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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2 - 전이하는 메타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평점 :
나는 하루키가 좋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하루키의 작품보다 하루키식 라이프 스타일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가 하루키의 라이프 스타일을 정확히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건 하루키 작품 속 인물들의 라이프 스타일이다. 매력적인 주인공은 독자를 소설 한 가운데로 어렵지 않게 이끌어 간다. 나는 하루키 사람들을 좋아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하다.
초상화 전문 화가이며 친구 아버지 집에 머물게 된 ‘나’는 신비에 쌓인 이웃 멘시키씨의 부탁으로 그의 딸로 예상되는 여고생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다. 마리에는 엄마 없이 고모 손에 자란 부잣집 딸이다. 문화센터 미술선생님이자 이웃집 아저씨의 초상화 모델이 되기 위해 자리에 앉았는데, 마리에는 모델과 화가로 만나는 첫 자리에서 자신의 ‘가슴’에 대한 이야기를 반복한다.
마리에에게 가슴은 생명만큼 중요하다. 곧 죽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제일 중요한 이야기가 ‘가슴’ 이야기고, 이데아의 현신인 기사단장이 그녀와 헤어지며 마지막으로 하는 말도 ‘제군의 가슴은 머지않아 커질 거라네’는 말이다. 마리에 마음 속 가장 큰 고민이 ‘가슴’에 관한 것임을 기사단장이 꿰뚫어 보았다는 뜻이다. 가슴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럴 수도 있겠다. 가슴은 중요하다. 가슴은 중요하지. 하지만, 가슴만 중요한가. 눈도 중요하고, 코도 중요하다. 입술도 중요하고, 이런 세상에! 피부도 중요하다. 귀모양도 중요하고, 머리결도, 헤어스타일도 중요하다. 목 라인도 중요하고, 쇄골뼈도 중요하고, 손도 중요하고, 허리도 중요하고, 다리도 중요하고, 엉덩이도 중요하다. 목소리, 보이지 않지만 느낌을 100% 살려주는 목소리도 중요하다. 한 사람이 앞에 서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사람이 여자라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그 사람에게, 그 여자에게 가슴만 중요한가.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모두 다 중요하다. 마리에가 자신의 정체성의 한 축을 육체에서 찾으려고 하는 청소년기라는 점을 참작하더라도 그렇다. 그녀에게는 이렇게 한결 같이 가슴만 중요한가. 이 부분이 마음에 안 든다. 처음 만나 초상화 작업을 하는 자리의 문화센터 선생님이며 이웃집 아저씨에게, 자기 가슴이 너무 작지 않냐고 물어보는 여자애가 실제로 있는지 모르겠다. 소설 속에서는 모든 것이 꼭 그럴 듯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 ‘가슴’ 문제에 대해서라면 마리에는 너무 멍청해 보인다. 억지스럽다.
이제부터는 좋은 얘기.
실종된 마리에를 찾기 위해 ‘나’는 기사단장의 명령대로 기사단장을 죽이고, 땅 속에서 얼굴을 내민 ‘긴 얼굴’을 붙들어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어둠을 헤치고, 강을 건너 길을 걷는다. 숲을 지나 광장으로 나와서는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좁아진 동굴 끝에서 흙바닥으로 떨어지는데, 떨어져서 살펴보니 그 곳은 사당 뒤의 구덩이 속이다. 멘시키씨의 도움으로 ‘나’는 구출되고, 기사단장의 약속대로 마리에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사실, 그녀는 나흘간 멘시키집 지하 2층 입주 도우미방에 셀프 감금되어 있었다.
동굴 속의 어둠이나 강, 숲, 이런 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 굳이 찾지 않아도 ‘나’의 환상 여행을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든 그를 평가할 필요도 의무도 느끼지 않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로 강력하게 예견되었던 하루키의 수상이 불발되고, 그와 비교적 가깝다고 알려진 가즈오 이시구로의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소설 속 ‘나’의 이 말이 떠올랐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멘시키가 나의 어떤 부분을 부러워하는지 전혀 상상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고,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
“대체 저의 어디가 부러우신가요?” 내가 물었다.
“당신은 아마 누군가를 부러워하지 않으시겠죠?” 멘시키가 말했다.
잠깐 뜸을 들이며 생각해본 뒤 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누구를 부러워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제가 하려는 말도 그런 겁니다.” (92쪽)
부러우면 지는 거고, 부럽지 않다면 그걸로 됐다. 지금껏 누구를 부러워해본 적이 없다는 이 사람을, 나는 부러워한다. 나는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어떤 사람을 부러워했기에. 재능을, 끈기를 그리고 젊음을.
누구를 부러워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나’이고, 아래처럼 말하는 사람은 멘시키지만, 나는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모아진다고 느낀다.
멘시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게는 생각할 일이 많습니다. 읽어야 할 책과, 들어야 할 음악이 있어요. 많은 데이터를 모아 분류하고, 해석하고, 머리를 쓰는 것이 일상적인 습관입니다. 운동도 하고, 기분전환 삼아 피아노 연습도 합니다. 물론 집안일도 해야죠. 따분할 틈이 없습니다. (156쪽)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고, 생각하고, 책을 읽으며, 음악을 듣고, 운동을 하고. 기분전환 삼아 피아노 연습을 하고 집안일을 하고. 이런 삶은 근사하다. 크게 자랑할 일도 아니고, 돈과 시간이 많이 드는 일들도 아니다. 준비해야 할 것도 없고, 훈련이나 연습도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삶이야말로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하는 삶일 수도 있다.
따분할 틈이 없는 삶. 그런 삶은 누구를 부러워하지 않기에 누릴 수 있는 삶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피아노 연습을 다시 시작해야겠다.
저번주부터 이어지는 셀프 독려 메시지 혹은 계시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