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교적 최근에 읽은 나는 왜 책읽기가 힘들까에서는 현대에 적합한 독서법으로 난독을 권한다. 빠른 책읽기와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을 때 독서의 화학반응’, 세렌디피티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빠르게, 닥치는 대로 읽기를 권하는 독서법이다.

요즘에 다시 읽은 책은 이와 반대되는 독서법을 실천하고 있는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다. 여러 번 읽는 장르는 소설이 유일한대, 제인 에어, 유령퇴장, 속죄, eclipse는 그리고 작은 것들의 신은 여러 번 읽은 책들이다. 읽고 다시 또 읽는다. 하지만, 소설 이외의 장르는 웬만하면 다시 읽지 않는다. 읽어야할 책이 너무 많고, 읽고 싶은 책도 많다. 소설이 아닌 작품으로 최근에 다시 읽는 책으로는 이 책이 유일한 듯하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현재 일본 사상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평가이자 젊은 지식인이다. 일본에서 대표적인 비평가로 자리 잡은 아사다 아키라, 아즈마 히로키의 뒤를 잇는 사상가로 인정받고 있다. 사사키 아타루의 데뷔작 <야전과 영원 - 라캉, 르장드르, 푸코>은 박사 학위 논문을 출판한 것으로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사상서임에도 사상계와 독자로부터 폭발적인 관심을 받았다. <알라딘 책소개,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옮긴이 주석, 25

 

 

 

 

 

 

 

 

사사키 아타루는 정보를 모은다는 것이 명령을 모으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저는 다양한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술관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영화 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듣는 것을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만, 음악 활동도 그만두었습니다. 텔레비전 보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잡지 보는 것도 그만두었습니다. 스포츠 관람도 그만두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담배도 끊었습니다. (18)

그가 말하는 바 이 시대에 정보를 차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인다는 뜻이다. 자신이 정말 옳은지 어떤지를 알 수 없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보를 모으지 않음으로 오직 자신만의 명령만을 듣기로 한다. 지도 없이 이국의 숲을 비틀거리며 방황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살기로 한다. 창피하고 불안하며 한심한 삶을 살기로 하는 것. 다른 사람이 보면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의 삶.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는 죄책감 비슷한 감정에 시달린다고도 말한다. (28)

 

그는 읽을 수 없는 책을 읽는 것, 반복해서 읽는다는 것에 대해 말한다.

방어기제를 가동시키고, 따라서 기묘한 무료함이나 난해함을, ‘기분 나쁜 느낌을 느끼게 하지 못하는 것은 책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 사람을 몰아넣지 않고 안이하게 진행된 책이 과연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인지 어떤지. 그런 책을 읽는 것보다는 카프카의 무의식에 자신의 무의식을 비춰보고 자신의 무의식과 함께 변혁시키는 위험한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훨씬 더 즐겁지 않을까요. (43)

그러니까 그는 기분 나쁜 느낌을 주는 책이야말로 진정한 책,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사사키의 독서법은 책을 반복해서 읽는 법이다. 정독을 넘어서 암송에까지 이르는 정도다.

저는 몇 권 안 되는 책을 반복해서 읽기 때문에 입에 붙어 거의 원문 그대로 술술 나옵니다. 반복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정면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어리석은 일이지요. (45)

 

그의 독서법은 몇 권 안 되는 책을 반복해서, 원문 그대로, 입에서 술술 나오는 정도로 반복해서 읽는 독법이다. 반복적으로 읽고,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독법. 결국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독법. 읽기가 삶을 압도하는 독법.

읽기가 혁명으로까지 이어진 예로 그는 대혁명을 꼽는다.

한마디로 하지요. 대혁명이란 성서를 읽는 운동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했을까요? 성서를 읽었습니다. 그는 성서를 읽고, 성서를 번역하고, 그리고 수없이 많은 책을 썼습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책을 읽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던 것입니다.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 역시 저의 독창적인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인 역사학자의 책에도, 프로테스탄트 신학 연구자의 책에도 쓰여 있는 것, 즉 상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75)

마르틴 루터는 말합니다. “나는 아이제나흐 근교 멜라출신 농민의 아들이지만, 그래도 성서 박사가 되어 교황의 방해자가 된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멜라 출신 농민의 아들이 책을 읽습니다. 성서 박사가 됩니다. 그리고 책을 씁니다. 그래서 교황의 방해자가 되고 그리하여 예술, 문학, 정치, , 신앙, 종교, 그 모든 것이 변했습니다. 대혁명은 성취되었습니다. 반복합니다.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책을 읽었습니다. 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그것을 부정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도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던 것이지요. 책을, 텍스트를 읽는 것은 광기의 도박을 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읽어버린 이상 그것에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되고, 따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104)

 

읽고 쓰는 것에 대해, 그 혁명성에 대해 생각한다. 혼자 있을 때, 이렇게 읽고 쓰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나, 나 자신의 즐거움 이외 어떤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그럴 때는 강신주의 이런 글도 한 번 뒤적여 보고...

 

 

 

 

 

 

 

 

당장 쓸모가 없어 보여도 우리가 공부하고 책 읽고 감동받아 놓은 걸 하나하나 저장해 놓는 건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이 우리를 보여 줍니다. 모든 것은 정확한 문맥에 놓여야만 제대로 음미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색깔을 가진 천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붉은 천입니다. 분명 붉은 천은 루비를 제대로 볼 때는 장애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붉은 천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붉은 천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보석을 보는 데는 유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좌절+열공, <강신주, 철학하는 즐거움> 174)

 

그리고는 또 생각한다. 읽는다는 것, 그리고 쓴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내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이 올 것인가에 대해. 나는 잘 모르겠다. 내가 결정적인 순간을 맞을 만한 사람인가에 대해 물론 회의적이다. 나 자신을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을 보인다는 그것만으로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효용과 의미를 찾을 수 있나. 내 삶의 반경을 넘어서서 보여진 내 자신을, 나 자신이라 확신할 수 있는가. 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읽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내가 앉은 자리, 내가 읽는 자리가 혁명의 근원지가 될 수 없다 해도, 내 스스로가 혁명적 인간으로 살 수 없다 해도, 겁 많고 용기 없는 내가 앉는 자리가, 적어도 혁명가들이 앉았던 자리와 같은 질감의 것이라면.

어떤 의미를 찾기 전에, 의미를 이루려 하기 전에, 그것 자체가 의미이기 때문에. (293)

더위가 막 시작되려 할 때는 eclipse를 읽었고, 더위가 막 시동을 걸기 시작할 때는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를 들고 다녔다. 최고조의 더위는 아주 사적인 독서와 함께 지냈고 이제쯤 더위가 한 풀 꺾이나 헛된 기대를 하고 있을 때 이 책을 읽었다. 읽고, 쓰고 또 다시 읽는 일에 대해서 생각하며, 그 혁명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번 여름을 지냈다. 열대야 최장 기간 돌파와 서울 35.9도의 놀라운 기록을 뒤로 하며 이 여름을 보낸다.

 

 

 

 

 

 

 

 

더운 여름을.

이렇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8-10 14: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8-11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