면서, 삶의 선택지들마다 용기있는 선택을, 자신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강조하셨다.

결국 나도, 너도, 우리는 혼자였구나.

비자림님 시의 구절 중 오늘 맘에 꽂혔던 것

저마다 작은 배에 올라 타 재빨리 돛을 세우고 나아갔다/한 번도 방황하지 않은 사람처럼 서러움을 감추고서

(<대학 시절의 기억> 중)

작은 배라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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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9-10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젯밤 외로움을 느끼셨나 봐요. 사람은 본래 외로운 존재인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이 더 드네요. 인간은 근원적으로 외로운 존재가 아닐까 하는... 사랑이 있고, 일이 있고, 꿈이 있더라도 가끔씩 내 가슴에 틈입하는 서늘한 느낌...


기인 2006-09-11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 가끔씩, 그런 자각이 번쩍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