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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 아웃케이스 없음
가스 제닝스 감독, 주이 데샤넬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살아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영화
이 영화는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한다. 3년 전쯤이었나?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게 된 것은 길고도 독특한 제목과 두꺼운 두께에 끌렸기 때문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이 책을 집어 들고 2주 정도 들고 다니면서 읽었는데 보는 사람마다 조금 놀라면서 약간은 날 놀렸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솔직히 다 안 읽지 않았냐면서 웃던 동기에게 분명히 다 읽었다고 얘기했지만 사실 뒤쪽의 3분의 1은 결국 못 읽고 반납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보던 그 두꺼운 책은 5권으로 나누어서 나온 것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6번째 권이 나왔다고 하는데 영화화가 되기 전에 작가가 사망했는데 어떻게 뒷얘기가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후대인들의 헌정판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읽지 못한 책의 뒷부분에 다시 도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면서도 이걸 어떻게 영화로 옮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새삼 감독의 능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남자 주인공인 아서는 어눌해 보일 정도로 순수하지만 우직하고 결단력 있는 인물이다. 여자 주인공인 트리샤는 인형 같은 외모인데 독특하고 신비한 느낌이 난다. 우리나라로 치면 최강희와 비슷한 느낌이다. 요즘 즐겨보는 미국드라마 본즈의 여주인공과 자매 사이라고 해서 반가웠다. 두 자매 모두 투명한 녹색을 띈 푸른빛의 눈동자가 참 매력적인데 프랑스와 아일랜드 계통이라고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를 묘사한 대목에 초록색의 눈이 매력적이라는 구절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는 푸른색도 아니고 녹색의 눈이 어떻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 있을까하고 의아했는데 아마 이 여주인공의 눈빛과 같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본문에는 스칼렛 오하라의 조상이 아일랜드에서 이주했다는 대목이 있다.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색은 초록색이라는 것도 tv의 여행 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난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아일랜드 계통 미녀들의 특징인가?
몇 백 쪽이나 되는 책을 채웠던 영국식 농담과 넘쳐흐르던 상상력, 삶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두 시간짜리 영화에서 전부 찾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매력으로 가득하다. 그 점에서는 책보다 영화가 더 나은 점이 있다. 이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한 번 비틀지 않고 다시 한 번 또 비틀어서 이미 수많은 풍자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던 사람이 실제로는 가장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내용은 오히려 많은 책에서 본 설정이기에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쥐에게 의뢰받아 거대한 지구를 만드는 장면(여기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고 치자), 그 중에서도 히말라야 산맥 만드는 건 그렇다 쳐도 커다란 호스로 대양에 물 채워 넣는 장면은 정말 할 말이 없게 만든다. 상대편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다는 총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총구가 겨누어진 여성이 “여성은 모두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으므로 그런 총이 필요없다”고 말하는 장면은 여성들 마음에 참 드는 반전이다. 인간의 성격을 주입받은 로봇이 오히려 만성적인 우울증에 시달린다는 장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로봇이 불완전한 것은 결코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므로 완전한 로봇은 인간의 감정을 가진 로봇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해오던 인간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부분이다.
사실 이 책은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장난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면서도 장난 같지 않게 한다. 무슨 소리냐면, 지구가 한 순간에 사라진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웃음이 나오게 한다. 우주 공간에 도로를 만들기 위해 지구가 철거된 것이고, 게다가 그 과정에서 은하계 대통령이라는 자는 지구 철거에 대한 서류를 제대로 보지도 않고 서명을 해 버렸다. 수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미국의 영웅들이 그렇게 구하려고 애쓰던, (그리고 결국 구하고야 마는) 이 지구가 하루아침에 어이없는 이유로 너무나 허망하게 사라져버린다. 그리고 남은 지구인들은 빌붙을 데 하나 없는 그야말로 우주의 히치하이커가 되고 만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히치하이커와 다를 게 어디 있을까 싶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우리의 인생길을 여행길로, 우리를 여행자로 비유하고 있지 않나?
이 영화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물론 더글라스 애덤스의 매력이겠지만) 장난처럼 툭툭 내던지지만 사실 까집고 뒤집어보면 그 안에 화두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골똘히 생각에 빠지게 하고, 답을 찾는 노력을 하게하고, 마침내 감사하게 한다.
결국 인생에 대한 답은 없다는 것, 그리고 장난처럼 던져진 빌 나이히의 대사, “정답을 찾는 노력을 하지 마라.”(“인생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였나? 아무튼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인생의 의미, 삶의 궁극적 정답, 이딴 게 다 무슨 소용 있느냐는 것이다. 그냥 열심히 주어진 것에 행복해 하면서 최대한 만족하면서 살면 되지, 안 그런가?
사실 마지막에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장면, 특히 캥거루가 뛰던 그 화면, 지구의 아름다운 자연 환경을 담은 수많은 카메라 컷들이 지나가는 장면에서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었나? 비록 화면 안에서 다 벌어진 일이지만 두 시간 만에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온전하게 돌려준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살아 있는 동안 어차피 알지도 못할 인생의 의미 따위를 찾느라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인류는 몇 천 년 동안 이 문제로 고민해왔지만 여태껏 답을 알지 못했다) 삶을 있는 힘껏 껴안고 즐겁게 살다 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말이다.
P.S. 관공서에서 필요 이상의 서류를 남발하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정해진 점심시간은 지켜야 하는 것 등은 아마도 영국인으로서 영국의 일상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 같다. 이것을 풍자로까지 보면 좀 그렇고 아마도 개그콘서트 수준처럼 우리 안에 있는 어쩔 수 없는 모순적인 모습을 그려낸 것 아닐까? 그러고 보면 늘 차를 찾는 모습이나 소심한 중산층 남자 주인공의 모습도 영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다.
P.P.S. 컴퓨터가 내놓았던 어이없는 답 ‘42’는 어디서 튀어나온 숫자일까 궁금했는데 이후 수많은 SF물에서 이유 없이 등장했다고 한다. 애초에 이런 숫자는 왜 생각해낸 걸까. 이렇게 의문투성이 영화여서인지 우리나라에서는 단관 개봉했다고 한다. 원래 우리나라가 SF가 잘 안 먹히는 나라란다. 유일하게 스타워즈 시리즈가 별 재미를 못 본 나라라고.
P.P.P.S. 오프닝에 등장하는 물고기와 함께 나오는 노래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활기차고 경쾌하다.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와 화면 덕분인지 책을 읽을 때는 생뚱맞게 이 장면이 왜 있나 생각되었는데 영화를 보니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이젠 책을 읽으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