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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향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0
송성욱 풀어 옮김, 백범영 그림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갑작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으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인파속에서 주고 받던 "죄송합니다"란 인사를?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던 "잘못 거셨어요"란 목소리를?
그러나 난 이미 그들의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오, 기억나지 않아요.
이미 오래전부터
'우연'이 그들과 유희를 벌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들은 분명 깜짝 놀랄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운명이 될 만큼
완벽하게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운명은 다가왔다가 멀어지곤 했다.
길에서 예고 없이 맞닥뜨리기도 하면서,
낄낄거리고 싶은 걸 간신히 억누르며,
옆으로 슬며시 그들을 비껴갔다.
신호도 있었고, 표지판도 있었지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제대로 읽지 못했음에야.
어쩌면 삼 년 전,
아니면 지난 화요일,
누군가의 어깨에서 다른 누군가의 어깨로
나뭇잎 하나가 펄럭이며 날아와 앉았다.
누군가가 잃어버린 것을 다른 누군가가 주웠다.
어린 시절 덤불 속으로 사라졌던
바로 그 공인지 누가 알겠는가.
누군가가 손대기 전에
이미 누군가가 만졌던
문고리와 손잡이가 있었다.
수화물 보관소엔 여행 가방들이 서로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어느 날 밤, 깨자마자 희미해져버리는
똑같은 꿈을 꾸다가 눈을 뜬 적도 있었다.
말하자면 모든 시작은
단지 '계속'의 연장일 뿐.
사건이 기록된 책은
언제나 중간부터 펼쳐져 있다.
폴란드의 시인 쉼보르스카의 시이다. 이 시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에는 영혼이 바닥까지 치고 있었던 상태라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말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지금은 바닥에서 올라온 상태이지만, 그때와는 또 다른 의미로 이 시는 여전히 현재 시점에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이다. 폴란드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으며, 제2차 세계대전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등단 후 12권의 시집을 출간하였고 전 세계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으며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시단詩壇의 모차르트’라고 한다. 이 시인에게 빠져 있을 무렵 그녀가 몸을 담고 있던 문예지에 그녀가 쓴 독서칼럼들 중 일부가 추려져 번역되어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책 제목은 ‘읽거나 말거나’. 그녀가 쓴 칼럼의 제목은 ‘비필독도서’라고 한다는데, ‘필독도서’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내려놓고 다양한 장르의 도서들을 자유롭게 소개하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고 한다. ‘읽거나 말거나’라는 제목도 그녀의 의도를 온전히 살리면서도 귀엽고 재치 있는 책 제목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칼럼의 수는 총 562편이고, 한국어판에 실린 것은 총 137편이다. 선정 기준은 한국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서평들을 먼저 추려냈다고 하는데,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부터 모차르트나 슈베르트, 히치콕, 채플린, 니체, 릴케, 토마스 만, 클림트와 같은 예술가들의 회고록이나 평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여기에서 순간 눈을 번쩍 뜨게 한 부분. 저자 미상, ‘열녀 중의 열녀 춘향 이야기’. 놀랍게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춘향전이 폴란드의 1세대 한국학자 할리나 오가렉 최 교수에 의해 번역되었고, 그 번역본을 쉼보르스카가 직접 읽고 나서 소개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춘향전 완역본을 읽은 사람은 드물어도 춘향전의 전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또 있을까. ‘사랑 사랑 사랑 내 사랑이야’로 각인된 판소리는 당연하고, 김희선의 미모가 빛을 발하던 드라마 춘향전, 조승우의 데뷔작이자 한국 영화 최초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춘향뎐이 있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던 드라마 쾌걸 춘향, 원작을 비틀어 방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 방자전 등 춘향전이 모티브가 된 작품은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런 춘향전을 폴란드에서 태어나 평생 폴란드에서만 살았고, 한국에는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세계적인 시인이자 독서가가 어떻게 느꼈을지 궁금해졌다.
동아시아에서는 용꿈을 꾸면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실제로 기생 출신의 한 여인이 꿈에서 복숭앗빛 호수를 향해 뛰어드는 초록빛 용을 본 후, 그녀의 딸은 열여섯 살의 나이에 젊고 부유한 양반 자제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젊은 청년이 그녀를 보고도 첫눈에 반하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린 춘향은 립스틱조차 바르지 않아도 “온 나라를 뒤흔들 만큼”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였기에. 게다가 그녀는 우아한 몸가짐과 예의범절을 갖추고 있었고, 시를 짓는 데도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하지만 출신계급이 미천했기 때문에 그녀가 오를 수 있는 위치는 양반의 비공식적인 아내 자리뿐이었다.
어떤 이들은 생생하고 정교한 묘사를 높이 평가하고, 다른 이들은 생동감 넘치는 러브신을 극찬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는 수준 높은 감성에 찬사를 보내고, 사회비판적인 요소와 여성의 힘겨운 운명에 대한 공감의 메시지에 매료된 이들도 있다. 그밖에도 판타지적 요소가 없다는 점을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덕목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찬사의 밑바탕에는, 리얼리즘이야말로 문학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이런 확신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동화나 민담은 리얼리즘과 판타지가 혼합되어 있으므로 미성숙한 하위 문학이자 아직 나비로 성장하지 못한 애벌레와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동화나 민담을 읽는다는 것이 상당히 힘겨운 일일 것이다. 모든 종류의 기적이나 환상은 미학적으로 불완전한 일종의 죄악으로 치부되고, 개연성에 위배되는 요소들은 전부 유치하기 짝이 없게 여겨질 테니 말이다. 그런 이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 이 춘향에 관한 이야기조차도 그런 사람들에겐 이따금 안면근육의 경련을 일으키게 만들 것이다. 매우 강렬한 해피엔딩을 맞고 있지만, 사실 거기에 춘향의 으깨어진 두 발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으니 말이다. 과연 춘향의 발꿈치 뼈는 아무런 흉터도 남기지 않고 잘 붙었을까. 안심해도 좋다. 완벽하게 잘 아물었을 것이다. 틀림없이 춘향은 잘생긴 배우자 옆에서 절뚝거리며 걷지도 않을 테고, 첫날밤에 원앙이 수놓인 이불을 덮어 자신의 뒤틀린 두 발을 애써 가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동화는 결코 현실의 삶에 완전히 항복하는 법이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 반대이다. 틈만 나면 훨씬 나은 자신만의 해결책을 제시하면서 현실을 난처하게 만든다.
‘열녀 중의 열녀 춘향 이야기’에 대한 쉼보르스카의 서평 중 앞부분과 뒷부분을 옮겼다. 전체 내용의 핵심을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요약했고 완벽하게 전체를 이해하여 자신의 생각까지 덧붙였다. 더할 나위 없는 서평이었다. 무엇보다 고문당해서 으스러진 춘향의 두 발에 생각을 집중시킨 것은 흥미로웠다. 어떤 의미에서 춘향전은 유리 구두를 신은 신데렐라 스토리를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으니까. 현실의 삶에 항복하지 않고 자기만의 해결책을 제시했다는 것은 구전으로 전래되다가 마침내 문자로 장착된 춘향전을, 조선 후기 민중이 어떻게 창작하고 전승했는지에 대한 대답이자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