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0
송성욱 풀어 옮김,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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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으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속에서 주고 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오,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폴란드의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이다. 이 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에는 영혼이 바닥까지 치고 있었던 상태라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말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지금은 바닥에서 올라온 상태이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이 시는 여전히 현재 시점에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등단 후 1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고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시단詩壇의 모차르트’라고 한다. 이 시인에게 빠져 있을 무렵 그녀가 몸을 담고 있던 문예지에 그녀가 쓴 독서칼럼들 중 일부가 추려져 번역되어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책 제목은 ‘읽거나 말거나’. 그녀가 쓴 칼럼의 제목은 ‘비필독도서’라고 한다는데, ‘필독도서’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내려놓고 다양한 장르의 도서들을 자유롭게 소개하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고 한다. ‘읽거나 말거나’라는 제목도 그녀의 의도를 온전히 살리면서도 귀엽고 재치 있는 책 제목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칼럼의 수는 총 562편이고, 한국어판에 실린 것은 총 137편이다. 선정 기준은 한국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서평들을 먼저 추려냈다고 하는데,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부터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히치콕, 채플린, 니체, 릴케, 토마스 만, 클림트와 같은 예술가들의 회고록이나 평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여기에서 순간 눈을 번쩍 뜨게 한 부분. 저자 미상, ‘열녀 중의 열녀 춘향 이야기’.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춘향전이 폴란드의 1세대 한국학자 할리나 오가렉 최 교수에 의해 번역되었고, 그 번역본을 쉼보르스카가 직접 읽고 나서 소개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춘향전 완역본을 읽은 사람은 드물어도 춘향전의 전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로 각인된 판소리는 당연하고, 김희선의 미모가 빛을 발하던 드라마 춘향전, 조승우의 데뷔작이자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춘향뎐이 있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던 드라마 쾌걸 춘향, 원작을 비틀어 방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방자전 등 춘향전이 모티브가 된 작품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런 춘향전을 폴란드에서 태어나 평생 폴란드에서만 살았고, 한국에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세계적인 시인이자 독서가가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졌다.

동아시아에서는 용꿈을 꾸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기생 출신의 한 여인이 꿈에서 복숭앗빛 호수를 향해 뛰어드는 초록빛 용을 본 후, 그녀의 딸은 열여섯 살의 나이에 젊고 부유한 양반 자제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젊은 청년이 그녀를 보고도 첫눈에 반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춘향은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아도 “온 나라를 뒤흔들 만큼”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기에. 게다가 그녀는 우아한 몸가짐과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었고, 시를 짓는 데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출신계급이 미천했기 때문에 그녀가 오를 수 있는 위치는 양반의 비공식적인 아내 자리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생생하고 정교한 묘사를 높이 평가하고, 다른 이들은 생동감 넘치는 러브신을 극찬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는 수준 높은 감성에 찬사를 보내고, 사회비판적인 요소와 여성의 힘겨운 운명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에 매료된 이들도 있다. 그밖에도 판타지적 요소가 없다는 점을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덕목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찬사의 밑바탕에는, 리얼리즘이야말로 문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동화나 민담은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혼합되어 있으므로 미성숙한 하위 문학이자 아직 나비로 성장하지 못한 애벌레와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동화나 민담을 읽는다는 것이 상당히 힘겨운 일일 것이다. 모든 종류의 기적이나 환상은 미학적으로 불완전한 일종의 죄악으로 치부되고, 개연성에 위배되는 요소들은 전부 유치하기 짝이 없게 여겨질 테니 말이다. 그런 이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 이 춘향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그런 사람들에겐 이따금 안면근육의 경련을 일으키게 만들 것이다. 매우 강렬한 해피엔딩을 맞고 있지만, 사실 거기에 춘향의 으깨어진 두 발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으니 말이다. 과연 춘향의 발꿈치 뼈는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잘 붙었을까. 안심해도 좋다. 완벽하게 잘 아물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춘향은 잘생긴 배우자 옆에서 절뚝거리며 걷지도 않을 테고, 첫날밤에 원앙이 수놓인 이불을 덮어 자신의 뒤틀린 두 발을 애써 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화는 결코 현실의 삶에 완전히 항복하는 법이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틈만 나면 훨씬 나은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현실을 난처하게 만든다.


‘열녀 중의 열녀 춘향 이야기’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서평 중 앞부분과 뒷부분을 옮겼다. 전체 내용의 핵심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요약했고 완벽하게 전체를 이해하여 자신의 생각까지 덧붙였다. 더할 나위 없는 서평이었다. 무엇보다 고문당해서 으스러진 춘향의 두 발에 생각을 집중시킨 것은 흥미로웠다. 어떤 의미에서 춘향전은 유리 구두를 신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으니까. 현실의 삶에 항복하지 않고 자기만의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은 구전으로 전래되다가 마침내 문자로 장착된 춘향전을, 조선 후기 민중이 어떻게 창작하고 전승했는지에 대한 대답이자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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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4
김시습 지음, 이지하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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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라는 장르로 치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최초의 한글소설은 홍길동전.
최초의 근대소설은 무정.
금오신화의 금오산은 잘 알려진 구미시의 금오산이 아니라, 경주시 남산의 한 봉우리를 뜻한다고 한다. 세조의 왕위찬탈 이후 김시습이 금오산의 용장사에 7년간 은거하며 금오신화를 썼다고 하며, 현재 용장사는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남원의 양생, 송도(개성)의 이생, 송경(개성)의 홍생, 경주의 박생, 송도(개성)의 한생은 요즘 식으로 하면 양모 씨, 이군, 미스터 홍, 박 선생, 한 선생님 정도로 부를 수 있겠다. 관직은 없고 글재주는 많고 자기 소신은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이 모든 사람들은 김시습의 분신일 것이다. 과거를 준비하던 중 세조의 왕위 찬탈 이야기를 듣고 현실 정치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방외인’이라고 칭하면서 전국을 두루 유람하며 다녔던 김시습을 시대를 잘못 만난 불우한 천재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우리 문학사의 거장이 되었다. 자신이 쓴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현실을 벗어나 이번 생 바깥에서는 더 고귀한 존재가 된 것이다. 어쩌면 신곡을 쓴 단테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만복사에서 저포놀이를 하다-만복사저포기]
부처님과 내기를 해서 배필을 점지해 달라고 한 노총각 양생이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 여인은 실은 왜구의 난 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명문가의 여인이었다. 잠깐 신혼을 즐기다가 여인은 다른 곳에서 남자로 환생했다며 사라진다. 양생은 여인을 위한 재를 올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혼자 약초를 캐며 살다가 죽는다. 만복사는 실제로 전라북도 남원에 있던 절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고 한다.

[이생이 담 너머를 엿보다-이생규장전]
준수한 외모와 학식을 가진 이생과 명문가의 최 씨 처자가 우연히 만나 시를 주고받으며 사랑의 마음을 키운다. 천생의 연분이 결혼을 해서 꿈같은 날들을 보내던 중,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최 씨가 도적에게 잡혀 처참한 죽음을 당한다. 어느 밤에 최 씨가 찾아와서 함께 남은 인연을 다하기 위해 이승으로 돌아오고, 서너 해 동안 이생과 정분을 나누다가 최 씨는 다시 구천으로 돌아가고, 이생은 아내의 뼈를 찾아서 묻어준 후 아내를 그리워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다. 이생은 생육신인 김시습 자신을, 아내 최 씨는 사육신을 뜻하며 계유정난을 비판한 의도라는 해석도 있다.

[부벽정에서 취하여 놀다-취유부벽정기]
홍생이 부벽정에 놀러 가서 기자조선의 준왕의 딸이었다는 여인을 우연히 만난다. 이 여인은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자살하려다가 단군의 도움으로 천녀가 되었다고 말한다. 밤새도록 함께 놀다가 새벽이 되자 여인이 사라지는데, 이후로 홍생은 여인을 그리워하며 몸져눕는다. 홍생은 꿈에서 옥황상제의 부름을 받고 죽었는데,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말했다.

[남염부주에 가다-남염부주지]
박생이 꿈에 남염부주에 가서 염라대왕을 만난다. 염라대왕과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부터 현실 정치 문제에 이르기까지 문답을 주고받는다. 박생은 염라대왕에게 인정받아 왕위를 물려받는다. 토론의 내용은 당시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많이 담고 있어 김시습의 방외인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용궁 잔치에 초대받다-용궁부연록]
글을 잘 짓는 한생이 용왕의 초대를 받아 잔치를 즐기고, 글을 써준다. 좋은 구경과 유쾌한 경험을 하고 다시 돌아와서는 그곳에서 받은 선물을 간직한 채 산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다. 여기서 한생은 어린 시절 글을 잘 쓴다고 세종에게 직접 칭찬을 받았던 김시습 자신이며, 용왕은 세종이라는 해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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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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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에 이 리어 왕의 여주인공 코딜리아 이름을 접한 것은 다소 엉뚱하지만, 빨간머리 앤 에서였다. 원제인 그린 게이블즈의 앤, 그리고 이후에 나온 책들이 차곡차곡 쌓여 총 8권의 시리즈로 이루어진 앤 시리즈에서, 맨 처음으로 마릴라와 만나 자기 소개를 하는 장면에서 앤은 엉뚱하게도 자신을 코딜리아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완벽하게 우아한 이름이라며. 마릴라가 앤은 단정하고 좋은 이름이라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이 말하자 앤은 그럼 꼭 뒤에 철자 ‘e’를 붙여서 앤이라고 불러달라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기 이름이 좀 더 낭만적이었으면 바랐던 소녀 시절이 있다면 친근하게 느껴졌을 에피소드인데, 정작 내가 궁금했던 것은 대체 코딜리아가 왜 낭만적이지? 하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앤도 코딜리아도 낯선 이름인 데다가 앤보다 코딜리아가 어디가 좋은 이름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앤이 코딜리아라는 이름을 흠모하게 된 것은 리어 왕의 영향이었을까? 평소에 책을 좋아하고 비극적인 연극도 좋아했던 앤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어쩌면 앤이 이야기하는 코딜리아는 다른 코딜리아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리어 왕은 기본적으로 부녀간의 관계이다. 햄릿이 부자지간, 모자지간을 다루고 오셀로와 맥베스가 부부지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과 명확히 구분된다. 세 딸 중 아버지를 가장 사랑했으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후에 아버지를 거두고 아버지와 화해하는 듯하나 죽어버리는 코딜리아. 그리고 슬퍼하며 절명하는 리어 왕. 어쩌면 어릴 때 고아가 되어 버린 앤에게 있어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 이야기보다는 이 이야기가 깊숙이 박혔다는 것이 설득력 있어 보이기도 한다. 부모를 잃고 친척 집을 이리저리 떠돌며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던 앤이지만 언젠가는 내가 여러분 모두를 얼마나 헌신하고 사랑했는지 언젠가는 다들 알고 나를 그리워하게 될 거야, 라는 마음이 깔려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설에서도 나와 있지만, 이 책을 처음 읽으면 자신의 모든 권력을 양위하고도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이라고 리어 왕은 생각했을까하고 의아해 질 수 있다. 나이가 많아 왕이 쉬고 싶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쉬지도 못하는 것이 왕인지, 아니 인간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인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지나치게 순진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더 순수한 인물이 나와 순간 아연실색하게 한다. 리어 왕의 막내 딸 코딜리아는 왕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말로 밝히라는 아버지의 명령에 없다고 대답한다. 왜 이렇게 대답했을까? 해설에 따르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해석은 코딜리아가 리어의 질문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정확하게 대답하였다는 것. 왕국은 벌서 분열되고 언니들은 제 몫을 받아갔기에 코딜리아가 지금 무슨 말을 해도 남아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땅을 받지는 못하니 할 말은 없을 수 밖에 없다는 뜻. 다른 해석으로는 거짓이 있을 수 없다면 참도 있을 수 없는데 말은 본질적으로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니 코딜리아에게 말은 불가능하다는 것. 또 다른 해석은 말은 본질적으로 거짓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코딜리아는 말을 내뱉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어떻게 보면 수긍할 법도 한데 어떻게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 해석 대신 번역자는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코딜리아도 리어도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진실에 대한 그녀의 집착 때문에 이런 비극이 생겼다고. 놀란 리어가 다시 코딜리아를 재촉하자 도리 이상으로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다시 강조한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는 리어 왕. 코딜리아는 복종하고 사랑하며 가장 존경하지만 미래의 남편 이야기를 꺼내며 이미 결혼한 언니들의 위선을 지적한다. 해석에서는 아직 결혼하지 않고 어린 코딜리아이기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다소 의아한 것이 그렇다면 신하인 켄트 눈에도 보이고 바보도 알아차리는 것을 리어 왕이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반대로 나이가 든 리어 왕이 노망이 났기 때문인 것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젊은 시절 눈에 보이는 아부나 아첨을 싫어하는 명석하고 활기 찬 사람도 나이가 들면 판단력이 흐려져서 입에 발린 말을 좋아하게 되는 것일까? 인터넷에서 리어 왕을 쳐보면 아직까지도 활발히 오르고 있는 연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제 2차 세계 대전 직후 공연되는 리어 왕은 공허와 절망감과 무의미함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대부분의 관객들이 나이 드는 것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거나 나이든 친족을 모시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요즘에는 나이 듦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베이비붐 세대가 노년에 접어들었기에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고 하며, 연출가들이 여기에 초점을 맞춘 것에 대해서는 비판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쪽도 있고, 극단적으로는 리어 왕을 상연하는 것을 잠시 멈출 필요가 있다는 쪽도 있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좀 더 나이가 들어서 다시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이 비극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으로 해설에서 들고 있는 것은, 왕의 신하인 글로스터가 자신의 서자의 아첨에 빠져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내쫓고, 결국에는 장님이 되는 부분을 리어 왕이 코딜리아의 죽음을 목격하는 부분과 맞대어 놓은 부분이다. 전반부에서 눈 뜬 장님이었던 아버지 2명 중 한 명은 눈이 뽑혀 장님이 되고 후반부에서 눈 뜬 장님과 눈 빠진 장님이 대조되어 결말에는 눈 뜨고 차마 못 볼 리어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번에 리어 왕을 읽고 나서 처음 알게 된 것은 당연히 코딜리아는 죽고 리어 왕도 뒤따라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원본에서는 다소 열어 놓은 결말로 마무리했다는 것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많은 학자들의 해석이 존재하며, 일부 비평가들은 리어가 코딜리아가 살았다는 기쁨 때문에 죽거나 아니면 그 죽음의 불가역성 때문에 절망해서 죽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적당히 절충한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고 한다고 하는데 비평가가 아닌 우리는 결국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결말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는 멍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해석에서는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의 갈등이 한순간에 멈추며 이분법을 벗어나 마치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가는 공백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의 허무함은 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또 있었을까. 어쩌면 수년이 지난 후 다시 리어 왕을 집어들었을 때에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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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9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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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개봉한 영화 맥베스를 영화관에서 보았다. 청소년 명작 소설, 고전 전집을 통해 이미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줄거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공연을 본 적은 없었는데 영상으로 보는 순간 마녀가 나타나는 순간부터 시작해서 맥베스가 살인을 하는 장면, 반대편을 죽이고 또 그 반대편이 맥베스를 죽이는 장면까지 영화 내내 곤두서고 스산하고 소름이 끼치는 느낌이 생생히 기억이 난다. 보는 내내 주인공의 연기에 감탄하면서도 다소 괴로웠던 것으로 기억난다. 아마 그래서 그 이후로 이 영화를 다시 보려고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맥베스는 원래의 형태와 동일하게 연극으로 올려지는 것은 당연하고, 드라마나 영화로 그대로 만들어지거나 모티브를 주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이 영화 평을 보면 ‘셰익스피어도 흐뭇하겠어’, ‘고전은 어떻게 부활해야 하는가에 대한 황홀한 답’, ‘앞으로 맥베스는 패스벤더의 전과 후로 나뉘어질 것이다’ 라는 평들에서 알 수 있듯이 고전을 제대로 구현해내었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영화를 보고 나면 원작이 더 보고 싶어질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원작이 보고 싶어져서 원작을 봤고, 원작을 읽으면서 예전과는 다르게 맥베스에는 마이클 패스벤더의 얼굴이, 맥베스 부인에는 마리옹 꼬띠아르의 얼굴이 계속 떠올랐다.

1막 3장 마녀들의 유혹에 서로 다르게 반응하는 맥베스와 뱅코. 한 명은 왕이 된다는 말을 듣고 한 명은 자손이 왕이 된다는 말을 듣는다. 맥베스는 안 그런 척 하지만 동요하였고, 뱅코는 겉으로는 재미있어하는 듯이 보여도 마음의 동요가 없다. 결국 맥베스는 마녀를 만나기 전부터 권력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고, 마녀를 만나면서 욕구가 깨어났으리라. 그러고 보면 마녀는 결국 맥베스가 원하는 것을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이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 아니 사실 우리 모두가 다 그렇다. 동일한 시간에 동일한 대화를 나눈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서로가 기억하는 부분이 조금씩 달라지고, 똑같은 영화나 드라마나 책을 보아도 기억하는 장면은 사람마다 다르다. 결국 수없이 떠다니는 말들 중에 우리는 자기가 원하는, 겉으로는 부정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원하는 것들만 받아들이고 믿으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21세기인 요즘 아직까지도 사주, 점성술, 타로 등등을 찾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것도 그런 이유가 있겠다.

맥베스 (방백) 글래미스, 코도 영주.
그 다음엔 대권이다. (로스와 앵거스에게) 수고하셨습니다ㅡ
(뱅코에게) 후손들이 왕 되기를 바라지 않으시오?
코도를 내게 준 것들이 그 못잖은 약속을
그들에게 했지 않소?

뱅코 그 말을 다 믿다간
장군이 코도 영주 외에도 왕관을
탐할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이상하죠.
어둠의 수족들은 우리를 해치려고
가끔씩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소소한 정직으로 우리를 유인하여
중대한 결말에서 배반한단 말입니다.

1막 7장 망설이는 맥베스를 부추기는 맥베스 부인의 대사는 섬뜩한데, 특히 웃는 얼굴로 젖을 먹고 있는 아기에서 젖꼭지를 뽑아서 골을 깰 수도 있다는 부분은 언제 읽어도 무시무시하다. 아주 어릴 때 소년소녀전집에서 원작에서 상당히 각색된 형태의 맥베스를 읽은 것이 처음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이후부터 지금까지 죽 다른 대사는 몰라도 이 대사만큼은 확실하게 각인이 되어 있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식까지도 희생할 수 있다는 이 부분을 보다 보면 문학에서 창조해 낸 최고의 악녀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맥베스 제발 그만.
남자다운 일이면 난 무엇이든 감행하오.
더 할 사람 없을 거요.

맥베스 부인 그럼 무슨 짐승이
내게 이 계획을 발설하게 시켰어요?
이 일을 감행코자 했을 때 당신은 남자였고
전보다 더 과감해져 훨씬 더 큰 남자가
되려고 했어요. 당시엔 시간과 장소가
안 맞아도 당신이 맞추려고 했는데
저절로 맞춰지니 이젠 그 적절함 자체가
당신 기를 꺾는군요. 난 젖 빨린 적 있어서
내 젖 먹는 아기 사랑 애틋함을 알아요.
난 고것이 내 얼굴 보면서 웃더라도
이 없는 잇몸에서 젖꼭지를 확 뽑고
골을 깼을 거예요. 내가 만일 당신처럼
이 일 두고 맹세했더라면.

4막 3장 맥베스가 맥더프의 아내와 자식을 전부 살해했다는 사실을 접한 후의 대사이다.

맬컴 진정하오.
자 우리, 위대한 복수의 약을 지어
치명적인 이 비탄을 치료해 봅시다.

맥더프 그에겐 자식이 없어요. ㅡ 귀여운 것 모두를?
모두라 하였소? ㅡ 오, 지옥 솔개 갔으니! ㅡ 다?
아니, 귀여운 병아리와 암탉을 모두 다
일격에 낚아채?

이 부분에 대해서 주석에서는 세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고 한다.
1) ‘그’는 맬컴이며 그가 만일 자기 자식이 있다면 슬픔의 치료제로 복수를 제안하지는 않을 것이다. 2) ‘그’는 맥베스이며 그가 자식이 없기 때문에 맥더프는 같은 식으로 복수할 수 없다. 3) ‘그’는 맥베스이며 그가 만일 자기 자식이 있다면 맥더프의 자식들을 죽이는 것과 같은 일은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부분이 흥미로운 것은 무엇이냐면, 1막 7장에서 맥베스 부인의 대사로 미루어봤을 때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 사이에서는 아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시점에서는 없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 희곡에서는 명확히 나오지는 않는데, 2015년 작 영화에서는 맥베스와 맥베스 부인이 죽은 아이를 장사지내는 장면이 나오고, 이 들이 자식을 잃은 상실감으로 인해 여기까지 일을 벌였다, 즉 이 부부 캐릭터의 핵심은 상처와 결여다, 라고 해석하는 것은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해석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해되기 어려운 맥베스라는 인물을 이해하기 위하여 감독 나름의 정리를 한 것일 수 있겠다. 그렇다면 1막 7장에서의 맥베스 부인의 대사는 무시무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 아이가 죽고 나서 하는 대사였다면 말이다. 만약 더 이상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면, 맥베스 부부에게 남은 최고의 욕심은 왕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고, 자식이 있는 뱅코의 입장에서는 자자손손 내 자식들이 훌륭한 자리에 오르는 것이 더 큰 욕심이었을 것이다.

5막 8장

맥베스 내가 왜 얼간이 로마인 행세를 하면서
내 칼로 죽어야 해? 산 놈들이 보이는 한
멋지게 베어주자.

이 부분은 주석에 따르면 로마의 장수들인 카토, 브루투스, 안토니처럼 전쟁에 졌을 때 사로잡히는 굴욕을 면하기 위하여 자결하는 그런 바보 같은 관습을 맥베스 자신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이라고 한다. 끝까지 삶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집착하는 모습 때문에 맥베스에게 연민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을 앞에서부터 차례차례 읽고 있는데 아직 남아 있는 리어 왕을 제외하고 나면 다른 두 편인 햄릿이나 오셀로에 비해 맥베스가 훨씬 더 재미있다. 어떻게 보면 4대 비극 주인공 중 맥베스가 가장 잔인한 악인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햄릿이나 오셀로보다 맥베스가 훨씬 더 매력 있는 주인공이다. 햄릿이나 오셀로의 경우 그들의 불행에도 불구하고 읽다 보면 지긋지긋해지는 부분이 있었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스스로에 대한 지나친 연민, 자살 혹은 자기 파멸로 마무리 되는 결과에서 자의식의 과잉이 느껴져서였던 것 같다. 햄릿도, 오셀로도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그 태도가 끝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자기 불행에 대해 스스로 슬퍼하는데 주변의 온도와 그 슬퍼하는 정도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라 자기변호만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맥베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민하고 주저하고 회의하고 결국 마지막 부분에 다다라서는 자신의 운명을 그대로 껴안고 끝까지 삶 위에 서 있으려고 한다. 어쩌면 그런 부분이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지어내는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은 가장 인상 깊었던 맥베스의 마지막 모습이다.

5막 9장

맥베스 항복하지 않겠다.
나이 어린 맬컴의 발밑 땅에 입 맞추고
잡놈들이 욕 퍼붓는 놀림감은 안 될 거다.
던시네인 언덕으로 버남 숲이 오기는 했지만
대적하는 네놈이 여자 소생 아니긴 하지만
난 끝까지 해보겠다. 이 도전의 방패를
내 몸 앞에 던진다. 덤벼라, 맥더프. 그리고
“멈춰.”라고 하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
(싸우며 모두 퇴장. 경종. 싸우며 다시 등장하고 맥베스가 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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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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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을 보고 셰익스피어도 그 당시 유럽의 반유대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구나, 인종차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이 책을 보면 생각이 완전히 뒤집힘을 느낀다. 무어 인이란 아라비아인, 베르베르인, 흑인의 혼혈로 구성되며 좁은 의미로는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 무슬림, 넓은 의미로는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하지 않고 북서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총칭하며, 현대의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몰타, 모리타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중세 무어 인의 후세들이라고 한다. 무어 인은 인종학적인 명칭도 아니고 단일 민족이 아니기에 연대감이 약하며 무어 인이라는 용어 자체도 개념이 명확하지는 않다고 한다. 이러한 무어 인을 주인공을 삼아 비록 어리석은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자존심이 강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그리고, 피부색만으로 그를 미워하고 의심하는 백인들에 대한 비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오셀로 증후군이라는 말도 연관검색어에 뜨는데 정식 용어는 아니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주인공이니만큼 배우자의 정조를 의심하는 부정망상을 설명하기에 딱 좋은 단어인 것 같다. 대체 왜 오셀로처럼 유능하고 고귀했던 사람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댈 수 있겠다. 어느 것이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3막 3장에서 음모를 꾸미는 이아고의 대사를 보면 마음 한 구석에 자고 있던 열등감을 이아고가 자극시켜 깨운 것이 시작일 것이다.

이 손수건을 카시오의 숙소에 떨구고
그가 발견토록 해야지. 질투하는 사람에겐
공기처럼 가볍고 하찮은 물건도
성경 말씀처럼 강력한 확증이야.
이게 무슨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무어인은 벌써 내가 준 독약 먹고 변했어.
위험한 상상은 그 본질이 독약인데
맛이 고약한 줄 처음엔 거의 모르다가
약간씩 핏속으로 퍼지기 시작하면
유황불처럼 타는 거야. 그렇다고 했잖아.

질투에 대한 셰익스피어의 생각은 이아고의 대사 뿐 아니라 3막 4장에서 오셀로의 아내 데스데모나와 이아고의 아내 에밀리아의 대사에서도 나타난다.

데스데모나 어쩌나, 난 절대 원인 제공 안 했어!
에밀리아 질투하는 이들에게 그건 답이 아니에요.
그들은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질투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거라고요.
그건 스스로 생기고 스스로 태어나는
한 마리 괴물이랍니다.

어쩌면 오셀로는 완벽하게 열등감을 극복하지는 못한 인물이었고, 어쩌면 아내 데스데모나는 그가 적어도 그 자신에게, 그리도 남들에게 나는 나의 처지를 완벽히 극복했다는, 그래서 나의 처지에서 오는 열등감과 싸워 이겼다는 증표이지 않았을까. 금이 간 댐에 점점 물이 스며들다가 터져 버리는 것처럼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숨죽이고 있던 열등감이 자극되어 깨어나면서 심리적 안정도 같이 무너져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오셀로가 카시오에게 가지고 있는 열등감은 젊은 나이와 백인이라는 것, 그리도 아내인 데스데모나는 젊은 나이의 백인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 하지만 적어도 겉보기에는 가지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 그렇지만 그것을 가진 상대에게 끌려 사랑에 빠지고 이제 나는 과거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을 때 역시 너는 ‘그것’을 가지지 않아서 안 되겠다고 잔인하게 버림당했다고 믿게 되는 정황. 시대적인 설정을 들어내면 이것을 현대에도 충분히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영원히 현대적인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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