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2012년, 임진왜란의 임진년이고, 다산 탄생 250주년이다. 다산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 걸어다니는 인간 백과사전, 살인적, 초마력적인 양의 저술서, 긴 유배생활, 그리고 목민심서. 이게 다였다. 그리고, 순오기님의 ‘다산 소개’ 페이퍼를 보고, 결심했다.

“그래, 올해는 다산이야!”

해서, 처음 시작한 책이다. 행복만땅 끝없는 보물창고 다산의 세계로 초대해 주신 순오기님과 다산의 생애에 대한 사실적 서술로 다산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신 작가 이덕일님께 감사드린다. 꾸벅.

이승훈이 베이징의 북당을 스스로 찾아가 영세를 달라고 했다는 사실은 그가 이미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뜻한다. 조선에는 이미 이승훈에게 신앙을 주었던 자생적인 천주교 조직이 있었는데, 그 조직의 지도자가 이벽이었던 것이다. (1권, 64p) 

 

저자는 이 부분이 세계 천주교사에서 설명하지 못 하는 조선 천주교 초기 역사의 수수께끼라고 말한다. 이벽. 그는 누구일까. 고조부 이경상의 책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고, 전도에 힘쓰다가, 이승훈이 영세를 받고 돌아온 후, 이승훈에게 영세를 받았던 사람. 그는 어떻게 천주교를 학문이 아니라 종교로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그가 읽은 '천주교 서적'은 무엇일까.

나는 기독교인이다. 나는 내 신앙과 믿음의 가장 중요한 원리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책에 소개된 이벽이 지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교리서 ‘주교요지‘를 살펴보니, 이벽이 매우 정확하게 창조주 하나님과 성삼위일체에 대해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읽은 책은 무엇일까.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완전히 상반된 이야기들을, 완벽히 다른 세계관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일단 ’천주실의‘를 상호대차 신청했다.

무엇보다 정약용의 <성설>이 중요한 것은 근대 실학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백성들의 강제 노동(부역)이 아니라 역부를 모집해 쌓자고 주장한 대목이다. 성의 둘레 3,600보를 넓이 1장, 깊이 4척 정도의 구덩이로 나누어 1보마다 팻말을 세우고 1단씩 메워 나갈 때마다 일정한 품삯을 주자는 것이었다. 성과급 방식의 임금 노동을 실시하자는 것인데, 백성들의 강제 노동이 당연시되던 때 정약용의 이런 주장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1권, 144p) 

 

근대적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조선후기에 인센티브 제도를 생각해 내다니. 노력에 따라 결과를 얻는 방식이 그 어떤 사회, 경제적 제도보다 인간의 본성에 근접해 있기에, 다산의 이러한 생각은 결국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농토는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더 급진적이고, 개혁적인 조세제도를 생각해냈던 다산이었기에, 그의 생각이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됐다는 것은 참 가슴아픈 일이다.

정조와 정약용은 격식을 잊고 말장난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정조와 정약용은 3개자가 1개자로 합성한 한자 쓰기 내기를 하게 되었다. 晶(밝을 정), 姦(간사할 간), 森(빽빽할 삼), 磊(돌무더기 뢰), 淼(물아득할 묘)등을 쓰는 내기였다. “전하께서 한 자만은 신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자전에 있는 모든 자를 다 암기하는데 한 자가 미치지 못할 것이란 말이 웬말이냐?” “그래도 한 자만은 미치지 못할 것이옵니다.” 둘이 각자 쓴 것을 교환했더니 과연 정조가 한 자 부족했다. 三(석 삼)자를 빼놓은 것이었다. 군신은 서로 무릎을 치면서 웃었다. (2권, 99p)

내각 아전이 정조의 유시를 대신 전했다.

“오래도록 서로 보지 못했다. 너를 불러 책을 편찬하고 싶어서 주자소의 벽을 새로 발랐다. 아직 덜 말라 정결하지 못하지만 그믐께쯤이면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정약용은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어느 누가 군주에게 이런 사랑을 받는다는 말인가? 이 인연은 살아생전 끊기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권, 24p)

 

진짜, 이 말은 다시 한 번 써야한다. 어느 누가 군주에게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말인가? 한 시대를 개혁하고, 더 나은 사회로 바꿀 수 있을만한 훌륭한 인재가 나기는 쉽지 않다. 그런 훌륭한 인재가 임금의 마음에 들기도 쉽지 않다. 자기보다 학식 있는 신하, 자기보다 덕망 있는 신하를 좋아하는 임금이 어디 있는가. 언젠가 내 자리를 탐내지 않을까 하여 견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여기, 한 시대를 바꿀만한 훌륭한 인재가 있고, 그 자신이 학자군주로서 그 인재를 알아보는 임금이 있으니, 실로 조선의 기회였는데. 조선의 호재였는데. 조선은 찬스!를 쓰지 못하고, 패자부활전도 없이 허망한 스텝을 밟아간다.

폐족으로서 잘 처신하는 방법은 오직 독서하는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다. 독서라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깨끗한 일이며, 호사스런 집안 자제들에게만 그 맛을 알도록 인정한 것도 아니다. (2권, 132p)  

 

결국, 다산이 18년의 유배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독서의 힘’이라 생각된다. 책이 없었다면, 연구 과제가 없었다면, 다산은 긴긴 유배생활을 원망과 분노로 보냈을 것이다. 아픔을 작품으로 승화시킨 거인의 면모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유배생활이 끝난 후, 다산은 묘지명을 짓는 일에 정성을 기울였다. 이미 학문적으로는 본인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어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처절한 이유가 있었다. 혹독한 정권의 칼에 맞아 휘청거렸을지라도, 후대의 평가까지 그들에게 내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의 묘지명 중 다산이 신경쓴 사람은 형 정약전 외에 정헌 이가환과 녹암 권철신이다. 정헌 이가환은 남인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차원에서, 녹암 권철신은 성호학파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차원에서 묘지명을 저술했다. (286p). 그리고, 60세부터는 본인 묘지명. <자찬묘지명>을 쓰는데 심혈을 기울였는데, 두 가지 버전 집중본과 광중본이 있다.

현세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학문을 하고 저술을 했던 다산, 그는 <자찬묘지명>에서 자신의 학문체계가 완성되었다고 쓴 후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 주지를 않는 것으로 여겨 한 무더기 불 속에 처넣어 태워버려도 괜찮다. (296p)

 

다산의 뜻이 전해지는 세상, 지금은 그런 세상인가. 일반 백성, 사회 구성원의 99%를 위한 사회인가. 우리 사회는 그런 사회인가. 아니면, 다산의 뜻과 가르침이 불 속에 쳐넣어진 세상인가.

답이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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