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부제는 ‘창조, 진화, 지적설계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들’이며, 과학과 기독교의 핵심 이슈들에 대해 다양한 과학적 견해와 신학적 견해들을 살펴본다.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할 때,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본다. 자연을 통한 ‘자연계시’와 성경을 통한 ‘특별계시’가
그것이다. 자연계시는 세계관, 정치에 영향을 받는 ‘과학’을 통한 인간의 해석을 뜻하며,
특별계시는 신학과 교회의 전통에 영향을 받는 ‘성경’을
통한 인간의 해석을 뜻한다. 자연과 성경 그 자체는 갈등이 없지만, 과학과
성경 해석, 세계관과 신학 사이에서는 잠재적 갈등이 있다고 본다.
(83쪽)
창세기 1장에 대한 일치론적 해석과 비일치론적 관점에 대한 논점이 아주
잘 정리되어 있고, 현재까지 밝혀진 과학 지식을 토대로 젊은 지구론을 반박한다. 대륙의 이동, 빙하층, 방사성연대측정
등을 통해 오랜 지구론이 현대의 과학 지식과 일치함을 주장한다. 100억광년 너머에 있는 우주의 존재, 달과 행성들, 소행성 공전 궤도,
운석의 방사성연대측정, 성단에 대한 연구를 통해 우주의 오랜 역사를 증명한다.
제일 관심이 가는 부분은 우주와 생명의 시작, ‘기원’에 대한 것이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몇몇 천문학자들은 무신론적 세계관 때문에
정상우주론을 빅뱅 모델보다 선호했다. 그들은 우주에 시작점이 있었다는 생각에 반감을 드러내면서 빅뱅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반면에 당시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빅뱅 모델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선구자 중 한 명이 조르주 르메트르(Georges
Lemaltre)라는 벨기에 성직자로, 그는 우주 팽창을 설명하는 최초의 수학 모델을 발전시켰다. 그러다가 1965년에 우주배경복사가 발견되고 난 다음부터는 세계관과
상관없이 모든 천문학자가 빅뱅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187쪽)
우주의 시작, 빅뱅에 관해서라면, 이
책, 이 문단이 떠오른다.
물리학자들은 우주가 무한에 가까운 고밀도에, 크기도
없는 순수한 에너지로 시작했다는 데 동의한다. ‘특이점’이라
부르는 이 상황에서는 물리학 법칙들이 무너진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과학자들도 대폭발이 일어나던 그 첫 순간, 즉 처음 10-43초 동안 일어난 일을 해석하지 못한다(10-43초는 1초의 100만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0만
분의 1의 10분의 1초다.) (<신의 언어>, 71쪽)
『김상욱의 과학공부』
의
김상욱도 똑같이 말한다.
빅뱅이론을 이야기하면 반드시 나오는 질문. 첫째,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조차도
없었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마
대부분의 물리학자들도 비슷할 거다. (<김상욱의 과학공부>,
35쪽)
이렇게 만들어진 우주에, 태양계에,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 역시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호킹 박사는 말했다.
우주가 왜 꼭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어야 했는지, 우리
같은 인간을 탄생시키려는 신의 의도적인 행위로밖에는 달리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렵다. (<신의
언어>, 80쪽)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에서는 이렇게 표현한다.
우주는 몇 가지 기본적인 상수들을 통해 우주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지 결정된다. 가장 중요한 상수들은 6개를 꼽아볼 수 있다. 전기력과 중력의 비율이라든가, 우주의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결합력과
그 중력의 비율, 우주 안에 들어 있는 총 질량, 우주 상수
등 6개가 주요 논의의 대상이다. 이 상수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어떤 특정한 값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6가지의
상수 값들이 초기 우주에 아주 조금, 가령 0.00000001%만
변하면 우주의 역사는 확연하게 바뀌어버려 지금과는 매우 다른 우주가 되었을 것이다. (<과학시대의
도전과 기독교의 응답>, 327쪽)
현재까지의 과학 지식, 인간이 알아낸 정보와 지식만으로는 이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알지 못 한다. 우주의 변두리에 속하는 태양계 속,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게 되었는지 설명하지 못 한다. 더 알 수 없는 것은, 왜 우주가 시작되었는가의 의문이다. 왜 우주는, 이런 방식으로, 이런 형태로, ‘시작’되었는가.
진화에 대한 설명 역시 구체적으로 이어지는데, 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지식과
교회에서 반복적으로 들었던 창조론 사이의 차이와 간극을 발견했던 사람이라면, 그 문제로 고민했던 사람이라면, 의문의 많은 부분이 해소될 것이다. 물론, 소진화의 범위를 넘어서 종의 멸종과 새로운 종의 등장, 공통조상과
관련된 부분은 보통의 기독교인이라면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다.
진화론과 진화주의에 대한 비교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대부분의 과학자가
생각하는 진화론(theory of evolution)은, 무작위적
돌연변이와 차별적 번식성공도를 통해 수세기 동안 종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소진화)과 수백만 년을 주기로 이뤄지는 큰 변화를 모두 아우르는 용어다. (203쪽) 이에 반해 진화주의(evolutionism)는 과학이 아니라 일련의
세계관적 신념을 가리킨다. 진화론을 이용해 무신론적 신념을 뒷받침하려는 진화주의는 이렇게 주장한다.
l 세계를 돌보는 창조자는
없다
l 인간은 신의 인도나
다스림 없이 순수하게 자연적 과정만을 통해 발생했다.
l 인간 존재에 고상한
목적 같은 것은 없다.
l 인간의 도덕성은 유전과
환경의 결과물일 뿐이므로, 절대적인 도덕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주장들은 과학이 아니라,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진술이다. (204쪽) 진화론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 입증될 수 있지만, 진화주의는 신념의 문제다. 의미와 목적의 부재. 처음부터 끝까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오직 ‘우연’에 기대는 ‘진화주의’는 ‘환원주의적 무신론’에
다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다. 인간이 유인원과 공통조상을
가졌다는 화석학적, 유전학적, 해부학적 증거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도 그렇다. 하지만, 공통조상이나 진화론에 동의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모순되지 않는다. 인간이
유인원이나 다른 동물들과 같은 공통조상을 가진다 할지라도, 어떤 시점에서부터 인간의 계보는 다른 동물들의
계보에서 떨어져 나왔다. (304쪽) 인간은 다른 동물과
특별히 다르게 만들어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인간이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방식은 (우리가 아는 한) 이 태양계 안에서는 특별함 그 자체이다. 끝없이 펼쳐지는 우주 공간 속에서 인간은 먼지처럼 보잘 것 없고 하찮은 존재지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크고 위대하다. 하나님의 눈에 인간은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이다. (305쪽)
과학은 이제 절대자의 자리에 앉았다. 과학적으로 증명된, 실험으로 확인된 정보와 지식에 대해서는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이를
의심하거나 거부하는 사람은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일쑤다. 과학은 그 영역이 점점 더 넓어질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 없이 신봉될 것이다. 하지만, 과학이 답할
수 없는 수많은 의문에 대해서는 질문이 계속될 것이다.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우주는 왜 이런 식으로 시작되었는가.
지구는 어떻게 생명체가 살 수 있는 완벽한 환경으로 조성되었는가.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왜 태어났는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나는 누구인가.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