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글쓰기
이동진의 빨간 책방 39회를 들었다. 김영하의 책 읽어 주는 시간은 김영하의 목소리 때문인지, 내가 청취한 회차가 그랬는지 (위대한 개츠비편) 참, 진지하고 잔잔했다. 이동진의 빨책 39회는 소설가 김중혁씨가 게스트로 나왔는데, 무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한 이야기였다. 게시판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저급유머가 생각보다는 적은 회차였음에도, 이야기는 끝이 없었고, 모범생인듯 하지만 은근 삐딱한 두 남자의 이야기는 맛깔나게 재미있었다. 특히, 김중혁 작가의 초저음 베이스 목소리는 듣기 좋았다.
하루키를 동네형 또는 하형이라고 부르는 김중혁 작가가 말해주는 하루키의 일상은 단순하면서도 대단했다. 새벽 3-4시에 일어나서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LP집에 갔다가 (김작가의 표현 그대로다. 음반 판매하는 곳?) 조깅을 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두부, 낫토, 생선을 사가지고 와서는 맥주 한 잔과 함께 먹는다. 9시쯤 잠자리에 든다. 하루키는 인터넷을 안 한다. 하루키는 써핑도 안 한다.
하루키의 어마어마한 작업은 이런 성실성과 근면성에 근거한 것이라는데, 하루에 보통 원고지 10매 정도를 쓴다고 한다. 쓰는 걸로 한다면야, 스티븐 킹을 빼놓을 수가 없지. 엄청난 다작인데다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도 수두룩하다. 그 역시, 매일 매일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많이 쓸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기도 그게 의문이라고. 다른 작가들은 그렇게 안 쓰면 남는 시간에 도대체 뭐하냐고. 이런 멘붕 질문을 했다고 한다. 작가들, 부지런한 작가들의 뇌는 정말 일반 사람들과 다른가. 그 많은 이야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2. 이승우님과 다락방님
2009년이던가, 도서관에서 그의 책들을 발견했다.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살다>. 책들은 새 책처럼 깨끗했고, 하늘색, 노란색 자그마한 책들은 예뻤다. 난 '이승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의 책 두 권을 읽었다. 이런 구절들을 적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문학의 문장은, 실용문과 달라서 정보의 직접적이고 빠른 전달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문학은 간접적이고 우회하는 방법을 택한다. 할 수 있는 한, 소통을 지연시키는 것, 그것이 문학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말하는 것이 문학의 언어이다. 호수는, 내 마음의 상태를 은유한다. (당신은 이미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64쪽)
내가 데뷔작을 쓸 무렵(결핵 요양을 한답시고 빈둥거리던 1981년 여름은 유난히 무덥고 짜증스러웠다) 글의 길이 막힐 때면 올바른 길을 찾기 위해 몇 번이고 들추어 읽던 책이 <소문의 벽>과 바로 <당신들의 천국>이었다. 책을 읽다 보면 길이 보였다. 읽던 책을 덮고 원고를 쓰고, 원고를 쓰다 말고 책을 다시 집어 드는 일이 반복되었다. (소설을 살다. 38쪽)
다락방님은 여러 번 작가 '이승우'에 대해 말했다. 작가 중의 작가라고, 이승우 작가님이 작가들을 모아놓고 강의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도 그의 작품에 여러 번 도전하려 했지만, 사실 그의 작품은 편하게 앉아 쉽게 읽을만한 것들이 아닌 것 같아 좀처럼 시작하지 못 했다. 이번에는 다락방님의 추천으로 <지상의 노래>부터 읽어보마 결심했다.
3. 아껴서 읽고 싶은 책
그리고 다시, 이번에는 좀 더 노골적인 착각이 이루어졌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예전 주일학교 여선생을 보았다고 느꼈다. 그녀가 주일학교 여선생을 정말로 닮았는가, 얼마나 닮았는가는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많이 닮았을 수도 있고 조금 닮았을 수도 있고 전혀 닮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새로 만난 사람이 과거의 누군가와 닮아서 그 사람을 떠올리고 그 사람에게 향하게 한 것이 아니라 새로 만난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과거의 누군가가 불러내졌다는 것이다. 이 길은 새로 만난 사람을 통해 과거의 누군가에게 가는 길이 아니라 과거의 누군가를 통해, 그를 이용해서 새로 만난 사람에게 가는 길이다. 과거의 누군가에게 가기 위해서는 새로 만난 여자가 과거의 그 사람과 실제로 닮아야 하지만, 새로 만난 사람에게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녀가 과거의 누군가와 닮아야 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누군가와 닮았다는 발견 혹은 암시만으로 충분하다. (48쪽)
떠오르지 않은 사람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연락할 수 없고, 떠오른 세 사람은, 떠올랐음에도, 혹은 떠올랐기 때문에 연락할 수 없었다. 대개의 사정이 그렇다. 연락하는 데 거리낄 이유가 없는 사람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를 이유가 없기 때문에 떠오르지 않는다. 연락하는 데 거리낌이 있거나 아예 연락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떠오른다. 연락할 수 없기 때문에 떠오르고, 떠올랐기 때문에 연락할 수 없다. (309-310쪽)
그의 문장은 진지하다. 그의 문장은 꾸밈이 없다. 그리고, 아주 찰지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딛는 그의 걸음을 따라가면서 난 생각했다. 아, 아껴서 읽는다는게 이런 거구나. 한 문장, 한 문장 내가 읽어버려 이제는 내 뒤로 던져지는 문장들이 이렇게 아깝구나. 너무나 아쉽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겨갔다.
박 중위의 외출이 잦아진 것은 연희를 알게 된 다음부터였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일어날 거라고 예상되는 모든 증세가 그에게 나타났다. 그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에 빠지게 한 상대에게 할 거라고 집작되는 모든 행동을 다 했다. 그는 자주 하늘을 쳐다보았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공부를 하지 못했고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자주 편지를 썼고 선물 공세를 했고 그녀의 집 근처를 배회했다. 때때로 호소했고 가끔 윽박질렀다. 퇴근 시간에 맞춰 미장원 앞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기다리기도 했다. (58쪽)
나중엔 박 중위의 사랑이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어 아쉽기도 했지만, 적어도 58쪽에서의 박 중위는 순수한 모습이다. 하늘을 쳐다보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늦게까지 잠들지 못한다. 때때로 호소하고 가끔 윽박지르는 사랑.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
부장은 준비해 온 것을 쓸 수 없어서 아쉽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불편한 대화를 이어 가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안위했다.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편안히 지내시도록 조치하겠습니다." 헬기에서 내리기 직전에 부장이 그 한마디를 했다. ...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편안히 모시겠다는 말을 한정효에게 다시 한 사람은 장이었다. 그는 불편하지 않게 모시겠다고 말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지시대로 했다. 철저히 지켰고 감시했고 보고했다. 그러나 편안히 모시지는 않았다. (195쪽)
권력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 그리고 이제 막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
이제 막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이제 권력의 자리를 떠나가는 사람에게 말한다.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편안히 지내시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예의를 갖추어 말했을지 몰라도, 이 말을 했던 사람이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편안히 지내시도록 조처하는게 어떤 것인지" 알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막 권력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이 간단한 문장의 1%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노력했을까. 진심이라는게 있었을까. 의문이 생긴다. 이 책엔 좋은 문장이 참 많다. 좋은 문장이 참 많지만, 이 문장처럼 날 슬픔에 빠져들게 하는 문장은 없었다.
세상의 권력은 그들의 구별된 공간인 천산을 침범하고 파괴하여 카타콤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범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행사되는 이 세상이야말로 카타콤에 다름 아님을 그들의 구별된 삶과 특별한 죽음으로 증거했다. (346쪽)
세상이 자신들을 버리기 전에, 세상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버리고, 세상을 버렸던 천산 공동체 형제들. 작은 방에 한 사람씩 고요히 누워, 자신들을 부르는 나팔소리를 기다린다. 나팔소리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