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만든 여자 1
신봉승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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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이 승하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며 수양대군이나 안평대군등 권력에 야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파란의 시대가 열렸다.세종이 그동안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면 그야말로 내일을 내다볼 수 없는 그런 날들 속에서 수양은 '왕'을 꿈꾼다. 그런 수양의 곁에는 그의 맏며느리 한씨인 '인수대비'가 있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그동안 드라마로 이어진 <공주의 남자>나 <누가 김종서를 죽였는가> <김종서의 눈물> <한명회> <채홍> 등 드라마로 소설로 만이 나왔다. 역사의 행간을 읽는 다는 것은 예전에는 무조건 어렵다고 외면하듯 하여 더욱 어렵게 보게 되었지만 요즘은 부딪혀 읽고 보려고 하니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하거니와 역사가 재밌는 소설이나 드라마로 재탄생 하여 좀더 우리 곁에 가깝게 다가옴도 한몫을 하는 것 같다.

 

며칠전에 읽은 <채홍>은 세종의 며느리이자 문종의 두번째 빈이었지만 동성애 스캔들로 역사에서 사라진 여인이다. 그런가 하면 <왕을 만든 여자>는 한학의 딸로 수양대군의 며느리이면서 가슴에는 만권의 책을 품고 다니듯 대단한 독서량도 그러하지만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달랐던 것 같다. 현세를 냉철하고 살피고 앞을 내다보는 눈으로 시아버지 수양대군의 든든한 후원자가 될 수 있던 한씨, '아들과 바뀌었더라면..' 이라고 수양대군과 아내가 탄식할 정도로 여러모로 빼어난 여성이었든 듯하다.그런 그녀가 시아버지가 가슴에 품은 뜻을 이루는데 한몫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시아버지 수양이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하여 불러들인 '칠삭둥이' 한명회와 뜻을 함께 하면서 씨너지 효과를 낸 것은 아닐까.'수양대군과 칠삭둥이 한명회의 만남은 이 나라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놓을 만한 운명의 만남이었다.' 그런가 하면 안평대군의 편에 선 '김종서는 불길한 미래를 예견한다. 사사건건 수양대군의 참견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찌보면 <왕을 만든 여자1>은 수양대군과 한명회가 한편이라면 그외 맞서는 김종서의 그외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다.

 

어린 단종이 다스리기엔 이씨 조선은 너무 태평성대를 누려왔다. 그의 작은 어깨로 조선의 종묘를 떠받치기엔 그는 너무 힘이 없다. 그렇다면 그 힘을 수양이 가져야 할 것인가 안평이 가져야 할 것인가? 수양은 자신이 가슴에 품은 뜻을 남이 먼저 말해주기 바랬지만 선뜻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이를 만나지 못했는데 칠삭둥이 한명회만은 서슴없이 그의 뜻을 알아보기도 했지만 시아버지 수양보다 며느리 한씨가 중전의 인물임을 알아보고는 수양의 편에 서서 그를 왕을 만들기 위한 발빠른 움직임에 나서며 그에 필요한 인물들을 포섭하고 담금질을 하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어 놓는다. 대세는 점점 단종의 손을 떠나 숙부인 수양에게 기울도록 자신의 편을 만들수 있는 자와 안평의 편에 선 이들의 자식들을 데리고 사은사까지 다녀온 수양에게 기울어졌다.

 

그런가하면 사운사를 간 수양을 위해 한명회를 그가 돌아오면 행동에 나설 수 있는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춘다. 그를 돌아보고는 든든해 하는 한씨, 그녀는 어찌보면 한명회를 앞지른다고 볼 수도 있다. 사은사를 다녀 온 후 자신의 입지를 넓히기 위하여 드디어 칼을 휘두르는 수양대군, 피비린내와 유배로 물들은 현세에 견디지 못하고 단종은 드디어 수양에게 자리를 내어 놓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단종이 왕의 자리를 내어 놓는 것은 더 많은 피를 부리지 않기 위함이면서 자신이 살 길을 찾기 위하여서이다. 얼마나 무서운 세상인가. 자신들의 혈육이면서 서로 칼을 겨누고 있는 꼴이. 그렇게 하여 권력을 손에 쥔들 무엇이 좋을까.그 후한으로 늘 밤마다 시달려야 했던 세조, 칼로 얻는 권력은 응징의 대가를 치루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한다.그런 정치판을 작가는 '정치란 불과 같은 것이어서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화상을 입게 되고, 너무 멀리하면 동상으로 고통 받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가까이 해도 화요 멀리해도 화이니 그 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어찌할꼬.

 

소설은 역사에 입각하여 충실하게 쓰여져서인지 역사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런가하면 '수양대군' 은 드라마 <공주의 남자>를 보아서일까 그때 생각을 하며 읽으니 더욱 재밌다. 소설을 읽고 있으면 계유정란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속에 함께 휘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어쩔 수 없이 왕위에서 물러나야 했던 단종이나 야심에 불타 혈육도 마다하지 않았던 수양이나 참 씁쓸하지만 어쩌면 이런 소설이라도 많이 나와 역사가 좀더 우리와 가깝게 숨을 쉬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역사책에서 주입식으로 들어 외우던 딱딱한 역사에서 벗어나 소설을 읽으며 그 틀을 잡아가다 보면 인물들이 살아 있는 듯 하여 역사를 이해하는 그 정도도 좀더 쉽고 멀게만 느껴졌던 역사가 내가 숨쉬고 있는 '지금'과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퍼뜻든다. 아직 인수대비의 파란만장한 삶이 나오진 않았지만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밑바탕을 이루는 그 이면에 한씨인 그녀 인수대비가 있다는 것을,그리고 그녀 또한 한명회를 앞지르며 난세와 현세를 읽을 줄 아는 현명한 여인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벌써부터 여장부다운 기세를 여실히 보여주는 그녀,아직은 시아버지 수양의 그늘에 가려 있지만 그녀가 그늘밖으로 나올 2부가 기다려진다.

 

요즘은 역사가 자주 문화 아이콘으로 등장하면서 역사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줄어 들었다. 여장부 인수대비 또한 <내훈>으로 알고 있던 면보다는 어느 집안에서 자라고 한집안의 며느리로 그리고 구궁궁궐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던 지식인 여성으로 과감할 수 있었던 그녀를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다. 한 줄 역사에 기록된 인물을 부활시키기 보다는 파란의 여물목을 지나가는 그 시대와 인물들과 함께 작가의 입김에서 되살아난 역사가 신선하게 와 닿기도 하지만 재밌게 읽어나갈 수 있어 다행이다. 주입식 교육의 역사에서 멀어졌던 부분들이 이런 문학작품으로 놓쳤던 역사의 행간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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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대에 시공사 헤밍웨이 선집 시리즈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성곤 옮김 / 시공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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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사망 50주기가 되어서일까 그의 작품들이 봇물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번 기회에 나 또한 그의 대표작인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어보게 되었다. 학창시절에 읽어 보았고 영화로도 몇 번 보았던 '노인과 바다'를 그때하고는 또 다른 공감대를 형성하며 내게 다가왔다. 인생이란 무얼까? 무언가 거대한 것을 낚았다고 생각하는 순간,노인은 모든 것을 잃듯 했다. 인생역전을 할 수도 있었는데 역시나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인지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 짧은 작품 속에서 '인생'이란 굴곡진 삶을 다시금 되새김질 하면서 만난 헤밍웨이는 시간이 흘러도 역시나 노련미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만나게 된 헤밍웨이 단편선집, 그리 알려진 작품이 아니다. 그의 굵직한 대표작들만 알았지 이런 단편이 있는지도 몰랐고 '우리들의 시대에' 라는 단편선집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노인과 바다>에서도 그렇지만 그는 '짧은 대화' 속에서도 모든 것을 다 담아 내고 사실감 있게 그려낸다. 현실의 냉혹함,비단 그때 뿐일까?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그,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그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하다. 전쟁의 실상을 냉철하게 보여주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노인과 바다>에서처럼 역시나 그의 소설의 특징인 사실적이면서 짧은 대화들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그의 장편에 익숙한 우리들에겐 어쩌면 낯선 작품들일지 모른다. 난 작가들의 장편소설도 좋아하지만 단편이나 에세이등을 찾아서 읽기도 하고 읽는 것을 좋아한다. 장편에서 다 못한 짤막한 생각들을 단편에서 만나는 듯 하기도 하지만 장편으로 다루기 위한 '디딤돌'과 같은 작품들이 단편속에 숨겨져 있다. 좋은 작품들은 단편에서 더 많이 만날 수도 있다. 그런면에서 '우리들의 시대에'에는 그가 장편으로 나가기 전의 그의 문학의 자궁과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나이 스물다섯에 발표한 작품인 '우리들의 시대에' 는 영글지 않았으면서도 모든 작품들을 통틀어 본다면 하나의 영글은 열매로 거듭나는 그런 작품이라 할 수도 있겠다.

 

자신의 자전적인 인물인 '닉 애덤스'를 통해 자신의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첫번째 프로포즈의 실패나 아버지의 연약한 모습 그리고 처음 접한 죽음 이나 결혼후 찾아온 권태및 자신의 인생전반에 걸쳐 굵직한 굴곡진 삶을 짧은 단편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그, 훗날 굵직한 장편들이 태어날 모태와 같은 작품들이 실려 있어 읽어볼만 하다. 단편이 하나 끝나고 짧은 글이 있어 더욱 자신의 자서전 같은,아니 일기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의 대작들의 여운이 남은 독자라면 그의 다른 작품으로 가기 전 징검다리를 건너듯 한번 읽어볼만한 작품이다. 작가의 단편집을 만난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이다. 장편보다 더 많은 생각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기분으로 작가를 탐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한다. 어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사냥과 낚시를 배워서일까 작품에서 그의 그런 일상이 담겨 있기도 하고 아버지의 모습도 그의 모습도 소설인듯 일상인듯 담겨 있어 '왜 지금 헤밍웨이인가... '문학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깨우쳐주는 작가이다 - 김성곤 교수' 의 말처럼 냉혹하고 잔혹한 현실에서 자신의 삶 또한 고독하고 무력한 가운데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엽총자살이라는 끝맺음으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파란만장한 삶이 그의 작품속에 숨겨져 있는 듯 하여 올해는 좀더 '헤밍웨이'를 찾아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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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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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사랑을 기록하지 않아요. 아니,애초에 못하지요. 그래서 사랑은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지워진 여인,이름도 없고 시호도 없이 그녀가 한때 지녔던 '순빈' 이라는 품계가 그녀를 부를 수 있는 호칭의 전부라니.조선의 역사에서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스러져갔을까. 격식,절차,의례,명분,도리... 등의 이름뒤에 자신의 삶을 버려야 했던 여인들이 얼마나 많은까? 순빈 또한 그런 역사의 몽둥이에 자신의 날개를 한번도 펼쳐보지 못하고 그저 파닥이가 죽어간 것은 아닌지,읽기 전에는 무얼까? 하던 것이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정말 씁쓸하면서 가슴의 깊은 날카로운 비수에 깊게 찔린 것처럼 아프다. 꽃 한송이가 활짝 피어보지도 못하고 몽오리에서 그만 누군가에 의해 '똑' 떨어져 버린것어럼 이 슬품은 무엇일까? 왜 그녀는 '위험한 사랑'을 선택해야만 했을까?

 

평범하게 살 던 그녀,아니 평범함이라기 보다는 자유롭게 살던 난은 구중궁궐에 갇혀 지아비인 세자의 발길조차 뜸한 궁에서 홀로 젊음을 뒤로 한채 시들어가야만 했을까. 누구보다 빼어나고 누구보다 사랑받을 자격을 가지고 태어난 그녀가 왜 유독 세자의 눈에서 멀어진 것일까? 세자는 그야말로 할 일이 많아서 그녀를 멀리 했을까. 그렇다면 왜 그녀가 아닌 다른 후궁의 처소에는 들러 봉빈과 눈지 못하는 그런 남녀의 사랑을 한 것일까? 정말 그녀에게는 사랑할만한 터럭만큼의 요인 한가지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아니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었을까? 아마도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었을테지만 세자에게도 분명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한다. 부부간의 문제는 양쪽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봐야지만 그 깊은 속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쪽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한쪽편만 들 수 있는 것이 부부사이 문제이고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고 하지만 칼에는 흔적이 남지 않지만 물에는 흔적이 남을 수 있다. 세자에게는 아무 문제없이 지나간 '사랑'이 왜 유독 사랑을 받고 훼임을 해야만 했던 세자빈 봉빈만 질타를 받아야 했을지.

 

'아름다운 것이 그녀의 죄일 리 없으나 아름다움 때문에 외면당하는 것도 그녀의 운명이었다.' 첫번째 세자빈을 폐하고 맞이한 두번째 세자빈 '봉빈'마져도 세자의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아님 정말 해야할 업무가 많고 효심이 지극하여 그녀를 멀리한 것일까.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만큼 사랑을 받지 못하고 시들어가야만 했던 난, 혼자서 향기를 품고 있어도 그 향기를 맡아 줄 이가 없다면 그 꽃은 꽃의 매력을 잃은 것이다. 가끔 부모의 충고가 있어야 책임하에 찾아오는 세자,그런 세자에게서 무엇을 바랄 수 있으리요. 그런 사랑의 기울어짐을 침선으로 달래보려 해도 하루 이틀이고 또한 자신에게서 있어야 할 훼임소식도 아니 후궁보다 더욱 많이 찾아야할 봉빈을 무시하듯 하는 세자의 마음은 이미 기울어진 달처럼 지고 있다. 그녀가 의지하던 친정의 오라비와 아버지,그 아버지마져도 곁을 떠나시고 더욱 자신의 사랑의 길을 찾지 못하고 외로움에 방황하던 그녀의 눈에 들어 온 것은 소쌍,그리고 그들은 외로움을 달래듯 서로의 갈 길을 찾은 듯 서로를 탐했다,아니 중독되어갔다. '구리거울이 아니라 마음의 거울을 들여다보라고 했으렸다? 내 마음... 마음을 비추는 거울을?!..'

 

'그녀는 다만 살고 싶었을 뿐이다.'

구중궁굴에 갇혀 자신을 찾지 않는 세자를 기다리는 일도 하루 이틀, 마음의 방황을 잠재우지 못하던 봉빈은 그야말로 살 길을 찾아야 했다. 그것이 '소쌍' 이었다. 남녀의 사랑이 아닌 '여인과 여인의 사랑' 세자빈이기에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의 눈이 되고 귀가 되고 벽에도 귀가 있듯 그녀의 말은 세어나가 그녀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런 곳에서 남편인 세자마져 그녀를 등졌는데 그녀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마음'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물에 빠져서 허어적 거릴 때 남편이란 사람은 나몰라라 하면서 지나쳐 가기만 할 뿐이고 스스로 지푸라기를 잡아서 살아야 했던 그녀가 선택한 것은 격식도 명분도 도리도 아닌 그저 마음이 동하는 사랑이었다. '마음, 정녕 어디에 있는 알 숭 벗는, 살 수도 팔 수도 없는 그것!' 젊은 나이에 미치지 않고 술로도 달래는 것에는 한계를 느꼈던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살 수 있는 길'은 '여인을 사랑하는 것' 아니 '사랑하고나니 여인이었다' 말은 정말 처참하고 처절하다. 어떻게 세자는 그녀를 그토록 홀로 내버려 둘 수 있었을까? 난 여자이기에 여자 편을 드는 것 보다는 그 마음을 이해하기에 남자를 벌하고 싶다.정녕 그녀를 내처야만 했을까.

 

'그의 따듯한 사랑을 담뿍 받았던 고명딸은 지금 춥다. 아무리 톡톡한 비단옷을 지어 입어도 뼛골까지 가득 찬 냉기로 한봄에도 한겨울을 산다.' 그녀가 세자빈으로 간택이 안되고 만약에 평범한 지아비를 만나 평범한 삶을 살았다면 그때도 그녀가 '여인과의 사랑'을 선택했을까? 오라비들과 아버지 그늘 밑에서는 밝고 자유롭고 누구보다 아름다웠던 그녀가 세자빈으로 선택되는 순간 그녀의 운명은 하향곡선을 그리며 지독히도 빠르게 낙하하고 말았다. 흔히들 '여자 팔자는 뒤웅박팔자'라고 하듯이 결혼을 하고 남편을 만나면서 그야말로 삶이 어떻게 변화할지 모르는 것이 여인의 삶이거늘,자유롭던 것이 모든 것이 격식과 명분을 따지고 도리를 따져가며 자유를 억압받고 오로지 한 명 믿을 수 있는 내 편인 남편마져 멀리한다면 그 삶은 어떨까? 세자빈으로 간택된 순간부터 그녀의 삶은 '낙화'가 되고 말았다. 혼자서 그 모든 시간을 이겨내기란 정말 슬프고 가슴이 저릿저릿 후벼파는 그 아픔에 몸부림치며 스스로 안에서부터 죽어가지 않았을까.

 

'사랑은 독이다. 사랑을 할 때는 마비되어 황홀하지만 정작 그 독력은 사랑이 끝난 뒤에 발휘된다.' 사랑의 지독한 독에 중독된 여인,아니 사랑의 그 진실을 맛보기도 전에 중독되어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죽어간 여인같다. 그녀를 죽게 한 것은 그녀 스스로가 아니라 모두의 잘못이다. 세자도 역사도 격식도 명분도 모두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간 원인이다. 사랑보다는 절개를 더 중시하고 인지상정보다는 더 중한 것이 명분이고 격식이고 시부모에 대한 도리인 사회에서 사랑은 철저하게 통제를 받았지만 더욱이 여인의 삶보다는,아니 개인의 삶보다는 격식이 더 중히 여기는 구중궁궐에서 살고자,아니 살아나가고자 발버둥쳤던 여인의 흔적조차 사라졌다는 것이 씁쓸하다. 한 줄 역사에서 화려한 '무지개'로 부활한 난의 삶, 역사 속에서 다 피지 못하고 낙화한 그녀의 삶이 소설속에서 처절하게 피어났지만 가슴이 아리다. 비단 이런 삶은 역사 속뿐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또 다른 그녀도 있을지 모른다. 그녀들의 꿈이 더이상 낙화하지 않고 비상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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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초보에서 달인으로 거듭난 소셜마케터 미사키
이케다 노리유키 지음, 최희승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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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모르면 젊은 세대들과 공감을 나눌 수 없을 정도로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로그는 무척 많은 이들이 스마트폰이나 PC를 이용하여 하고 있다. 나 또한 어찌하다보니 '소셜시대'에 편승하여 '소셜화'되고 있듯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하고 있다. 물론 블로그는 오래전부터 운영하고 있지만 모든 사이트의 블로그를 모두 다 잘 관리한다는 것은 힘들다. 그렇다고 트위터나 페이스북도 정말 어느 이름난 누구처럼 잘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달인'의 경지에 이를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초보이지만 그런대로 운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소셜로 날 PR하는 것도 아니도 마케팅을 하는것도 아니기에 이 수준에서 만족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세계에 너무 빠져 들면 '자신'을 잃어 버리는 것 같아 적절하게 이용을 할 뿐이지 얽매이지는 않는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는 개인의 PR뿐 아니라 기업의 PR및 마케팅에도 적절하게 잘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나 또한 출판사들의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자주 이용하고 있기에 그 용도가 어디에 쓰이는가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한다고 모두가 '대박' 이 나는 것은 아니다. 이용자가 늘어 난다고 해도 마케팅에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을 글쎄? 이런 방면에 종사하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소셜시대에 살고 있고 나 또한 트위터와 페이스북 블로그를 이용하고 있기에 '마케팅' 이나 '기업'에서는 어떻게 사용할까 하고 궁금증에 읽어 보았는데 소설형식이라 재밌게 읽을 수 있으며 소셜 생초보였던 미사키가 소셜마케터가 되면서 겪는 우여곡절을 따라가다보면 '아하' 하고 재밌게 그 장단점을 이해할 수 있다.

 

 

난 처음에 트위터를 하면서 '리트읫'인 'RT'가 무엇인지 '맨션'이 무엇인지 몰랐다. 트친 트친하기에 그것은 알아 들었지만 '팔로워'나 '팔로잉' 등 내가 해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할 단어를 트위터계정을 만들고 블로그와 연계를 하면서 블로그에서 쓴 글을 보내고 그리고 트위터에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출판사나 그외 트친들의 글을 '리트읫'하거나 맨션을 보내면서 그 세계를 조금씩 알아갔다. 너무 빠져들다보면 그에 보내는 시간이 많이 걸려 내 생활을 방해 받기에 가끔 시간을 내서 들어가 보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 짬을 내어 보기도 한다.트위터활동을 한다고 하여 내 블로그가 PR되는 것은 많겠지만 그렇다고 내게 퍽이나 도움이 크게 되었다고 볼 수 없는 것 같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미사키와 다쿠야 그리고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이라가시의 이야기 속에도 그런 장 단점을 잘 드러내고 있다.기업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만 열어 놓으면 금방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 믿고 있지만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마케팅 목표는 매출이나 이익이라는 것. 그리고 그 달성을 위해 정말 많은 부서와 담당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한편 커뮤니케이션 목표는 광고나 PR, 인테렉티브 마케팅이나 소셜마케팅의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지표라는 것. 소셜마케팅 담당자에게 매출이라는 큰 경영지표의 달성을 바라면 안 된다는 것.' 미사키와 다큐야는 이라가시의 가르침을 그들의 일에 직접적으로 적용을 시킴으로 해서 기업이 소셜을 이용하여 '이익'을 극대화 시키려고 하지만 이익에만 기대할 수 없다는,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어떻게 이용하여 개인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느냐가 또한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재밌게 소설형식을 빌어,더구나 다쿠야는 속으로 점점 미사키를 좋아하는 러브라인을 첨가하면서 이야기를 더욱 재밌게 이끌어 간다. 하지만 이 또한 트위터나 페이스북등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재미가 없을 듯 하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하고 있다면 한번 읽어보면 재밌을 책이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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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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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잊혀진 질문>,故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 하기 전에 가까이 지내던 신부님께 남긴 인생의 절실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라 하지만 질문들을 읽어보다보니 누구나 인생에 한번쯤 갖게 되는 질문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라서라면 더욱 '절실하게' 정말 절실하게 느껴질 질문들인 듯 하다. 이 책은 딸이 만성비염과 코연골이 휘어져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가 드디어 새출발을 하기 직전에 수술을 결심하게 되었고 정말 수술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읽게 되었던 책이니 나 또한 인생의 종착역이 아닌 그 심정을 너무도 절실하게 느끼며 읽게 되었다.

 

딸이 수술을 들어가던 그 순간에 그날 수술동지인 딸보다 더 심한 아줌마가 앞에서 수술을 하시게 되었는데 수술이 끝나고 나오는 아줌마는 대성통곡을 하면서 나오시기도 했지만 코 앞에 붙여 놓은 거즈에는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순간 아줌마와 교차하듯 수술실로 향하는 딸, 너무도 비참함에 녀석은 얼어 있었다. 수술당일까지 자신이 왜 여기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수술을 하기 겁내하던 녀석이었는데 수술실앞에서 많은 이들과 기다리는 동안 세개의 엘리베이터에서는 연신 수술실로 혹은 중환자실로 향하는 사람들을 태운 침대가 들고 나고 하는 가운데 딸이 수술실에 들어가고 이십여분 지났을까 갑자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시신을 옮기는 철관이 올라오는 것이다.순간 남편과 난 얼어붙고 말았다. 딸의 이름은 계속 '수술중' 이었는데 아마도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호자들은 모두 얼어붙었을 것이다,그순간에는 말이다. 그리고는 잠시 후, 시신을 태운 관은 내려가고 잠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한시간여 걸린다는 수술은 한시간 반이 지나도 계속 수술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곤 갑자기 딸의 이름이 불려져 달려가니 녀석이 나온다. 그런데 눈을 꼭 감고 있는데 눈물이 한 줄 흘렀다. '고생했어. 아프면 울어도 돼.이제 다 끝났다' 했더니 눈물이 그렁그렁. 그리곤 병실로 옮겨지고 조금 정신을 차렸을 때 왜 울지 않았냐고 물었더니만, '엄마, 나도 이제 다 큰 어른이니까 참아야지.울면 어떻게 해.' 한다. 녀석 제가 무슨 어른이라고..아마도 기다리는 엄마를 생각해서 울지 않은 듯 하다.수술실에 들어간 순간,정말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존재할까? 과연 내 옆에 신이 있을까? ' 큰소리로 묻고 싶었다. 그런 순간이 삶에서 한번뿐일까?

 

2011년에는 친정아버지를 폐암으로 보내드리게 되었다. 그때도 물론 지금 딸이 입원한 종합병원에서 내가 모시게 되었다. 정말 아버지와 함께 하며 난 '신의 존재를 믿고 싶었다.' 어떤 신이든 내 곁에 존재한다면 아버지를 오년만 아니 삼년만 아니 일년만이라도 건강한 모습으로 사실 수 있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아니면 아버지를 데려 간다면 정말 아버지가 아프지 않고 행복한 세상에서 사실 수 있는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빌고 빌었다. 아니 아버지가 가시는 그 순간에 고통이 주시지 말라고 빌었는데 내 기도가 통했던 것일까,아버지는 고통없이,물론 아버지 본인은 고통을 느끼셨겠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너무도 편안한 모습으로 주무시다가 아주 편안하게 가셨다.그 순간이 병원에 오니 더욱 생각이 나고 어린 딸이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하게 되면서 더욱 '신의 존재'를,특별하게 믿는 믿음은 없지만 어느 신이든 존재한다면 모두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며 빌게 되었다. 딸이 있는 병실에는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와 함께 하게 되었다.할머니는 우리가 입원하고 이틀까지도 정신을 못차리고 드시지도 못했는데 입원 이틀째 신부님과 수녀님이 오셔서 예배를 보시고 가셨다. 할머니는 정신이 없는 가운데도 우리말을 정확하게 못하시는 신부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예배를 보신 그 다음날에 거짓말처럼 정신도 돌아오고 밥도 드시게 되었다. 말씀도 못하시던 할머니 내게, '자네 고향이 어딘가?' 하고 물으시며 앉으셔서 조근조근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정말 할머니는 신이라도 만나고 오신 것일까?

 

우리는 행복한 순간보다는 '고통'의 순간에 더욱 신을 찾는다. 故 이병철 회장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잊혀진 질문' 을 질문에 답이기 보다는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하면서 아니 누군가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속에서 신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무의식중에 신의 존재 부정보다는 믿음이 없어도 신을 긍정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신'이란 존재는 더욱 부각되게 마련이다. 나 또한 그런 순간들에는 믿음을 떠나서 기도하고 신을 찾게 된다. 내 안에 아니 어느 곳에 존재하는지 모를 신을 찾아 기도하면서 고통의 순간을 이겨내어 보려고 노력한다. 고통을 벗어나려는 것은 어쩌면 삶을 좀더 희망으로 이어가려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 하다. 그 속에서 우린 '살아갈 이유'를 '존재의 이유'를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삶의 끝에서는 누구나 신을 믿게 되고 죽음이라는 또 다른 세계 보다는 이승에서 또 한번 굴러보고 싶은 욕심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 또한 삶의 끝에서는 그토록 고통의 순간에도 '아프다,무섭다' 소리 한번도 자식들 앞에서 하시지 않으셨는데 마지막 전날 집을 찾은 내게, '아버지 아파서 죽을 것 같다. 막내야,아프다' 하시었다. 그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좀더 자식들과 평생을 함께 알콩달콩하셨던 엄마와 조금더 생명을 연장하고 싶으셨던 아버지, 지금 신을 만나고 계실까? 딸의 수술실 앞에서 난 누구 다른 신보다는 '아버지' 께 빌고 또 빌고 그렇게 기다리는 모든 시간을 빌었다. 제발 꼭 손녀딸을 보살펴 달라고. 당신이 다 누리지 못한 세상을 좀더 행복하게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고통의 순간에 늘 찾게 되는 아버지는 내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아버지가 찾지 못한 세상을 아니 찾아 안주하고 계실지 모를 그 세상에서 아직은 그 세상에 가려면 더 긴 시간이 필요한 존재들에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서광의 길을 열어 달라고 부탁하곤 한다. 기도한다. 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내 옆에 있다. 그것을 내가 다 가진 순간에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고통의 순간에만 느끼게 되니 그것이 인간인 듯 하다. 모자라기에 그 모자람을 또 신부님의 말씀으로 채워본다. 신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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