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나귀님 > 주마"관"산으로 뒤적이기 (74) : 비트겐슈타인과 저작권 표시


그린비에서 나온 <청갈색책>의 판권을 보니, 어라, 예상과는 달리 영국의 유명한 학술서 출판사인 블랙웰의 허가를 받아 나온 "정식 계약본"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이 저작권 계약이 필요할 정도로 그렇게 요즘(?) 사람이었나 하는 의문이 생긴다. 책날개의 저자 약력을 살펴보니 1951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국내 저작권법상 1958년 1월 1일 이전에 사망한 저자의 경우에는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나온 책은 <논리철학논고>가 유일하고, 나머지는 그의 사후에야 출간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철학적 탐구>는 1953년에, <청갈색책>은 1958년에, <확실성에 관하여>는 1969년에, <문화와 가치>는 폰 리히트가 엮어서 1977년에,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은 1978년에 각각 출간되었다. 만약 저자가 1957년 이전에 사망한 경우에도, 특정 저술의 초판 발행일이 1957년 이후인 경우에는 그 특정 저술에 한해서만 저작권이 보호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05년에 사망한 쥘 베른의 작품은 거의 대부분 저작권 보호 대상이 아니지만, 1863년에 집필했지만 미발표 작품이었던 <20세기 파리>는 1994년에 와서야 사상 최초로 출간되었기 때문에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있었고, 한국어판 역시 프랑스 측 출판사와 정식 계약하여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위에 열거한 비트겐슈타인의 저술 가운데 1957년 이전에 출간되어 국내에서 저작권을 보호받을 수 없는 것, 바꿔 말하자면 누구나 마음대로 출판할 수 있는 것은 <논리철학논고>와 <철학적 탐구>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저술은 원칙적으로 국내 번역본이 나올 경우에는 모두 저작권 계약을 해야만 한다. <청갈색책> 역시 1958년에 나왔으니 원칙적으로는 저작권 계약 대상이고, 따라서 그린비에서 이 책을 "정식 계약본"으로 펴낸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책세상에서도 비트겐슈타인 전공자인 이영철 교수의 번역으로 7권짜리 선집이 나오면서 <청색책 / 갈색책>이라는 번역서가 나왔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아직 책세상 판본을 못 보았으니 가타부타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중복계약이 아닌 이상 한국어 판권을 두 군데 출판사가 나눠가지기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쩌면 책세상 측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1957년 이전에 사망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그의 모든 저작을 "저작권 계약 없이 펴낼 수 있는 것"으로 간주했던 것일까? 번역서 실물을 보기 전에는, 그리고 그쪽의 별다른 해명을 듣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나저나 그린비의 <청갈색책>의 경우에도 저작권 표기가 "정확"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의 판권면에는 Copyright (c) 1958 by Ludwig Wittgenstein 이라고 적혀 있는데, 차라리 그 자리에 Estate of Ludwig Wittgenstein 이나 가족이나 자녀(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독신이었지만) 등의 권리 상속인의 이름이 들어가면 모를까, 1951년에 사망한 저자의 이름을 1958년에 집어넣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혹시나 해서 아마존닷컴에서 영어판을 찾아보았더니 Copyright (c) 1958 by Blackwell Publishing Ltd 로 나오는 걸로 보아, 일단 블랙웰 출판사에서 저자(의 권리 상속인) 대신 저작권을 관리한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한 가지 가능한 추측은, 아마도 그린비 출판사 측에서 한국어 판 저작권 문구를 작성할 때 "비트겐슈타인이 쓴 책이므로, 저작권 표시에도 비트겐슈타인의 이름이 들어가면 된다"는 단순논리에 따라 그렇게 적었으리라는 것이다. 한국 출판 문화업계의 순진무구하다 못해 어벙띠벙한 "저작권 개념"을 어느 정도 인지한 사람이라면 "뭐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이건 사실 국제적 "망신"이자 자칫 "분쟁"의 꼬투리가 되기 쉬운 일이니 조심해야 하는 일이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이것 역시 요즘의 유행마냥 X파일 이론이 대입되어 여기에도 어떤 "의도"가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해석되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한도 끝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워낙 신중무구한 까닭에 생전에는 제대로 책도 펴내지 않았던 "비 선생"조차도, 지금쯤 저 멀리 하늘나라에서 "사후세계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다 말고 이 만행 소식에 노발대발하고 있을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