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바퀴 반 1 - 아프리카 중동 중앙아시아
한비야 지음 / 금토 / 1996년 6월
평점 :
절판


한비야. 이제 상징이 된지 오래다. 자유, 용기, 헌신, 당당함, 모험, 국제기구. 많은 십대, 이십대들이 닮고 싶은 사람으로 한비야를 뽑았고, 그녀가 글을 쓰면 곧 베스트셀러가 된다.

그러한 한비야의 첫번째 책. 거기서 그녀는 무모하게 보이는 도전을 시작한 배낭여행족이었으며, 글도 여성잡지에 실리는 기행문 비슷할 뿐이다. 실제로 그녀는 여성잡지에 연재를 하면서 어느정도 여행경비에 보탤 수 있었다. '호모', '동성연애자'라는 용어가 불편하게 다가왔고, 성에 대한 이야기가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지점도 분명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녀가, 이 여행을 통해서 단순히 베스트셀러 '여행작가'로만 남은 것이 아니라, 그녀의 삶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이 책의 중간에서 난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앞으로 이쪽 일을 해보고 싶다고 잠시 적어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다.

여행이 단지, '관광'이 아니라,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고, 이를 통해 '나'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라 할 때, 한비야는 진정 여행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잘 들어보지도 못했던 나라들, 그 나라에서도 시골을 다니면서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애를 쓰고, 그 사람들과 함께 먹고, 자고, 체험한 그녀. 그러한 체험을 결심하고 실행한 것도 용감하지만, 그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더욱 과감한 결단이었다.

멋진 비야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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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80 2007-02-11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비야에게 사람들은 전혜린의 자유와 기질적 방황 의식, 김혜자의 꽃과 선행 등을 종합적으로 투사하는 모양입니다. 종합선물세트인데 안 사들고 배기겠습니까? ㅋ

기인 2007-02-1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 한비야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제가 당비랑 유네스코 지원금 내고, 나는 이제 내 이익 추구해도 괜찮아라고 위안해버리는 심리적 메카니즘이랑 닿아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한비야를 사고 읽음으로서 한비야의 용기와 행동을 '대리체험'함으로서 마치 자기가 체험한 것처럼, 윤리적 부채의식을 덜 수 있는 것. 지젝의 어떤 글에서인가 읽었던 것 같은데; ㅎ

프레이야 2007-02-11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윤리적 부채의식뿐만 아니라 그녀의 자유로운 의식과 행동에 대한 대리만족,
전 그 두가지 모두로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가 그녀를 만난 첫책도
이것이었네요.^^

기인 2007-02-1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닮고 싶은 사람이에요. 비야 누님 ^^

2007-02-11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인 2007-02-11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ㅇ님/ 아니 그럴수가! 그럼 큰 뉴스인데요. 까발려야겠죠. 한비야면 지금까지의 뉴스들과도 또 다른 파급력일 것입니다. 그럼 이제 정말 전반적인 반성이 일어나야 하는 일로 여겨집니다. 아직 증거를 제가 모르니, 무죄추정이지만. 설마요;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장을 다듬는 수준이 아닌 '대필'이라면!!! 그러면 한비야의 많은 부분이 부정될 것 같습니다.

드팀전 2007-02-11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비야씨 한 번 만난적이 있었는데..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지요.책은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서 읽지 않았습니다만...
한동안 심리적 외상으로 인해 몸이 상당히 않좋으시다고 하더니 이젠 괜찮아졌나 모르겠네요.

나비80 2007-02-1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지젝이 이렇게 말했죠. 아프리카의 난민을 위해 구호금을 내는 사람은 이미 그들과 자신을 다르다고 인식하고 있다고 말이죠. 그렇게 거창한 이유때문만은 아니지만 한비야의 책에는 이상하게도 손이 가질 않습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후배가 한 권 집어다 놓고 갔는데도 말이죠.

기인 2007-02-12 0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팀전님/ 그 외상이 '대필'관련은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소이부답님/ 넹~ 그 다름에 대한 인식말고 실제 활동을 안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에 대해서 이야기했던 것이 있던 것 같던데요 ^^; ㅋ 저는 지젝 5년전에 읽고 안 읽었습니다. ㅡ.ㅡ; 사실 유네스코에 기부금을 내는 이유는 아프리카인들과 제가 다 같은 '인류'라는 인식에 입각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지만, 하루하루 죽어가는 친구들이 한달 돈 만원이면 끼니를 해결할 수 있다 것에도 동참하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드팀전 2007-02-1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리적 외상이란 게 그거라던데요.해외 구호활동을 하는 자원봉사자들은 그 곳 주민들과 심리적 애착 관계를 갖게되는데..그들이 폭격이나 기아등으로 비참하게 죽는 장면을 자주 볼 수 밖에 없게된다고 합니다.자원봉사자들에게도 그 죽음이 심리적 외상으로 다가오는 것이죠.아주 비참한 광경일 테니...그래서 유엔같은 기관에서는 해외자원봉사자들에게 정기적으로 심리상담을 권장하고 있다고 하더군요.한비야씨의 과도한 열정은 그런 과정조차 무시하고 여기저기를 뛰게 만들었다고 하네요...그결과가 낳은 심리적 외상이 실어증이나 신경계의 장애 같은 형태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기인 2007-02-1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참.. 역시 '개인'이라는 것, 독립된 자아라는 것은 환상인 것 같아요.

ㅇㅇ 2008-12-19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비야와 월드비전의 실체가 속속 발혀지는것 같네요. 씁쓸합니다.
http://afterdan.kr/35
http://afterdan.kr/40

대필은 또 무슨 소린지 자세히 알고싶네요.
 

울라
노동자 국가 창출을 위해 노동자 정당이 존재하고, 당은 진공상태가 아닌 계급투쟁이라는 엄혹한 조건에서 존재하는 바, 당의 일상적 존재양식은 투쟁일 것입니다. 그리고 투쟁에서의 승리와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가 양립할 수 없을 때 후자의 폐기를 선택할 수 있는 결단은 이 가치들의 이상적 구현은 혁명의 완성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신념에 근거할 것입니다.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의 진정한 담지자는 제도, 불문율 등의 형식이 아닌 주체라는 것, 노동자 당에서의 민주주의의 달성은 이러저러한 형식이 아닌 혁명적 주체의 재생산에 달려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주의자는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계급투쟁이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이들에게는 1903년 이래로 공식화된 합리적 결론일 것입니다. 우리가 열사에게서 삶을 뜨겁게 사랑하는 이유가 삶을 불살라버린 근거가 되어버린 모순을 발견하듯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이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진형 사회주의'란 결국 적당히 사회주의 교양을 공부한 자유주의자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다고밖에 여겨지지 않습니다. - 2007-02-06 12:37
 
로쟈
**님/ 농반진반입니다.^^
울라님/ 정답입니다. 마치 모범답안 같습니다... - 2007-02-06 14:34
 
푸하
문제는 부정적인 것의 담지자가 되고 싶은 개체가 있는가? 하는 것 같아요. - 2007-02-06 21:29
 
기인
그런 개체는 있을수도 있는데, 제가 문제삼고 있는 부분, 또는 고민하고 있는 부분은. "다시 돌아온 주체"입니다. 과연 혁명적 주체라는 것은 무엇인가. 내용없는 당위가 아니라, 규정된 법률같은 것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담금질 되는 혁명적 주체라는 것. 그리고 그 실천과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사이의 역사적(현재 시점에서) 긴장. 당의 일상적 실천 가운데서 당과 함께하고 단련된다는 것. 그런데 현재 당이 과연 있는가? 아니면 당 또한 만들어가야 하는가?
계속 회귀하는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충분한 이론적 반성이 부재하다는 것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울라님이 말씀하시는 '합리적 결론'이 더 이상 모든 '사회주의자'가 흔쾌하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또한 이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가 너무 쉽게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였어, 또는 그들은 맑스를 '곡해했어' 정도로 덥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 결국 그래서, 전망이 뚜렷하지 않고, 어떻게 가야하는지, 정말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으니, 답답한 것 아닐까요. '답답'하다라는 말은 너무 나이브하고, 오히려 '절망'과 '답답'의 중간에 가깝습니다. - 2007-02-07 14:32 수정  삭제
 
울라
올바른 전망 / 올바른 전망의 구체화로서의 혁명 / 구체화의 매개로서의 사회주의자 => 올바른 관념없이는 역사도 없다!?
의문)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 않는 데/존재한 적이 없는 데 사회주의 사회에 대해 올바른 전망/개념을 갖는 것은 가능한가?
'사회주의는 전망이 아니라 운동이다. 이 운동은 자본주의가 산출하는,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운동으로서 자본주의와 함께 모순적 통일체을 구성한다. 우리는 모순적 통일체로서의 이 역사의 시기의 종착지를 사회주의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전망이 불투명해서 못한다 = 적정이윤이 보장이 되지 않아서 투자 안한다> 사회주의는 투기가 아닙니다.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배우리라 믿습니다. - 2007-02-07 17:14
 
기인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배워야 하고 배울 수 있다는 것에는 원칙적으로 동의. 그런데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 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라는 판단은 역시 의심이 갑니다. 그렇다면 '전위'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또는 '전위'라는 주체는 불필요하고, pt가 역사적 운동과정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주체의 역할(또는 주체효과)를 하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요? 그래서 제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현재는 '당'이 있습니까?
현 시점이 '전망'이 불투명한 시점이라는 것은 바로 '전진하는 운동'으로부터 무엇을 배우고 있지 못한 시기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한 의문을 던지신 것처럼,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가 현존하지도 않았고, 존재한 적이 없다는 것은 동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역사적 '국가 사회주의'에 대한 이론적 반성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에 면죄부를 줄 수 있는 것일까요? 그 실패에 대한 (이론적) 책임은 누가 져야 합니까?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 반성도 하나의 실천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닐까요?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에 날고, 철학의 임무는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고, 주체는 실천을 통해 구성되지만, 이론 또한 물질화된다는 것. '전진하는 운동'에 따른 새로운 '이론'이 전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현재 그 '이론'이 확고히 없어서 그것을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고요.
울보님 지적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따로 제 페이퍼에 정리해 두겠습니다. ^^ - 2007-02-07 22:09 수정  삭제
 
yoonta
이상하게 길게만 쓰면 댓글이 잘 등록이 안되고 있습니다. -_- 짧게 쓰면 이렇게 올라가고..할말이 많은 내용의 글인데 - 2007-02-07 23:48
 
로쟈
'에디터로 쓰기'로 해보시죠... 그래도 그런가요?.. - 2007-02-07 23:59
 
yoonta
그래도 마찬가지라는...알라딘에 상담해봐도 원인불명이라는군뇨..ㅜ.ㅜ - 2007-02-08 00:01
 
푸하
그렇다면 짧은 글의 무한연쇄를 시도해봐도 괜찮을 듯합니다.^^: - 2007-02-08 00:14
 
로쟈
아무래도 댓글이 아닌 페이퍼를 쓰시는 게 빠를 듯하네요.^^ - 2007-02-08 00:18
 
yoonta
제가 페이퍼쓰는 걸 별로 선호하지 않는 것은 독백처럼 혼자 주절거리다보면 독선에 빠지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완성도의 차원에서는 페이퍼가 더 좋지만 말이죠. 어떤 분은 댓글이 주렁주렁달리는게 싫다고 하시는데 저는 진흙탕속에서 뒹굴게 되더라도 댓글처럼 대화를 주고받는 글이 더 좋더군요. 그러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생각치 못했던 생각들도 발견하게 되구요.^^ 근데 문제는 페이퍼도 안올라가네요..-_- 아 근데 어느정도분량까지 올라가는지는 실험안해봤는데 이정도까지는 올라가나보네요. - 2007-02-08 00:42
 
울라
"전위는 전능하지 않습니다. 저 오래된 미래에 대한 초월적 인식이 가능하다는 환상에 종지부를 찍어야 됩니다. 구시대의 전위는 노동자 국가 건설까지에만 가교를 놓을 수 있을 뿐입니다. 이후의 사회주의운동의 발전은 신시대의 주인에게 과제로 남겨놓으면 됩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정세와 과제... 이 쉼없는 무한연쇄의 짐을 지고서 지금 이 땅에 '당'을 건설하기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안식일을 기원합니다. - 2007-02-08 01:07
 
기인
전위가 전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구시대의 전위'라고 하신 것이 현시대의 전위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노동자 국가 건설' 자체가 반성되고 새롭게 이론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요? (pt의 정치권력 장악과 국가독재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자율주의가 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떠한 길도 적확한 '전망'으로 제게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저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전혀 상관없이 또 다시 '노동자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것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성을 통해 이론이 재구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현실적으로 실재적으로 '당'이라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일종의 '최종심급' 비슷한 의미에서의 '당' 건설이라고 하며, 또 이는 정세와 과제의 '무한'연쇄 속에서 투쟁-실천의 '무한' 연쇄 속에서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것 뿐이라면! 지구가 둥글고 유한하다는 확신 속에서만이 먼 지평선으로 다가가는 행위가 유의미하다면, 그 본질적 전제에 관한 반성이 과연 확고히 이루어졌느냐가 의문입니다.
물론 사회주의에 대한 전망은 원칙적으로 전진하는 운동에 대한 이론적 반성으로서 이루어지겠는데, 그 '전진하는 운동'이라는 것이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도 포함되는 현정세라는 것입니다. - 2007-02-08 08:59 수정  삭제
 
울라
평소 스타일대로 말하겠습니다. "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는 목적으로서의 사회주의없이도 스스로 운동한다. 이 운동은 목적인이 아닌 근거를 갖기 때문이다."에서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자본주의가 X 같아서 운동하고, 무릅 꿇고 사는니 서사 싸우다 죽겠다는 뒤틀린 심정으로 운동하지, 해방/평등/우리의 아름다운 사회주의 여신을 추앙해서 운동할 수 있을 것 같냐"는 것입니다. 이념이 없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이 사회에서 아직도 가진 것이 많아서 못 하는것 아닙니까? 자기가 가진 알량한 것들이랑 죄다 버리고 낮은 곳에 임하소서~ 이 X같은 곳에서 팔뚝질 안하고 살 수 있나...
그리고 노동자국가 권설이란게 뭐 대단한 것 이야기 한 것도 아니고, 억압받는 자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고서 억압을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구체적인 강령이야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근데 이 강령이란게 골방에서 책만 파서는 나오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상아탑 안주인들의 ddr에 기대하느니...
아! 소련의 경험에 대한 반성이야 정말이지 중요하죠. 근데 전 91년 이전의 삶, 러시아어, 러시아인, 그들의 고통과 희망에 직접 맞닿아 있는 활동가가 쓴 글이 나오면 읽으렵니다. 2차문헌에서 짜집기한 논문들의 자기재생산을 바라보는 심정이란... 흐미~~

'이루어야 할 상태로서의 사회주의'라는 개념이 미친 해악은 두 가지이다. 첫째 역사는 이 정당하기 그지없는 목적을 향해 달려간다는 객관주의의 유포. 둘째 이 훌륭하기 그지없는 관념에 많게 세계를 끼어맞추어야 한다는 주관주의의 유포. 역사의 관조자 혹은 절대군주가 되려는 자 환상에서 깨어나소서. - 2007-02-08 11:25
 
yoonta
울라/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짜집기한 논문들"을 보지 않아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쯤은 이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죄송합니다만 제가보기엔 아직도 님은 한국의 80년대식 맑스레닌주의라는 협소한 시야안에 갖혀계신듯 합니다. 제가 바로 그랬거든요..-_- - 2007-02-08 14:24
 
울라
80년대 스탈린주의 밀수품과 1917년 레닌의 사유를 구분못하는 이가 지금도 있습니까? 전위/당/노동자국가 등 이런 단어들만 나오면 깍~깍~ 소리치며 저기 아직 시체가 걸어다닌다며 질색하는 분들. 한 번 세상 엎어보세요. 그러면 믿어줄게요.

80년대 값싼 낭만으로 어쩌구저쩌구 주변에서 맴돌던 이들. 당신들이 반 푼어치의 값싼 입으로 '동지'라 불렀던 어떤 이들이 수인이 되어서도 꺾지 않았던, 그리고 지금도 키워나가고 있는 그 신념에 발언할 자격이 있습니까?

로자님의 서재를 별 시덥잖은 말들로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 2007-02-08 16:56
 
로쟈
별 말씀을. 한데, 견적상 댓글로 카바될 수 있는 말씀들이 아닐 듯한데요.^^ - 2007-02-08 17:15
 
기인
로쟈님 말씀에 동의 ^^; 처음의 논점과는 다른 부분으로 많이 나아갔지만, 분명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제가 절박한 노동자의 상황에서 비정규직 투쟁이나 생존권 투쟁에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상황이라서 (꾿꾿하게 공익월급 받아가며 사교육으로 연명하며 자기변명하고 있는 학삐리!라는 상황) 전망이다 뭐다, 고민하고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저와같은 '계급'의 사람들이 한때나마 노동자 중심주의와 pt독재를 믿었던 사람들이 요즘 전반적으로 회의하고 있는 까닭에 대해서 묻는 것입니다.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으로서 노동자 계급에 투신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되풀이되는 논점이지만, 울라님이 말하신 것처럼 pt독재, 공산주의, 꼬뮨,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구체적 내용이 소련에 대한 반성으로 채워지거나, 적어도 어떤 길은 '아닌지'를 과거 잘못된 길이 왜 잘못되었는지를 통해서 반성되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물론 확고한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저술과 블루 프린트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닫힌 체계로서, 목적론적으로 공산주의를 바라보는 것의 폭력성과 실패(즉 교조적 맑시즘)로부터 우리는 배운것이 많으니까요. 그리고 앞으로의 전진하는 운동을 통해서 이론이 조직화되는 것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계속 돌아오는 지점은,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시대의 맑스가, 레닌이 아니라. 지금의 맑스와 레닌 말입니다. 제 의문점이 어느정도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도 레닌의 전위당주도의 노동자국가는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지만, 그 '스탈린'이라는 지점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럼 스탈린은 사회주의 외부에서 나온 괴물입니까? 스탈린에 의해 조성된 그리고 그가 '발명한' 여러 것들은 비-사회주의라고 처단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스탈린이라는 괴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레닌주의 안에 분명 있었고, 스탈린주의도 그렇게 쉽게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면 스탈린 이후, 지금 소련은 당연히 부정하시겠지요. 그렇다면 이러한 실패를 말미암은 '원인'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일국-사회주의의 한계이든, 치졸하게는 서방넘들의 압박이든 간에. 그러기에 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처럼 91년 이전 러시아 활동가의 글이 나오면 읽게다라고 하셨는데, 저도 읽고 싶습니다. 도대체 러시아는 무엇이었는지. 이것이 해결이 안 되면, '팔뚝질'은 하나의 상황에 대처하는, 또는 '조직'의 판단에 따르는 일 밖에 더 되겠습니까? - 2007-02-08 17:50 수정  삭제
 
yoonta
울라/ 당시에도 스탈린은 취급도 안해줬습니다. 주 텍스트는 레닌저작집과 MEW같은 것들었죠. 모르긴 몰라도 님보다는 제가 접한 맑스레닌 저작들이 더 많을걸요? 그리고 위에처럼 말씀 격하게 하시는것보니 제가 무슨 코리아혁명의 배신자쯤으로 보이시나보네요.? 님같은 분들이 과거에도 있었죠. 그런 분들이 소위 혁명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동료사회주의자들을 학살하곤 했었죠..한마디만 더하면 세상은 "한번 엎"는 것으로 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님에게 하려는 이야기는 결국 이겁니다. - 2007-02-09 01:28
 
울라
휴머니스트적 동질감... 자본주의 모순이 여전히 '그'의 문제이고 운동이 '그'의 고통에 공감해야 할 문제인가요. '그'의 해방없이는 '나'의 해방이 없다는 인식이 심장을 뛰게합니다.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을, 나의 해방의 가능성을 믿습니다. 기인님의 대안에 대한 사유가 올곧은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이라면 이 엄혹한 시기에 뜻있는 동지를 만난듯 기쁨니다. 그렇지만 그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불편한 글에 인내해주셔서 고맙습니다.

yoonta/ 동료사회주의자를 학살하고 학살당했던 시대를 체험한 듯 말하네요... 몇마디 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낭만, ~주의, 학살자로 규정짓는 것 또한 학살의 인터넷버전이라고 생각되네요. 우리는 어쩌면 그토록 미워하며 깔보는 스탈린에게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요즘같이 칠흑같은 시기에 눈 막고 귀 막고서 운동에 뛰어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 반성과 성찰의 터널을 통과했으리라는 착각은 착각일 뿐이죠.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의 수많은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해지고 있는 '말'들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을 것입니다. 이 근거에 접속해 보시겠습니까?
(80년대 그것들을 읽으셨으니 일어는 정말 잘하시겠네요^^) - 2007-02-09 13:30
 
yoonta
그래서 그런사람(학살한사람) 없다...라고 말씀하고 싶으신가요? 원래 그런겁니다. 소위 레닌주의란게. 줄줄이 읊어드릴 생각 없고 또 그러지도 못하니 역사책 좀 보세요. "짜집기 논문"이라고 비아냥거리기 이전에 기본 소양은 익히셔야죠. 그리고 기본 매너하고.."몇마디댓글로 상대방을 값싼 ~주의"자로 규정한것은 누가먼저인지 위 댓글들을 다시한번 읽어보시길. - 2007-02-09 20:37
 
울라
yoonta님 하나 제안하겠습니다. "소위 레닌주의적 전위당 주도의 노동자국가라는 것이 실패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을 정리해서 올려주기를 바랍니다. 그럼 거기에 제가 가능한 한 성심껏 답하겠습니다.
저도 학교라는 공간에 거주하고 있을 때에는 반-레닌주의자였습니다. 자율적인 활동가들의 동등한 관계맺기를 기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 몸에 쓰여지고 있는 세계는 점점 "강고한 규율의 당을 달라"는 목소리를 높여 가고 있습니다.
님은 협업에 의한 자본주의의 생산력 발전을 칭송해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의 협업을 왜 거부합니까? 적의 압도적인 힘을 체험하고 있노라면 전 감히 이러한 거부에 대해 이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은 집단적 협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집단적 '노동'은 공동으로 노동하고 공동으로 향유하는 공동노동이기도 합니다. 이 공동노동은 규율없이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전 동지들의 노동의 축적물/공동의 노동수단을 제 실책으로 소진시켜서는 안 된다는, 제한된 역량을 집중해서 돌파해야 된다는 최소의 조직적 책임을 규율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평가받고 제 역량에 맞추어 알맞은 위치에서 활동하는 것. 전 이것을 규율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러한 규율에 대해 억압이라고 낙인찍을 것입니까? 세계를 변혁하는 노동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가 주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에 있기 위해서 전 이 억압을 달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자유로운, 너무나 자유로운 그러나 무력한, 너무나 무력한 개인이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전 개인이기보다 '지도'받는 인자가 실상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쓰여지지 않은 세계가 너무나 광할합니다. 글로 세계를 인식하기에 앞서, 그 한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2007-02-10 00:28
 
기인
울라님/ 저도 그 '휴머니스트적 동질감'이 아니라, 이를 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그'의 해방 속의 '나'의, '우리'의 해방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는 지점은 저도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우리'의 해방의 궁극적 길이 아닌, 그 '매개'단계 내지는 방법론이 반성되었는가의 문제라는 것이죠. 울라님과 대화하면서 내 고민이 '형이상학적' 이었는지 자문해보기도 합니다. 문제는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라면, 이 지점부터 즉 '어떻게 변혁시킬 것이고' '변혁을 하려면 나의 세계관은 어때야 하는가' 부터 사유해야 되는 것은 아닌지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천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더라도, 실제 (어쨌든) 성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역사적 반성과 '함께' 우리는 실천의 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그것 자체가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울라님 말씀처럼 이것이 '지도력'을 고민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 고민의 성패여부가 행동의 기준이 되는지가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천적 고민이냐, 형이상학적 고민이냐, 변증법적 사유냐, (소부르주아적) 합리주의적 사유냐를 가르는 것이 그 지점이 되겠지요. 기본적으로 제 입장은, 제 고민 또한 나름의 '실천'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에 '고민'후 '행동'이 아니라, 행동으로서의 고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그 외 활동으로는 모 단체의 당비나 또 다른 모 단체의 후원금 정도로 자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고민이 하나의 '지도력'이 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뚤어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절박한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 2007-02-10 08:03 수정  삭제
 
기인
사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지만, 아직 80년 이후의 서구 맑시즘의 기본 문제틀 자체도 따라가기 벅찰지경이라서, 어떻게 하면 적어도 '내'가 확신을 갖고, '우리'로 확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수준이죠;; - 2007-02-10 08:06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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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제 생각을 정리하자면, 구조주의적으로 '주체' 물음을 주체를 발생시키는 호명하는 힘의 문제로 변신(?)시키더라도 그 '구조'가 '주체'의 자리를 대체할 뿐이 아닌가하는 문제로 나아가고, 여기서부터 탈구조주의자들에게 배우는 것이 있어야 할터이지만, 저는 아직 어떠한 확신도 없습니다. 계속 고민을 하면서도 현정세와 '현재'라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음은 물론이죠. 힘듭니다. 여기까지 페이퍼에 정리해 놓겠습니다. - 2007-02-10 23:05 수정  삭제

 

어쨌든 정리해 놓습니다. 위 대화에서도 짐작하실 수 있지만, 이제 제 관심은 스탈린입니다. 스탈린! 지젝이 레닌도 좋아하던데, 저는 스탈린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도대체 스탈린이란 무엇인지 공부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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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02-11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비스의 전기를 예약구입하세요.^^

기인 2007-02-11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정말 막막한 지점이라서, 첫 여자친구와 헤어진 후의 그 막막함을 느낍니다.

기인 2007-02-11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헉; 지금 보니 예약주문도 아니고 이젠 주문되던데요? 근데 가격이;;; ㅡ,.ㅡ;
정말 춘원이 왜 다 때려치고 불경공부했는지 그 심정이 이해됩니다. 불경이나 공부할까라는 생각이라니까요! 차근차근 조바심내지 말아야 할텐데, 석사논문 쓰고 나서 놓고 있던 문제를 다시 접어드려니까 열불나고, 학부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정말 막막하고... 휴;; 차근차근히!!

yoonta 2007-02-11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탈린선집도 한권 과거 전진출판사에서 나왔었죠. 전 읽어보지 않았는데 수소문해보면 구해보실수 있을듯..^^

기인 2007-02-1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스탈린 읽어보려고요. 스탈린도 읽어야 겠지만, 스탈린에 대한 평가도 더 공부해봐야겠네요. ^^;
 
 전출처 : 로쟈 > 진은영, 긴 손가락의 시

일간지들의 북리뷰가 주로 주말에 몰려 있기 때문에 내일 아침 온라인 기사가 미리 뜨는 금요일 밤시간이면 할일이 좀 늘어난다. 내일이면 어느새 날짜가 10일로 접어드는구나, 란 생각에 경악(!)을 하면서(주말의 빨래감처럼 밀려 있는 일들이여!) 또 하던 일 안할 수는 없는지라 '작가와 문학사이'의 연재도 옮겨놓는다. 이번 주는 진은영 시인 편이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철학전공자로서(아래의 기사를 읽으니 어느새 학위도 받았다) <순수이성비판>의 '리라이팅'을 쓰기도 했다. 그녀의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문학과지성사, 2003)을 나는 사두지는 않았지만 개성적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보다 더 미더운 촉수를 가진 신형철 평론가의 감식의견을 들어보기로 한다.

 

경향신문(07. 02. 10) [작가와 문학사이](6) 진은영-청신한 몸·유연한 머리의 언어

그녀의 첫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은 명품이다. 재료도 고급이고 만듦새도 정통이며 외장도 우아하다. 열혈독자가 많다는 소문이다. 그녀는 나가르주나와 니체를 비교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도이기도 하다. 그녀가 철학적인 시를 쓰고 시적인 철학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게 있다는 생각은 거의 오해에 가깝다. 반쯤은 호메로스이고 반쯤은 플라톤인 사람은 호메로스도 플라톤도 되지 못한다. 시는 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철학의 문으로 나올 수 있고, 철학은 철학의 계단을 더 높이 올라갈 때 시의 문으로 나올 수 있다. 횔덜린의 시와 하이데거의 철학이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단호히 제 길을 갈 때 그 둘은 궁극에서 만난다. 시인 진은영은 시만 생각한다.

'봄, 놀라서 뒷걸음질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슬픔/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자본주의/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문학/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시인의 독백/“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혁명/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전문)



소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마리오가 네루다에게 묻는다. 시란 무엇입니까. 시인 왈, 시는 메타포다. 시 조갈증에 걸린 우편배달부에게 이 시를 처방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시는 고급 메타포의 일대 향연이다. 무릇 메타포는 수혈(輸血)이다.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 혁명 시 등과 같은 혼수상태의 단어들이 젊은 피를 받아 막 살아난다. 뛰어난 메타포는 감각의 문으로 들어가 사유의 문으로 나온다. 특히 ‘혁명’을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로 혹은 “가로등 밑에서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로 규정한 대목은 곱씹을수록 아득해진다. 사유를 건너 뛴 감각은 가슴만 물들이지만 사유를 관통한 감각은 머리까지 흔든다. 그녀의 좋은 시들이 대개 그러하다.

혹자는 그녀를 최승자의 후계자라 칭한다.(시인 김정환의 말대로라면 이 후계책봉은 어느 술자리에서 최승자 본인의 기꺼운 재가를 이미 받았다고 한다.) 최승자가 누구인가? 한국 여성시의 발성법을 혁신한 시인이다. 발명이라고 해도 좋다. 최승자의 언어는 격렬한 액체의 언어다. 그녀는 시에서 오줌 싸고 똥 누고 생리혈을 흘린 최초의 여성이었다. 생의 막장에서 자존심 내던지고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청파동을 기억하는가’) 너에게 가겠다고 매달리는 여자의 발화다. 참혹하고 두렵고 아름답다. 이 몸의 언어가 머리의 언어와 연동해 지진을 일으킬 때 그녀의 시는 더욱 위력적이었다. 역사·정치·문명의 허위를 사유하는 강인한 지성이 또한 그녀의 것이었다. 덕분에 ‘여류’라는 수상쩍은 말이 척결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는 식의 발성은 확실히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서른 살은 온다”(‘삼십세’)의 그것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더 깊이 앓는 몸과 더 깊이 사유하는 머리가 최승자 이후에 없지 않았으나 그 둘의 뜨거운 합선(合線)은 이후에도 드물었다. 후계 운운하는 사람들의 저의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우리의 젊은 시인이 몸의 언어와 머리의 언어 모두에 능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사숙한 선배와는 또 달라 보인다. 덜 뜨겁지만 더 청신한 몸의 언어, 덜 치열하지만 더 유연한 머리의 언어가 그녀의 것이다. 그 차이가 더 소중하다. 그녀는 그녀만의 또 다른 혁신으로 선배에게 진 빚을 탕감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때가 되었는데 소식이 없다. 시인은 시만 생각하지 말고 기다리는 사람 생각도 해야 한다.(신형철|문학평론가)  

07. 02. 09.

P.S. 알라딘의 소개에 따르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2000년 「문학과사회」에 '커다란 창고가 있는 집' 외 3편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진은영의 첫 번째 시집'이다. "시인은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 하는 마음가짐으로 시를 짓는다. 허나 '모든 표정이 사라진 세상'에 '너'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막 심어진 묘목이 파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듯, 조심스레 손가락을 내어밀어 적은 시편들이 담겼다."

긴 손가락의 詩

시를 쓰는 건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모두 다른 것을 가리킨다. 방향을 틀어 제 몸에 대는 것은 가지가 아니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 가지는 물을 빨아들이지도 못하고 나무를 지탱하지도 않는다. 빗방울 떨어진다. 그래도 나는 쓴다.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 손가락 끝에서 시간의 잎들이 피어난다

평론가 이광호의 해설도 그렇지만, 대개 이 시인의 키워드로 꼽는 단어(그러니까 '일곱 개의 단어' 중 하나이겠다)가 '손가락'이다. 손가락에 주의를 두는 사람들은 주로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들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면 그녀의 시들은 '긴 손가락'으로 씌어진 시들이다. "가장 멀리 있는 가지는 가장 여리다. 잘 부러진다"고 시인은 적었다. 듣기에 두번째 시집이 늦어지는 건 시인이 건강과도 무관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시간의 잎들'이 더 풍성하게 피어나기를 고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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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너희가 섹스의 공포를 아느냐?

작년 여름에 근간 목록에 올라와 있던 파스칼 키냐르의 에세이 <섹스와 공포>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바 있는데, 반년이 지나서 드디어 책이 출간됐다. 이 겨울이 가기 전에 중후한 에세이 한 권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반갑다. 발빠른 리뷰도 올라와 있어서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7. 02. 10) 쾌락 뒤에 숨겨진 공포 '섹스와 공포'

사회적인 공인을 통과하지 않은 섹스에 대한 현대인들의 끈질긴 공포감은 어디서 연유된 것일까. 이 같은 공포감의 연원으로 기독교의 엄격한 청교도주의를 꼽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있지만,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의 원작자인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이에 의구심을 품었다. 특히 1980년대 에이즈의 등장으로 인한 청교도적 윤리의 확산은 키냐르의 의구심에 불을 지피는 계기가 됐다.

섹스에 대한 현대인의 공포감의 뿌리를 찾아가던 키냐르의 눈길이 멎은 곳은 폼페이의 회화였다. 통음난무의 자유분방한 풍조를 반영하듯 폼페이의 벽화들은 에로틱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시선은 수줍고 심각했다. 즐겁고 쾌활해야 할 그림 속의 여인들은 정면을 바라보지 못했고 겁에 질려있었다.

키냐르는 <섹스와 공포>에서 자유로웠던 초기 로마의 성윤리가 공포감에 짓눌리게 되는 시기는 공화정이 제국의 형태로 정비되던 아우구스투스 황제기(BC 18~AD 14)라고 지적한다. 황제는 간통 처벌법인 ‘율리아의 법’ 제정 등 성의 억압을 통해 시민들을 통제하고 이를 기반으로 황제권을 강화하려 했다. 여자를 유혹, 밀애를 즐기는 내용을 노래한 당대의 인기시인 오비디우스는 당장 ‘불온시인’으로 낙인 찍혀 다뉴브 강변으로 쫓겨나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했다.

성에 대한 억압과 금기가 없었던 기독교가 ‘로마의 윤리’를 따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다. ‘육체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죽음이 오고 영적인 것에 마음을 쓰면 생명과 평화가 온다’ ‘음행하는 자는 제 몸에 죄를 짓는 것이다’라며 기독교인의 윤리를 설파하는 신약의 로마서는 바로 이 때에 쓰여졌다. 로마인들이 알몸을 가리기 위해 팬티를 착용하게 된 것도 이 시기의 변화된 성 모럴을 반영한 풍속이라는 것.

키냐르는 아우구스투스가 재위하던 32년이 단지 로마역사의 변곡점과 같은 시기가 아니라 세계사의 ‘지진’과도 같은 기간이었다고 과감하게 결론내린다. 디오니소스적이었던 로마의 에로티시즘이 이 시기 불안과 공포감에 가득찬 우수로 변질됐고, 이 공포감은 적대감으로 탈바꿈하면서 기독교 원죄의식의 질료가 됐다는 것이다. 섹스를 지옥으로 보내버린 중세의 청교도적 윤리가 이 시기에 뿌리 내리고 있고 현대의 성 윤리 역시 일정 부분 중세 윤리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기는 신대륙 발견기보다도 더 큰 변혁기라는 것이다.

역자 송의경씨는 “탄생이 죽음으로의 출발을 의미하는 양면성이 있듯이 섹스에는 쾌락과 공포가 본질적으로 혼재돼 있다”며 “섹스에서 공포만을 분리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현대인들이 쾌활함이라는 에로티시즘의 또 다른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책”이라고 말했다.(이왕구 기자) 

07. 02.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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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4) : 비트겐슈타인과 저작권 표시

 

 

 

 

 

그린비에서 나온 <청갈색책>의 판권을 보니, 어라, 예상과는 달리 영국의 유명한 학술서 출판사인 블랙웰의 허가를 받아 나온 "정식 계약본"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저작권 계약이 필요할 정도로 그렇게 요즘(?) 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책날개의 저자 약력을 살펴보니 1951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국내 저작권법상 1958년 1월 1일 이전에 사망한 저자의 경우에는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나온 책은 <논리철학논고>가 유일하고, 나머지는 그의 사후에야 출간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철학적 탐구>는 1953년에, <청갈색책>은 1958년에, <확실성에 관하여>는 1969년에, <문화와 가치>는 폰 리히트가 엮어서 1977년에,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은 1978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만약 저자가 1957년 이전에 사망한 경우에도, 특정 저술의 초판 발행일이 1957년 이후인 경우에는 그 특정 저술에 한해서만 저작권이 보호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05년에 사망한 쥘 베른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지만, 1863년에 집필했지만 미발표 작품이었던 <20세기 파리>는 1994년에 와서야 사상 최초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한국어판 역시 프랑스 측 출판사와 정식 계약하여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 열거한 비트겐슈타인의 저술 가운데 1957년 이전에 출간되어 국내에서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없는 것, 바꿔 말하자면 누구나 마음대로 출판할 수 있는 것은 <논리철학논고>와 <철학적 탐구>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저술은 원칙적으로 국내 번역본이 나올 경우에는 모두 저작권 계약을 해야만 한다. <청갈색책> 역시 1958년에 나왔으니 원칙적으로는 저작권 계약 대상이고, 따라서 그린비에서 이 책을 "정식 계약본"으로 펴낸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책세상에서도 비트겐슈타인 전공자인 이영철 교수의 번역으로 7권짜리 선집이 나오면서 <청색책 / 갈색책>이라는 번역서가 나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아직 책세상 판본을 못 보았으니 가타부타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중복계약이 아닌 이상 한국어 판권을 두 군데 출판사가 나눠가지기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쩌면 책세상 측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1957년 이전에 사망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의 모든 저작을 "저작권 계약 없이 펴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일까? 번역서 실물을 보기 전에는, 그리고 그쪽의 별다른 해명을 듣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그린비의 <청갈색책>의 경우에도 저작권 표기가 "정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의 판권면에는 Copyright (c) 1958 by Ludwig Wittgenstein 이라고 적혀 있는데, 차라리 그 자리에 Estate of Ludwig Wittgenstein 이나 가족이나 자녀(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독신이었지만) 등의 권리 상속인의 이름이 들어가면 모를까, 1951년에 사망한 저자의 이름을 1958년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혹시나 해서 아마존닷컴에서 영어판을 찾아보았더니 Copyright (c) 1958 by Blackwell Publishing Ltd 로 나오는 걸로 보아, 일단 블랙웰 출판사에서 저자(의 권리 상속인) 대신 저작권을 관리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아마도 그린비 출판사 측에서 한국어 판 저작권 문구를 작성할 때 "비트겐슈타인이 쓴 책이므로, 저작권 표시에도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이 들어가면 된다"는 단순논리에 따라 그렇게 적었으리라는 것이다. 한국 출판 문화업계의 순진무구하다 못해 어벙띠벙한 "저작권 개념"을 어느 정도 인지한 사람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이건 사실 국제적 "망신"이자 자칫 "분쟁"의 꼬투리가 되기 쉬운 일이니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것 역시 요즘의 유행마냥 X파일 이론이 대입되어 여기에도 어떤 "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워낙 신중무구한 까닭에 생전에는 제대로 책도 펴내지 않았던 "비 선생"조차도, 지금쯤 저 멀리 하늘나라에서 "사후세계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말고 이 만행 소식에 노발대발하고 있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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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7-02-11 0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약을 했다면 그쪽에서 보내온 서류에 영어문구도 같이 딸려올 텐데 그린비에서 자의적으로 그렇게 쓸 리가 없을 것 같네요.

기인 2007-02-1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저도 퍼온 글인데, 자명한 산책님도 출판업계 쪽에서 일하시니 잘 아시겠네요~^^ 이 나귀님도 출판쪽에서 일하시는 것 같던데요?

릴케 현상 2007-02-1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단수가 다를 것 같으니 같이 놓지는 마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