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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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남자! 책을 얘기해주는 남자.. 

이 아저씨, 얼굴이 낯이 익다. 언제였던가, 늦은 밤 책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를 통해서 본 기억이 난다. 김갑수란 이름이 흔치 않은데, 유명한 배우 이름과 같아서일까?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도 책에 찍힌 이름과 사진을 보고 금방 알아보겠더라.   

책에 얽힌 이야기와 자기만의 공간에 의례 등장하는 잡다한 취미와 관심거리들이 있겠거니 했다. 물론 어떻게 보면, 그러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진 않다. 처음에 나오는 'THE'가 생소함을 주면서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뭐, 순전히 자기 얘기지만). 그렇게 시작은 "이게 뭔가?"하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 그렇다고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을 보이려는 변칙도 아니었다.  

음악으로 치자면, Intro는 약간 실험적이다. 그러나 이내 음습한 곳으로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텍스트는 습기를 먹고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지하 공간! 두더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벽은 LP요, 공기는 이미 원두커피향이 장악했다. 그리고 여러 명기들이 조합을 이루어 주인의 안목을 유감없이 알려주는 오디오 기기들까지. 이것들은 장식용이 아니다. 괜히 누군가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를 치밀하게 꿰고, 그것도 모자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질투가 새어 나오기 마련. 그때, 이런 말을 속으로 굴리기 쉽다. "저 사람, 꽤 잘난 척!" 

그러나, 이 지하의 주인, 김갑수는 그것만이 아니다. 그래! 프로이트를 끌고 오든, 융을 데려오든, 멋부린다는 혐의를 붙이는게 뭐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그런 단순성은 지상의 찻길 쌩쌩 달리는 차에 부딪혀 이미 사라져 버렸다고 믿자. 이 사람은 정말 음악에 빠진 사람이다. 그래서 많은 시간과 정성(돈은 물론이고)을 투자한 켜켜한 흔적들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러니 설령 폼생폼사가 보여도, 나보다 너무 잘 아는 박식함에 기가 죽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자.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 않나?  

다시 동굴 속 풍경을 살피자. 그러기에 앞서, 잠시 이 책(31쪽)에 실려 있는 바슐라르 이름이 뒹구는 글을 옮겨본다.  

   
  바슐라르의 쾌락과 바르트의 고뇌가 만나는 장소가 동굴 속이다. 동굴 속 동굴인의 기질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다. 동굴인에게 쾌락과 고뇌는 같은 종류의 호르몬으로 생성된다. 가령 사랑도, 동굴인에게는 부재 즉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된다. 그 부재는 아프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동굴인은 그의 먼 조상, 원시시대의 노래를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부재로 인한 고통을 마치 쾌락처럼 감지하며 즐긴다.   
   

동굴인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야 쓸 수 있는 글 같다. 책, 커피, 음악(그것도 클래식!)이라는 삼색향연도 버겁긴 하지만, 거기에 진한 사람의 역사가 빠지면 심심하다. 다행히도, 사람의 역사, 곧 사랑의 얘기도 예사롭지 않게 흘러 나온다.  

선생님이 보고 싶다면서, 새벽 한 시에 짧은 치마를 입고 찾아 온 여인의 얘기는 짓궂은 악몽이자 보는 사람에겐 희미한 미소를 선사한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운이 좋은, 혹은 김빠지는 연애사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이 책 저자의 첫인상은.. 하지만, 지독한 냄새가 날 것만 같은 만남과 고통도 살짝 넘쳐 나오기도 한다. 이 남자가 음악과 오디오에 이렇게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것에는, 그런 사람과의 상실에서 오는 결핍에도 있지 않을까? 아니, 원래가 그런 치열함을 가졌기에, 사람이든, 음악이든, 대상과의 적당하고 안전한 거리 확보에 실패하는지도. 그 실패는 탐욕의 손끝을 남보다 더 두툼하게 만들어, 새로운 처방전으로 대리만족하시라! 하고 이런 뮤즈와의 접속을  권하는지도 모른다.  

오디오 매니아들만이 흥분하고 공유할 애깃거리들 앞에선 나도 잠시 멈칫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리고 자랑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이 남자는 정말 안에 누적되어 이젠 쏟을 수 밖에 없는 얘기들을 하는 거 같다. 그걸 누가 막으랴! 나는 그냥 인정해주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은,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와 어떤 연속성을 갖는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 친절하게 효과적인 만남을 도와주는 '시간단축형 알림기능'을 기대하진 말자. 음악을 오랫동안 들은 한 남자의 주관적인 흐름과 취향을 훔쳐보면서, 자연스레 어떤 자극에 떨려보는 것만으로도 좋겠다. 어떤 유명한 명반 이름 몇 개를 얻을 욕심이 아니라, 음악 자체에 대한 욕망을 마음껏 부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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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희망이다>를 리뷰해주세요
거꾸로, 희망이다 - 혼돈의 시대, 한국의 지성 12인에게 길을 묻다
김수행 외 지음 / 시사IN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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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 정권 1년이 지난 지금, 여러 곳에서 한숨들이 나온다. 가장 큰 선거공약은 반대 여론에 부딪혀 결국 스스로 포기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분위기는 마치 그 전 정권(수도 이전)과 흡사해 보일 정도다. 그러나 무작정 비난만 하면서 앞으로 남은 시간들을 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일이다.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진 세(勢)가 바뀌면, 근본적인 차원에서 다른 배치 작업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의 혼돈은 예상할 수 있다.   

노무현 정권 시기에 보수세력들이 그랬던 것처럼, MB 정권에 무조건 반대를 하고 싶은 세력들이 있고, 마침 충분한 빌미를 계속 제공하는 흐름도 있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반대급부의 행태와 달리, 기대를 걸었다가 아니면 미지근한 심정으로 바라보다가 실망으로 바뀐 경우들도 있다. 어쨌든, 지금 정부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이러한 것이 바뀔 여지는 아직 보이질 않는다. 

그러니 위에만 쳐다볼 순 없지 않은가? 가만히 앉아서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서, 쓴소리를 하는 재미에 빠져서 원한을 키우고, 혹 다음 선거에서 자신이 찍은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 그 한을 시원하게 풀어주길 기대한들, 그 희망이 다시 도루묵이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이것도 어찌보면, 정치변화의 주체를 막연히 한 명의 개인에게 몰아주고, 알아서 잘해주길 바라는 너무나 만연되어 있는 의타적인 심리일 것이다.  

이젠 이러힌 습성에서 나와,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닌가? 너무 거대하고 거창한 것들이 아니라, 작지만 소중하고 필요한 것들을 말이다. 이 책, <거꾸로, 희망이다>라는 책에도 이러한 위가 아닌, 우리 민중들이 직접 참여하고, 실천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자극들이 심어져 있다.  

책 맨 앞에 '책을 내며'라는 부분은 편집인의 글인데, 우선 지금 정권에 대한 푸념을 전하느라 바쁘다. 살 맛이 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데, 그건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정말 살 맛이 나던 시기는 언제였는지(여태 태평성대였다가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는 듯이)? 국민들이 살 맛이 나지 않는다고 외칠 때, 한 때는 그냥 조용히 있다가, 이제는는 큰일이라도 났다는 듯이 나와서 흥분을 하는 사람들(지식인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자신의 성향에 따라 민중의 흐름을 외면하다가, 이용하거나 과장하는 자들을 좋게 보진 않는다. 하여튼 '책을 내며'라는 부분은 이 책에 실린 여러 필자들의 글보다 더 극단적이고 흥분된 모습을 보여서, 좋은 길잡이 역할을 했다고 보긴 어렵다. 

이 책에서 '생태적 상상력'과 관련한 김종철의 강의는 약간 이상적인 어조가 있지만, 귀담아 들을 곳도 있었다. 특히 민주주의를 국가 단위가 아닌, 소규모로 무수히 만들자는 발상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예전에 도올 김용옥이 노자의 '소국과민(小國寡民)'을 통해서 강조했던 것과도 흡사했다. 민주주의의 미래가 건전하게 나아간다면, 이러한 모습이 될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김수행의 강의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위기를 마르크스 시각을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겉그림 하나를 선사한다. 특히 과거 IMF와 관련한 얘기들에서 우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을 짚어준다. 박원순의 강의는 이 책에서 가장 집중해서 본 곳이다.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한 현장의 경험이 강의를 통해서 명쾌하게 잘 전달이 된 거 같다. 특히 대기업 몇 개 위주로 돌아가는 우리나라 경제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대안을 찾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박원순은 구체적으로 좋은 본보기들를 찾아서 설명한다.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여러나라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많은 사례들은 훌륭한 예가 될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너무 일률적으로 대도시에서 직장 생활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눈을 돌려서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성공의 터전들을 찾아나가는 것도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한 아래서부터의 다양화가 결국 우리나라 전체를 튼실하고 건강하게 만들어줄테고, 그러한 실천들 속에서 희망은 싹을 튀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싹은 정권이 바껴도, 윗물이 가끔 흐려져도 우리에게 실망을 가져다 주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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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즐거움>을 리뷰해주세요
노년의 즐거움 - 은퇴 후 30년… 그 가슴 뛰는 삶의 시작!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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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펼치자 마자, 아래와 같은 글이 마중 나온다.  

   
  드맑은 가을날, 서산마루가 저무는 그 한때!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황혼은 황홀이다. 너무다 아름답다. 마음에 사무치게 곱고 야무지다. 우리 인생의 황혼도 황홀할 수 있다. 그래야 한다.
 
   

"황혼은 황홀이다" 여기 누런 황금빛, 그 저무는 힘에서 어떤 운치와 가락을 힘겹게 끌어내는 시선이 있다. '늙음의 미학'이랄까? 존재의 끝자락(죽음)에 가까워졌으니, 그 마지막 떨림은 정말 황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저자가 말하는 황홀과 다를 수 있겠지만. 

하여튼, 그냥 힘을 다 쓰고 어쩔 수 없이 떨어지는 그 쇠락의 기운에 맡길 순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늙음에서도 하나의 가치를 발견해야 하고, 그것을 긍정해야 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래야 한다." 

날마다 새로운 책들이 쏟아지는데, 누가 굳이 이런 노인들 얼굴을 들이미는 책을 집겠는가. 그래도 책표지와 편집은 외외로 세련된 맛이 난다.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내용은 어떤가? 이 책의 저자도 여든이 가까우신데, 글은 늘어지지 않고 간결하며, 구수한 맛이 난다. 노인이 가뿐하게 산을 타는 모습이랄까? 그래서 처음과 달리 약간 기대를 갖고 보다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자화상>을 만나게 되었다. 저자 김열규는 다 빈치의 자화상에 어지럽게 그려진 머리카락과 턱수염에서 이 화가의 다른 작품, <대홍수>의 역동적이고 복잡한 물결을 떠올린다. 그리고 여기에 '노년의 생명력, '노년의 역학力學'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짜릿한 순간이었다. 

이어 황공망의 <구봉설제도>, 곽희의 <조춘도>, 미불의 <춘산서송도>를 시조와 같이 감상하면서 신선놀음까지 즐겼다. 하지만, 이 책이 산으로 치자면,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던가? 올라가는 재미도 잠시, 갑자기 일상의 풍경으로 내려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뭐 뒤로 갈수록 일상의 소박함을 다룬다고 볼 수도 있지만, 처음에 보여준 맛하고는 다른 미지근한 맛이 된 거 같다. 

황혼과 황홀은 책의 앞에서 잠시 기웃거리다 사라지고, 책을 덮을때쯤, 황망하게 자리를 뜨게 만드니, 늙음의 미학을 계속 유지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앞에 잠시나마 보여 준 감흥이 이 책을 괜히 읽었다는 생각을 접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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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뇌의 원근법>을 리뷰해주세요
고뇌의 원근법 - 서경식의 서양근대미술 기행
서경식 지음, 박소현 옮김 / 돌베개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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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 무심한 눈으로 재빠르게 시선을 거두는 '보기'도 있고, 회화의 표면에 마음의 눈이 거의 닿을 정도로 집중하는 '보기'도 있다. 그러니 같은 그림이라도 그것을 보고 반응하는 각자의 반응, 떨림, 깊이는 차이가 클 것이다.  

이러한 그림 보기가 일방적인 받아들임이라는 단순한 반응에서 점점 깊이 올라간다면, 우리는 그림 읽기라는 다른 차원의 상황을 떠올릴 수 있다. 여기서는 회화의 빛과 무게가 보는 사람을 장악하거나, 수동적인 감동을 이끄는 것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보는 자도 그림에 다가서는, 이러한 마중은 그림 보기가 그림 읽기 혹은 그림과의 만남이라는 어떤 순간을 가능케 할지도 모른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읽기, 만남의 선행 작업으로 미술 이론과 미학(용어)을 익히고,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의 적당한 주관적인 감성을 섞는다. 상징(대개는 신화와 종교와 관련된)과 알레고리는 그림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느슨한 공식이기도 하다. 그리고 전문가의 친절한? 설명을 통해서 마치 독해의 방식을 전수 받듯이 흡수한다. 그래서 그림에 대한 하나의 일반적이고 우세한 해석이 그림들과 우리 사이를 떠돌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을 다르게 읽는 것도 가능한가? 학교에서는 국어 시간에 시(詩)에 문제를 내고 정답을 맞추게 하는 과정이 있다. 가령, 내가 이 시를 지극히 주관적으로 해석하고, 이것이 나에게는 지독한 현실이라고 우길 순 있지만, 정답에 벗어나면 틀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도 그런 점에서 비슷한 부분이 있다.  

이것은 다소 극단적인 예이고, 사회가 공인하는 학문으로서의 미학의 힘에 벗어나는 그림 읽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인습의 굴레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모험적인 사상가들은 이미 그 경계를 벗어나거나, 또는 너무 멀리 나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의 실시간의 행동(실천)들이 일반적인 사회적 지식으로 재편성되기에는 꽤 시간일 걸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른 읽기는 가능하고, 그러한 행동들에서 나온 다른 해석들도 나오고 있다.  이 책, <고뇌의 원근법>도 굳이 말하자면, 그러한 흐름에 넣고 싶다. 물론 아주 새롭거나 생소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이미 알려진 방법이라도 그 방법을 쓴 존재, 존재성은 유일할 수 밖에 없다.  

서경석이라는 이 책을 쓴 사람은 무엇보다 '신체성'에 주목하는 걸로 보인다. 여기서 신체성은 몸과 정신을 나누는 이분법으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속한 시간대에서(시대) 겪은 고통의 흔적들이 차곡차곡 주름이 되어 기록된 그 장소. 일상에선 다른 감각들이 우세해도, 사라지지 않고 잠재적으로 계속 흐르는 그 끈끈한 힘. 

독일 등 유럽에서의 미술 기행이기도 한 이 책에서, 유독 고뇌의 습기가 찬 그림들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그림에서 화가의 번민과 고통을 감지하는 저자의 심점에도 역시 비슷한 슬픔의 분자들이 활성화 된다. 회화의 표면에는 화가의 내면에서 삐져나온 색들이 하나의 메시지, 감정체계를 이룬다. 반대로, 회화의 겉은 화가의 내면으로 주름이 접혀서 다시 중층적인 신체를 만든다. 이러한 폐쇄적인 고리에 감상자로서 저자가 참여할 수도 있음을 이 책은 보여준다.  

위와 같은 읽기는 유행에 뒤처진 그림 해석법으로 볼 여지도 있으며, 저자 역시도 알고 있다. 그러나 저자 자신의 가장 솔직한 상황(가령, 한국의 어두운 시대 상황에서 옥고를 치른 형들에 대한 기억 등)에서 생기는 의욕은 이러한 읽기-'그림을 꿰뚫는 듯한 만남' 을 시도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해준다. 그래서 고흐의 그림도 다시 더 고통스럽게 읽혀지는데, 여기에 진정한 고흐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 책에서 보여 준 저자의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고뇌의) 신체성에 충실하게 그림과 만나려는 자세는 습한 땀이 나도록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것을 어떤 이론이나 방법으로 물리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저자가 이것만을(시대와 개인의 아픔에 동조하는, 표현하는 미술, 예술)을 주장한다면, 거기에는 반대 의견을 내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한 개인이 그림을 만나는 그 지독한 순간을 독자의 입장에서 감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낀다.   

끝으로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 본다.

"... 거리가 떨어진 건너편에서 무언가가 있어서 그것이 어둠으로부터 불쑥 튀어나와 밝음 속으로 뚫고 지나간다면, 그건 눈부시게 하얀 빛 속에 생명이 증발해버릴 것만 같은 장소에서 색채를 찾고 있는 거라할 수 있겠죠."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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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를 리뷰해주세요.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
권진.이화정 지음 / 씨네21북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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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도 첫인상이란게 있다. 책이니까 아무래도 겉표지가 우선 눈에 띈다.  제목은 물론이고 그림이나 색깔이 어떻게 책의 내용과 조화를 이루는지가 중요하다. 물론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출 순 없지만, 그래도 적정 수준이란게 있을 게다. 

이 책, <뉴욕에서 온 남자 도쿄에서 온 여자>라는 제목은 부제를 참고하지 않는다면, 자칫 남녀간의 문제를 다룬 책으로 살짝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겉표지의 그림과 색깔은 본문의 세련된 편집과는 엇박자를 낸다. 그냥 이 표지에는 '여름에 떠나는 시골길'이라는 제목을 붙여도 어울릴 것만 같다. 

괜히 내용도 아니고 책의 겉표지를 가지고 시비를 건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앞서 말한 부분은 물론이고 책 내용에서도 조금만 더 세심한 신경을 썼다면, 더 좋은 결과를 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게 한다.  

맨 처음 나오는 파란눈의 영어 선생님인, 이 남자는 아마 서울에 사는 가장 전형적인 외국인이 아닐까? 외국인이 우리나라, 서울에 살면서 느끼는 가장 평균치에 가까운 시선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책의 전체적인 순서로 볼 때도, 이 사람을 처음에 등장시킨 것은 잘한 것 같다. 두 번째로 나오는 중국인?은 신세대적인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데, 싸이월드 가상 공간을 실제 자신의 방에 그대로 재현한 사진(p.40)은 재치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여기서 이 책은 슬슬 읽는 사람의 눈을 달구기 시작한다. 

막 피기 시작한 열기를 이어받아 약간 괴짜의 이미지까지 얹어주는 이가 있었으니, 일요일 오전에 방영하는 <서프라이즈>의 재연 배우이기도 한 젠 아이비라는 남자다. 일본에서 일본문학을 공부하고, 한때는 락밴드에서 음악을 했으며, 귀신에서 유에프오까지 특이한 목격 경험까지 있는 이 남자의 관심은 결국 우주학이란다. 이렇게 정상과 비정상의 차원을 품고 멀쩡하게 서울을 거니는 그의 모습은 꽤 독특하다. 이 장에 속한 소제목에 '외계인과 이방인'이 있는데, 이 남자의 정체성을 가장 잘 표현한 제목 같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붙이자면, 이 남자가 다른 도시와 달리 한국, 서울에서 느낀 인상적인 기운이 있단다. 그것은 바로 과거 전통 무늬에도 깃든 '영매'의 에너지다. 우리는 이미 그러한 것들이 증발했으리라 생각하는데, 이 (외계인을 찾기도 하는) 이방인의 눈에는 아직도 사그라들지 않았나보다. 

이어서 이 책에 나오는 유일한 외국인 여자가 나오는데, 우리나라의 지나친 음주문화에 대한 꼬집기에 같은 한국 남자로서 살짝 찔리기까지 한다. 후반부에는 영화와 관련된 두 명의 백인 남자가 나온다. 미국인이면서도 미국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줄곧 견지하는 그(얼 잭슨 주니어)의 시선에서 생각 있는 지식인의 풍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남자의 한국 영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우리를 조금 부끄럽게 만든다. 

서울이라는 도시를 인연으로 여러 빛깔의 눈을 가진 외국인들을 만나 보았다. 대개 이들이 우리나라를 처음 알게 되는 과정은 직접적이지 않고, 일본(학)을 거치는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세계화가 단지 정치-경제적인 면이 아니라 문화와 인문학이라는 넓은 바탕이 필요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그리고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이 외국인들은 서울에서 높고 세련된 빌딩에 둘러쌓인 공간보다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촌스러운? 장소를 더욱 선호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외국의 현대화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너무 일방적으로 거기에 경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이젠 조금 여유를 가지고, 우리의 옛것이 도시화에 소실되지 않고, 영매의 기운이든, 우리만의 고전미, 정취를 가지고 그 자리에 자리잡을 수 있는 넉넉한 공간화에 대한 의식도 필요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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