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저자 바버라는 학자의 양심으로 책상 위에서 이러저러하다 판단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웨이트리스, 식이요법 보조원, 청소부, 월마트 점원이 되어 얻게 된 수입만으로 생활하는 실험을 강행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가, 그들이 돈을 낭비해서가 아니라, 게을러서가 아니라,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돈을 아껴 쓰면서, 부지런히,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데도 여전히 가난한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 때문임을, 저자는 밝혀내고자 한다.
저자가 도전했던 저임금 육체노동 중에, 가사 노동의 특이성을 지적한 부분이 흥미로웠다. 첫 번째는 비슷한 임금을 받는 경우라 하더라도 가정집 청소부는 최후의 선택인 경우가 많았다. 지역별로 집안인을 대신해 주는 노동 인구의 인종 구성이 다른 경우가 있다손 치더라도, 어느 경우든 더 나은 직장, 심지어 새로운 직장이 공장인 경우라 하더라도, 가정집 청소부는 다른 직장을 구하는 즉시 그 일을 그만두었다.
두 번째는 비슷한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가정집 청소부는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저자가 일했던 다른 지역에서는 웨이트리스 유니폼을 입고 있을 때면 처음 보는 사람조차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청하고, 다른 점원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청소부 유니폼은 정반대의 효과를 냈는데, 식당에서 주문을 하는데도 웨이트리스가 못 들은 척하기도 하고, 슈퍼마켓에 들어섰을 때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기도 한다. "문득 흑인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142쪽) 가정은 스위트홈이고, 여성은 가정의 천사라 칭송되어 왔지만, 그 중요한 일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그 일이 실제로 시장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고단한 직업 체험을 마친 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와 함께 근거를 제시한다. 저자는 가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지나치게 높은 주거비(월세)와 낮은 임금을 꼽는다. 한 번도 아프지 않고, 초과 수당 없는 초과 근무를 버티면서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고, 그 돈으로 월세를 내고, 배부르다는 게 뭔지 모를 정도만 먹고, 일과 수면을 반복하는 삶. 오늘만 있고 내일이 없는 삶. 부양할 가족이 있고, 어린아이가 있는 경우라면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삶. 육체노동을 하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미국 노동자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다. 보조금을 받기 위한 절차, 생필품을 받기 위한 절차의 비효율성 역시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임대 주택의 확대와 최저 임금의 상승, 의료 제도의 전면적 개편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건 확실하지만, 적어도 그것 정도가 시작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 길어지면, 다시 기본소득 나오니 이 이야기는 여기에서 갈무리하고.
저자의 아버지는 구리를 캐는 광부였고, 삼촌들과 할아버지들도 광산이나 철도 회사에서 일했다. 저자의 언니는 통신 회사 영업 사원, 공장 노동자 같은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했고, 그녀가 전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시간당 4달러 50센트를 받는 창고 인부였다. 그녀의 가정사를 줄줄이 읊는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그런 뿌리, 그런 배경을 잊지 않았음을 책 전체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박사 학위 소지자이다. 과학도답게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 어려운 실험을 시작했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노트북을 펼치고 자신의 경험과 그 경험이 의미하는 바를 문장으로 조립해 낼만한 지식인이다. 자신이 지식인이라는 자의식. 그녀는 그걸 자랑하려 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그걸 잊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에나.
이 프로젝트를 마치고 난 뒤, 함께 일하던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더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이 질문에는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어떤 면에서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노동자들과 다를 것이라는 가정이 담겨 있다. 내가 어느 모로든 특별하다고, 더 지적이거나 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는 말을 직장 상사나 동료한테 들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런 일은 결코 없었다. 내 생각에 내가 남들보다 '특별'했다면 그건 오로지 일에 너무 서툴다는 점에서 그랬을 것이다.(19쪽)
그러니깐, 사람들의 통념. 박사 학위를 받았고 글을 써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일용직 노동자들과 '뭔가' 다를 거라는 통념은 통념에 불과하다. 지독한 이분법의 지배 아래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뭔가 다르지 않을까. 그래도 다른 점이 있지 않을까.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다,고 한단다. 특별한 점이라면, '특별히' 일에 서툴다는 점 정도다.
드디어 도착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단. 이 문단을 옮겨 적으려고, 이 글을 시작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문단에는 배경이 있다. 가정집 청소 작업은 조를 짜서 이루어지는데, 저자가 속한 조의 팀장인 홀리는 점점 창백해지는 안색으로도 일을 계속하는 젊은 여성이었다. 주당 30-50달러를 벌어 남편과 자기 자신과 연로한 친척을 먹여 살린다는 그녀는 어느 날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아무래도 임신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저자는 홀리가 청소일에 사용하는 각종 화학 약품 가까이 있는 것이 해로우니 집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홀리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저자는 홀리의 일까지 해내기로 마음먹었다. 새로운 집에 당도했을 때, 그들에게는 부엌 조리대 위에 올려져 있는 구리 냄비와 팬들을 모두 닦으라는 업무 명령이 내려졌는데, 저자가 조리대 위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냄비를 잡다가 손이 미끄러져 냄비가 유리구슬로 꾸며진 최고급 어항에 떨어지고 말았다. 물고기들이 날아가고, 고급 요리책들이 모두 물에 젖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구세주 노릇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해. 나 자신에게 타일렀다. 아무도 얼뜨기한테 구원받기를 바라진 않으니까. 심지어는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조차 확실히 기억 나지 않았다. 물론 홀리를 돕고 싶고 곤경에 처한 모든 사람을, 가능하다면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돕고 싶었다. 제정신이 아닌 요양원 환자들이 말해 주었듯이 나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갑자기 처하게 된,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야 하는 이 상황이 너무 싫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나는 제시 잭슨 목사가 즐겨 말했듯 '무시할 수 없는 사람(somebody)'이 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관대하고, 능력 있고, 용감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 눈에 띄는 사람.(140쪽)
나는 이 순간을 정확히 포착해냈다는 점에서 저자가 훌륭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삶 속에서 주인공이다. 아무도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고, 그건 그 자체로도 충분하다. 동의도 필요 없고, 허락도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관대하고, 능력 있고, 용감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 눈에 띄는 사람. 그 인정은 반드시 외부에서 온다.
저자는 과학자이고, 박사이고, 지식인이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내고자 이 프로젝트에 자신을 투입시켰다. 직장 동료들은 그녀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자기소개서에 쓰인 대로, 이쪽 분야의 경력이 전혀 없지만, 새로 일을 시작하려는 이혼녀로 알고 있을 뿐이다.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보면서 저자는 그들을 돕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이 왜 잘못된 일이겠는가. 저임금 노동에 허덕이면서도 끼니조차 때우지 못하는 가난한 동료를 돕는 일이 왜 비윤리적인 일이겠는가. 문제는 그 마음의 이면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살아야 하는' 현재의 자신을 다른 존재, 이전의 자신으로 바꾸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고. 나는 원래 이렇게 무능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원래... 그 욕망이 그릇된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가 자신 안의 그런 욕망을 알아차렸다는 점에 감탄할 뿐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순간을 알아 채지 못한다.
나는, 나 자신으로 충만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인정은 밖에서 온다. 나를 'somebody'라고 말해줄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를 보는, 밖에서 나를 보고 있는 어떤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나에게 그렇게 말해 줄 때, 김춘수의 시구처럼, 비로소 나는 그런 사람이 된다. 관대하고, 능력 있고, 용감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남들 눈에 띄는 사람.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somebody가 된다.
아무도 내게 somebody라 말해주지 않을 때, 허공에 대고 소리친다. 나보다 나이 많은 나무에게 주절거린다. 지나가는 동네개에게 하소연한다. somebody가 되고 싶은 여전한 욕망으로, 내내 이글거리는 내가 즐겨 읽는 시다. 이상목 시인의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생략)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여름이 또 가고 나니까
민박집 간판처럼 허술하게
떠내려가다 걸린 나뭇등걸처럼
우두커니 그냥 있었다
이 촌구석에서
이 좋은 가을에
나는 정말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니라고
그렇게 여러번 일러줬는데도
나무들은 물 버리느라 바쁘고
동네 개들도 본 체 만 체다
지들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는데
나도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소주 같은 햇빛을 사발때기로 마시며
코스모스 길을 어슬렁거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