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뇌의 원근법>을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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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평점 :
그림은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 무심한 눈으로 재빠르게 시선을 거두는 '보기'도 있고, 회화의 표면에 마음의 눈이 거의 닿을 정도로 집중하는 '보기'도 있다. 그러니 같은 그림이라도 그것을 보고 반응하는 각자의 반응, 떨림, 깊이는 차이가 클 것이다.
이러한 그림 보기가 일방적인 받아들임이라는 단순한 반응에서 점점 깊이 올라간다면, 우리는 그림 읽기라는 다른 차원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는 회화의 빛과 무게가 보는 사람을 장악하거나, 수동적인 감동을 이끄는 것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보는 자도 그림에 다가서는, 이러한 마중은 그림 보기가 그림 읽기 혹은 그림과의 만남이라는 어떤 순간을 가능케 할지도 모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읽기, 만남의 선행 작업으로 미술 이론과 미학(용어)을 익히고,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의 적당한 주관적인 감성을 섞는다. 상징(대개는 신화와 종교와 관련된)과 알레고리는 그림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느슨한 공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문가의 친절한? 설명을 통해서 마치 독해의 방식을 전수 받듯이 흡수한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이고 우세한 해석이 그림들과 우리 사이를 떠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을 다르게 읽는 것도 가능한가? 학교에서는 국어 시간에 시(詩)에 문제를 내고 정답을 맞추게 하는 과정이 있다. 가령, 내가 이 시를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이것이 나에게는 지독한 현실이라고 우길 순 있지만, 정답에 벗어나면 틀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도 그런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것은 다소 극단적인 예이고, 사회가 공인하는 학문으로서의 미학의 힘에 벗어나는 그림 읽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인습의 굴레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모험적인 사상가들은 이미 그 경계를 벗어나거나, 또는 너무 멀리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실시간의 행동(실천)들이 일반적인 사회적 지식으로 재편성되기에는 꽤 시간일 걸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른 읽기는 가능하고, 그러한 행동들에서 나온 다른 해석들도 나오고 있다. 이 책, <고뇌의 원근법>도 굳이 말하자면, 그러한 흐름에 넣고 싶다. 물론 아주 새롭거나 생소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방법이라도 그 방법을 쓴 존재, 존재성은 유일할 수 밖에 없다.
서경석이라는 이 책을 쓴 사람은 무엇보다 '신체성'에 주목하는 걸로 보인다. 여기서 신체성은 몸과 정신을 나누는 이분법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시간대에서(시대) 겪은 고통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주름이 되어 기록된 그 장소. 일상에선 다른 감각들이 우세해도, 사라지지 않고 잠재적으로 계속 흐르는 그 끈끈한 힘.
독일 등 유럽에서의 미술 기행이기도 한 이 책에서, 유독 고뇌의 습기가 찬 그림들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그림에서 화가의 번민과 고통을 감지하는 저자의 심점에도 역시 비슷한 슬픔의 분자들이 활성화 된다. 회화의 표면에는 화가의 내면에서 삐져나온 색들이 하나의 메시지, 감정체계를 이룬다. 반대로, 회화의 겉은 화가의 내면으로 주름이 접혀서 다시 중층적인 신체를 만든다. 이러한 폐쇄적인 고리에 감상자로서 저자가 참여할 수도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위와 같은 읽기는 유행에 뒤처진 그림 해석법으로 볼 여지도 있으며, 저자 역시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의 가장 솔직한 상황(가령, 한국의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옥고를 치른 형들에 대한 기억 등)에서 생기는 의욕은 이러한 읽기-'그림을 꿰뚫는 듯한 만남' 을 시도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고흐의 그림도 다시 더 고통스럽게 읽혀지는데, 여기에 진정한 고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책에서 보여 준 저자의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고뇌의) 신체성에 충실하게 그림과 만나려는 자세는 습한 땀이 나도록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것을 어떤 이론이나 방법으로 물리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자가 이것만을(시대와 개인의 아픔에 동조하는, 표현하는 미술, 예술)을 주장한다면, 거기에는 반대 의견을 내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한 개인이 그림을 만나는 그 지독한 순간을 독자의 입장에서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끝으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 본다.
"... 거리가 떨어진 건너편에서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이 어둠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와 밝음 속으로 뚫고 지나간다면, 그건 눈부시게 하얀 빛 속에 생명이 증발해버릴 것만 같은 장소에서 색채를 찾고 있는 거라할 수 있겠죠." p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