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 노동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었던 것은 고미숙님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2004)에서였다. 어떤 철학자의 글을 인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철학자가 이 책 그림자 노동의 저자인 이반 일리치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정확한 표현은 모르겠지만 대강의 워딩은 이러했다.

 

 

 

 

 

 

 

 

 

현대인의 노동은 근본적으로 노동 그 자체에서 소외된 것이다. 가사노동은 임금노동의 형태가 아니므로, 노동의 범주에서 한 번 더 소외된다. 가사노동은 이중으로 소외된 노동 형태이다.  

 

가사 노동의 특이점은 무임금과 보완성에 있다. 가사 노동을 위해 인력을 고용할 수 있고, 가사 노동하느라 애썼다고 스스로에게 보수를 지급할 수도 있겠으나, 원칙적으로 가사 노동은 수익을 창출할 수 없는 종류의 노동이다. 가사 노동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노동이라기보다는 일상적이고 원만한 삶을 위해 수행되어야 하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보조적이다. 돈이 되지 않는 노동 행위이고, 보완적인 노동 행위이다.

예전과 달리 가사 노동의 많은 부분은 기계의 힘을 빌려 비교적 손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가마솥 올려놓고 불 조절을 해가며 밥 하지 않는다. 전기밥솥이라면 쌀을 씻어 넣고는 버튼을 두 번 누르면 밥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청소는 청소기가 하고 빨래는 세탁기가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집안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다. 다 먹은 밥통은 씻어야하고, 청소기가 닿지 못하는 곳은 닦아주고 털어주어야 한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되, 샤워 후에 바닥에 나뒹구는 젖은 수건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꺼내고 널고 개켜서 각각의 서랍에 넣는 일은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가사 노동의 어려움에 대한 애달픈 간증, 노명우님의 이야기 잠깐 들어본다.

 

 

 

 

 

 

 

 

 

집안일은 아무리 해도 티가 나지 않는 끝없는 노동이라고 한다. 만일 당신이 남자라면, ‘혼자 산다는 것은 하지 않으면 티가 나고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시시포스의 운명과도 같은 가사노동에 수많은 시간을 투여해야 함을 의미한다. (생략)

최악의 것은 청소죠. 그건 정말 끔찍해요. 매일 해봐야 진짜로 알 수 있을 텐데. 이를테면 당신이 금요일 날 무엇을 닦아 놓아도 다음 주 똑같은 시간, 똑같은 곳에 똑같은 먼지가 앉아 있을 거예요. 그러니 지겹지 않겠어요. 최소한 맛이 가게 하는 일임엔 틀림없죠. (...) 이건 거의 바다 한복판에서 걸레질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요. (96)

 

이반 일리치는 <고용의 그늘에 가린 노동>에서 이렇게 말한다.

상품 집약적 사회에서는 임금 노동의 생산물을 통해서만 기본적 필요가 충족된다. 이 점에서는 주거와 교육이 다르지 않고 교통과 분만이 다르지 않다. 이런 사회에서는 직업윤리마저도 임금을 받는 고용만을 인정하고 독립적으로 먹고 사는 행위는 폄하한다. 그러나 임금 노동의 파급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급 노동을 두 유형의 상반된 활동으로 갈라놓기까지 한다. 임금 노동이 예전의 무급 노동 영역을 잠식해온 현상은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새로운 종류의 무급 노동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은 줄기차게 외면당해 왔다. 즉 산업 노동과 서비스에 대한 보완물로서의 무급 노동이 그것이다. ...

오늘날 가정 부문에서 여성이 겪고 있는 예속은 가장 뚜렷한 사례이다. 우선 가사 노동은 무급이다. 그리고 여자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남자와 합심해 집안 전체를 이용함으로써 갖고 구성원의 생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므로 자급자족 활동도 아니다. 오늘날의 가사는 생산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산업적 일용품들에 맞춰 획일화되었을 뿐 아니라, 여성으로 하여금 여성 특유의 방식으로 임금 노동을 위한 재생산, 재충전 및 자극제 역할을 하도록 강제한다. (28)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 안 된다는 자각과 내가 하고 있는 노동 행위가 어디까지나 보완적이라는 인식은 두 개의 물음을 촉발한다. 내가 하는 일은 정말 의미가 없는 일인가,하는 물음과 그렇다면 나는 돈을 벌 수 있는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하는가,하는 물음이다.

두 가지 물음과 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은 내가 실제로 돈을 벌게 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아이가 가까운 곳에서 직접적인 돌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나이가 됐을 때, 빠르게는 아이가 어린이집 종일반으로 들어갔을 때부터 늦게는 초등학교 고학년, 조금 더 늦게는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대부분의 전업주부들은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크고 돈은 더 많이 필요한데 어디에서 돈을 벌 것인가.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현실은 녹록치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장기불황, 사상 최고치로 치솟는 청년 실업률, 경단녀 말 그대로 경단녀가 설 자리는 없다. 일을 놓은 지 12년 됐다. 회사를 4년 다녔는데, 회사를 다니지 않은 햇수가 그에 3배다. 나는 아줌마고, 늙었고, 뒤쳐졌다. 특별하게 잘 하는게 없고, 새로운 것을 배우기엔 나이가 많다.

좀 더 솔직하게 쓰자면, 나는 살림을 잘 못 한다. 잘 못한다, 정도가 아니라, 그냥 살림을, 막 한다. 대충대충 산다. 먹는 것도, 치우는 것도, 정리하는 것도 보통에 못 미친다.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이런 구절을 읽었기 때문이다

 

 

 

 

 

 

 

 

 

안타깝도다! 펜을 들려고 시도했던

여성은 주제넘은 종으로 여겨지고,

그 과오는 결코 속죄될 수 없다네.

그들은 말하지. 우리가 성과 그 역할을 잘못 알고 있다고.

자녀 양육, 유행, , 의상, 사교,

이것이 우리가 선망해야 할 소양이라고.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거나 질문하는 일은

시간 낭비일 뿐이며, 우리의 미를 가리고,

꽃다운 우리를 정복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반면 노예처럼 집안 살림을 돌보는 무미건조한 일에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능력을 써야 한다고. (109-110)

 

글을 읽고 쓰는 것, 생각하거나 질문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 일을 통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문제는 여성들이 그런 일을 하는 것, 글을 읽고 쓰고, 생각하며 질문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말한다는 데 있다. 자신이 가진 최고의 능력, 자신의 소질과 재능을 집안 살림을 돌보는 일에만 사용하라는 압력이 문제라는 것이다.

집안일을 잘 해서, 반찬을 잘 만들어서, 정리정돈을 잘 해서, 인테리어에 소질이 있어서, 자신이 잘 하는 그 일을 통해 수익을 창출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자주 들을 수 있다. 집안일만 잘해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돈을 벌 수 있다. 문제는 집안일을 잘 못한다는 데 있다.

 

핵가족이든 확대가족이든 가족이 상호보완적이면서 상호배타적인 두 노동, 즉 하나는 주로 남성에게 배당되고 다른 하나는 여성에게 배당된 노동들을 연결하는 수단이었던 적은 역사상 어느 시점에도 없었다. 두 상반된 활동이 가족을 매개로 불가분의 혼인 관계를 맺는 이 공생 현상은 상품집약적 사회만의 특징이다. (45

  

 

 

가끔 방송을 통해 돈 버는 아내와의 역할분담으로 집안일을 하고 있는 남성들의 고충을 들어보면, 그 불만의 내용이 일반 가정의 아내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가사 노동이 특정한 성을 여성화시켰다기 보다는, 가사 노동의 성격 자체가 그 일의 주체를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가장 큰 슬픔이라면 가사 노동이 여성이라는 성,에 배당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위가 박탈된, 전혀 새로운 계급인 가정주부의 탄생을 1830년대 미국의 역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음식 가공과 저장, 양초와 비누 제조, 실쌈, 제화, 퀼팅, 양탄자 짜기, 소형 가축 기르기, 텃밭 농사 등이 모두 가정 안에서 이루어졌다. ... 가정의 자급자족을 유지하는 데 여성도 남성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집에 가져오는 수입은 비슷했다. 경제적으로 여성은 여전히 남성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

하지만 1830년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상업적 영농이 자급농을 대체하기 시작했고, 생활 임금을 버는 일이 상례가 되었으며, 부정기적 임금 노동은 빈곤의 징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여성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가정의 안주인에서, 자녀가 일하러 가기 전에 머무는 장소, 또는 남편이 휴식을 취하고 수입을 지출하는 장소의 관리인으로 전락했다. 앤 더글러스는 여성의 이러한 변형을 지위 박탈’(disestablishment)이라고 불렀다. (198-9)

 

요약하자면, 유인원에게 가정의 역할을 투사해 보금자리를 지키는 것이 여성 고유의 역할이라 주장하는 생물학적 신화화와 상품집약적 산업사회의 등장으로 인한 자급자족사회의 붕괴로 가정주부라는 새로운 계급이 탄생했다. 하루 종일 일하고 계속 일하고 쉬지 않고 일하지만, 무임금 노동의 그녀들은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지 못한다. 가사 노동에만 전념하는 한 그녀들에게 주어질 것은 없다. 혜택이 없고, 보상도 없다.

 

여성이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닌 것(non-work)이기 때문이다. (19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