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서관책에 번듯한 장하준 교수님 싸인

우리집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아, 책 많네.” 책이 많다. 그렇지만, 여기가 어딘가. 알라딘 서재 아닌가. 우리집 책 많다고 얘기해서도, 얘기할 수도 없다. 결혼할 때, 신랑이 가져온 짐 대부분은 책이었다. 회사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곧잘 신간을 사기도 해서, 책장은 여유 없이 빼곡했다. 그리고 아이.

첫째 아이가 어렸을 때는 책을 많이 사지도, 읽지도 않았다. 한 페이지에 "엄마", 그 다음 페이지에 "자동차" 이렇게 쓰여있는 책을 사는게 돈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아름다운 그림과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는 그림책은 글씨빡빡하고 답답한 책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행복하고 황홀한 감동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첫째 아이가 점점 자라자,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책이 많아졌다. 유아기에는 읽은 책을 반복해서 보는 경향이 있기에, 책이 많이 필요하진 않았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은 몇 권씩 단행본으로 사기 시작했다. 여섯 살이 되자, 어린이 백과 사전류가 필요했다. 그러고 보니, 전래동화도, 세계명작도, 과학동화도 없었다. (이런, 엄마를 보았나, 쯔즛) 아이와 친한 아이의 엄마의 아는 엄마 집에서 몇 질을 중고로 사 왔다. 그 집 작은 책장 하나를 통째로 들고 왔다. 이젠 책장을 세울 곳도 없었다. 그래서, 꼭꼭꼭!!! 필요한 책만 구입하고, 나머지는, 즉, 한번 두 번 정도 읽을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로 했다.

내가 사는 곳은 좋은 동네라, (ㅋㅎ, 지극히 도서관 중심적 사고에서) 지역 도서관이 많다. 걸어서 3분 거리에 도서관이 있고, 자동차로 10분거리에 두 개, 12분 거리에 하나, 14분 거리에 또 하나 있다. 도서관 카드 하나면, 이 모든 곳에서 개인당 3권씩 도서를 대출할 수 있고, 연장신청을 하면, 일주일 더 볼 수 있다. 3 곱하기 4 곱하기 5는 60, 60권을 대출해 볼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위의 도서관 중 세 곳은 지어진지 3년도 되지 않았다는 거다. 고로, 그 곳의 모든 책이 "새 거"라는 거. 그 곳에 가면 아빠, 엄마, 누나, 동생 모두가 원하는 책을 맘대로, 정말 맘대로 고를 수 있다.

물론, 그 많은 책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도 큰 일이고 (신랑 일), 반납기한에 맞춰 책을 찾는 것도 귀찮은 일 (내 일, 요즘엔 여섯 살 짜리 아들과 신랑이 맡았다. 아들이 글자 아는게 이렇게 반가울 수가!)이지만, 도서관 가는 길은 즐겁고, 돌아오는 길은 뿌듯하다. 아,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래서, 나는 도서관에서 빌려 이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고 인용할 곳을 확인하고, 맨 앞장을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200년 전에 노예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집어 넣었습니다.

50년 전에 식민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

테러리스트로 수배 당했습니다.

단기적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는 계속 발전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대안이 무엇인가 찾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장하준

책날개 뒷장, 첫 번째 노란 종이에, 어머나, 장하준 교수님 글씨였던 것이다. 크헉! 조심스레, 글씨를 만져봤다. 그럼 그렇지, 직접 쓰신 건 아니구나. 아, 그래도 교수님 친필을 볼 수 있다니 영광이다. 철칙을 깨고, 이 책을 사기로, 사야한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지금 사도 이렇게 인쇄될까. 인터넷으로 전화 번호 검색, 출판사 부키에 전화를 걸었다.

이러 저런한데요. 네, 직접 하신 건 아니구요, 이러 저러 합니다. 지금 구매해도 그렇게 인쇄되나요? 아니요, 그 때 잠깐 그렇게 한 거예요. 아~~~~(급실망) 네, 알겠습니다.

아, 슬프다. 도서관책에 번듯한 장하준 교수님 싸인을, 그냥 이렇게 보내야만 한단 말이냐!!!

아쉬운 맘으로 한 컷 올려본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대안이 무엇인가 찾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장교수님 말씀에 희망을 봤다. 조금 더 나아질 이 세상을 위해 대안이 무엇인지 찾아보자. 이야기해보자.

2. Thing 0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스톡홀름의 버스기사 스벤이 인도 뉴델리의 버스기사 람보다 50배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보호주의 덕택이다. 자국 정부의 이민 통제 정책 덕에 스웨덴의 노동자들은 인도를 비롯한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과 직접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50p)

능력면에서 봤을 때 뉴델리의 버스기사 람이 더 능숙하고, 또 위험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스톡홀름의 버스기사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은 스웨덴의 이민 통제 정책 때문이다. 자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닌데, 그렇게 되면, 가난한 나라에 태어난 것은 상쇄할 수 없는 간극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니, 결국엔 불공평한 결과를 가져온다.

장 지글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출생의 우연이라는 수수께끼는 죽음만큼이나 신비롭다. 나는 왜 유럽에서 태어났는가? 어째서 잘 먹고, 가진 권리도 많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고문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운 백인으로 태어났는가? 나는 이렇게 태어났는데, 어쨰서 뱃속에 기생충이 우글거리는 콜롬비아의 광부는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을까? 페르남부쿠의 혼혈인 카보클루는? 염산에 의해서 얼굴이 일그러진 치타공의 벵갈 여인은? (탐욕의 시대, 330p)

처음부터 불공정한 게임이, 지금도 그렇게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다.

3. Thing 11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 저개발의 이유로 지목하는 것들, 예컨대, 열대병, 내륙국가라는 지정학적 위치, 많은 양의 지하자원, 다양한 민족 구성, 낙후된 제도, 나쁜 문화는 적어도 아프리카만의 문제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은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1960년대, 1970년대에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도 경제 발전의 여러 신호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프리카 저개발의 이유는 뭘까.

저자는 정책, 즉 구조 조정 프로그램과 선진국 여러 나라들에게 강요당한 자유 무역, 자유 시장 정책이 아프리카를 저개발의 쳇바퀴 속으로 밀어넣었다고 진단하고 있다.

4. Thing 20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그러니 가난한 부모한테 태어난 것이 무슨 벌을 받을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모든 아이들이 최소한의 음식과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숙제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이런 조처는 대부분 정책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들이고, 실제로 몇몇 나라에서는 무상 급식과 예방 접종, 기본적인 건강 검진을 제공하고 학교에서 고용한 교사들이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정책을 실행에 옮기고 있기도 한다. (286p)

수능이 끝나고, 성적이 발표되면, 신문과 방송에서는 만점자 또는 최고점자를 찾아 인터뷰를 한다. 인터뷰에 응하는 사람은 매년 달라도, 인터뷰 내용은 거의 똑같은데, 1) 교과서를 위주로 공부했어요 2) 학원은 다니지 않았어요 3) 과외는 받은 적이 없어요 4) 하루 수면 시간은 6~8시간이예요, 등이다. 예전에는 인터뷰 내용을 고스란히 믿었고, 게으른 나를 자책했고, 특히나 어려운 환경에서도 좋은 결과를 이룬 지독한(!) 학생들에게 감탄했다. 난 아직도 이렇게 기본에 충실한 학생들이 사회적으로도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인터뷰 내용이 너무 뻔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 어째, 이렇게 야무진 애들이 매년 나오냐. 그 언제 이후부터는 만점자 또는 최고점자의 부모의 직업을 살펴보게 됐다. 처음엔 회사원이었고, 그리고는 고등학교 교사, 그 다음부터는 교수, 의사, 교수, 의사. 만점자 또는 최고점자의 아버지들은 엘리트였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다. 그렇지만, 일선 고교에서 일하는 어떤 가까운 사람도 요즘엔 가정 형편이 좋은 아이들의 성적이 더 좋다고, 그 경향이 몇 년새 더 뚜렷해졌다 말한다. 이제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아니라, 전설이 되려는 것일까.

한국 사회에서 다른 계층으로 이동이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이다. 독보적인 능력이 있어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학력”, “대학의 이름”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는게,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이 나라는 그런 나라다. 대학 시험 본다고, 직장 출근 시간을 한 시간씩 늦춰주는 나라, 비행기 이륙 시간을 조정하는 나라, 조정해야 한다고 믿는 나라. 우리나라는 그런 나라다. 왜? 수능 성적이 대학을 결정하고, 대학이, 대학의 이름이 남은 인생을 결정하니까. 그런데, 이젠 “가난한 집 공부 잘 하는 아들”, “가난한 집 공부 잘 하는 딸”이 서 있을 자리조차 없어진 것이다.

이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도 동일한 기회를 준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본다.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최소한의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방학에도 굶지 않도록, 준비물 살 돈이 없어 학교 가는게 싫어지지 않도록, 현장 학습 돈이 부담되지 않도록 배려하고, 지원해 주는 일이라 생각한다. 아,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셀프서비스로 생각난다. 오세훈, 아이들 밥그릇 뺏기에 이은 주민투표 셀프 빅엿. ㅋㅎ

우리가 시장의 결과에 대해 과감하게 문제를 제기할 때만이 더욱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주식 회사 경영자들이 받는 천문학적인 보수를 제한하기 위해 주식 시장과 기업 지배 구조를 개혁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능력 위주의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동등한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333-4p)

장교수님 스스로도 이야기 했듯이, 외국여행 자체가 어려웠던 시절, 장교수님은 아버지가 여행에서 돌아올 때 사오신 시계를 선물받았고, 집에는 텔레비전이 있었다. 당시 한국 상황으로는 매우 유복한 편에 들었다.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캠브리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를 받기도 전에 교수로 임용됐는데, 그 때 나이가 스물 일곱이었다. 2002년에는 <사다리 걷어차기>로 ‘뮈르달 상’을, 2005년에는 ‘레온티예프 상’을 수상했다. 이런 사람이, 이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지금의 세상은 불공정합니다. 뒤에 처진 사람들이 똑같은 환경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적어도, 그들에게 매달린 모래 주머니는 빼 주어야 합니다. 암담한 현실에 대한 문제 해결이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여도 대안이 무엇인가 찾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네가 세상에서 낙오된 건 네가 게을러서라고, 책 안 읽고, 공부 안 하고, 스펙 안 쌓고, 영어 실력 없어서라고, 모두 다 한 목소리로 윽박지르는 이 각박한 현실에서, 이렇게 이야기 해주는 분이 계셔, 아, 기쁘다.

감동은 이럴 때 받는 거다.

아,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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