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머리 여가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3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오세곤 옮김 / 민음사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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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이근삼의 원고지가 생각이 났다. 이근삼의 희곡은 아마도 교과서에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주인공이 읽어가는 신문내용은 몇 년 전과 현재가 다르지 않다. 동일한 내용의 신문을 읽는 장면에서 아, 부조리란 이런 것이로구나 하며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놀라운 것은 이 희곡이 60년대 작품이라는 사실. 2018년의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성숙해졌나 하고 생각하면 감탄이 아니라 탄식이 나온다. 1960년대의 대한민국과 2018년의 대한민국이 연결되는 고리가 곳곳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근삼의 이 희곡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공연이 되는 이유일 것이다. 안타깝게도 외젠 이오네스코의 연극에서는 이 정도의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의 연극 속 세계와 내가 속한 세계와는 시간과 장소와 언어의 간극이 있고, 그 간극만큼 거리가 느껴졌다. 프랑스어로는 분명히 급소를 찌르고 재기발랄했을 대사들이 번역과 각주를 거치다 보니 생동감이 떨어져서 연극 특유의 치고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부족하고 다소 싱거워졌다. 외젠 이오네스코의 희곡은 아쉽게도 '나에게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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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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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z Kafka 의 변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갑자기 일어났더니 벌레가 되어 있는 남자. 이걸 인간의 존엄성이나 실존과 연결시켜서 해석하려고 하면 머리가 아파지지만, 단순하게 내가 아주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한 번이라도 받았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박에 이 소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아주 하찮은 인간이 된 것 같은 느낌을 한 번도 받아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실망, 나에 대한 낯선 느낌, 주변에서 나를 외면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끝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문학사적인 위치를 생각하면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기억하고, 좋아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한다. 아마도 정도는 다르지만 소설 속 그레고리의 상황에 어떤 의미로든 공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일 것이고, 이 소설이 100년이 지나도 생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마 향후 100년 동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유대인 집안이면서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령 있었던 지금의 체코에서 태어나 평생을 자랐고, 독일어 교육을 받고 독일어로 글을 쓴 작가. 나는 문학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다른 그 무엇도 아니고 다른 그 무엇도 될 수 없다(Ich habe kein literarisches Interesse, sondern bestehe aus Literatur, ich bin nichts anderes und kann nichts anderes sein)라는 말을 남길 정도로 문학을 사랑했으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노동 보험 공단에서 일하게 된다. 이런 그의 배경 때문에 평생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상당히 고민을 했을 것이고, 이는 사회적 소외감으로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자수성가한 유대인 상인이었던 아버지는 세 아들 중 두 명이 일찍 죽고 남은 프란츠에게 건 기대가 컸기에, 보통 사람들이 다녔던 체코어를 쓰는 학교 대신 당시 지배층이 주로 사용했던 독일어를 사용하는 학교에 보낸다. 어릴 때부터 병약하지만 독서를 즐겼고, 감성적인 반면 출세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아들을 아버지는 고함을 지르고 때리며 키웠는데, 이런 경험이 카프카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을 지는 이 책에 수록된 소설 <판결>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카프카의 직장은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로 근무 시간이 짧았고, 2시쯤 퇴근하고 귀가한 후 3시부터 7시 반까지 잠을 자고, 밤 11시경부터 3시간쯤 글을 쓰다가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고 한다. 그의 창작 활동을 배려하지 않고 수시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 글을 썼다고 하는데, 이것은 가족에게 전업 작가의 꿈을 인정받지 못하고,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작가의 꿈을 끝내 놓지 않으려는 카프카의 노력이라고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요즘에는 시작할 때에는 직장 생활과 창작을 병행하더라도, 어느 궤도에 오르면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분들이 많은데, 생전에 카프카는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 스스로 상당수 작품을 찢거나 불태우고, 길거리에서 자신의 글을 찢고 날리며 미친 듯이 웃어 경찰에 끌려간 적도 있었고,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키려고 했다고 한다. 평생 인정받지 못했던 카프카는 약혼과 파혼을 반복하다 결혼하지 않고 자식도 남기지 않은 채 아버지보다 7년 일찍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인생을 놓고 보면 비극적이지만, <변신>이나 <판결> 등을 보면 소설 속 대부분의 절망이 그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생각도 들고, 여동생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 정권 하에서 가스실에서 사망했다는 후일담을 접하고 나면 카프카에게 허락된 삶이 이 이상 최선일 수는 없지 않겠나 하는 다소 비관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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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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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아마 가장 유명한 소설의 첫문장을 꼽으라면 빠지지 않을 문장일 것이다.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언젠가는 꼭 읽어야겠다고 생각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설국. 온통 눈으로 뒤덮인 풍경. 일본의 눈 하면 크게 떠오르는 작품이 내 개인적으로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영화 러브레터, 또 하는 소설 설국이었다. 둘 사이의 차이라면 러브레터는 여주인공을 맡은 여배우가 중년에 이른 현재까지 몇 번이고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영화를 보고 있다는 점이고, 설국은 한 번도 읽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동양에서는 두 번째, 일본에서는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화려한 수식 때문에 겁을 많이 먹었던 것 같다.

손님을 마중 나온 여관 안내인은 화재 현장의 소방수처럼 엄청난 눈옷 차림이었다. 귀를 감싸고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다. 대합실 창문으로 선로를 바라보며 서 있는 여자도 푸른 망토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마치 눈에 그려지는 것 같은 묘사이다. 눈이 쌓인 훗카이도의 모습을 한번도 본 적이 없더라도 외부와 차단된 것 같은 고요하고 정갈한 풍경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다.

「이 정도가 영화란 말인가」 하고 시마무라는 처마 끝에 귀엽게 매달린 고드름을 바라보며 여관 안내인과 자동차에 올랐다. 흰 눈 빛에 가옥의 낮은 지붕들이 한층 낮아 보이고, 마을은 고즈넉이 바닥으로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도쿄에서 한 남자가 기차를 타고 설국을 찾아온다. 시마무라. 그는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으로 사는 유부남이다. 서양 무용에 취미를 두어 가끔 비평글을 쓰고 있는데, 일본춤이 아닌 서양무용에 호기심을 갖는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서양의 인쇄물에 의지하여 서양무용에 대해 글을 쓰는 것만큼 편한 일은 없다. 보지 못한 무용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다. 이보다 더한 탁상공론이 없고 거의 천국의 시에 가깝다. 연구라 해도 무용가의 살아 움직이는 육체가 춤추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의 상상으로 서양의 언어나 사진에서 떠오르는 그 자신의 공상이 춤추는 환영을 감상하는 것이다. 겪어보지 못한 사랑에 동경심을 품는 것과 흡사하다.

실제를 접하지 않으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에 몰두하는 그가 인생과 사랑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이고 반응할지 충분히 알 것 같은 부분이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이 직접 동경에서 일부러 만나러 온 여자, 고마코에 대해서도 어렴풋이 깨닫는 순간이 있다.

이러한 그의 일본춤 이야기가 여자로 하여금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데 도움을 준 것은 그의 지식이 모처럼 현실적으로 쓸모가 있었다고나 해야 할 처지였지만, 역시 시마무라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서양무용 취급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상상은 고마코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일년에 한 번 정도로 고마코를 찾아오는 시마무라가 두 번째 설국행 기차를 탔을 때 기차 안에서 발견한 요코에 대한 체험도 비슷하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게다가 인물은 투명한 허무로, 풍경은 땅거미의 어슴푸레한 흐름으로, 이 두 가지가 서로 어우러지면서 이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처녀의 얼굴 한가운데 야산의 등불이 켜졌을 때, 시마무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사실 이 부분을 읽으면 시마무라의 가슴을 떨리게 한 요코와 시마무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으나 소설이 다 끝날 때까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시마무라 주변의 모습에 대한 묘사를 통해 시간의 흐름과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날은 소리가 달라요」하고 눈 온 뒤 맑은 하늘을 올려다본 고마코가 말한 적이 있었다. 공기가 다른 것이다. 극장 벽도 없고 청중도 없고 도시의 먼지도 없어, 소리는 다만 깨끗한 겨울 아침을 맑게 지나며 멀리 눈 쌓인 산들까지 곧바로 울러 퍼졌다.

그날, 첫눈이 내렸다. 올해도 벌써 바다와 산이 울렸을까. 시마무라는 혼자 여행을 다니며 온천에서 고마코와 줄곧 만나는 사이, 청각이 묘하게 예민해졌는지 바다와 산이 울리는 소리를 그저 연상만 해도 그 먼 울림이 귓속을 스치는 것 같았다.

아아, 은하수, 하고 시마무라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 순간, 은하수 속으로 몸이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은하수의 환한 빛이 시마무라를 끌어올릴 듯 가까웠다. 방랑중이던 바쇼가 거친 바다 위에서 본 것도 이처럼 선명하고 거대한 은하수였을까. 은하수는 밤의 대지를 알몸으로 감싸안으려는 양, 바로 지척에 내려와 있었다. 두렵도록 요염하다.

스웨덴의 한림원은 노벨상 수여 이유로 “자연과 인간운명에 내재하는 존재의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인 언어로 묘사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문장으로 보면 굉장히 어렵다. 설국. 눈이라는 것은 쌓이고 녹고 다시 내리고를 반복한다. 시마무라가 고마코를 만나러 올 때마다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달라지는 부분이 있고, 이미 지나가 버린 일들은 다시 되돌리기 어려우며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흔적을 남긴다. 읽다 보면 굉장히 쓸쓸해지는 부분이 있다. 어쩌면 그 부분이 이 소설이 사람들의 감정에 조용히 가 닿는 부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제가 여기 온 지 5년 됐어요. 처음엔 이런 데서 어떻게 사나 하고 불안했죠. 기차가 개통되기 전엔 쓸쓸했어요. 당신이 처음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년째예요.」 그 3년이 채 안 되는 동안 세 번 왔고, 그때마다 고마코의 처지가 바뀌어 있었던 것을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이 부분에서는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생각나기도 했다.

눈 내리는 계절을 재촉하는 화로에 기대어 있자니, 시마무라는 이번에 돌아가면 이제 결코 이 온천에 다시 올 수 없으리라는 느낌이 들었다......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 부분에 다다라서야 시마무라와 고마코, 요코의 인연이 이렇게 한 매듭을 지었구나 하고 알 수 있다. 사실 이 책을 계속 읽다 보면 줄거리가 대체 무엇인지, 그래서 작가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살 수 있게 되고부턴 도저히 엄두를 못 내요, 물건을 함부로 다루니까.

와 같은 문장이나

거대한 오로라처럼 은하수는 시마무라의 몸을 적시며 흘러 마치 땅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고요하고 차가운 쓸쓸함과 동시에 뭔가 요염한 경이로움을 띠고도 있었다.

와 같은 문장, 또

불길은 더욱 활활 타오를 뿐인데, 높은 데서 별이 빛나는 드넓은 하늘 밑을 내려다보니, 마치 장난감 불처럼 고요했다.

이러한 문장을 읽으면서 동경과 그리움은 한없이 허용하면서도 감정의 도취나 접촉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새벽 추위에 놀라 사마무라가 베개에서 머리를 들어보니, 하늘은 아직 밤 빛깔인데 산은 이미 아침이었다.

이렇게 무심히 지나가는 것 같은 문장에서도 감각적 서정이 묻어난다.

곰처럼 단단하고 두꺼운 털가죽이라면 인간의 관능은 틀림없이 아주 다르게 변했을 것이다. 인간은 얇고 매끄러운 피부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와 같은 문장은 아주 관능적이다. 책을 읽으면서 온전히 감각적으로 설국을 느낄 수 있다.

올려다보고 있으니 은하수는 다시 이 대지를 끌어안으려 내려오는 듯했다.

와 같은 문장이 마지막 대목에서

정신없이 울부짓는 고마코에게 다가가려다, 시마무라는 고마코로부터 요코를 받아 안으려는 사내들에 떼밀려 휘청거렸다. 발에 힘을 주며 올려다본 순간, 쏴아 하고 은하수가 시마무라 안으로 흘러드는 듯했다.

라는 식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보면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정독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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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실격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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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주인공 요조가 작가 자신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비정상적인 논리로 자신의 언행을 지속적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내내 하던 도중 퍼뜩 든 생각이 ‘아, 요조는 다자이 오사무 자신이로구나’하는 생각이었다. 선천적인 것처럼 보이는 요조의 우울함, 좌절감, 죄의식은 나같이 무딘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읽는 내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난해한 것은 결국 그의 의식 세계가 난해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몇 번을 반복하여 책을 읽어도 그 막막한 감정은 전달이 되었지만 완전히 공감하기는 솔직히 어려웠다. 그나마 책으로 읽었을 때 그에게 연민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실제 이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면 친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작품을 통해서는 그의 의식과 소통하고 감정에 공감할 수는 있겠다. 문학이라는 것은 어쩌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담은 소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인간을,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비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무시당해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면 찬양을 받을 수 있으니까. 요조의 모든 생각과 감정이 전부 비정상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 흐르는 수많은 생각들, 우울함, 죄의식, 좌절감, 열등감, 자기 파괴에의 욕구 등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깐씩은 품을 수 있고 다소나마 머릿속으로도 상상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이로 인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 실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생활에서 인간 실격인 사람이라도 소설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인간 실격


서문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그저 보기 싫은 주름을 잔뜩 잡고 있을 뿐이다. ‘주름투성이 도련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만큼 정말이지 괴상한, 왠지 추하고 묘하게 욕지기를 느끼게 하는 표정의 사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괴상한 표정의 소년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소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겉멋이 잔뜩 들었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경박하다고 하기도 그렇다. 교태를 부리고 있다고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멋쟁이라고 하는 것도 물론 부적합하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여자 같은 미모를 가진 이 학생한테서도 역시 어딘지 악몽 비슷한 섬뜩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ᄁᆞ지 이렇게 이상한 미남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아아,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상조차 없다. 특징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이 사진을 보고 나서 눈을 감는다 치자. 나는 이미 그 얼굴을 잊어버렸다. 방 벽과 작은 화로는 생각나지만 방 주인의 얼굴은 안개가 스러지듯 사라져서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얼굴이다. 만화조차도 안 된다. 눈을 뜬다. 아아, 이런 얼굴이었지. 이제 생각난다. 이런 기쁨조차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눈을 뜨고 사진을 다시 봐도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다. 그저 무턱대고 역겹고 짜증나고, 나도 모르게 눈길을 돌리고 싶어진다.
소위 ‘죽을 상’이라는 것에도 뭔가 좀 더 표정이라든가 인상이라든가 그런 것이 있을 텐데, 사람 몸뚱이에다 짐 끄는 말의 목이라도 갖다 붙이면 이런 인상이 되려나? 어쨌든 딱히 무엇 때문이랄 수도 없이 보는 사람을 섬뜩하고 역겹게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기묘한 얼굴의 남자를 역시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첫 번째 수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은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그야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푸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존경을 받을 뻔했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개념 또한 저를 몹시 두렵게 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에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수기

바닷가, 파도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바다 가까운 해안가에 꽤 큰 시커먼 줄기의 산벚나무가 스무 그루도 더 늘어서 있어 신학기가 되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산벚꽃이 끈끈해 보이는 갈색 어린잎과 함께 현란한 꽃을 피우고, 이윽고 꽃이 질 때에는 꽃잎이 수없이 바다에 흩뿌려져 해면을 아로새기며 떠돌다 파도를 타고 다시 기슭으로 되돌아오는 벚꽃 모래사장을 그대로 교정으로 쓰고 있는 동북 지방의 어떤 중학교에, 저는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도 그럭저럭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교의 모자 휘장에도, 교복 단추에도 도안된 벚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된 나날의 불안과 공포.
겉으로는 여전히 서글픈 익살을 연기해서 보두를 웃기면서도 문득 자기도 모르게 괴로운 한숨이 나왔습니다. 무슨 짓을 하든 모두 다케이치가 낱낱이 간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녀석이 이제 곧 아무한테나 이 얘기를 퍼뜨리고 다닐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 이마에 축축하게 진땀이 솟았고, 미치광이 같은 묘한 눈초리로 희번덕거리며 공연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침, 낮, 밤, 스물 네 시간 꼬박 다케이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가 비밀을 퍼뜨리지 못하게 감시하고 싶었습니다. 그한테 들러붙어 있는 동안 내 익살이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니라 진짜라고 믿게끔 할 수 있는 노력이란 노력을 다하고, 잘만 된다면 녀석하고 다시없는 친구가 돼버리고 싶다, 만일 이도 저도 다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그의 죽음을 빌 수밖에 없다, 라고까지 외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를 죽이려는 마음만은 안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한테는 인간 중에서 여성 쪽이 남성보다도 몇 배나 더 난해했습니다. 제 가족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았고 또 친척 중에도 계집애가 많았으며 예의 ‘범죄’를 저지른 하녀 등도 있어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하고만 놀며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저는 정말이지 살얼음을 밟는 느낌으로 그 여자들을 대해 왔던 것입니다. 거의, 아니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실수를 저질러서 끔찍한 상처를 입기도 했는데, 그게 또 남자들한테서 받는 상처하고는 달라서 내출혈처럼 몹시 불쾌하게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좀처럼 치유가 안 되는 상처였던 것입니다.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눌러서 감추고 감추었던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하고 혼자 인정했지만 그 그림은 다케이치 외에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제 익살 밑바닥에 있는 음산함을 간파당하여 하루아침에 경계당하게 되는 것도 싫었고, 또 어쩌면 이것이 내 정체인 줄 모르고 또 다른 취향의 익살로 간주되어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도니다면 그건 제일 가슴 아픈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그림은 바로 이불장 깊숙이 집어넣어 두었습니다.

저한테는 단체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청춘의 감격’이라든가 ‘젊은이의 긍지’라든가 하는 말은 듣기만 해도 닭살이 돋았고, ‘고교생의 기개’라느니 하는 것은 도저히 좇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교실도 기숙사도 비뚤어진 성욕의 쓰레기통으로 느껴졌으며, 저의 완벽에 가까운 익살도 거기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노는 것뿐이야, 놀이 상대로 사귀는 것뿐이야, 라고 언제나 그를 경멸하고 때로는 그와의 교제를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했으면서도, 그하고 같이 다니는 사이에 저는 결국 이 사나이한테조차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는 혼자서 전차를 타면 차장이 무섭고, 가부키 극장에 가고 싶어도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현관 계단 양쪽에 죽 늘어서 있는 안내양들이 무섭고, 레스토랑에서는 등 뒤에 조용히 서서 접시가 비기를 기다리는 웨이터가 무섭고, 특히나 돈을 치를 때 아아, 그 어색한 손놀림.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플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서 동류로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저는 언제나 창녀들로부터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샀습니다. 아무런 타산도 없는 호의, 강요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호리키가 입을 일그러뜨리며 말했습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궁상맞은 여자는.......”

소위 속물들의 눈으로 보면 쓰네코는 취한의 키스를 받을 가치조차도 없는, 그저 초라하고 궁상맞은 여자였던 것입니다. 의외였지만 뜻밖에도 저는 청천벽력에 박살 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끝도 없이 술을 마셨고, 어질어질 취해서는 쓰네코와 마주 보며 서글픈 미소를 나눴습니다. 글쎄 듣고 보니 이건 묘하게 지쳐빠진 궁상맞은 여자로군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없는 사람끼리의 동질감(빈부의 불화라는 것이 진부한 것 같아도 역시 드라마의 영원한 테마 중 하나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만)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와서 쓰네코가 사랑스럽고 불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그렇게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일어서서 소매에서 지갑을 꺼내어 여니 동전 세 닢뿐. 수치심보다도 참담한 느낌이 엄습했고 금방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센유관의 내 방. 교복과 이불만이 남아 있을 뿐, 이제는 더 이상 전당포에 맡길 만한 것 하나 없는 황량한 방. 그 밖에는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잔무늬 옷과 망토 뿐. 이것이 내 현실인 것이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우물거리고 있으니까 여자가 일어나더니 제 지갑을 들여다봤습니다.
“어머나, 겨우 그것뿐이야?”
무심한 목소리었습니다만 그것 또한 뼈에 사무치게 아팠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사랑한 사람의 말이었던 만큼 쓰라렸습니다. 동전 세 닢은 돈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제가 맛보지 못했던 기묘한 굴욕이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굴욕이었습니다. 필경 당시의 저는 아직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겠죠. 그때 저는 자진해서라고 죽으려고 진심으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검찰청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검사로부터 간단한 취조를 받았습니다. 검사는 사십 세 전후의 조용한(만일 제가 미남이었다 해도 그것은 소위 사악한 미모였음에 틀림없습니다만, 그 검사의 얼굴은 ‘올바른 미모’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총명하고 고요한 기운을 띠고 있었습니다.) 사람이었고 곰살맞은 인품이 아닌 것 같아서 저도 전혀 경계하지 않고 멍하니 진술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의 기침이 나기에 저는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었는데 문득 거기 묻은 피를 보고 이 기침 또한 무슨 소용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천박한 술책으로 쿨럭쿨럭 하고 두어 번, 거기다 가짜 기침까지 요란하게 보태어 기침을 한 후에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검사 얼굴을 흘깃 본 순간.
“진짜야?”
조용한 미소였습니다. 진땀이 석 되 흘렀습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콱 죽고 싶어집니다. 중학교 시절, 저 바보 다케이치한테서 부러 그랬지, 라는 말로 등에 칼을 맞아 지옥으로 굴러 떨어졌던 때의 느낌 이상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기분이었습니다. 그 일과 이 일, 이 두 가지는 제 생애의 연기 중 대실패의 기록입니다. 검사의 그런 조용한 모멸에 맞닥뜨리느니 차라리 십 년 형을 구형받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할 때조차 가끔 있을 정도입니다.


세 번째 수기

그럴 때마다 제 뇌리에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중학교 시절에 그렸던, 다케이치가 ‘도깨비 그림’이라고 했던 몇 장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상실된 걸작. 여러 번 이사 다니는 사이에 없어져버렸지만 분명히 뛰어난 그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이것저것 그려봤지만 그 기억 속의 걸작에는 미치지 못했고 저는 언제나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느른한 상실감에 괴로워해 왔던 것입니다.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
저는 그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 것 같은 상실감을 혼자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얘기가 나오자 제 눈앞에 그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가 아른거렸습니다. 아아, 그 그림을 이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내 재능을 믿게 하고 싶다는 초조감에 몸부림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기도하면 하느님이 뭐든지 들어주신다는 게 정말이야?”
저야말로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응, 그래. 시게코한테는 뭐든지 주시겠지만 아빠는 안 될지도 몰라.”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 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두꺼비.
그게 나야. 세상이 용납할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도 없지. 매장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나는 개보다도 고양이보다도 열등한 동물인 거야. 두꺼비. 느릿느릿 꾸물거리기만 하는 두꺼비.

즉 여태까지 저의 공포란, 봄바람에는 백일해를 일으키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목욕탕에는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이발소에는 대머리로 만드는 병균이 몇십만 마리, 전철 손잡이에는 옴벌레가 우글우글, 또 생선회, 덜 익힌 쇠고기와 돼지고기에는 촌충의 유충이나 디스토마나 뭔가의 알 따위가 틀림없이 숨어 있고, 또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에 작은 유리 파편이 박혀서 그게 온몸을 돌아다니다가 눈알에 박혀서 실명하는 일도 있다는 등의 소위 ‘과학적 미신’에 겁먹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던 겁니다. 그야 분명히 몇십만이나 되는 세균이 돌아다니고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사실이겠죠. 그러나 동시에 그 존재를 완전히 묵살해 버리기만 하면 그것은 저와 전혀 상관없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과학의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시락 통에 먹다 남긴 밥알 세 알. 천만 명이 하루에 세 알씩만 남겨도 쌀 몇 섬이 없어지는 셈이 된다든가 혹은 하루에 휴지 한 장 절약하기를 천만 명이 실천하면 얼마만큼 펄프가 절약된다는 따위의 ‘과학적 통계’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밥알 한 알 남길 때마다 또 코를 풀 때마다 산더미 같은 쌀과 산더미 같은 펄프를 낭비하는 듯한 착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어두운 마음을 가져야만 했는지.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거짓’, ‘통계의 거짓’, ‘수학의 거짓’이며 밥알 세 알을 정말로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곱셈 또는 나눗셈 응용 문제라고 쳐도 정말이지 원시적이고 저능한 테마로서 전등을 안 켠 어두운 화장실에서 사람들은 몇 번에 한 번쯤 발을 헛디뎌서 변기 구멍 속으로 떨어질까 혹은 전차 문과 플랫폼 사이의 틈새에 승객 중 몇 몇이 발을 빠뜨릴까 같은 확률을 계산하는 것만큼 황당한 얘기인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정말 있을 듯하지만 제대로 발을 걸치지 못해서 화장실 구멍에 빠져 다쳤다는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그런 가설을 ‘과학적 사실’이라 배우고 진짜 현실로 받아들여서 두려워하던 어제까지의 저 자신이 애처로워서 웃고 싶어졌을 만큼 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쭐거리고 있군. 뭐, 별 얘기는 아니고 말이야...... 가끔은 고엔지 쪽에도 놀러 와달라는 말씀이더군.”
잊을 만하면 괴조(怪鳥)가 날아와서 기억의 상처를 부리로 쪼아 터뜨립니다. 금방 예전의 죄와 부끄러운 기억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면서 왁! 하고 소리치게 될 것 같은 공포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 나는 아직 너처럼 오랏줄에 묶이는 치욕 같은 건 겪은 적이 없어.”
흠칫했습니다. 호리키는 내심 저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겁니다. 단지 나를 죽어야 할 때를 놓친 쓸모없고 몰염치한 바보의 화신, 말하자면 ‘살아 있는 시체’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호리키의 쾌락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을 이용하면 그뿐인 ‘교우’였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저라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리키가 저를 그렇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 저는 옛날부터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역시 나는 호리키한테조차도 경멸받아 마땅한지도 모른다고 고쳐 생각했습니다.

“자네는 죄라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군.”
“그야 그렇지. 너 같은 죄인이 아니니까. 나는 난봉은 즐겨도 여자를 죽게 하거나 여자한테서 돈을 우려내거나 하지는 않거든.”
죽인 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 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그러나 필사적인 항변의 소리가 끓어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나쁜 거야, 라고 금방 다시 고쳐 생각해 버리는 이 버릇.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요시코는 신뢰의 천재니까요. 남을 의심할 줄이라곤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비극.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비루하게 쭈뼛쭈뼛 남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버렸습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폐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저는 점점 더 얼간이가 되어갔습니다. 아버님이 이젠 안 계신다.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젠 안 계시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모든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고뇌할 능력조차도 상실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후기

“그러고 나서 십 년이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이것은 당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낸 거겠죠. 다소 과장해서 쓴 듯한 부분도 있지만 당신도 꽤 피해를 본 것 같군요. 만일 이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의 친구였다면 나 역시 정신 병원에 집어넣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직소(直訴)

저에게는 언제나 혼자 남몰래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저 시시껄렁한 제자 모두하고 헤어지시고, 또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가르침이니 뭐니 설교하는 일도 그만두시고, 점잖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어머님이신 마리아 님과 저하고 우리 셋이서만 조용한 일생을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다. 저희 마을에 저의 작은 집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나이 든 부모님도 계십니다. 꽤 넓은 복숭아밭도 있습니다. 지금쯤은 복숭아꽃이 피어서 아름다울 겁니다. 거기서라면 평생을 안락하게 지내실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제나 곁에서 시중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좋은 부인을 얻으십시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분은 희미하게 웃으시고 “베드로와 시몬은 어부지. 아름다운 복숭아밭도 없어. 야고보와 요한도 가난한 어부라네. 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토지라곤 아무 데에도 없지.”라고 낮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시고는 또다시 해변을 조용하게 걸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건 그 후에건 그분하고 차분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때 한번 뿐이었고 그 뒤로는 결코 저한테 마음을 열어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분을 사랑하고 있어. 그분이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을 테다. 그 사람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내 거야. 그 사람을 남의 손에 넘기느니, 차라리 그 전에 내가 죽여버리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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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의 회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2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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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연히 네이버의 책 섹션을 유심히 볼 일이 있었는데, 특정 기간 동안 오디오북을 무료로 책 전체를 대여해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무료니까... 거기에 민음사에서 나온 세계문학전집 중 한 권이니까... 깊은 고민 없이 바로 대여 버튼을 눌러서 듣게 되었다.

책 소개를 보다 보면 번역에 대해 이야기가 많다.

번역이 너무 안 좋아서 안 쓰던 리뷰도 쓰게 만들었다, 헨리제임스 학회장까지 맡은 경력이니 오독은 없었겠지만 번역은 전문번역가가 하고 교수님은 감수를 봐야 했던 게 아닐까 싶다, 시공사가 "기묘한 자유분방함"이라고 옮긴 단어를 민음사는 "괴이한 자유의 기운"으로 옮겼다, 오독과 오역 이전에 '국어 감성'의 문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대한 구매 자체를 숙고하게 만든 번역이다, 할 말을 잃었다 등등

다행인 게 나는 이 책을 눈으로 읽지 않고 귀로 들었다. 그래서인지 번역이 거슬린다는 느낌은 사실 받지 못했다.

오디오 북에 대한 경험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이미 써진 글을 낭독을 한다는 특징 때문에 실제 대화보다는 연극의 독백에 가까운 느낌도 들고, 아무래도 활자가 소리로 바뀌면서 정보가 들어오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질 수밖에 없고, 눈으로 읽을 때처럼 온갖 정보가 한꺼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정보를 제쳐두고(나는 이 오디오북을 들을 때 눈을 감고 앉아서 들었다) 오로지 글의 내용에 오롯이 집중을 하기 때문에서인지 특유의 번역이 오히려 생경함을 느끼게 해서 속세와 차단되는 것 같은 효과(?)를 낳은 것 같기도 했다. 적절한 비유인지는 모르지만 마치 수도원이나 산사에 가만히 앉아 명상하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확실히 오디오북을 보고 나서 이 책을 활자로 읽으니 단어 하나하나가 오히려 육중하게 마음에 박히는 느낌이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데, 그 분들은 그 분들대로 지적할 만하니 지적했을 것이다.
나사의 회전은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도 있으니 혹시 거슬린다면 다른 번역자의 글을 읽는 것도 방법이 되겠다.
만약 이 책을 읽는다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오디오북도 조심스레 추천할 수 있겠다.

일단 다음은 출판사에서 제시한 책 소개이다.

영국의 한 저택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던 젊은 여성이 유령을 목격한다. 혼자 걷던 산책길의 오래된 탑 위에, 세차게 펄럭이던 촛불이 꺼진 어둠 속 계단 꼭대기에, 아무도 없는 주방의 창밖에, 한적한 오후 호수 건너편에, 누군가 나타난다. 가정교사는 그 집에 유령이 나온다고 확신하고, 아이들을 유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이 작품은 유령의 실체에 대하여 상반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유령은 실제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가정교사의 환상에서 비롯된 것인가, 유령은 초자연적인 존재인가, 아니면 개인의 심리에서 만들어진 것인가. 어디에도 명확한 결론, 완전한 추론이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 헨리 제임스는 작품 속에 수많은 복선을 넣어 온갖 해석이 가능하도록 했다. 또한 인간 의식의 특징을 모호성으로 규정하여 유령은 물론, 유령으로 상징되는 여러 문제를 인식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사실 이 책은 그 어떤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고 있지는 않지만, 독자로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무래도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내 아이들 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되는 부분에서는 더더욱.
학교 선생님인 지인이 한 때 담임을 맡은 아이들을 표현할 때 내 새끼들 이라는 표현을 했었는데, 아직 엄마가 되기에는 한참 어리게 느껴지는 그녀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굉장히 놀라면서도 그 이후에도 계속 생각이 났던 것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빅토리아 시대 가난한 시골 목사의 딸이 이제 막 가정교사가 되기 위해 부유하고 매력적인 연상의 부자 남자와 처음 만나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는 제인 에어를 연상할 수 있었고, 그것은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여주인공에게도 어떠한 감정의 움직임을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추측은 무리가 아니다. 이후 그 남자의 조카들을 가르치기 위해 시골로 향하는 동안,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돌보는 엄청난 권한을 부여받고 난 후, 사실상 저택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을 때, 그 책임감에 한편으로는 도취되었고 한편으로는 짓눌렸을 것이라는 짐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작가 헨리 제임스는 유명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동생이라고 한다. 집안의 분위기가 그랬는지 형으로부터의 영향도 있었는지 모르나 어쨌든 이 책은 최초의 심리 소설로 꼽히며,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조지프 콘래드, D. H. 로렌스 등의 영국 작가들과 이디스 워튼, 윌라 캐더 등의 미국 작가들이 제임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작가들은 이른바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법을 사용하여 인간 행동의 내면에 있는 심리적 동기를 마치 해부하듯이 분석해 나가는 작가들이다.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은 한 인물의 시점에서만 서술되며 이 때문에 심리 묘사가 더 촘촘하면서도 복합적으로 펼쳐진다. 가정교사의 시선으로 유령이 목격되고, 그녀의 관점으로 모든 것이 해석되며, 또한 유령이 아이들을 위협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독자는 유령이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지 의심을 가질 틈도 없이 가정교사의 확신에 휩쓸리고 만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유령의 존재가 과연 있기나 한 것인지,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이 만들어낸 존재는 아닌지 의심을 하게 된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각 독자마다 다르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가정교사가 본 것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 유령이 있느냐 혹은 가정교사가 미쳤느냐 등등. 어쩌면 그 실체 자체가 무엇인지, 무엇이 사실인지는 애초부터 중요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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