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무의식으로 흘려보낸 기억을 찾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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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가설
앨리 헤이즐우드 지음, 허형은 옮김 / 황금시간 / 2022년 12월
평점 :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는데 참 좋았다. 여러 번 읽었고 오디오북으로도 여러 번 들었는데, 이번에 번역본으로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띄엄띄엄 읽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고. (다시 보니 좋은 상황이 아니라 슬픈 상황이다). 새로운 이야기처럼 읽혀서 좋았다.
사건의 주도권이 올리브에게 있어서 좋았다. 로맨스의 기본 규칙, fake-relationship이 이루어질 때, 관계를 시작한 사람(다짜고짜 키스)이 올리브였고, 그 관계를 끝낸 사람이 올리브여서 좋았다. 책 뒷부분에서 애덤이 올리브를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올리브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시작해 이후 3년 동안, 올리브를 너무나 좋아했지만, 올리브와 자신이 같은 학과이고, 교수인 자신에게 박사과정 학생인 올리브가 부담을 느낄까 봐 애덤은 애정을 전혀 표현하지 못한 터였다. 가짜 연애를 시작한 후, 올리브의 마음을 얻기 위한 애덤의 분투가 펼쳐진다.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꼼꼼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두 사람 앞에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올리브는 그를 위해 자신의 불편함을 감수하기로 결정한다. 진실을 말해서 그의 커리어에 방해가 되느니, 차라리 거짓을 말하면서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한다. 그 결정이 어리석은 것이었거나 혹은 애덤의 본심과 동떨어진 것이었다 해도, 당시 올리브 생각에는 그게 최선이었다. 올리브는 그를 위해 그렇게 행동한다. 주도권. 두 사람 관계의 주도권을 가진 사람이 올리브여서, 나는 그게 좋았다.
생각해보니, <제인 에어>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도 그 장면이다. 집시 여인으로 변장해 제인의 마음을 떠보려 했던 로체스터와 제인의 대화 장면이나 제인과 로체스터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 두 사람의 재회 장면이 아니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제인이 로체스터와 이별하는 장면이다. 하나님이 정해둔 법을 말하며 제인이 로체스터와의 결혼에 응할 수 없음을 말하고, 로체스터가 그녀의 발 앞에서 간청했을 때, 그를 위로하는 제인을, 하지만 결국에는 그를 떠나는 제인을, 나는 그런 제인을 사랑한다.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하지만, 나를,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당신에게 줄 수는 없어요.
여주인공이 쥐고 있던 주도권을 남주인공이 ‘결정적으로’ 획득하는 지점은 두 사람 사이에 ‘섹스’가 중심으로 떠올랐을 때다. 올리브와 애덤의 ‘뜨거운 밤’이 생생한 챕터 16 초반, 주도권은 분명 올리브에게 있다. 하지만, 이내 주도권은 애덤에게로 넘어간다. 시작한 사람은 올리브지만, 실행한 사람은 애덤이다. 먼저 손을 뻗은 사람은 올리브지만, 상황을 이끌어간 사람은 애덤이다. 경험 많은 애덤과 경험 없는 올리브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이런 상황은 점점 더 강화된다.
제인과 로체스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제대로 된, 남자 같은 남자를 만나본 적이 없는 제인과 기혼자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돌며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로체스터는 나이, 계급, 재산의 차이뿐 아니라 ‘성적 체험’이라는 측면에서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브리저튼 시즌 2>에서는 섹스를 ‘가르쳐주는’ 남주와 섹스를 ‘배워가는’ 여주의 모습이 그려진다. 백작 신분의 남주와 조금 더 낮은 신분의 여주를 비교하는 것이 마뜩짢다면, 안소니와 그의 여동생 다프네를 비교해도 되겠다. 풍부한 성적 경험이 매력이고 강점이 되는 남성에 비해, 같은 신분에 속한 여성에게 성적 경험은 인생 최대의 약점으로 기능한다. 결혼으로 구제되지 않는, 결혼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여성의 성적 경험은 곧 파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알라딘의 케미스트리 리딩 친구는 양자오를 잊어버린 나를 안타까워하며 훌륭한 글을 써주었는데(https://blog.aladin.co.kr/jyang0202/14466029 : 당신이 무의식으로 흘려보낸 기억을 찾아드립니다/쟝쟝님). 그 글은 재미있고 유익하고, 나는 친구에게 참 고맙지만. 고맙지만, 나는 우회전 안 하고 좌회전했다. 양자오를 지나쳐 애덤에게로 갔다. 정신 분석이라는 장대한 위업 앞에서 연구 대상 무의식이 아니라 탐구 생활 섹스에게로 갔다.
리드 모어 하고 싶다. 독서대가 큰 도움을 주어야 한다.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고 한다.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를 고민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