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위의 작업실>을 리뷰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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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위의 작업실
김갑수 지음, 김상민 그림, 김선규 사진 / 푸른숲 / 2009년 6월
평점 :
책을 읽는 남자! 책을 얘기해주는 남자..
이 아저씨, 얼굴이 낯이 익다. 언제였던가, 늦은 밤 책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를 통해서 본 기억이 난다. 김갑수란 이름이 흔치 않은데, 유명한 배우 이름과 같아서일까?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도 책에 찍힌 이름과 사진을 보고 금방 알아보겠더라.
책에 얽힌 이야기와 자기만의 공간에 의례 등장하는 잡다한 취미와 관심거리들이 있겠거니 했다. 물론 어떻게 보면, 그러한 이야기와 크게 다르진 않다. 처음에 나오는 'THE'가 생소함을 주면서 여러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뭐, 순전히 자기 얘기지만). 그렇게 시작은 "이게 뭔가?"하는 익숙하지 않은 풍경. 그렇다고 새로운 글쓰기의 모험을 보이려는 변칙도 아니었다.
음악으로 치자면, Intro는 약간 실험적이다. 그러나 이내 음습한 곳으로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텍스트는 습기를 먹고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지하 공간! 두더지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지만, 벽은 LP요, 공기는 이미 원두커피향이 장악했다. 그리고 여러 명기들이 조합을 이루어 주인의 안목을 유감없이 알려주는 오디오 기기들까지. 이것들은 장식용이 아니다. 괜히 누군가 자기가 잘 모르는 분야를 치밀하게 꿰고, 그것도 모자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질투가 새어 나오기 마련. 그때, 이런 말을 속으로 굴리기 쉽다. "저 사람, 꽤 잘난 척!"
그러나, 이 지하의 주인, 김갑수는 그것만이 아니다. 그래! 프로이트를 끌고 오든, 융을 데려오든, 멋부린다는 혐의를 붙이는게 뭐 어려운 일인가? 하지만 그런 단순성은 지상의 찻길 쌩쌩 달리는 차에 부딪혀 이미 사라져 버렸다고 믿자. 이 사람은 정말 음악에 빠진 사람이다. 그래서 많은 시간과 정성(돈은 물론이고)을 투자한 켜켜한 흔적들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그러니 설령 폼생폼사가 보여도, 나보다 너무 잘 아는 박식함에 기가 죽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자. 그럴만한 자격이 있지 않나?
다시 동굴 속 풍경을 살피자. 그러기에 앞서, 잠시 이 책(31쪽)에 실려 있는 바슐라르 이름이 뒹구는 글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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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의 쾌락과 바르트의 고뇌가 만나는 장소가 동굴 속이다. 동굴 속 동굴인의 기질을 타고나는 사람이 있다. 동굴인에게 쾌락과 고뇌는 같은 종류의 호르몬으로 생성된다. 가령 사랑도, 동굴인에게는 부재 즉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고부터 본격적으로 개시된다. 그 부재는 아프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동굴인은 그의 먼 조상, 원시시대의 노래를 본능적으로 체득하고 있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부재로 인한 고통을 마치 쾌락처럼 감지하며 즐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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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인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라야 쓸 수 있는 글 같다. 책, 커피, 음악(그것도 클래식!)이라는 삼색향연도 버겁긴 하지만, 거기에 진한 사람의 역사가 빠지면 심심하다. 다행히도, 사람의 역사, 곧 사랑의 얘기도 예사롭지 않게 흘러 나온다.
선생님이 보고 싶다면서, 새벽 한 시에 짧은 치마를 입고 찾아 온 여인의 얘기는 짓궂은 악몽이자 보는 사람에겐 희미한 미소를 선사한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운이 좋은, 혹은 김빠지는 연애사만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이 책 저자의 첫인상은.. 하지만, 지독한 냄새가 날 것만 같은 만남과 고통도 살짝 넘쳐 나오기도 한다. 이 남자가 음악과 오디오에 이렇게 탐욕스럽게 매달리는 것에는, 그런 사람과의 상실에서 오는 결핍에도 있지 않을까? 아니, 원래가 그런 치열함을 가졌기에, 사람이든, 음악이든, 대상과의 적당하고 안전한 거리 확보에 실패하는지도. 그 실패는 탐욕의 손끝을 남보다 더 두툼하게 만들어, 새로운 처방전으로 대리만족하시라! 하고 이런 뮤즈와의 접속을 권하는지도 모른다.
오디오 매니아들만이 흥분하고 공유할 애깃거리들 앞에선 나도 잠시 멈칫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리고 자랑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이 남자는 정말 안에 누적되어 이젠 쏟을 수 밖에 없는 얘기들을 하는 거 같다. 그걸 누가 막으랴! 나는 그냥 인정해주고 싶다.
아마도 이 책은, <텔레만을 듣는 새벽에>와 어떤 연속성을 갖는다.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 친절하게 효과적인 만남을 도와주는 '시간단축형 알림기능'을 기대하진 말자. 음악을 오랫동안 들은 한 남자의 주관적인 흐름과 취향을 훔쳐보면서, 자연스레 어떤 자극에 떨려보는 것만으로도 좋겠다. 어떤 유명한 명반 이름 몇 개를 얻을 욕심이 아니라, 음악 자체에 대한 욕망을 마음껏 부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