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부족한 건 경험이 아니라 상상력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나의 연애 경험 부족은 두 가지 양태를 띤다. 하나는 로맨스를 좋아하는 걸로 나타나고(대리만족), 또 다른 하나는 그렇게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로맨스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전히 잘 모르겠는, 그런 마음 말이다. 이 소설의 몰입이 힘든 건 주인공들이 둘 다 남자여서는 아닌 것 같다. 내게 이입이 어려운 지점은 주인공 중 한 명은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찬란한 제국의 왕자님이고, 다른 한 명은 세계 최강국인 미국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점이다. 현실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너무 멀리 있는 그대들만의 애틋한 사랑이라서.
내가 밑줄 그은 문장은 여기다.
아주 많은 날에 헨리는 알렉스의 연락을 받고 재빨리 위트 넘치는 유머로 응수하는데 만족한다. 알렉스와 함께하는 시간, 배배 꼬인 알렉스의 생각들에 굶주리면서. 하지만 가끔은, 갑자기 다크 모드로 돌변해 보기 드물게, 이상하게 원한에 찬 독한 위트를 날릴 때도 있다. 그럴 때면 몇 시간 혹은 며칠 연락이 되지 않는다. (But sometimes, he's taken over by a dark mood, an unusually acerbic wit, strange and vitrified.) 알렉스는 이제 그럴 때가 슬픔의 시간이라는 걸 안다. 우울증이 덮쳐오는 시간, 헨리에게 모든 게 ‘너무‘ 해질 때 찾아오는 증상이다. 헨리는 그런 날들을 끔찍하게 싫어한다. 돕고 싶은 마음은 크지만, 사실 알렉스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먹구름이 낀 헨리의 성질머리도, 햇살처럼 환한 헨리로 되돌아올 때도, 그 사이의 수백만 가지 색깔도 어차피 알렉스에게는 매력적일 뿐이니까. (160p/191쪽)
연애할 때 항상 알콩달콩할 수는 없다.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 연애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먹구름이 끼고, 바람이 솔찬히 불어오기 마련이다. 갑자기 다크 모드로 변해버리는 헨리를 지켜보며, 알렉스는 기다린다. 돕고 싶지만 도울 수 없기에, 성질머리 부리던 헨리가 환한 미소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어느 만큼, 얼마큼 오래 기다려 줄 수 있는가. 아니, 수백만 가지 색깔의 헨리는 언제까지 매력적일 텐가. 언제까지 아름다울 텐가. 알렉스는 헨리의 우울함을 이해한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다크 모드를 이해한다. 오고 가는 정황을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배려와 이해는 언제까지 가능한가.
결혼은 여남 모두에게 공히 예속적이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남자에게만 가능했던 이혼(결정)이 여자에게도 가능해졌다는 정도일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의지로 이혼'할' 수 없었고, 오직 이혼 '당할' 수만 있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남자들이 중혼과 축첩의 형태로 사회적 역할에 복무하면서도 동시에 성적 자유를 누렸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결혼은 그 무엇보다 ’성적 억압’의 측면이 강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두 사람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한다. 로맨틱한 감정을 동반한 현대의 결혼 개념은 비교적 최근의 사회적, 문화적 개념의 산물이다. 아주 오랫동안 결혼은 ‘애정 없이도 존속 가능한 동맹‘, 즉 사회적 계약의 한 가지 양태였다. 현재에 이르러서 결혼은 두 사람의 결합을 확증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또한 빠른 속도로 동거와 같은 다른 삶의 양식도 보편화되고 있다.
나는 궁금했다. 알렉스는 헨리의 다크 모드를 얼마나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줄 수 있을까. 퍼즐처럼 맞아떨어지는 두 사람 사이의 티키타카와 미치도록 강렬한 섹스, 불같은 사랑과 참을 수 없는 그리움. 이런 열정적인 감정은 자주 찾아오고 여러 번 반복되는 헨리의 다크 모드 혹은 배배 꼬인 알렉스의 이상함을 계속해서 이겨낼 수 있을까.
결혼이 그 답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아니다. 동성간 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제 결혼하지 않고 동거 생활을 이어가는 이성애 커플도 증가하고 있다. 결혼이 답은 아니다. 그래서, 내 물음을 다시 정교화하자면.
그건, 그 사랑의 한계와 종착점에 대한 물음이다. 불같은 사랑은 사그라들고, 그렇게나 매력적으로 보였던 그 사람의 어떠함이 이제는 참을 수 없는 무엇이 되었을 때, 되어 버렸을 때, 결혼이라는 제도로, 법이라는 강제적 수단으로 그 사람을 나에게, 나를 그 사람에게 묶어두지 않으려 할 때.
어느 때까지 그의 다크 모드를 참아줄 수 있는가.
그는 어느 때까지 그의 까탈스러움을 참아줄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