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를 적다 보니 의미 있고 뜻깊은 날인데 나는 오늘 그냥 일기를 올린다.
커피를 끊은 건 아니고, 마시는 시간을 10시간 뒤로 미뤘다.
커피를 끊을 수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막 40대에 진입했을 때, H균에 감염되어 한 달 이상 병원에 출입할 때였다. 항생제를 네 번이나 바꿔도 낫지 않고, 약사가 술을 많이 마시냐고, 피곤해서 그러니 좀 쉬라고 말했을 때, 어이없는 표정으로 커피를 끊었다. 항생제에 반응하는 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는 커피를 끊은 건 아니지만 마시는 시간을 바꿨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뛰쳐나가 진하게 내린 드립 커피를 부어댔더니, 위장이 버텨내지 못했다. 출근 일주일 만에 메슥거리는 증상이 찾아오더니 점점 심해져서 급기야 임신 때도 뜸했던 헛구역질까지 해댔다. 모닝커피를 끊었고, 바로 그다음 날부터 속은 제대로 돌아왔다. 두통과 머리 무거움, 피곤 등의 증세가 찾아오기는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퇴근길에 달달한 커피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외모를 포기했다
고 하기에는, 사수할 외모가 없구나. 아무튼 외무의 일정 부분을 포기했다. 일 년 365일에 250일 이상 요가복을 입고 나머지 날들은 청치마와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나. 집 앞에 나갈 때 썬크림만 바르는 나. 나는 내가, 예쁜 옷 입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예쁜 옷 사기를 즐겨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매일 아침 출근 준비에 아름다운 출근룩에 대한 환상은 모두 깨져 버렸고. 두 달이 지나서야, 5일 중 3일은 같은 옷을 입고 다니고, 두 달 동안 같은 운동화에, 같은 가방을 메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두 달 동안 같은 운동화, 같은 가방이 별로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게 좋은 사람들이 있고, 또 그대로도 예쁜 사람들도 많이 있으리라. 그건 사람마다 각자 다른 거니까. 다만, 나는 내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 7센티 굽에 하이웨스트 치마를 입고 다니지는 않더라도 단정하고 깔끔하고 모던한 옷차림을 하고 다닐 줄(!) 알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그런 행보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마음껏 그 소용돌이 속으로 뛰어들 줄 알았다.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매일 같은 옷을 입고, 같은 운동화를 신고, 같은 가방을 메고 집을 뛰쳐나가고, 그리고 밤에는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Life Lesson>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To stop doing what you love is an invitation to burnout. (141)
이 문장에 따르면 나는 정확히 번아웃의 시작점에 와 있다. 주40시간 노동에, 쉬는 시간도 적당하고, 노동강도 적은 곳에서의 ‘근무’가 나를 번아웃에 이르게 했고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했다. 그리고 알라딘에 오지 못했다.
나는 내가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겨하는 사람인 줄 알았으나.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나면 노곤해져서, 세탁기에서 방금 꺼낸 빨래처럼 널브러져서는 유튜브의 플레이를 누르고 있는 나를, 마주하게 되었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는 놀라운 재발견의 시간을, 원치 않게 갖게 되었다. 커피를 포기하고, 외모를 포기하고, 그리고 알라딘을 포기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 세 가지를 포기하고 나는 쥐꼬리만 한 월급을….. 어디로 가서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는 월급을 (짧은 시간이나마) 갖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려, 이 세상 모든 직딩들과 퇴근 후 문을 열자마자 ‘엄마!’라고 부르며 달려드는 껌딱지를 소유하신 워킹맘과 24시간 휴무 없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시간마저 확보하기 어려운 전업맘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여러분, 참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알라딘에 뜸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피곤한 몸을 누이고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밤에는 끝내 꿈에서 울 수밖에 없었는데, 안타까움과 슬픔의 증거는 퉁퉁 부어버린 내 두 눈이었고. 열심히 살지 않는 대신 많이 후회하지 않는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만약에, 그때…’의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상황과 환경, 조건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에게로 돌아왔다. 만약 그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만약 그때 내가 저렇게 했더라면. 이 세상 모든 일들이 내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는 걸 처음 배우게 된 아이가 떼를 쓰듯, 그렇게 나는 ‘그때, 만약…’의 질문에 매달렸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글도 쓸 수 없었다. 그제는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내 심경과 같았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쓸 수 없는 마음.
제인은 가정부 페어팩스 부인으로부터 로체스터가 잉그램 양을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잉그램 양과 로체스터는 진지하게 결혼을 고려 중인 사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제인은 자신이 얼마나 로체스터를 사랑하고 애타게 기다리는지를 일기장에 적지 않는다. 유모인 소피에게도 자신이 로체스터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고, 로체스터에게 그리움의 편지를 보내지도 않는다. 그가 한 일은 애써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그는 상상력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아름다운 모습으로 잉그램 양의 얼굴을 그리고 또 최대한 볼품없고 못생기게 자신의 얼굴을 그리면서 자신의 가슴을 짓이기고 있었다. (144쪽)
직장 생활의 애환을 넘어서서, 변신의 새로운 희망을 선사한다는 김동률의 신곡 <황금가면>을 내 친구와 또 다른 친구에게 바친다.
황금가면이 되라고. 아니, 네가 황금가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이 노래할 그 이야기 내가 쓸 거야
대대로 이어질 전설을 꼭 난 이뤄내고 말 거야
별에게 맹세코 절대
순간의 치기는 아니다
이렇게 태어난 거다
난 황금가면, 황금가면, 황금가면
황금가면 내 친구야.
너의 길을 가.
꿋꿋이, 흔들리지 말고
찬찬히, 너의 길을 가.
내가 너의 치어리더가 되어 줄게.
제일 앞자리,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이렇게 서서
너를 응원할게.
너를 응원해 줄게.
오래오래,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