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퍼 하나를 이상하게 마쳐놓고도, 끝냈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혼자 두리둥실 어제 하루를 날려버렸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수록 자신을 다잡아가는 의지가 얼마나 약해지는지. 예전의 빠릿빠릿함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닐리리야 자세만이 가득하다. 사실 '시험'을 위해 공부하는 것과 달리, 페이퍼 쓰기는 공부의 목적이나 대상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 섀도우 복싱과도 같아서 공부의 질이 엄연히 다르다고 자위하지만, 식어빠진 학구열은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학부 시험 감독 들어갔다가 빠릿빠릿 시험지를 채워나가는 학부생들을 보며 가슴이 뻐근하게 부러웠다.

 

첫번째 페이퍼와는 달리, 두 번째 페이퍼는 내가 오랫동안 품어온 thesis가 있기에 애정이 남다르지만, 역시나 게을러서 아직 관련 책 한 번 다시 점검해보지 않았다. (이틀이나 남았잖아! 역시나 방만한 자세.)

 

이런 내게 필요한 주옥같은 말씀을 수백 년 전에 정약용 선생님이 남겨주셨다.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을 읽고 정신이 번쩍 났지만, 번쩍 났던 정신은 그간 놀아오던 관성 법칙에 밀려 다시 혼미해졌다.


시야가 짧은 사람은 오늘 자신의 뜻과 같지 않은 일이 있으면 당장에 눈물을 줄줄 흘리고, 다음날에 뜻이 맞는 일이 있으면 벙긋거리며 낯빛을 펴곤하여, 일체의 근심, 유쾌함, 슬픔, 기쁨, 감격, 분노, 애정, 미움 등의 감정이 대부분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그러나 달관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보면 비웃지 않겠느냐? . . . 요컨대 알아야 할 점은 아침에 햇빛을 먼저 받는 곳은 저녁때 그늘이 빨리 들고, 일찍 피는 꽃은 그 시듦도 빠르다는 진리인 것이다. 운명은 돌고 돌아 한 시각도 멈추지 않는 것이니 이 세상에 뜻이 있는 사람은 한 때의 재해 때문에 마침내 청운의 뜻까지 꺾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가슴속에는 가을매가 하늘로 치솟는 기상을 지니고서 천지가 눈 안에 들고 우주가 손바닥 안에 있듯이 생각하고 있어야 옳다.

(정약용,『다산문선』97쪽)

 

나는 젊었을 때에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반드시 그 해의 공부와 과정을 미리 정하였는데, 예를 들면 무슨 책을 읽고 어떤 책을 뽑아 적어야 하는가를 미리 정해놓은 뒤에 실행하였다. 간혹 몇 달 뒤에 이르러 사고가 발생해서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선을 즐기고 앞으로 전진하려는 뜻만큼은 스스로 숨길 수가 없었다.

(같은 책 156쪽)


아침엔 눈물을 줄줄 쏟고, 저녁엔 벙긋거리는 내 생활을 마치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저 구절을 보며 공부하는 자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양살이의 고통을 일개 대학원 생활의 고통에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어떤 식의 기다림도, 외로움도, 가난함도 꺾을 수 없는 기상이 무엇인지를 저 구절이 일깨워주고 있어서 가슴에 찡한 감동이 전해져 왔다.(자기 연민이 극에 달해 폐족이 된 정약용의 아들과, 귀양살이를 하는 정약용에 '동화'되고 있는 듯하지만.) 공부하는 기간이 길어질 수록 도리어 옹졸해지고,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는데, 정약용의 글을 읽으면서 제대로 때를 기다리며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청운의 뜻이라니! 진부하다고 느끼던 단어였는데, 지금은 뭔가 나를 설레이게 만든다. 깊어지자는 다짐 다시 한 번.

 

마지막으로, 폐족의 신분과 대학원생의 신분 사이에서 analogy의 극치를 만들어낸 문장을 인용하고 글을 마쳐야 겠다.


그 폐족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 뿐이다. 이 독서야 말로 인간의 제일가는 깨끗한 일로서, 호사스런 부호가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또한 궁벽한 시골의 수재들도 그 오묘한 이치를 알 수 없다.

(정약용,『다산문선』 113쪽)

 

패러디:

대학원생의 처지를 잘 대처한다 함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것은 오직 독서하는 것 한 가지 뿐이다. 이 독서야 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고귀한 일로서, 고시 합격자나 연봉 높은 직장인이나 호사스런 재벌집, 준재벌집의 자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알아서도 안 되고, 알지 못하길 바라고, 또한 지적 능력이 한미하거나 좁은 지식인 행세나 하는 무리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아 가난한 대학원생이여~독서하라.


그만 책 읽으러 가야겠다.

http://www.cyworld.com/heine80

에서. 귀여운 영문학도 인혜누나의 홈페이쥐에서 펌.

 대학원생으로서 어찌 아니 공감될 소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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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6-09-10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지적이고 환타스틱한 페이퍼입니다. 정약용도 나오고.... 갑자기 님께 존경심이 왈칵....

마태우스 2006-09-10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근데 다른 분 글 퍼오신 건가요??

기인 2006-09-10 2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영문학도 누님의 홈페이지에서 퍼왔습니다. ㅋ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