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미스 포터, 혹은 미스 베아트릭스 포터...

오늘 신도림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서 있는데, 마침 내가 서 있었던 승강장의 추락방지대에 온통 <미스 포터>라는 영화 광고가 도배되어 있는 거다. 누가 나오는 영화인가 보니 왼쪽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콧수염 기른 이완 맥그리거(오비완 선생), 오른쪽에는 르네 젤위거(난 이 배우 예쁜 것 잘 모르겠더라)가 있고, 그 위쪽으로는 여주인공이 책상 위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는" 장면과 두 사람이 키스하는 장면이 나와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19세기 영국 분위기가 나는데, 혹시 무슨 소설이 원작인가 싶어서 가운데에 붙은 포스터 밑에 나온 크레딧에서 혹시 내가 아는 이름이 더 있나 찾아보았지만, 음악을 맡은 레이첼 포트먼(<베니와 쥰>과 <피아노>의)을 빼고는 모두 생소했다. 그렇다면 "음악"은 꽤나 기대가 되지만 막상 "내용"은 어떤지 좀 의심스러운 그저그런 로맨틱 코미디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그놈의 "제목"은 참! 요즘 세상에 "포터" 하면 무조건 "해리 포터"를 연상시키는 판에 아마도 순수 창작물인 것 같은 영화 제목이 "미스 포터"라니, 이것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닌가 싶었는데... 웬걸! 내 눈이 잠시 멀었는지, 열차를 타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야 포스터 왼쪽 위에 나와 있던 카피가 눈에 들어오는 거다. "유명한 그림책 작가 비어트릭스 포터의 운명적인 사랑 운운..." 꽥. 여기서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포터가 바로 그 "포터", 바로 "베아트릭스 포터"였다니.
앞에서 말했다시피 요즘은 "포터"라고 하면 십중팔구 "해리 포터"다. 하지만 감히 장담하건대, 앞으로 100년 뒤, 아니 200년 뒤까지 남을 "포터"는 사실 "해리"가 아닌 "베아트릭스" 쪽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 "베아트릭스 포터"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지금이나 앞으로 100년 후에나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베아트릭스 포터는 그 유명한 "피터 래빗" 시리즈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피터 래빗은 이런저런 팬시용품이나 각종 학용품, 그리고 이런저런 생활용품에 사용되는 캐릭터 머천다이징 쪽의 "강자" 가운데 하나다. 솔직히 이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해리 포터만 해도 그 캐릭터 머천다이징 쪽은 완전 "죽"을 쑤고 만 것에 비하자면, 피터 래빗의 경우에는 그 이름은 몰라도 부드러운 수채화 느낌으로 그려진 귀여운 동물 캐릭터를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했거나, 그런 그림이 그려진 물건을 안 가져본 사람은 드물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히 "베아트릭스 포터"야말로 "해리 포터"를 능가하는 아동문학 및 캐릭터 분야의 최강자 중 하나라고 선뜻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나저나 베아트릭스 포터의 "생애"에 과연 이처럼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의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는지는 금시초문이어서, 집에 돌아와서 이것저것 인터넷과 책을 뒤적뒤적해 보았다.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는 아직 베아트릭스 포터에 대한 전기 같은 것은 나와있지 않았고, 다만 <토토로의 숲을 찾다: 내셔널 트러스트의 여행>(요코가와 세쯔코 지음)이라는 책에 짧게 생애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었다. 왜냐하면 베아트릭스 포터는 화가이자 그림책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내셔널트러스트의 초창기에 활동한 주요 인물 겸 기부자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베아트릭스 포터가 피터 래빗 시리즈를 구상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1893년, 베아트릭스는 일찍이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무어 부인의 다섯 살짜리 아들 노엘의 병 문안을 위해, 건강하고 장난꾸러기인 아기 토끼들이 등장하는 그림편지를 보낸다. "노엘, 노엘에게 뭐라고 써서 보내면 좋을지 잘 몰라서, 작은 네 마리 아기토끼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토끼들의 이름은 프롭시, 몹시, 카튼텔, 그리고 피터라고 합니다..."
- 피터 래빗이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기록이다. 피터라고 이름 붙인 토끼는 베아트릭스가 런던의 상점에서 산 놈이었다. 대도시에 살던 베아트릭스는 피터를 통해 자연에의 동경을 노엘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 그림편지의 이야기를 베아트릭스로부터 들은 론슬리는 그것을 그림책으로 출판할 것을 열심히 권유했다. 베아트릭스는 1900년, 34세의 나이에 이 그림편지를 기초로 그림책을 만들 결심을 하고, 몇 군데 출판사에 가져가지만 컬러가 아니었기 때문에 채색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채색을 완강히 거부하여 결국 출판이 거절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생각대로 책을 자비 출판하기로 했다. 1901년, <피터 래빗 이야기> 250부가 이렇게 하여 세상에 나왔다. 출판사의 예상과는 반대로 이 그림책은 좋은 평을 받았고, 다음 해인 1902년 3월에는 200부를 추가 인쇄했지만 모두 팔려나갔다. 그 후 프레드릭 워언 출판사와 출간에 관한 이야기가 매듭지어져, 그해 10월에는 워언사 판 <피터 래빗 이야기>가 출간되기에 이른다. 최초의 8천 부는 출간되자마자 매진되었다. 그후 판을 거듭하면서 피터는 열광적인 인기를 얻어 나갔다. (45-46쪽)
위에 언급된 "론슬리"는 바로 내셔널트러스트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허드윅 론슬리 목사인데, 이 책에서는 베아트릭스 포터가 론슬리를 존경하다못해 사모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넌즈시 암시하고 있다. 가령 다음 대목을 보자.
- 16세에 론슬리와 운명적으로 만난 베아트릭스는 36세가 되어 있었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그녀는 그의 격려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책을 출간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그 인세로 자신이 일생을 보낵 된 니어소리 마을의 힐탑 농장을 최초로 구입하여 런던으로부터 이주한다. 그 후에도 그녀는 인세를 받을 적마다 농장과 토지를 구입했다. 베아트릭스는 호수지방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후, 재산을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론슬리와 친교가 두터웠던 베아트릭스의 아버지 루퍼트 포터 또한 내셔널트러스트에 협력하여 종신회원 제1호가 된다.
- 베아트릭스의 마음에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해 준 론슬리에의 청아한 사랑이 작은 강물처럼 흘러 이어지고 있었다. 후에 론슬리의 아들 노엘은 "베아트릭스는 아버지의 인생을 정말로 사랑해주었던 분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48쪽)
그래서 나는 <미스 포터>라는 영화가 분명 베아트릭스 포터와 허드윅 론슬리 목사의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왜냐하면 베아트릭스 포터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보다 15세 연상인 론슬리는 이미 결혼한 사람, 즉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미스 포터>는 론슬리 목사가 아니라 그녀의 "유일한" 연애 상대였던 노먼 워언, 즉 프레더릭 워언 출판사 대표와의 짧고도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라고 했다. 어째서 "짧고도 비극적"이라고 했는지, 이 책에서 다시 살펴보자.
- 물론 그녀는 연애도 했다. 39세 때 그림책의 담당편집자였던 노먼 워언과 사랑에 빠져 약혼을 하지만, 그가 백혈병으로 급사하는 불행이 밀어닥쳤다. 호수지방 니어소리 마을의 힐탑 농장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은 이 직후의 일이었다. 상심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연밖에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던 것은 베아트릭스 자신과, 그녀를 소녀시절부터 주시해 온 론슬리였다.
- 47세에 호수지방의 변호사 윌리엄 힐스와 결혼한 베아트릭스는 양치기와 농사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부터는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 베아트릭스는 1943년 12월, 77세를 일기로 그 생애를 마간한다. 유언에 의해 유골은 니어소리 마을의 언덕에 뿌려지고, 생애에 걸쳐 구입한 14개의 농장과 4천 에이커(약 5백만 평)의 토지는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되었다. 현재 호수지방의 토지 가운데 4분의 1을 트러스트가 소유하고 있다. 1백년 전과 변함없는 풍경이 남겨진 것은 론슬리와 베아트릭스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48-50쪽)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정작 <미스 포터>라는 영화에서는 론슬리라는 인물의 비중이 아주 없거나, 혹은 아주 미미하게 처리되어 있는 듯하다는 거다. 당장 Imdb.com 에 나온 캐스트만 보면 어린 시절의 베아트릭스 포터와 노먼 워언, 그리고 윌리엄 힐스까지는 배역이 정해져 있어도 정작 론슬리라는 이름은 없으니 말이다. 물론 "내셔널트러스트 홍보영화"가 아니라 베아트릭스 포터의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 이야기라고 치면 론슬리라는 이름이 슬쩍 지워져도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피터 래빗 시리즈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프뢰벨인가 하는 아동 출판사에서 "피터 래빗과 친구들"이라고 해서 그야말로 눈높이를 "팍팍" 낮춰서 만든 커다란 보드북 형태로 나온 적이 있었다. 무슨 비디오에 오디오북까지 넣어서 완전 "아동 전집물"을 만들어서 솔직히 좀 꼴불견이다 싶었는데,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정신을 차렸는지 "피터 래빗 시리즈"라고 해서 23권에 달하는 세트를 그것도 "오리지널 사이즈"대로 출간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나 역시 오리지널 크기로 다시 만든 복각본 중 하나를 갖고 있는데, 가로 11센티미터, 세로 14.5센티미터의 귀여운 하드커버 문고판이다. 그것 말고도 The Great Big Treasury of Beatrix Potter 라는 책을 꽤 오래 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구했는데, 이것은 피터 래빗 시리즈 가운데 18편을 수록한 책으로 오리지널 사이즈의 약 4배 크기다.(그림을 확대한 것은 아니고, 각 페이지마다 그림을 2, 3개기 배치해 두었다.) 그런데 우리말로 된 피터 래빗 시리즈는 가격이 무려 16만원(전23권)이어서 차마 선뜻 구입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더니, 어느새 그만 절판되고 만 모양이다. 혹시 <미스 포터>의 개봉에 맞춰 재출간될 예정이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이후에서 나온 <토토로의 숲을 찾다>는 내셔널트러스트와 베아트릭스 포터라는 두 가지 소재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지만, 번역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일본어로 표기된 영어 고유명사 등을 옮기는 데 있어 그야말로 실수가 속출하고, 희한한 오역이나 오류도 많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