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를 마무리하고, 문학 작품에 나타난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혐오에 대해 쓰려고 했다. 다음주는 개학이고, 첫날부터 바쁠 것이 예상되기에 나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 탐구는 이번주까지만, 이렇게 생각하고.
무엇이 피해이고, 피해자를 규정할 수 있는 권력의 장소는 어디인가. 진영 논리 사회에서는 불가능한 논쟁이다. 소모적인 논쟁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다. 가해 피해는 팩트가 아니라 경합의 과정이지만, 경합의조건-다양한 목소리-이 없다는 의미다. 타인을 타자로 만드는 이들은 "우리는 억울하다. 우리는 당신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존중했다(봐줬다)"고 반발한다. (해설, 357쪽)
피해자성과 피해자 정치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기에 오늘은 적당하지 않은 날이다. 나는, 인도의 피식민지배 경험과 우리의 그것이 여러 측면에서 구별된다고 생각하는데, 그 생각을 정교화하기에도 오늘은 적당한 날이 아닌 것 같다. 이에 대한 연구와 숙고가 지식인, 그들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한 걸음 앞서서 나아간다는 건 그런 것일테다. 사람들은 비난할 수도, 비판할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는 그들의 주장을 이해할 수 없을 수도 있으나, 그건 그대로 두어야 할 일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책으로, 문장으로, 논리로 그 일을 이뤄가면 될 것이다.
제79주년 광복절을 맞았다. 강제노동에 대해 명확히 하기 위해 전시시설에 '강제'라는 표현을 명시적으로 담아달라는 한국의 요구를 일본 정부는 거부했다. 우리 정부를 이를 받아들였고,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에 동의했다. 외교부 장관이 말하는 국익이 도대체 어떤 나라의 국익인지를 가늠하지 못하겠는 나는, 한쪽 자리가 텅빈 광복절 행사에서 대통령이 뭐라 할지 궁금해지려고 한다. 미역국을 끓이면서 기다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