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Ritournelle > *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의 정치사회학

* 한겨레(2007. 4. 18) “미국인은 한국책임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한겨레] 미국 버지니아공대 총기참사로 미국사회가 큰 충격에 빠졌다. 더군다나 최악의 총기참사의 범인이 한국국적의 이민자인 재미동포 조승희임이 밝혀진 뒤 미국내 한국동포와 유학생들은 또 한번의 충격과 대혼돈에 빠졌다. 한국의 언론은 자국인이 최악의 총기참사의 범인으로 드러나자 대대적인 보도를 하고 있고, 미국의 매체들도 “범인은 한국인”이라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국에 이민 가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한 1.5세 한국인이 기고를 보내왔다. 16살에 이민을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미국에서 졸업한 33살의 시드니 손 변호사는 이 기고에서 “이번 일은 한국인으로서 저지른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인이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일이 아니다”라며 “조씨에게 심어주지 못한 정체성, 주체성과 소속감에 미안해 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드니 손 변호사가 보내온 기고를 소개한다.

<한겨레> 온라인뉴스팀

미국에 살고 있는 1.5세 한국인으로서 언론과 각종 매체에 올라 있는 기사 및 댓글을 보고 이 글을 씁니다. 우선 이번 사건은 안타깝고 슬픈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일로 인해 너무 민감해진 언론과 몇몇 여론은 저를 더욱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선 미국에선 언론 이외에는 가해자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에 대해 이슈화가 되고 있지 않습니다. 미국시민들과 거주인들은 이 일이 한국정부에 또는 한국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일이 일어난 후 소수의 몰지각한 사람들이 아시안계와 한국인을 비하하는 발언을 했을 수도 있으나 그런 일로 한국인들이 창피하거나 수치심을 느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가해자의 국적 이슈화 없어…민감한 언론이 더 슬퍼

우린 세계 어느 곳에서도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고 있는 데 이런 일이 우리가 어깨를 다시 움추리고 또 한국인임을 감춰야 하는 이유가 된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직도 마치 주인집에 얹혀 사는 객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국인은 마치 화장실도 안가고 화도 않내고 또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로만 인식이 되길 바라는 태도는 우리에 관한 인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의 우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막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대한민국과 한국인은 모든 문화권에 사회와 사람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다면성과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다채로운 인격의 집합체임을 세계가 인정할 때 우린 비로소 객이 아닌 한 주인으로서의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이상 수학에 능하고 또 고분고분한 아시아인들중 의 하나인 나라가 아닌 뛰어난 예술가와 운동선수뿐만 아닌 우리와 같은 보통사람들도 존재하는 나라로 인식될 때 우린 비로소 세계와 동등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주인집에 얹혀 사는 객이라는 생각에서 비롯

또한 이 일로 인해 한국사람들과 한국 정부가 미안해 할 일도 사죄할 일도 없고 또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해서 또 영주권자라 해서 그가 저지른 행동이 우리에게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는 계기가 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은 우리가 마치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주체적으로 관할한다는 착각에 빠진 생각입니다. 그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 것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아닌 바로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번 사건은 한국정부도 또 한국인도 주동한 일이 아니라 단순히 개인이 개인적인 이유로 저지른 일입니다. 그는 누구와도 의논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으며 또 한국정부와 한국인을 대표해서 이 일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나라간 일이 무슨 아이들의 소꼽장난인 것처럼 비화

그런데도 우린 이 일에 관해 정부적인 차원에서 사과를 해야 한다느니 또 국민 개개인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버젓이 언론에 옳은 말인양 유포되고 있습니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이 일로 한미관계 와 FTA체결에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소위 전문인들의 의견들입니다. 나라간의 일이 무슨 아이들의 소꼽장난인 것처럼 비유되고 비화되는 말들을 들으며 저는 큰 실망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일이 반대로 우리에게 일어났을 경우 정부에서 보복적인 차원에서 나라일을 결정할 수도 있음을 가정하는 것 같아 우리의 언론에서 모시고 있는 이런 소위 전문가분들의 자질과 인성이 의심스럽습니다.

미 장갑차 사건과 달라…미군이 공무중 일으킨 사고

이 일을 또 미군 장갑차 사건과 비유해 사죄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두 가지 일은 아주 다른 상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미군장갑차 사건은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국을 대표하는 미군이 부주의로 공무집행 중 일으킨 사고입니다. 개인적으로 일으킨 사고가 아니라 미국의 공무집행 중 부주의로 일어난 일이므로 당연히 미국정부와 미군은 정식으로 한국에 사과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씨가 저지른 일들은 그의 개인으로서 삶과 결정에 의해 일어난 일입니다. 우리가 슬퍼하고 안타까워 해야 하는 이유는 정작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과 미안함이 아니라 그가 이런 결정에까지 이르게 한 사회적인 고립과 주체성에 대한 상실에 있어야 합니다.

외톨이로 선천적 정신분열증 있는 사람으로 간주

전 16살 때 가족의 결정으로 미국에 이민와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이젠 Korean-American 변호사로 살아가고 있는 33세 남성입니다. 그래서 전 조씨의 소식을 듣고 제 주변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동생들을 떠 올렸습니다. 미국과 한국언론에서는 “loner” 와 외톨이, 왕따라는 표현을 써가며 조씨가 혼자 고립된 생활을 즐기고 선천적 정신분열증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 조씨가 저를 포함해 어린나이에 미국에 온 제 친구, 동생들과 비슷한 환경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며 살아왔음을 알기에 더욱 가슴아프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미국인들 텃새나 차별 탓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이질감

제 주변에도 조씨와 같이 어린 나이에 미국에 와 주체성과 소속감의 결핍으로 고뇌하고 방황하는 한국인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대체적으로 자기가 주체적이면서도 사회에 소속되어 있길 바랍니다. 특히 어린 나이에는 그것에 대한 확신이 없을 경우 방황하고 또 고민하게 됩니다. 저 또한 한국인으로서 여기가 어색하고 또 소외감을 느끼며 지낸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꼭 미국인들의 텃세나 차별 탓이 아니라, 내가 완전한 한국인도, 또 미국인도 아니라는 자신에 대한 이질감에서 오는 번뇌입니다. 하지만 저는 주변사람들과 가족의 사랑과 관심으로 큰 방황 없이 살아왔습니다.

한인모임은 유학생이나 2세들이 주도…1.5세는 어색

그런데 한국언론에서는 그가 한인모임에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도하며 마치 한인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기에 그토록 고립된 생활을 즐기는 비정상 적인 사람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름니다. 대학에 존재하는 한인모임들은 한국에서 온 한국 유학생들이 주도하는 모임이거나, 혹은 2세들이 주동해 만든 모임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정체성과 주체성이 결핍된 1.5세들은 이런 모임에서도 어색하게 느끼며 또 관심 밖의 인물로 취급받기 쉽습니다. 그러니 조씨도 이런 모임에 참여하는 것 차체가 어색하고 불편했을 겁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한국인으로, 또 한국인들은 그를 미국인으로 보는 눈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이질감으로 혼자 있게 되고, 또 그러면서도 누군가에 관심을 바랬을 겁니다. 그러다 관심을 보이는 한 사람에게 집착하게 되고 또 그로 인해 배신감을 느꼈을 때 세상에 대한 분노와 상실감에 빠졌을 겁니다.

혼자이다 관심 보이는 사람에 집착…배신감 느끼면 세상에 분노

또 미국에 일찍 이민 오신 대부분의 가족이 그렇듯 부모님들은 생계에 전념하시느라 어린아이들에게 특별히 교감과 정체성에 대한 토론을 나눌 기회가 없는 게 사실입니다. 또 어린 아이들과 그런 대화를 나누는 방법이 막막하신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대부분 영어만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것이 더더욱 이런 대화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를 어렵게 합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고립되길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어색함 때문에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고립되는 것입니다. 조씨가 행한 일은 정말 끔직하고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씨에게 손가락질하고 수치스러워 하기 전에 우리가 조씨에게 심어주지 못한 정체성, 주체성과 소속감에 미안해 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조씨 손가락질 말고 정체성과 주체성 못 심어준 것 반성해야

한국인은 긍지와 자주성, 민족성이 강한 민족입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너무 성공과 목적에 집착하여 그것을 이룬 이들만이 우리의 민족이며 대표라 생각합니다. 또 미국에서 한국인들은 마치 얹혀 사는 것처럼, 오직 ‘주류사회’를 외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 살든 우리가 사회의 일부로 존재하는 곳에는 우리도 주류라는 것을 알고 또 우리의 후손들에게 인식시켜야 합니다. 이젠 미국에 살고있는 동포들은 객지 생활을 하는 손님이 아니라 미국의 주인이며 주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조씨가 저지른 사건은 우리가 한국인으로서 미국인들과 미국정부에게 사과해야 하고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라 우리가 미래의 한국인들에게 심어주어야 할 주체성, 소속감, 정체성에 관한 큰 숙제를 남긴 일로 보아야 합니다.

시드니 손(Sidney S. 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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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기초적 맑스이론에 대한 소고(2)

 

제1부 맑스주의 이론 개설


1.철 학

  맑스주의 철학은 유물론, 변증법, 유물사관을 통일적 체계로서 포괄하는 것이며, 자연․사회․인식에서 운동과 발전을 비로소 수미일관한 유물론적 세계관에 의해 이론적으로 기초 짓는 것이다. 현재와의 관련에서 말한다면 현대사회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는 계급사회인 이상, 계급간의 이데올로기투쟁은 피할 수 없으며, 철학적으로는 특히 무엇보다도 그 세계관에서 유물론 혹은 관념론이라는 명료한 대립이 되어 나타난다.


(1)유물론

  유물론은 고대 그리스철학 이래 존재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 최고(最高)의 발전형태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을 검토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은 2천년에 걸친 철학의 발전사를 관통하는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최고의 산물이다. 특히 시인 하이네가 말한 것처럼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독일철학 혁명의 성과를 남김없이 흡수한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독일관념론 철학의 집대성자 헤겔 및 중간자 역할을 한 포이어바흐로부터 각각의 변증법과 유물론을 비판적으로 섭취하고, 당대의 자연과학의 성과를 적용한 것에 의해 성립한 것이 맑스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맑스주의 철학이 형성되고 확립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서이며,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나타난 노동자의 부정적 상태의 이데올로기적 표현이 되었다.


  철학의 근본문제에 대하여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철학, 특히 근세철학의 큰 근본문제는 사고와 존재와의 관계문제이다. 이 문제에 어떻게 답하는가에 따라서 철학자들은 두 개의 진영으로 분열했다. 자연에 대한 정신의 본원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결국 어떤 종류의 세계창조를 인정한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으로, 자연을 본원적인 것으로 본 사람들은 유물론의 여러 학파에 속한다”(『포이어바흐론』)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즉 정신(의식)의 발생 이전에 이 지구라고 하는 자연(물질)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지금은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주관적 관념론자는 세계가 자신의 주관, 감각에 의해 구성된다고 하고, 객관적 관념론자는 세계는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절대정신이 외화(外化)한 것이라고 하며, 신비주의자, 종교인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하여 그들이 관념론의 진영을 형성한다.


  유물론은 이것에 대해 자연의 근원성을 자연과학의 발전에 의해 직접적으로 확증했다. 물질과 의식의 이 대립은 철학의 근본문제인 세계관의 대립으로서 절대적이지만, 이것은 물질이든 의식이든지 형이상학적 이원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대립에서 벗어나면 의식도 또한 물질에 의존하고 양자의 대립은 이 한도에서 상대적이다. 물질이 제1차적이라는 것은 유물론에 대한 편견에서 볼 수 있는 물질이 중요하며 정신이 하찮은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물질이 본원적인 것에 의해 세계의 통일성도 또한 그 근거를 물질에서 발견하고 있다.


   “세계의 현실 통일은 그것의 물질성에 있다. 그리고 이 물질성은 두 세 개의 기이한 문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학과 자연과학의 아주 긴 발전에 의해 증명될 뿐이다”(엥겔스, 『반듀링론』)


  세계의 통일성을 어떤 정신이나 신에 귀착시키는 관념론철학과는 달리 유물론철학에 의해 비로소 자연, 사회, 인식의 대상에 유기적 연관과 현실적 기반이 부여된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뇌수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며 물질의 최고형태로서의 뇌수의 작용인 것이며, 관념이라는 것도 타고나면서 갖추어진 것이 아닌 자연, 사회의 객관적 대상이 인간에 의해 과학, 산업, 사회적 실천을 통해 인간의 의식에 반영되는 것이라는 것, 의식의 심화와 관념의 발달도 사회적으로 물질적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삼라만상이라고 하는 이 세계의 통일은 확실히 물질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면 물질이란 무엇인가. 유물론의 물질관념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레닌에 의해 가장 완전하게 정의되었다.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부여된 것으로 우리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면서 우리의 감각에 의해 모사되고 촬영되며 반영된 객관적 실재를 표현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이다”(『유물론과 경험 비판론』)


  유물론의 원칙을 정리해 보자. 첫째, 물질이란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객관적 실재라는 것에 의해 관념을 과장하는 주관적 관념론과 대립한다. 둘째, 물질이 감각을 통해서 부여되는 것에 의해 이성만을 중시하는 객관적 관념론에 대립한다. 셋째, 물질이 감각에 의해 모사되는 것에 의해 인식의 불가능성을 설파하는 불가지론에 대립한다.


 특히 세 번째 원리의 반영모사론(反映模写論)은 인식의 가능성에 대한 회의적 혹은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불가지론자(흄, 칸트) 또는 현실의 합리적 인식으로 진전하지 않으려는 니힐리즘, 실존주의 철학을 비판하는 측면에서는 중요한 것이 된다. 엥겔스는 불가지론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천, 즉 실험과 산업”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를 들면 붉은 풀의 색소 아리자닌을 들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지금은 이미 자연에서 구하지 않고 코르타르로부터 훨씬 싸고 간단하게 제조한다. 아리자닌이라는 물자체는 우리에 대하여 물이 되었다”(『포이어바흐론』)


 인식의 원동력은 실천이다. 자연과학이 발달하고 산업이 진전하는 것에 의해 미지의 분야는 우리의 공유인식이 된다. 지금은 지구 이외의 다른 천체에 대해서도 인식은 확대되고 있다. 인식이 무한하게 확대되고 완전하게 되어가는 것은 절대적 진리이며 그 인식이 시대의 제약을 받는 것에 의해 그것은 상대적 진리인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레닌의 물질에 대한 인식론적 범주는 물질의 여러 가지의 구조, 성격을 규정하는 자연과학적 범주와는 별개의 것이다. 물질의 자연과학적 카테고리는 과학의 진보에 수반하는 인식의 심화에 의해 점차 다면적이고 고도의 것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물질은 이런 것이라고 하는 인식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물질이 발견될 때마다 ‘물질은 소멸했다’고 하는 마흐주의자가 물질의 철학적 개념과 자연과학적 개념을 구별하지 않고 혼동한 것을 보아도 이 구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다음으로 물질의 존재양식과 속성에 대해서인데 물질은 어떤 특정의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며 끊임없는 자기운동의 과정이다. 유물론의 물질관은 형이상학과 같은 절대적이고 도식적인 고정관념 및 주관적 관념과 같은 자의적이고 신비적 관념을 포함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적대적인 듀링은 공간과 시간을, 운동과 물질을 형이상학적으로 잘라내고 절대적인 항상 불변의 상태에 있는 신비적인 세계 매개물질을 고안하는 것에 의해 물질의 변증법적 운동을 부정했다. 엥겔스는 간결하게 다음과 같이 총괄하고 있다.

 

   “공간과 시간은 모든 존재의 기본형식으로 시간의 밖에 있는 존재라는 것은 공간의 밖에 있는 존재라는 것과 같은 것으로 대단히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운동은 물질의 존재양태이다. 운동이 없는 물질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은 물질이 없는 운동이 생각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운동은 물질 자체와 같은 것으로 창조할 수도 소멸할 수도 없는 것이다” (『반듀링론』)


  마지막으로 유물론의 역사를 보자. 18세기의 기계적 유물론 즉 프랑스유물론은 확실히 변증법적 발전관의 결여 등 기계적이었지만, 자연과학을 중시하고 실증적 견지에서 물질의 구명을 향한 위대한 성과를 남겼다. 그런데 19세기의 속류 유물론은 그 이름대로, 예를 들면 의식을 뇌수의 분비물로서 생리학적으로 파악하려 하여, 유물론을 비속화한 수준 이하의 유물론이었다. 19세기에 활약한 헤겔좌파인 포이어바흐가 ‘하반신은 유물론자, 상반신은 관념론자였다’고 말한 것도 포이어바흐 자신의 결함(사적 유물론에 그쳤다) 뿐만 아니라, 당시 뒤처진 독일사회의 제약과 당시의 속류 유물론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 준다. 유물론을 변증법적으로 기초짓고 자연뿐만이 아니라 자연과의 물질대사에 의존하는 인간사회 및 그 반영으로서의 의식에 적용한 것이 새로운 유물론, 맑스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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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未知生焉知死 >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1)

 

세계자본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공동토의)

   -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야마시로 무쯔미(山城むつみ),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야마시로 : 가라타니씨의 『트랜스크리틱』은 『군조오』(群像) 4월호에서 완결되었지만, 나는 그 후반부, 특히 그 「맺음말」을 읽고 이 연재 전반부의 칸트론이나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과 같은 이전의 맑스론과의 차이에 놀랐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라타니씨라면 그러한 것은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90년에 나온 이와이 카쯔히토(岩井克人)씨와의 대화 『끝없는 세계』에서는 그 후반부에서 가라타니씨는 코뮤니즘에 대하여 「세계자본주의가 곧 코뮤니즘이다」이라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것을 읽었을 때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나 투쟁을 말하지 않고, 코뮤니즘과 세계자본주의를 직접 연결하여 말하는 가라타니씨의 표현에는 지금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남았다. 그런데 이번의 『트랜스크리틱』에서는 가치형태론을 기초로 하면서 자본에 대한 저항원리를 적극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한 전회이며 변모라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탐구Ⅰ』 이후의 주장인 「파는 입장」의 논의에 관한 것입니다. 「파는 입장」을 강조한 가라타니씨의 논의는 대단히 자극적이긴 하지만, 그 때 이후 내가 줄곧 의문스럽게 생각한 것은 노동력을 파는 입장이라는 것이 되는 경우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노동력을 판다, 예를 들면 실업자가 직업을 찾는다, 여기에도 「파는 입장」 일반에 관계된 목숨을 건 비약이 있는 것이지만, 그 윤리성을 말하는 것만으로는 세계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원리가 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트랜스크리틱』에서는 「사는 입장」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그것에서 자본에 대한 투쟁원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것도 대단한 이동이라 생각합니다. 가라타니씨의 경우 논점의 이동이라는 것은 지금까지도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이번의 『트랜스크리틱』의 맑스론의 결론부의 이동은 그러한 것과 차원이 다른 커다란 이행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 큰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가라타니 : 야마시로씨로부터 『끝없는 세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사실 그것은 소련 붕괴의 시기에 썼던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소련적인 국가자본주의가 보통의 코뮤니즘 혹은 사회주의로서 생각되었지만, 코뮤니즘은 그런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자본주의의 진전을 통해 나온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와 페르시아만 전쟁 후에 세계자본주의를 아이러니컬하게 긍정한다는 입장은 그 아이러니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단지 긍정밖에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면 그 단계에서 지금까지 데리다나 들뢰즈가 갖고 있는 비평성이 상실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들뢰즈나 데리다는 그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맑스주의자인 것을 처음 표명한 것이며, 그것을 알지 못했고 또한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은 얼치기는 여전히 데리다나 들뢰즈를 운운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80년대까지 래디컬한 의미를 갖고 있던 사상이 90년 이후 그 의미를 상실함으로써 그런 단계에서 나는 새롭게 맑스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끝없는 세계」라고 나는 말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종말을 항상 연장시켜 가는 운동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운동(자본축적의 운동)은 신용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종교적인 세계와 같습니다. 그렇다기 보다는 종교의 편이 거기에서 온다. 자본축적의 욕동은 물(物)을 갖고 싶다고 하는 욕구나 타자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과는 이질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교환가능성 권리의 축적에 대한 욕동으로 개개의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쾌감원칙의 피안」에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프로이트가 말하는 죽음의 욕동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자본의 운동은 자동적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과반수가 죽어도 그것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면 실제로 환경오염이나 식량위기로부터 인류의 과반수는 죽겠지요. 그것은 대체로 후진국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본의 운동은 끝나지 않지만, 그것은 그것에 대항하는 운동이 없으면 끝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자동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것은 윤리적인 동기 이외에는 없다. 맑스의 경우도 코뮤니즘의 동기는 윤리적인 것으로 그것은 초기부터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윤리적인 동기가 강하다 해도 자본의 운동 자체에 그 계기가 없다면 그것만으로는 자본의 운동을 그치게 할 수 없다. 예전은 이렇게 생각했다. 자본의 운동이 노동자계급을 점차 궁핍화시키고 비인간적인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거기로부터의 해방으로서 혁명이 발생한다고. 이것은 공황대망론(恐慌待望論)이나 카타스트로피대망론으로 지금까지도 있는 사고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대불황은 자본축적의 발전에서 하나의 과정이며, 국가는 어떤 형태로든 그러한 모순을 해소하려고 하며, 그것을 노동자도 지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국가자본주의적인 경향을 강하게만 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양기(揚棄)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자본과 국가에 어떻게 대항하는가. 그 때 나에게는 아무 것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현상보다도 나쁜 상태로 귀착되어 버린다. 현재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 그것이 가져온 불평등이나 폐해를 국가적인 재분배에 의해 시정해 나간다고 하는 사고가 지배적이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사회민주주의로 유럽제국도 미국도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소프트한 국가자본주의이며 자본의 운동을 정지시키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시장경제」라는 개념은 그것이 자본의 축적과정이라는 것을 소거하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신고전파 경제학자가 말하는 것처럼 기업주체와 소비자주체가 있고 시장에서 생산과 교환이 조정된다고 하는 이미지인 것입니다. 결국 시장경제는 G-W와 W-G라는 교환을 가장 효율적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환이 화폐에 의해서만 행해진다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 화폐가 자본으로 전화한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국 G-W와 W-G는 G-W-G'라는 자본의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자본의 운동을 은폐하고 교환이 합리적으로 조정되는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것이 이른바 근대경제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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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인식의 생물학적 뿌리

밤참을 먹으면서 잠시 여유를 부린다고 새로 나온 책들을 검색해보다가 대번에 '필을 받은 책'은 마투라나/바렐라의 <앎의 나무>(갈무리, 2007). 작년 바로 이맘때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가 출간된 바 있어서 벚꽃소식과 함께 '최근에 나온 책들'로 소개한 바 있는데(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57338) 다시 1년만에 그들의 주저라고 할 <앎의 나무>가 마저 출간된 것. 이번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로 출간된 바 있어서 '오래된 새책'에 해당한다. 역자도 같은 것으로 보아 약간 손질해서 다시 낸 듯하다. 물론 제목은 '앎의 나무'로 바뀌었고.

 

 

 

 

소개에 따르면, "칠레의 생물학자이자 철학자인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구성주의적 관점의 생물학 책"으로 "지은이들은 이 책에서 삶과 앎의 근본과정에 관한 자신들의 체계관을 일반인들도 알기 쉽게 선보이고 있다. 다윈주의의 영향아래 생물을 객관적인 바깥세계에 얽매여 있는 일종의 '노예'로 보는 종래의 관점과는 달리 이들은 생물의 '자유함'을 다양한 생물학적 지식을 통해 증명하고 있다."

거기서 핵심적인 개념이 '오토포이에시스'이다. 나는 작년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칠레 출신의 인지생물학자이자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움베르또 마뚜라나; 1928- )의 대담집 <있음에서 함으로>(갈무리, 2006)이다. 책은 독일어 원저가 2002년에 나오고, 대본이 된 영역본이 2004년에 나왔다고 하니까, 따끈한 책이다. 마투라나는 흔히 동료인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찍지어서 불리는 이름인데, autopoiesis, 즉 '자기생산' 혹은 '자가생산'의 개념을 창시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는 이미 <인식의 나무>(자작아카데미, 1995)란 책이 오래전에 소개됐었는데(나도 그 책을 통해서 이름을 처음 접했다), 마투라나는 자기조직 체계에 대한 관심의 고조와 함께 최근에 인문학에서는 부쩍 자주 눈에 띄는 이름이 되었다."

독어판은 영어판과 마찬가지로 1987년에 출간됐고, 영역본의 경우엔 지난 1992년에 개정 3판이 출간됐다. 이번에 나온 국역본 갈무리판은 자작아카데미판과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다. <인식의 나무>는 내가 따로 원서를 갖고 있지 않지만 그 전작인 <오토포이에시스와 인지>(1980)는 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이다. 추세로 보아 이 책은 내년 이맘때 번역본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07.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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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Ritournelle > * 비정규직 담론은 불평등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 담론비평(2007. 4. 17) 

"비정규직은 불평등의 중심문제 아니다"

 

정이환 교수, '경제와사회'에서 비정규직 편중 담론에 일침

 

리뷰팀 review@dambee.net

 

▲ 부품사 구조조정에 항의하는 모습

기다리던 '경제와사회' 봄호가 출간되었다. 여러 편의 주목할 만한 논문들이 많지만, 그가운데 먼저 정이환 서울산업대 교수(사회학)의 '기업규모인가 고용형태인가-노동시장 불평등의 요인분석'을 먼저 소개한다. 정 교수는 비정규직 그자체에 집중된 현재의 양극화담론을 송곳으로 예리하게 잘라내서 그 빈틈과 허점을 지적하고 있다.

노동시장 양극화, 그 중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이 불평등의 중심적 문제라는 것은 세간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그러나 그건 그렇게 자명한 사실은 아니다. 특히 정책 대안의 실행을 염두에 둘 때에 그러하다. 왜 그러한가.

정 교수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노동패널조사', '사업체근로실태조사' 등의 원자료를 분석해 노동시장 격차의 구체적인 모습을 살펴본다. 특히 '고용형태'와 '사업체규모'에 초점을 맞춰서 분석했다. 

그 결과 고용형태와 사업체 규모가 임금격차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둘 중에서 고르라면 정규직/비정규직이라는 고용형태보다는 사업체 규모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고용형태보다 사업체 규모가 근로조건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큼에도 불구하고 고용형태, 즉 정규/비정규직인가의 여부가 노동시장 불평등의 요인으로 더 부각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에 대해 정교수는 첫째, 기간제 노동자 등 비정규직이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을 든다. 이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급속도로 높아졌고 따라서 비정규직 문제를 중심으로 노동시장 문제를 보려는 경향이 생긴 것이다.

둘째, 정규직/비정규직 간 격차는 기업규모 간 격차에 비해 공평성 원리에 더 위배되고 더 심각한 불평등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간 근로조건 격차는 어디까지나 서로 다른 기업 간의 격차로 보여지고, 게다가 한국에는 사회적 표준임금 관행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기업간 근로격차는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는 것.

이에 비해 정규/비정규직 간 격차는 많은 경우 동일 사업체 내에서의 격차이며,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간의 불평등인 경우도 많다. 이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 그리고 제3자에 의해서도 부당한 차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기업규모별 불평등이 고용형태별 불평등보다 덜 문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정 교수는 강조한다. 왜냐하면 기업규모별 불평등이 훨씬 클뿐 아니라,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추세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업체 내부의 불평등이 사업체간 불평등보다 더 부정의하거나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시장 불평등 문제는 종합적이고 거시적으로 판단되어야 하며 대안도 종합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정 교수는 주문한다. 그 대안은 물론 우리 노동시장에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영세업체 근로자들을 위한 대책을 충분히 포함하는 것이어야 하며, 기업규모별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정부나 노동계의 대안은 이들보다는 비정규직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훨씬 더 잘 조직화, 동원화되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영세업체 근로자들은 비정규직보다 더 열악하지만 조직,동원화되지 못하며 사회적 발언도 미약하다. 이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다양한 방법에 의해 투쟁하면서 자신들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쟁점화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을 직간접적으로 고용한 대기업에 노동조건 개선요구를 할 수 있다는, 좀 다르게 표현하면 '기댈 언덕'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정 교수는 분석한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통도 크기 때문에 이들이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은 당연하나, 이것이 노동시장 불평등에 대한 전체적 대안과 잘 결합하지 못하는 경우 일부 비정형 노동자의 조건은 좋아지지만, 노동시장의 전체적 평준화는 잘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정 교수는 일례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경우를 든다. 그들은 지난 수년간 정규직 노조의 대리교섭으로 인해 임금이 빠르게 상승했다. 그 대신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와 사외 부품사 근로자 간의 임금격차는 크게 벌어졌다. 정 교수는 조성재의 연구를 인용하면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임금은 사외 1차 부품사에 비해서는 30%, 2차 부품사에 비해서는 51%나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한다.

정 교수가 기본적으로 제안하는 대안의 방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정부는 영세업체 노동자들을 위해 근로기준법의 실질적 적용범위를 5인 미만 사업체에까지 확대하고 최저임금 수준을 대폭 올릴 것, 그리고 노동조합은 거시적 관점에서 노동시장 전체적 조건 평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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