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 실격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3
다자이 오사무 지음, 김춘미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평점 :
작가와 작품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책을 읽으면서도 주인공 요조가 작가 자신이라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비정상적인 논리로 자신의 언행을 지속적으로 합리화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내내 하던 도중 퍼뜩 든 생각이 ‘아, 요조는 다자이 오사무 자신이로구나’하는 생각이었다. 선천적인 것처럼 보이는 요조의 우울함, 좌절감, 죄의식은 나같이 무딘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읽는 내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난해한 것은 결국 그의 의식 세계가 난해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고, 몇 번을 반복하여 책을 읽어도 그 막막한 감정은 전달이 되었지만 완전히 공감하기는 솔직히 어려웠다. 그나마 책으로 읽었을 때 그에게 연민을 가질 수는 있었지만 실제 이런 사람이 내 주위에 있다면 친해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감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작품을 통해서는 그의 의식과 소통하고 감정에 공감할 수는 있겠다. 문학이라는 것은 어쩌면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담은 소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인간을, 내가 살아보지 못한 인생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비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무시당해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면 찬양을 받을 수 있으니까. 요조의 모든 생각과 감정이 전부 비정상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머릿속에 흐르는 수많은 생각들, 우울함, 죄의식, 좌절감, 열등감, 자기 파괴에의 욕구 등등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잠깐씩은 품을 수 있고 다소나마 머릿속으로도 상상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이로 인해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어려울 정도가 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 실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실생활에서 인간 실격인 사람이라도 소설을 통해서는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인간 실격
서문
나는 그 사나이의 사진을 석 장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원숭이다. 웃고 있는 원숭이다. 그저 보기 싫은 주름을 잔뜩 잡고 있을 뿐이다. ‘주름투성이 도련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만큼 정말이지 괴상한, 왠지 추하고 묘하게 욕지기를 느끼게 하는 표정의 사진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괴상한 표정의 소년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이번 미소는 주름투성이의 원숭이 웃음이 아니라 꽤 능란한 미소가 되어 있지만, 그러나 인간의 웃음이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걸린다. 피의 무게랄까 생명의 깊은 맛이랄까, 그런 충실감이 전혀 없는, 새처럼 가벼운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운, 그냥 하얀 종이 한 장처럼 그렇게 웃고 있다. 즉 하나부터 열까지 꾸민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겉멋이 잔뜩 들었다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경박하다고 하기도 그렇다. 교태를 부리고 있다고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멋쟁이라고 하는 것도 물론 부적합하다. 게다가 자세히 뜯어보면 여자 같은 미모를 가진 이 학생한테서도 역시 어딘지 악몽 비슷한 섬뜩한 것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ᄁᆞ지 이렇게 이상한 미남을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아아, 그 얼굴에는 표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인상조차 없다. 특징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이 사진을 보고 나서 눈을 감는다 치자. 나는 이미 그 얼굴을 잊어버렸다. 방 벽과 작은 화로는 생각나지만 방 주인의 얼굴은 안개가 스러지듯 사라져서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얼굴이다. 만화조차도 안 된다. 눈을 뜬다. 아아, 이런 얼굴이었지. 이제 생각난다. 이런 기쁨조차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눈을 뜨고 사진을 다시 봐도 생각나지 않는 얼굴이다. 그저 무턱대고 역겹고 짜증나고, 나도 모르게 눈길을 돌리고 싶어진다.
소위 ‘죽을 상’이라는 것에도 뭔가 좀 더 표정이라든가 인상이라든가 그런 것이 있을 텐데, 사람 몸뚱이에다 짐 끄는 말의 목이라도 갖다 붙이면 이런 인상이 되려나? 어쨌든 딱히 무엇 때문이랄 수도 없이 보는 사람을 섬뜩하고 역겹게 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기묘한 얼굴의 남자를 역시 본 적이 한번도 없다.
첫 번째 수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은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그야 누구든 남이 비난을 퍼붓거나 화를 낼 때 기분이 좋을 사람은 없겠습니다만, 저는 화를 내는 인간의 얼굴에서 사자보다도, 악어보다도, 용보다도 더 끔찍한 동물의 본성을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어떤 순간에, 예컨대 소가 풀밭에서 느긋하게 잠자고 있다가 갑자기 꼬리로 배에 앉은 쇠등에를 탁 쳐서 죽이듯이, 갑자기 무시무시한 정체를 노여움이라는 형태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 저는 언제나 머리털이 곤두서는 듯한 공푸를 느꼈습니다. 이 본성 또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자격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저 자신에 대한 절망감에 휩싸이곤 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존경을 받을 뻔했습니다. 존경받는다는 개념 또한 저를 몹시 두렵게 했습니다. 거의 완벽하게 사람들을 속이다가 전지전능한 어떤 사람에게 간파당하여 산산조각이 나고 죽기보다 더한 창피를 당하게 되는 것이 ‘존경받는다’는 상태에 대한 제 정의였습니다. 인간을 속여서 ‘존경받는다’해도 누군가 한 사람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들도 그 사람한테서 듣고 차차 속은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을 때, 그때 인간들의 노여움이며 복수는 정말이지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상상만 해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수기
바닷가, 파도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바다 가까운 해안가에 꽤 큰 시커먼 줄기의 산벚나무가 스무 그루도 더 늘어서 있어 신학기가 되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산벚꽃이 끈끈해 보이는 갈색 어린잎과 함께 현란한 꽃을 피우고, 이윽고 꽃이 질 때에는 꽃잎이 수없이 바다에 흩뿌려져 해면을 아로새기며 떠돌다 파도를 타고 다시 기슭으로 되돌아오는 벚꽃 모래사장을 그대로 교정으로 쓰고 있는 동북 지방의 어떤 중학교에, 저는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도 그럭저럭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 중학교의 모자 휘장에도, 교복 단추에도 도안된 벚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계속된 나날의 불안과 공포.
겉으로는 여전히 서글픈 익살을 연기해서 보두를 웃기면서도 문득 자기도 모르게 괴로운 한숨이 나왔습니다. 무슨 짓을 하든 모두 다케이치가 낱낱이 간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녀석이 이제 곧 아무한테나 이 얘기를 퍼뜨리고 다닐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 이마에 축축하게 진땀이 솟았고, 미치광이 같은 묘한 눈초리로 희번덕거리며 공연히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침, 낮, 밤, 스물 네 시간 꼬박 다케이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그가 비밀을 퍼뜨리지 못하게 감시하고 싶었습니다. 그한테 들러붙어 있는 동안 내 익살이 ‘일부러 하는 행동’이 아니라 진짜라고 믿게끔 할 수 있는 노력이란 노력을 다하고, 잘만 된다면 녀석하고 다시없는 친구가 돼버리고 싶다, 만일 이도 저도 다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그의 죽음을 빌 수밖에 없다, 라고까지 외곬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를 죽이려는 마음만은 안 일어났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이 저를 죽여줬으면 하고 바란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남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한테는 인간 중에서 여성 쪽이 남성보다도 몇 배나 더 난해했습니다. 제 가족은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많았고 또 친척 중에도 계집애가 많았으며 예의 ‘범죄’를 저지른 하녀 등도 있어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여자하고만 놀며 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만, 저는 정말이지 살얼음을 밟는 느낌으로 그 여자들을 대해 왔던 것입니다. 거의, 아니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쩌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실수를 저질러서 끔찍한 상처를 입기도 했는데, 그게 또 남자들한테서 받는 상처하고는 달라서 내출혈처럼 몹시 불쾌하게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 좀처럼 치유가 안 되는 상처였던 것입니다.
“나도 이런 도깨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인간을 너무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요괴를 자기 눈으로 확실히 보기를 바라는 심리. 신경이 날카롭고 쉽게 겁먹는 사람일수록 폭풍우가 더 강하게 몰아치기를 바라는 심리. 아아, 이 일군의 화가들은 인간이라는 도깨비에게 상처 입고 위협받다 끝내는 환영을 믿게 되었고 대낮의 자연 속에서 생생하게 요괴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익살 따위로 얼버무리지 않고 본 그대로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다케이치가 말한 것처럼 과감하게 ‘도깨비 그림’을 그려낸 것입니다. 여기 장래 나의 동료가 있다고 저는 눈물이 날 정도로 흥분하여 “나도 그릴 거야. 도깨비 그림을 그릴 거야. 지옥의 말을 그릴 거야.”라고, 왜 그랬는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다케이치에게 말했던 것입니다.
제가 봐도 흠칫할 정도로 음산한 그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슴속에 꼭꼭 눌러서 감추고 감추었던 내 정체다. 겉으로는 명랑하게 웃으며 남들을 웃기고 있지만 사실 나는 이렇게 음산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하고 혼자 인정했지만 그 그림은 다케이치 외에는 아무한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제 익살 밑바닥에 있는 음산함을 간파당하여 하루아침에 경계당하게 되는 것도 싫었고, 또 어쩌면 이것이 내 정체인 줄 모르고 또 다른 취향의 익살로 간주되어 웃음거리가 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도니다면 그건 제일 가슴 아픈 일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 그림은 바로 이불장 깊숙이 집어넣어 두었습니다.
저한테는 단체 생활이라는 것이 아무래도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또 ‘청춘의 감격’이라든가 ‘젊은이의 긍지’라든가 하는 말은 듣기만 해도 닭살이 돋았고, ‘고교생의 기개’라느니 하는 것은 도저히 좇아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교실도 기숙사도 비뚤어진 성욕의 쓰레기통으로 느껴졌으며, 저의 완벽에 가까운 익살도 거기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저 노는 것뿐이야, 놀이 상대로 사귀는 것뿐이야, 라고 언제나 그를 경멸하고 때로는 그와의 교제를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했으면서도, 그하고 같이 다니는 사이에 저는 결국 이 사나이한테조차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는 혼자서 전차를 타면 차장이 무섭고, 가부키 극장에 가고 싶어도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현관 계단 양쪽에 죽 늘어서 있는 안내양들이 무섭고, 레스토랑에서는 등 뒤에 조용히 서서 접시가 비기를 기다리는 웨이터가 무섭고, 특히나 돈을 치를 때 아아, 그 어색한 손놀림.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저한테 창녀라는 것은 인간도 여성도 아닌 백치 혹은 미치광이처럼 느껴져서 그 품 안에서는 완전히 안심하고 푹 잘 수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가 서글플 만큼, 정말이지 티끌만큼도 욕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서 동류로서의 친근감 같은 것을 느끼는지, 저는 언제나 창녀들로부터 거북살스럽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호감을 샀습니다. 아무런 타산도 없는 호의, 강요하지 않는 호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호의. 저는 백치 아니면 미치광이 같은 그 창녀들한테서 마리아의 후광을 실제로 본 적도 있습니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호리키가 입을 일그러뜨리며 말했습니다.
“아무리 나라도 이런 궁상맞은 여자는.......”
소위 속물들의 눈으로 보면 쓰네코는 취한의 키스를 받을 가치조차도 없는, 그저 초라하고 궁상맞은 여자였던 것입니다. 의외였지만 뜻밖에도 저는 청천벽력에 박살 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도 전례가 없을 정도로 끝도 없이 술을 마셨고, 어질어질 취해서는 쓰네코와 마주 보며 서글픈 미소를 나눴습니다. 글쎄 듣고 보니 이건 묘하게 지쳐빠진 궁상맞은 여자로군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없는 사람끼리의 동질감(빈부의 불화라는 것이 진부한 것 같아도 역시 드라마의 영원한 테마 중 하나라고 지금은 생각합니다만)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와서 쓰네코가 사랑스럽고 불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때 적극적으로 미약하나마 사랑의 마음이 싹트는 것을 자각했습니다. 토했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술을 마시고 그렇게 정신을 잃을 만큼 취한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자도 누웠고, 새벽녘에 여자 입에서 ‘죽음’이라는 단어가 처음 나왔습니다. 여자도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데 완전히 지쳐버린 것 같았습니다. 또 저도 세상에 대한 공포, 번거로움, 돈, 예의 운동, 여자, 학업 등을 생각하면 도저히 더 이상 견뎌내며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아 그 사람의 제안에 쉽게 동의했습니다.
일어서서 소매에서 지갑을 꺼내어 여니 동전 세 닢뿐. 수치심보다도 참담한 느낌이 엄습했고 금방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센유관의 내 방. 교복과 이불만이 남아 있을 뿐, 이제는 더 이상 전당포에 맡길 만한 것 하나 없는 황량한 방. 그 밖에는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잔무늬 옷과 망토 뿐. 이것이 내 현실인 것이다.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제가 우물거리고 있으니까 여자가 일어나더니 제 지갑을 들여다봤습니다.
“어머나, 겨우 그것뿐이야?”
무심한 목소리었습니다만 그것 또한 뼈에 사무치게 아팠습니다. 처음으로 제가 사랑한 사람의 말이었던 만큼 쓰라렸습니다. 동전 세 닢은 돈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제가 맛보지 못했던 기묘한 굴욕이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굴욕이었습니다. 필경 당시의 저는 아직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겠죠. 그때 저는 자진해서라고 죽으려고 진심으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검찰청의 어두컴컴한 방에서 검사로부터 간단한 취조를 받았습니다. 검사는 사십 세 전후의 조용한(만일 제가 미남이었다 해도 그것은 소위 사악한 미모였음에 틀림없습니다만, 그 검사의 얼굴은 ‘올바른 미모’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 총명하고 고요한 기운을 띠고 있었습니다.) 사람이었고 곰살맞은 인품이 아닌 것 같아서 저도 전혀 경계하지 않고 멍하니 진술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예의 기침이 나기에 저는 소매에서 손수건을 꺼내었는데 문득 거기 묻은 피를 보고 이 기침 또한 무슨 소용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천박한 술책으로 쿨럭쿨럭 하고 두어 번, 거기다 가짜 기침까지 요란하게 보태어 기침을 한 후에 손수건으로 입을 가린 채 검사 얼굴을 흘깃 본 순간.
“진짜야?”
조용한 미소였습니다. 진땀이 석 되 흘렀습니다. 아니, 지금 생각해도 콱 죽고 싶어집니다. 중학교 시절, 저 바보 다케이치한테서 부러 그랬지, 라는 말로 등에 칼을 맞아 지옥으로 굴러 떨어졌던 때의 느낌 이상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닌 기분이었습니다. 그 일과 이 일, 이 두 가지는 제 생애의 연기 중 대실패의 기록입니다. 검사의 그런 조용한 모멸에 맞닥뜨리느니 차라리 십 년 형을 구형받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할 때조차 가끔 있을 정도입니다.
세 번째 수기
그럴 때마다 제 뇌리에 저절로 떠오르는 것은 중학교 시절에 그렸던, 다케이치가 ‘도깨비 그림’이라고 했던 몇 장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상실된 걸작. 여러 번 이사 다니는 사이에 없어져버렸지만 분명히 뛰어난 그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이것저것 그려봤지만 그 기억 속의 걸작에는 미치지 못했고 저는 언제나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느른한 상실감에 괴로워해 왔던 것입니다.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
저는 그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 것 같은 상실감을 혼자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림 얘기가 나오자 제 눈앞에 그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가 아른거렸습니다. 아아, 그 그림을 이 사람한테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내 재능을 믿게 하고 싶다는 초조감에 몸부림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 기도하면 하느님이 뭐든지 들어주신다는 게 정말이야?”
저야말로 기도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아, 저에게 냉철한 의지를 주소서. ‘인간’의 본질을 알게 해주소서. 사람이 사람을 밀쳐내도 죄가 되지 않는 건가요. 저에게 화낼 수 있는 능력을 주소서.
“응, 그래. 시게코한테는 뭐든지 주시겠지만 아빠는 안 될지도 몰라.”
저는 하느님조차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믿지 못하고 하느님의 벌만을 믿었던 것입니다. 신앙, 그것은 단지 하느님의 채찍을 받기 위해 고개를 떨구고 심판대로 향하는 일로 느껴졌습니다. 지옥은 믿을 수 있었지만 천국의 존재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네 난봉도 이쯤에서 끝내야지. 더 이상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세상이란 게 도대체 뭘까요. 인간의 복수(複數)일까요. 그 세상이란 것의 실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무조건 강하고 준엄하고 무서운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여태껏 살아왔습니다만, 호리키가 그렇게 말하자 불현 듯 “세상이라는 게 사실은 자네 아니야?”라는 말이 혀끝까지 나왔지만 호리키를 화나게 하는 게 싫어서 도로 삼켰습니다.
두꺼비.
그게 나야. 세상이 용납할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도 없지. 매장이고 뭐고 할 것도 없어. 나는 개보다도 고양이보다도 열등한 동물인 거야. 두꺼비. 느릿느릿 꾸물거리기만 하는 두꺼비.
즉 여태까지 저의 공포란, 봄바람에는 백일해를 일으키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목욕탕에는 눈을 멀게 하는 세균이 몇십만 마리, 이발소에는 대머리로 만드는 병균이 몇십만 마리, 전철 손잡이에는 옴벌레가 우글우글, 또 생선회, 덜 익힌 쇠고기와 돼지고기에는 촌충의 유충이나 디스토마나 뭔가의 알 따위가 틀림없이 숨어 있고, 또 맨발로 걸으면 발바닥에 작은 유리 파편이 박혀서 그게 온몸을 돌아다니다가 눈알에 박혀서 실명하는 일도 있다는 등의 소위 ‘과학적 미신’에 겁먹는 것이나 다름없는 얘기였던 겁니다. 그야 분명히 몇십만이나 되는 세균이 돌아다니고 우글거리고 있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정확한 사실이겠죠. 그러나 동시에 그 존재를 완전히 묵살해 버리기만 하면 그것은 저와 전혀 상관없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과학의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저는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도시락 통에 먹다 남긴 밥알 세 알. 천만 명이 하루에 세 알씩만 남겨도 쌀 몇 섬이 없어지는 셈이 된다든가 혹은 하루에 휴지 한 장 절약하기를 천만 명이 실천하면 얼마만큼 펄프가 절약된다는 따위의 ‘과학적 통계’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밥알 한 알 남길 때마다 또 코를 풀 때마다 산더미 같은 쌀과 산더미 같은 펄프를 낭비하는 듯한 착각 때문에 괴로워하고 큰 죄를 짓는 것처럼 어두운 마음을 가져야만 했는지.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과학의 거짓’, ‘통계의 거짓’, ‘수학의 거짓’이며 밥알 세 알을 정말로 모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곱셈 또는 나눗셈 응용 문제라고 쳐도 정말이지 원시적이고 저능한 테마로서 전등을 안 켠 어두운 화장실에서 사람들은 몇 번에 한 번쯤 발을 헛디뎌서 변기 구멍 속으로 떨어질까 혹은 전차 문과 플랫폼 사이의 틈새에 승객 중 몇 몇이 발을 빠뜨릴까 같은 확률을 계산하는 것만큼 황당한 얘기인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정말 있을 듯하지만 제대로 발을 걸치지 못해서 화장실 구멍에 빠져 다쳤다는 얘기는 들은 적도 없고, 그런 가설을 ‘과학적 사실’이라 배우고 진짜 현실로 받아들여서 두려워하던 어제까지의 저 자신이 애처로워서 웃고 싶어졌을 만큼 저도 세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를 조금은 알게 되었습니다.
“여전히 우쭐거리고 있군. 뭐, 별 얘기는 아니고 말이야...... 가끔은 고엔지 쪽에도 놀러 와달라는 말씀이더군.”
잊을 만하면 괴조(怪鳥)가 날아와서 기억의 상처를 부리로 쪼아 터뜨립니다. 금방 예전의 죄와 부끄러운 기억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면서 왁! 하고 소리치게 될 것 같은 공포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 나는 아직 너처럼 오랏줄에 묶이는 치욕 같은 건 겪은 적이 없어.”
흠칫했습니다. 호리키는 내심 저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겁니다. 단지 나를 죽어야 할 때를 놓친 쓸모없고 몰염치한 바보의 화신, 말하자면 ‘살아 있는 시체’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호리키의 쾌락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을 이용하면 그뿐인 ‘교우’였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저라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리키가 저를 그렇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 저는 옛날부터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역시 나는 호리키한테조차도 경멸받아 마땅한지도 모른다고 고쳐 생각했습니다.
“자네는 죄라는 것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것 같군.”
“그야 그렇지. 너 같은 죄인이 아니니까. 나는 난봉은 즐겨도 여자를 죽게 하거나 여자한테서 돈을 우려내거나 하지는 않거든.”
죽인 게 아니야. 우려낸 게 아니야, 라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희미한, 그러나 필사적인 항변의 소리가 끓어올라 왔습니다. 그러나 아니 내가 나쁜 거야, 라고 금방 다시 고쳐 생각해 버리는 이 버릇.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었습니다. 요시코는 신뢰의 천재니까요. 남을 의심할 줄이라곤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비극.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요시코가 더럽혀졌다는 사실보다도 요시코의 신뢰가 더럽혀졌다는 사실이 그 뒤에도 오래오래, 저한테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큰 고뇌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저처럼 비루하게 쭈뼛쭈뼛 남의 안색만 살피고 남을 믿는 능력에 금이 가버린 자에게 요시코의 순결무구한 신뢰심은 그야말로 아오바 폭포처럼 상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룻밤 사이에 누런 오수로 변해버렸습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진정한 폐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저는 점점 더 얼간이가 되어갔습니다. 아버님이 이젠 안 계신다.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젠 안 계시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모든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고뇌할 능력조차도 상실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 살 이상으로 봅니다.
후기
“그러고 나서 십 년이라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르겠군. 이것은 당신에게 감사의 뜻으로 보낸 거겠죠. 다소 과장해서 쓴 듯한 부분도 있지만 당신도 꽤 피해를 본 것 같군요. 만일 이것이 전부 사실이라면,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의 친구였다면 나 역시 정신 병원에 집어넣고 싶었을지도 모르지.”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예요.”
마담이 무심하게 말했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
직소(直訴)
저에게는 언제나 혼자 남몰래 생각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저 시시껄렁한 제자 모두하고 헤어지시고, 또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가르침이니 뭐니 설교하는 일도 그만두시고, 점잖은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어머님이신 마리아 님과 저하고 우리 셋이서만 조용한 일생을 오래오래 사는 것입니다. 저희 마을에 저의 작은 집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나이 든 부모님도 계십니다. 꽤 넓은 복숭아밭도 있습니다. 지금쯤은 복숭아꽃이 피어서 아름다울 겁니다. 거기서라면 평생을 안락하게 지내실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제나 곁에서 시중들어 드리고 싶습니다. 좋은 부인을 얻으십시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분은 희미하게 웃으시고 “베드로와 시몬은 어부지. 아름다운 복숭아밭도 없어. 야고보와 요한도 가난한 어부라네. 그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평생을 안락하게 보낼 수 있는 토지라곤 아무 데에도 없지.”라고 낮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시고는 또다시 해변을 조용하게 걸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건 그 후에건 그분하고 차분히 얘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때 한번 뿐이었고 그 뒤로는 결코 저한테 마음을 열어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 분을 사랑하고 있어. 그분이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을 테다. 그 사람은 누구의 것도 아니야. 내 거야. 그 사람을 남의 손에 넘기느니, 차라리 그 전에 내가 죽여버리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