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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실 비치에서 (영화 특별 한정판, 양장)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하지만 사십 년이라는 세월 저편에서 그를 찾느라 여념이 없는 그녀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아니면 스토너 밸리가 굽어보이는 곳에 잠시 멈춰서서, 그녀가 오렌지를 함께 먹으려고 멈췄던 곳이 여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남자든 여자든 그녀의 진정성에 필적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했다. 그녀 곁에 머물렀더라면, 그는 자신의 삶에 좀더 집중하며 의욕적으로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클래식 음악은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니었지만, 그는 에니스머 사중주단이 저명하며 여전히 클래식 음악계의 존경받는 스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연주회에도 가지 않았고,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박스를 사지도, 아니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사진을 보고 싶지도, 사진에서 세월의 흔적을 발견하고 싶지도, 그녀의 삶에 대한 이런저런 자세한 소식들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그녀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싶었다. 단춧구멍에 꽂은 민들레, 벨벳 머리끈, 어깨에 둘러멘 캔버스 가방, 시원시원하고 꾸밈없는 미소를 머금고 있는 골격이 튼튼한 아름다운 얼굴을.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물론 이제 그는 그녀의 자기희생적인 제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부를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빛나는 쭉 뻗은 광활한 자갈밭 길의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그리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언 매큐언의 소설 중 제일 좋은 소설이었고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자 최고의 마무리였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동명의 영화에 나오는 시얼샤 로넌을 정말 좋아하고, 영화의 시나리오를 작가가 직접 썼다고 하기에 영화를 보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소설의 감동이 아주 미세하게라도 금이 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망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