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영구 옮김 / 푸른숲 / 1998년 4월
품절


우리는 화려한 색채를 좋아하는 경향을 곧잘 야만적이고 속된 취미로 치부하곤 하며, 또 사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없지 않으나, 맑고 푸른 하늘 아래서는 원래 그 어떤 것도 다채로울 수가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태양의 광채와 바다에 반사된 빛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으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선명한 색깔이라도 강렬한 광선 앞에서는 색이 연해지게 마련이며, 수목의 녹색이나 토양의 황색, 갈색, 적색 같은 빛깔은 모두 우리 눈에 강렬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다채로운 꽃이나 의복까지도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랍니다. 널찍하게 금박과 은박을 넣은 네투노(로마 남쪽 라티움 해안 부근의 비장: 역주) 여인들의 주홍색 코르셋과 치마, 그밖의 울긋불긋한 전통 의상, 배를 그린 그림 등 모든 것이 하늘과 바다의 광채 아래 자신들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355쪽

이탈리아 패션과 자연. 역시, 넓은사 하이얀 고깔 고이 접어 나빌레라 라는 것은 우리 산들의 고운(?) 곡선 아래의 패션.
우울한 독일 기후가 탄생시킨 헤겔 같은 아저씨도 있지만,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항상 기후를 칭찬하고 놀란다. 나폴리의 찬란한 빛깔들을 보러 가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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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영구 옮김 / 푸른숲 / 1998년 4월
품절


호머는 나의 눈을 열어주는 고전입니다. 그의 묘사와 비유 등은 우리에게 시적 감동을 주면서도 말할 수 없이 자연스럽지만, 그 순수성과 내면성에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괴상하게 날조된 사건이라도 묘사된 대상이 아니고는 아무데서도 느끼지 못할 자연스러움이 간직되어 있습니다.
잠깐 내 견해를 들어주기 바랍니다. 호머가 묘사하는 것은 실제로 현존하는 존재임에 반해, 우리는 보통 그것의 효과만을 묘사할 뿐이며, 호머가 두려운 것을 서술한다면 우리는 두렵게 서술하고, 호머가 쾌적한 것을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쾌적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과장되고 기교적이며 지나친 겉치레와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효과만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면 그러한 효과를 충분히 느끼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한 이야기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라면, 나는 새로운 계기로 그 점을 아주 생생하게 느꼈을 겁니다. 이 모든 것, 즉 해안과 산맥, 만과 곶, 섬과 지협, 바위와 모래사장, 관목으로 뒤덮인 언덕과 부드러운 초원, 비옥한 들판과 잘 꾸며진 정원, 잘 손질된 나무들과 줄줄이 매달린 포도덩굴, 구름이 맴도는 산정과 언제나 청명한 평원, 절벽과 제방, 그리고 그처럼 다양하게 변화하는 바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 마음 속에 현실감있게 간직되어 있는 지금에야 비로소 <<오디세이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338쪽

서구 지식인들이 언제나 회귀하고 싶어하는 그리스. 그리고 호머.
'호머'라는 것이 결국 '민중성'을 의미한다면, 위 괴테의 글에서 '호머' 대신 '민중'을 넣는다면 80년대 많이 보아왔던 민중에 대한 낭만주의를 읽어낼 수 있다. 결국 괴테의 시기도 그러한 민중에 대한 낭만주의와 겹친다. 괴테는 '호머'라는 위대한 개인으로 읽어낼 수도 있지만, 묘하게도 '민중'의 작품인 오디세이아에 대한 괴테의 시각과 민중성에 대한 괴테의 시각이 겹치는 부분이다.
결국 이런게 '심미안'이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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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간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시 공부를 위한 리스트라는 것을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만든다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하고요. 훈련소 가기 직전 학기에 D대학과 K대학 선생님께서 강의를 한 강좌 맡아달라는 부탁을 하셨지만, 빨리 군복무(?)를 마무리 짓고 좀 길게 공부계획을 세워보려 해서, 사죄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독서 리스트는 어떻게 작성할 것인지 고민을 좀 해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학부나 교양에서의 시 강의는 역시 ‘전문적으로 시 공부’를 하려는 학생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시’라는 것에 친구들이 매력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준, 더 나아간다면 ‘필독시’들을 같이 읽고 설명하는 방식에 그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전문적’으로 시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마 대학원에서 시를 전공하는/하려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전문적’이라는 말에는, ‘전공’이라는 말에는 그런 의미가 있으니까요. 제 석사과정을 돌이켜보거나 학부과정을 돌이켜봐도 딱히 시 공부하기 위해서는 이 리스트를 읽고 오게라는 선생님은 안 계셨던 것 같습니다. 고전문학의 박희병 선생님께서는 그러신다고 하시지요. ^^ 또 예전에 김윤식 선생님도 그런 리스트 비슷하게 말씀하시고는 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문학’에 관한 리스트이기는 해도, 그 리스트라는 것이 우선은 ‘정치경제학’ 공부부터 해라였습니다.

 

자명한 산책님처럼, 시를 좋아하시고 시를 많이 읽으시고 계간지도 꾸준히 보시는 분이 이제 시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실 때 무엇을 읽어야 할까... ‘전문적’으로 공부하시겠다는 것은 결국 ‘인문학’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에 대한 이론서 리스트는 많지만, 이를 다 볼 필요도 없고 실제 시를 공부하는 석사/박사 학생들도 이를 다 보지는 않습니다. 자신이 관심이 생기는 분야의 이론서들을 공부하지요. 그렇다면 보통 요즘 석사/박사들은 어떤 분야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고 한다면 정신분석학 쪽과 탈식민주의입니다. 어찌보면 이러한 이론들을 우회해서 시를 읽는 것일 수도 있고, 혹자는 이론적 정신분석이나 탈식민주의를 ‘내면화’해서 나름 세계를 보는 눈/마음을 확정한 후 이를 통해 시를 보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제 또래 학생들 중에서는 소수자(?)로 맑스주의를 통해 이런 작업을 해보려고 하고 있고요. 이렇게 보면, 결국 시를 전공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시’ 자체에 대한 공부라기보다는 세상을 보는 시각에 대한 공부인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신비평에서 이어져 나오는 ‘시 자체’에 대한 이론들도 어느정도 숙지는 하고들 있지만, 보통 이에 큰 노력을 쏟지는 않지요.

이것이 흔히 말하는 ‘이론’또는 ‘방법론’공부입니다. 이 다양성에 대해서는 테리 이글턴의 아래 책을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또 한국 현대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이 주로 공부하는 것은 소위 ‘자료 읽기’입니다. 이는 시가 쓰인 당대의 ‘자료’들을 읽는 것으로, 당대 신문/잡지를 읽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이 이 시를 쓰던 당대, 이 시를 쓰게 촉발시킨 직접적/간접적 영향들에 대한 실마리를 잡는 것이기도 하고, 시인론을 쓰기 위해서, 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 당대에 대해 공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찌보면 역사공부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1차자료들을 읽어나가는 것이지요.

이렇게 쓰고보니, 쓸데없어보이기도 하는 대학원을 왜 사람들이 가는 것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이런 공부들은 혼자 하기 힘든 경우가 많거든요. 우왕좌왕 말을 풀어내서 자명한 산책님께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국 결론은 시와 이에 대한 연구서를 읽는 것 이외에 이론/방법론 공부로서의 인문학 공부, 자료 읽기, 이렇게 사람들은 시를 공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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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28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2-29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6-12-29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ㅈ님/ ㅎ 어디 능력의 문제겠습니까. 누구나 나름의 성찰을 담아내면, 그 성찰의 진정성에 따라 '좋은' 글이 판가름난다고 생각합니다. ㅈ님의 서평을 읽고 싶어지네요. :)

기인 2006-12-29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ㅈ님/ ㅎㅎ 그리고 넘 감사합니다. 감사히 읽고, 저도 능력껏 평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평론가나 연구자의 입장이 아니라, 시인 지망생으로서 비판적(?)으로 읽어보려고 합니다. ㅎ 잘 읽겠습니다.

릴케 현상 2007-03-24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가재미론 언제 쓰실 건가요?
 

<연구공간 수유+너머> 2007년 겨울 강좌 안내

개강일 : 2007년 1월 3일 (수요일)
장소 : 연구공간 ‘수유+너머’
접수구좌 : 우리은행 1002 - 332 - 853371 (박현민)
문의 : 박정수(016-473-9293), 박혜선(019-433-6342), 현민(016-624-1892)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해주십시오.
◎강좌회비를 온라인 송금하신 분은 홈페이지 강좌게시판을 통해 입금날짜와 강좌명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환불 안됨)
◎연구실에서는 강좌 외에 다양한 세미나가 열리고 있습니다. 세미나는 모든 분에게 공개되어 있습니다. 홈페이지 세미나 안내를 참조하십시오.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2가 1-206 (구) 정일학원 자리
∥TEL 02-3789-1125
http://www.transs.pe.kr ∥trans@korea.com

1. [특별강좌] 한국근대문학사의 두 공간에 대하여
1. 8-11  월-목  7시  강좌회비: 8만원  강사: 김윤식

‘근대’문학은 ‘국민’문학입니다. ‘민족국가’(nation-state)와 ‘국어’의 수립이 근대문학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민족-국가 수립에 실패한 상태에서 근대문학을 형성했습니다. 이런 모호한 상황은 일제말기 한국어 말살 정책에 의해 종결되고, 한국작가들은 일본어로 글쓰기를 지속했습니다. 그들의 일본어 글쓰기는 제국의 ‘국어’도 아니고 식민지의 ‘모어’도 아닌, 제3의 이중어 글쓰기였습니다.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이런 이중어의 지대가 해소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근대문학의 형성은 여전히 ‘과정’ 중에 있으며 그 안에는 해소 불가능한 모호함과 혼종성이 웅얼거리고 있습니다. 한국근대문학사의 탐색은 고답적인 아카데미즘도 아니고 고풍스런 문학취미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중이며 항상 되돌아오는 근대성의 질문들에 대한 질문입니다. 


1강(1.  8) 한국근대문학이란 무엇인가
2강(1.  9) 이중어 글쓰기론
3강(1. 10) 민족문학 글쓰기론
4강(1. 11) 합병세대의 글쓰기론

 

(*아직도 저 책들을 보면 눈물이 나려고 한다. 쩝; 나의 김윤식 선생님에 대한 센티멘탈한 감정.. )

오. 김윤식 선생님께서 수유에서 강의하신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다. (몇해전 조동일 선생님께서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의하셨던 것보다 몇 배는 더! 그래도(?) 철학 아카데미는 내 경험(?)상 뭔가 더 제도 내적이다.)

수유 연구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자기 안에 갇히지 않고 뻗어나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초청강좌라던지 소위 '대중지성'/청소년교양 등으로. 갇히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해되는데, 역시 힘든 길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상품화' 논란도 있고, 세미나가 원활하게 진행되기 어려운 점도 있고.

시간만 된다면, 오랜만에 수유도 가볼껄. 석사입학 이후 한번도 못 가봤네. 시간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고. ㅎ

수유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2002, 박노자 선생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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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6-12-21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간 낭비란... 수업의 질이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인가요?

기인 2006-12-21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제가 좋아하는 시집~ <자명한 산책>님.
사실 수유에서의 수업은 교양수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나서 별로 만족스럽지는 않았고요. 저는 세미나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아무래도 '제도'내적인 공부와는 유리되는 부분이 있었죠. 또 혼자 공부하거나 대학원 사람들이랑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도 됬고요.
그래도 수유의 장점은, 공통된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장기적으로 세미나를 할 수 있는 장소와 이를 통해 출간도 하는 등의 '물적 기반'인 것 같아요.
요즘은 워낙 인문대 대학원 사람들의 수도 적고, 관심사도 제각각이라서 공부 모임을 꾸리기가 힘들죠. 뭐 다 제 능력 이상의 과욕을 제가 부리는 걸 수도 있고.
생각해보면, 공부하려고 마음 먹으면 왜 못 하겠어요? ㅎㅎㅁ

antitheme 2006-12-2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수유"라면 이진경씨에 대한 선입견으로 조금은 꺼려지던데 그곳에서 김윤식선생의 강좌라니 그건 쫌 끌리네요.

기인 2006-12-21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저는 이진경 선생 강의나 세미나에서는 직접 못 뵈서 ^^;

kocka 2006-12-22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 소비자는 뭐 든 배우고 싶어요^^
결국은 하나로 통하지 않겠어요?

기인 2006-12-22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만류귀종! ^^

릴케 현상 2006-12-2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을 좋아하신다니 반갑습니다^^

기인 2006-12-2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전공도 현대시에요 :)
<자명한 산책>은 그 해 제가 읽은 최고의 시집이었어요! ^^*

2006-12-23 1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출처 : 나귀님 > 미스 포터, 혹은 미스 베아트릭스 포터...

오늘 신도림역에서 지하철을 갈아타려고 서 있는데, 마침 내가 서 있었던 승강장의 추락방지대에 온통 <미스 포터>라는 영화 광고가 도배되어 있는 거다. 누가 나오는 영화인가 보니 왼쪽에는 어울리지 않게도 콧수염 기른 이완 맥그리거(오비완 선생), 오른쪽에는 르네 젤위거(난 이 배우 예쁜 것 잘 모르겠더라)가 있고, 그 위쪽으로는 여주인공이 책상 위에서 뭔가를 열심히 "쓰는" 장면과 두 사람이 키스하는 장면이 나와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19세기 영국 분위기가 나는데, 혹시 무슨 소설이 원작인가 싶어서 가운데에 붙은 포스터 밑에 나온 크레딧에서 혹시 내가 아는 이름이 더 있나 찾아보았지만, 음악을 맡은 레이첼 포트먼(<베니와 쥰>과 <피아노>의)을 빼고는 모두 생소했다. 그렇다면 "음악"은 꽤나 기대가 되지만 막상 "내용"은 어떤지 좀 의심스러운 그저그런 로맨틱 코미디가 아닐까 싶었다. 게다가 그놈의 "제목"은 참! 요즘 세상에 "포터" 하면 무조건 "해리 포터"를 연상시키는 판에 아마도 순수 창작물인 것 같은 영화 제목이 "미스 포터"라니, 이것도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닌가 싶었는데... 웬걸! 내 눈이 잠시 멀었는지, 열차를 타려고 하는 바로 그 순간에야 포스터 왼쪽 위에 나와 있던 카피가 눈에 들어오는 거다. "유명한 그림책 작가 비어트릭스 포터의 운명적인 사랑 운운..." 꽥. 여기서 완전히 뒤집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말하는 포터가 바로 그 "포터", 바로 "베아트릭스 포터"였다니.

앞에서 말했다시피 요즘은 "포터"라고 하면 십중팔구 "해리 포터"다. 하지만 감히 장담하건대, 앞으로 100년 뒤, 아니 200년 뒤까지 남을 "포터"는 사실 "해리"가 아닌 "베아트릭스" 쪽이 될 가능성이 크다. 아니, "베아트릭스 포터"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의 그림을 모르는 사람은 지금이나 앞으로 100년 후에나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베아트릭스 포터는 그 유명한 "피터 래빗" 시리즈의 저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 생각에 피터 래빗은 이런저런 팬시용품이나 각종 학용품, 그리고 이런저런 생활용품에 사용되는 캐릭터 머천다이징 쪽의 "강자" 가운데 하나다. 솔직히 이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해리 포터만 해도 그 캐릭터 머천다이징 쪽은 완전 "죽"을 쑤고 만 것에 비하자면, 피터 래빗의 경우에는 그 이름은 몰라도 부드러운 수채화 느낌으로 그려진 귀여운 동물 캐릭터를 한 번도 구경해 보지 못했거나, 그런 그림이 그려진 물건을 안 가져본 사람은 드물 정도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감히 "베아트릭스 포터"야말로 "해리 포터"를 능가하는 아동문학 및 캐릭터 분야의 최강자 중 하나라고 선뜻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나저나 베아트릭스 포터의 "생애"에 과연 이처럼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의 어떤 드라마틱한 사건이 있었는지는 금시초문이어서, 집에 돌아와서 이것저것 인터넷과 책을 뒤적뒤적해 보았다.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는 아직 베아트릭스 포터에 대한 전기 같은 것은 나와있지 않았고, 다만 <토토로의 숲을 찾다: 내셔널 트러스트의 여행>(요코가와 세쯔코 지음)이라는 책에 짧게 생애에 관한 언급이 나와 있었다. 왜냐하면 베아트릭스 포터는 화가이자 그림책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내셔널트러스트의 초창기에 활동한 주요 인물 겸 기부자였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베아트릭스 포터가 피터 래빗 시리즈를 구상하게 된 계기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1893년, 베아트릭스는 일찍이 자신의 가정교사였던 무어 부인의 다섯 살짜리 아들 노엘의 병 문안을 위해, 건강하고 장난꾸러기인 아기 토끼들이 등장하는 그림편지를 보낸다. "노엘, 노엘에게 뭐라고 써서 보내면 좋을지 잘 몰라서, 작은 네 마리 아기토끼 이야기를 하려고 해요. 토끼들의 이름은 프롭시, 몹시, 카튼텔, 그리고 피터라고 합니다..."
  • 피터 래빗이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한 기록이다. 피터라고 이름 붙인 토끼는 베아트릭스가 런던의 상점에서 산 놈이었다. 대도시에 살던 베아트릭스는 피터를 통해 자연에의 동경을 노엘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 그림편지의 이야기를 베아트릭스로부터 들은 론슬리는 그것을 그림책으로 출판할 것을 열심히 권유했다. 베아트릭스는 1900년, 34세의 나이에 이 그림편지를 기초로 그림책을 만들 결심을 하고, 몇 군데 출판사에 가져가지만 컬러가 아니었기 때문에 채색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채색을 완강히 거부하여 결국 출판이 거절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생각대로 책을 자비 출판하기로 했다. 1901년, <피터 래빗 이야기> 250부가 이렇게 하여 세상에 나왔다. 출판사의 예상과는 반대로 이 그림책은 좋은 평을 받았고, 다음 해인 1902년 3월에는 200부를 추가 인쇄했지만 모두 팔려나갔다. 그 후 프레드릭 워언 출판사와 출간에 관한 이야기가 매듭지어져, 그해 10월에는 워언사 판 <피터 래빗 이야기>가 출간되기에 이른다. 최초의 8천 부는 출간되자마자 매진되었다. 그후 판을 거듭하면서 피터는 열광적인 인기를 얻어 나갔다. (45-46쪽)

위에 언급된 "론슬리"는 바로 내셔널트러스트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허드윅 론슬리 목사인데, 이 책에서는 베아트릭스 포터가 론슬리를 존경하다못해 사모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을 넌즈시 암시하고 있다. 가령 다음 대목을 보자.

  • 16세에 론슬리와 운명적으로 만난 베아트릭스는 36세가 되어 있었지만 아직 미혼이었다. 그녀는 그의 격려로 그림을 그리고, 그림책을 출간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으며, 그 인세로 자신이 일생을 보낵 된 니어소리 마을의 힐탑 농장을 최초로 구입하여 런던으로부터 이주한다. 그 후에도 그녀는 인세를 받을 적마다 농장과 토지를 구입했다. 베아트릭스는 호수지방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사후, 재산을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할 것이라는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론슬리와 친교가 두터웠던 베아트릭스의 아버지 루퍼트 포터 또한 내셔널트러스트에 협력하여 종신회원 제1호가 된다.
  • 베아트릭스의 마음에는 자신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해 준 론슬리에의 청아한 사랑이 작은 강물처럼 흘러 이어지고 있었다. 후에 론슬리의 아들 노엘은 "베아트릭스는 아버지의 인생을 정말로 사랑해주었던 분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48쪽)

그래서 나는 <미스 포터>라는 영화가 분명 베아트릭스 포터와 허드윅 론슬리 목사의 "아름답고도 안타까운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왜냐하면 베아트릭스 포터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보다 15세 연상인 론슬리는 이미 결혼한 사람, 즉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보니 <미스 포터>는 론슬리 목사가 아니라 그녀의 "유일한" 연애 상대였던 노먼 워언, 즉 프레더릭 워언 출판사 대표와의 짧고도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라고 했다. 어째서 "짧고도 비극적"이라고 했는지, 이 책에서 다시 살펴보자.

  • 물론 그녀는 연애도 했다. 39세 때 그림책의 담당편집자였던 노먼 워언과 사랑에 빠져 약혼을 하지만, 그가 백혈병으로 급사하는 불행이 밀어닥쳤다. 호수지방 니어소리 마을의 힐탑 농장으로 옮겨 살게 된 것은 이 직후의 일이었다. 상심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자연밖에 없다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던 것은 베아트릭스 자신과, 그녀를 소녀시절부터 주시해 온 론슬리였다.
  • 47세에 호수지방의 변호사 윌리엄 힐스와 결혼한 베아트릭스는 양치기와 농사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부터는 점차 멀어져가고 있었다. (...) 베아트릭스는 1943년 12월, 77세를 일기로 그 생애를 마간한다. 유언에 의해 유골은 니어소리 마을의 언덕에 뿌려지고, 생애에 걸쳐 구입한 14개의 농장과 4천 에이커(약 5백만 평)의 토지는 내셔널트러스트에 기증되었다. 현재 호수지방의 토지 가운데 4분의 1을 트러스트가 소유하고 있다. 1백년 전과 변함없는 풍경이 남겨진 것은 론슬리와 베아트릭스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48-50쪽)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정작 <미스 포터>라는 영화에서는 론슬리라는 인물의 비중이 아주 없거나, 혹은 아주 미미하게 처리되어 있는 듯하다는 거다. 당장 Imdb.com 에 나온 캐스트만 보면 어린 시절의 베아트릭스 포터와 노먼 워언, 그리고 윌리엄 힐스까지는 배역이 정해져 있어도 정작 론슬리라는 이름은 없으니 말이다. 물론 "내셔널트러스트 홍보영화"가 아니라 베아트릭스 포터의 "첫사랑과 두 번째 사랑" 이야기라고 치면 론슬리라는 이름이 슬쩍 지워져도 꼭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든다.

피터 래빗 시리즈는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프뢰벨인가 하는 아동 출판사에서 "피터 래빗과 친구들"이라고 해서 그야말로 눈높이를 "팍팍" 낮춰서 만든 커다란 보드북 형태로 나온 적이 있었다. 무슨 비디오에 오디오북까지 넣어서 완전 "아동 전집물"을 만들어서 솔직히 좀 꼴불견이다 싶었는데, 그러다가 몇 년 전에 같은 출판사에서 정신을 차렸는지 "피터 래빗 시리즈"라고 해서 23권에 달하는 세트를 그것도 "오리지널 사이즈"대로 출간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나 역시 오리지널 크기로 다시 만든 복각본 중 하나를 갖고 있는데, 가로 11센티미터, 세로 14.5센티미터의 귀여운 하드커버 문고판이다. 그것 말고도 The Great Big Treasury of Beatrix Potter 라는 책을 꽤 오래 전에 어느 헌책방에서 구했는데, 이것은 피터 래빗 시리즈 가운데 18편을 수록한 책으로 오리지널 사이즈의 약 4배 크기다.(그림을 확대한 것은 아니고, 각 페이지마다 그림을 2, 3개기 배치해 두었다.) 그런데 우리말로 된 피터 래빗 시리즈는 가격이 무려 16만원(전23권)이어서 차마 선뜻 구입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더니, 어느새 그만 절판되고 만 모양이다. 혹시 <미스 포터>의 개봉에 맞춰 재출간될 예정이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이후에서 나온 <토토로의 숲을 찾다>는 내셔널트러스트와 베아트릭스 포터라는 두 가지 소재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은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지만, 번역이 그리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히 일본어로 표기된 영어 고유명사 등을 옮기는 데 있어 그야말로 실수가 속출하고, 희한한 오역이나 오류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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