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당신과 내가 대화할 수 있을까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존의 전통적인 정치학에서 말하는 평화는 전쟁의 부재가 아니라 전쟁 그 자체라는 것입니다. 팍스로마나는 로마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지배를 전제로 합니다. pax에서 비롯된 단어 중에 ‘pacify‘가 있습니다. ‘평정(平靜)하다‘ ‘평화롭게 만들다‘는 뜻이죠. 그런데 이 단어가 군사용어로 쓰일 때는 폭격과 학살, 마을 불태우기, 대량 강간(mass rape) 등 민사작전의 성공을 말하거나 정복과 강제 동맹을 거친 뒤에 "치안이 확보되었다" "한 지역이 평정되었다" "한 세력을 진압했다" 라고 말할 때 쓰입니다. (34쪽)

『정희진처럼 읽기』로 기억나는데 어쩌면 『낯선 시선』일 수도 있겠다. 평화라는 것이 어디까지나 강자 편에서의 해석, 강자 쪽의 논리로 작동될 수 있음을 정희진님 책에서 처음 읽었을 때 놀랐던 기억이 있다. '우리 사이에', '좋게 좋게' 하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약자의 목소리는 언제나 시끄럽고 불편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새 책을 사서 연필을 들고 줄을 치며 정성스레 1독을 마쳤다. 여러 번 다시 읽고, 또 읽어야겠다는 다짐을 여기에 적는다.










2. 전략가, 잡초

나는 원래 책 추천을 별로 안 좋아한다. 나에게 책 추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알라디너. 내가 접수하는 책 추천은 알라딘뿐이다. 남편이 이 책을 추천하였고. 알았다고 하고 지나쳤는데, 한 번 더 추천하였고. 마지막으로 '이 책, 읽으면 좋을 거 같아.' 이렇게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읽기 시작했다.

살아남으려고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에서 경쟁에 약하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다. 잡초는 어떻게 이 약점을 이겨냈을까? 연약한 식물 잡초의 기본 전략은 '싸우지 않는 것'이다. 강한 식물이 자라는 곳은 피하고 강한 식물이 자라지 않는 곳만 골라서 자리 잡는다. 한마디로 말하면 경쟁 사회에서 도망친 낙오자인 셈이다.(31쪽)

불어오는 바람이 점점 시원해지고 벌써 9월이고 해서 내 맘이 약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잡초 같은' 인생에서 '잡초'란 어떤 환경에서든 잘 버티고 이겨내고 살아남아서가 아니라, 결국 그 리그에서 지고, 망하고, 실패해서 거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부분이 맘에 와닿았다. 열심히 살아서 잡초가 아니라, 하다가 망해서 잡초. 잡초의 특별함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진다. 잡초가 좋아졌다.










3. 그림으로 보는 거의 모든 것의 역사

개학이어서 개학이다. 몰랐는데 꼭 2-3권씩 고르는 전래 동화 파트에서 내가 도깨비'류' 동화를 많이 고른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유물론 시대를 거쳐 이제 인공지능의 지배가 가시화되고 있는 이 즈음에, 여전히 인간의 오감을 뛰어넘는 그 어떤 다른 세계에 대한 추구, 나의 무의식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혼자 해보았다. 도깨비랑 사이좋게 지낼 생각은 없지만 요술 방망이에 대해선 관심이 많다.

빌 브라이슨의 이 책은 우리 은하와 태양계의 거대한 세계뿐 아니라, 소립자, 세포 등의 미시 세계 그리고 생명의 탄생과 인류의 진화 과정을 여러 과학자들의 이론을 곁들여 설명한다. 딱딱해지기 쉬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톡톡 튀는 질문들이 인상적이다. 내가 그의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이런 부분이다. 우리 인간의 특별함. 우리 존재의 특이성, 그런 부분.

우리는 운명이나, 섭리나, 아니면 여러분이 부르고 싶은 무엇에 의해서 선택되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이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의 전부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 있는 우주의 가장 뛰어난 성과이면서 동시에 가장 나쁜 악몽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두렵다. (160쪽)










4. The Wedding People

They get back in the car. She wonders if her feelings for Gary could be a new form of love, one she's never known before: love without expectation. Love that you are just happy enough to feel. Love that you don't try to own like a painting. But she doesn't know if that is a real thing. She hopes it is. She looks out at the parking lot all around them, like she's a kid going on an errand with her father, announcing whatever she sees.(343p)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의 대명사라면 유부남 아니면 유부녀. 그걸 극대화하면 신랑 아닐까. 이번 주말에 결혼할 사람, 예비 신랑. 예비 신랑과 이 소설의 주인공 피비 사이의 묘한 기운. 그걸 어떻게 이 소설에서처럼 이상하지 않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단은 이 결혼의 주인공 신부 라일라가 신랑 게리와 결혼하기 싫어한다는 설명이 있어야겠다. 라일라가 보기에, 게리는 결혼해도 좋을 사람이다. 결혼을 약속하고 싶은 사람. 하지만,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다. 게리 역시 마찬가지다. 라일라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준비가 되어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하지만, 게리 역시 마음속의 의문을 풀지 못한 상태다.

그런 게리가 피비와는 편안한 대화가 가능하다. 대화만 가능한 게 아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는 침묵의 시간조차 자연스럽다. 결혼식 준비에 대한 이야기 외에는 당최 할 이야기가 없는 게리와 라일라와는 달리, 게리와 피비는 대화할 때도, 대화하지 않을 때도 편안하고, 안온하다. 물론 유머를 빼놓을 수 없다. 대화 중에 두 사람은 자주 마주 보며 웃는다.

연애 경험이 적은 엄마지만, 가끔 아이들에게 연애 조언을 한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때, 편안함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20만 원짜리 호텔 뷔페도 같이 갈 수 있지만, 7,500원짜리 떡볶이 튀김 세트를 나눠먹을 때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내 계급의 일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내가 호텔 뷔페에 가는 건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만, 저렴하고 간단한 식사를 하게 되는 경우는 아주 많으니까. 그 상황을 너와 함께 잘 '지낼' 사람을 찾으라는 말일 수도 있다. 연애 경험이 적은 엄마의 말이라 아이들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친구도 마찬가지고, 연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녀/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혹은 더 나은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그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경직되고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나 자신, 내 본연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내게 필요한 사람이고, 편안함이 전부는 아니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편안함이 더 중요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이 참 좋아서 앨리슨 에스파흐의 다른 책을 찾아보았는데, 두 권 더 있지만, 이 책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고 해서 읽을지 말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이 책의 발견이 즐겁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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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6-09-06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앨리슨 에스파흐, 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