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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 (무선) - 개정판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9
레이먼드 카버 지음, 김연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평점 :
「열」
나는 잘 우는 편이다. 내 이야기를 하면서도 쉽게 눈물을 글썽이고,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금방 눈물을 글썽인다. 혼자서도 잘 울고,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잘 운다. 교회는 다른 곳보다 ‘눈물’에 대해 관대한 편이지만, 나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많이 우는 편이라 눈물대비용 손수건을 항상 챙기는데, 언젠가는 2층 유아예배실에서도, 4층 본당에서도 화끈하게 울어버리는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요즘에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하야~~ 나이가 들어서) 예전만큼은 아닌데, 이 단편을 읽다가 그만 눈물이 쏙 나고 말았다. 책을 읽던 장소는 지하철이었는데, 나는 손에 책을 들고 있어 급하게 탈출하는 눈물들을 어쩌지 못해 혹시 내가 아끼는 이 소중한 책이 눈물에 젖을까 순간 당황했다.
눈물을 쏙 뺀 구절은 이렇다.
그는 아이들이 태어난 뒤의, 중간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처음으로, 그러니까 아일린은 열여덟, 그는 열아홉 시절의 일들, 한 소년이 한 소녀를 만나 사랑에 불타오르던 시절로 돌아갔다.
그는 이마를 닦기 위해 말을 멈췄다. 그는 입술을 적셨다.
“계속해요.” 웹스터 부인이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나는 알아요. 계속 말하세요, 칼라일 씨. 때로는 그렇게 다 말하는 게 좋을 때가 있어요. 때로는 말해야만 하는 거라우. 게다가, 나도 듣고 싶어요. 다 말하고 나면 기분이 한결 가벼워질 거예요. 나한테도 있었던 일이니까요. 당신이 말하는 그런 일. 사랑이라는 거. 바로 그 얘기 말이우.” (253쪽)
칼라일은 홀아비다.
칼라일은 버림받은 홀아비다.
칼라일은 아이가 딸린 버림받은 홀아비다.
어려서 만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알콩달콩 행복하게 지내던 어느 날, 아내는 자신의 직장 동료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간다. 아이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 애를 태우던 칼라일은 사정을 전해 들은 아내의 친절한(?) 주선으로 아내 새애인의 어머니 집안일을 돕던 웹스터 부인을 소개받고 그녀에게 아이 돌보는 일을 부탁한다. 그녀 덕분에 엉망이었던 집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칼라일은 돌연 가슴이 조이고 머리가 아파왔다. 그리고 열이 난다.
웹스터 부인이 챙겨준 약을 먹고, 웹스터 부인이 가져다준 시리얼을 먹고 나서, 일어날 힘을 회복한 칼라일은 그녀에게 말한다. 자신과 자신의 아내는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이 세상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사랑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떠났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로 가 버렸다.
여름 동안, 아일린은 아이들에게 몇 장의 카드들과 편지들과 자기 사진들과, 집을 나간 이후에 그린 펜화 몇 개를 보냈다. 그녀는 또한 칼라일에게 이 문제 - 이 문제 -를 이해해달라며, 하지만 자신은 행복하다는 내용의,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행복. 마치 행복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투로군, 이라고 칼라일은 생각했다. (227쪽)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하고, 세상 누구보다 더 아끼는 자신의 유일한 그 사람이 “이제 내 인생을 찾겠다”고 떠나갈 때, 그 사람을 아직 사랑하는 사람의 실망이란 어떠할까. 떠나버린 사람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사람을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의 절망이란 어떠할까.
칼라일, 떠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애쓰는 남자.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아이들 옷을 세탁해서 다리고, 아이들을 차에 태워 근교로 나가 기름종이에 싸온 샌드위치도 먹고 같이 꽃도 따는 칼라일. 아이들을 슈퍼마켓에 데려가 사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고르게 하는 사람, 칼라일. (225쪽) 자기 혼자 행복하겠다고, 행복을 찾아보겠다고 자신을 떠나버린 아내를 기다리는 칼라일.
칼라일은 아내가 돌아올거라 믿었다. 아니,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랬다. 그녀와의 사랑은 너무나 소중해서 그것을 버려두고 자신의 인생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집을 더 이상 돌봐줄 수 없다는 웹스터 부인을 앞에 두고, 이제 곧 헤어지게 될 웹스터 부인을 앞에 두고 칼라일은 말하고 싶어한다. 그는 말하고 싶어한다. 자신과 자신의 아내에 대해, 그들의 사랑에 대해 말이다.
웹스터 부인은 칼라일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바로 그때, 창가에 서 있을 때, 그는 그렇게 뭔가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일린과 관계된, 이전의 삶과 관계된 그 무언가가.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든 적이 있었던가? 물론 그랬을 것이다. 그랬다는 것을 안다. 비록 지금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하지만 그는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이해했고 그녀를 보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는 자신들이 함께한 인생이 자신이 말한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그 인생은 이제 지나가고 있었다. 그 지나침은 - 비록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맞서 싸우기까지 했지만 - 이제 그의 일부가 됐다. 그가 거쳐온 지난 인생의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254쪽)
웹스터 부인에게 자신의 심정을 모두 털어놓고 나서, 그녀에게 손을 흔들고 나서 칼라일은 비로소 이제 모든 게 끝났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이젠 끝났다. 행복했던 순간과 마찬가지로 지옥 같은 이 순간도 이렇게 지나가 버렸다. 그는 이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아내가 자신을 떠나갔다는 것을, 이제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칼라일의 아내를 이해한다. 그녀에게는 완벽한 하나의 사랑이 있었고, 그리고 또 하나의 완벽한 사랑이 그녀를 찾아온 것일테다. 그 사랑 역시 열병처럼 그녀에게 찾아왔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이해한다. 이해는 하지만, 그녀의 뻔뻔한 모습은 정말 별로다. 아이를 버려두고 떠난 그녀는 너무 당당하다.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어 아쉽다. 그녀가 얄밉다.
칼라일은 이제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웹스터 부인 덕택이다. 그녀는 많이 배운 사람도, 실연당했을 때 이루어져야 하는 치료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칼라일이 이 어려운 시기를 지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아스피린 한 개와 시리얼 한 그릇, 진심으로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그에게 힘을 주었다. 말하고 싶어하는 칼라일에게 귀기울이는 마음이 그에게 인생의 새로운 시간을 열어 주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