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RM의 인터뷰 내용을 담은 카드 뉴스를 보며 독어 선생님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 내가 선택한 제2외국어는 독일어였다. 작은 키에 단정한 단발머리셨던 독어 선생님께 배웠던 독일어는 당연히 1도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한국의 낙후성을 한탄하시던 선생님의 목소리와 톤. 거의 매시간 선생님은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비난하셨는데, 한국 사람들은 게으르고, 무식하고, 공중도덕을 안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울분에 가까운 감정이 담긴 언설이었기에 나는 종종, 저렇게 한국이 싫은데 왜 한국에 사시는 걸까, 라고 생각했다. 전해 들은 바로는 선생님은 짧게 외국 생활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래서 더욱 선명한 비교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한국을 미워하셨다. 또박또박 전해지는 한국말. 바로 그 말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시면서, 한국을, 한국이라는 나라를, 한국 사람들을 한결같이 멸시하셨다.

 


딱 한 번, 선생님이 한국과 한국인을 변호하신 일이 있었다. 선생님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유럽을 위시한 선진국 사람들은 이미 커다란 원(쳇바퀴)을 만들어놓고 그 안을 천천히 산책하듯이 걸으면 그 원이 앞으로 나아가는데, 우리가 만든 건 작은 원이어서 선진국 사람들이 큰 원을 한 번 돌릴 때, 우리는 두 번, 세 번 돌려야 겨우 그들 비슷하게나마 따라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들은 걸어도 되고 우리는 뛰어야 한다고. 내 기억엔 그때가 유일하다. 선생님이 한국을 옹호하신 경우는.


 

선생님의 대한민국 변호와 RM의 인터뷰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판단 유무다. 선생님은 판단하지 않으셨고, 순진하게 현재의 상황에 짜증을 내셨다. 한국 사람들은 무식하다. 한국 사람들은 예의범절을 모른다.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에게 예의를 요구하셨다. 고생한 사람이 우아하게 말하기를 기대하셨다. RM은 다르게 말한다.



 


서양 사람들은 이해 못 합니다.

한국은 침략당하고 파괴되었고,

둘로 갈라진 나라입니다.

 

70년 전만 해도

아무 것도 없던 나라

 

지금은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서른이 안 된 사람이 이걸 알고 있다는 것, 이런 인식.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다는 게 내게는 놀라우면서도 감격스러웠다. <탐욕의 시대>에서 장 지글러는 이렇게 말했다.  

 















출생의 우연이라는 수수께끼는 죽음만큼이나 신비롭다. 나는 왜 유럽에서 태어났는가? 어째서 잘 먹고, 가진 권리도 많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며, 고문으로부터도 비교적 자유로운 백인으로 태어났는가? (330)



시간이라는 요소를 무시할 수 없겠지만, 유럽에서 태어났다는 것, 백인으로 태어났다는 것, 남성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특권이다. 3개의 특권이 결합한 형태. 여기에 영어가 모국어라면 완성형이다. 우리는, 태어난 조건에 지배당하고, 어떤 사람의 조건은 어떤 사람의 것보다 명백하게 유리하다.

 


우리는 명백하게 불리한 조건 속에서 현재를 만들어냈다. 엄청난 변화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RM은 이 점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세상에, 내가 RM의 말에 해설을 달고 있다니… RM, 짱이야!)

 




그래요. 우린 그렇게 목표를 달성해 왔거든요.

그리고 이 방식이 K팝을 그토록 매력적으로 만드는 점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부작용도 있겠죠.

빠르고 급박하게 진행되는 모든 일이 그렇듯이요.

 


교육전문가 이범은 그의 책에서 사회의 변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서구에서 2~300년 동안 이룩한 일들을 우리는 5~60년 만에 해냈다. 두 세대가 지나야 가능한 일들이 한 세대 안에 일어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자식들을 자식으로봐서는 안 된다. 손자 세대라고 봐야 한다. 그 정도의 세대 차이를 인정해야만 세대 간의 갈등에 올바로 대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중요한 건은 자기 인식이고, 주제 파악이다. 너희는 과하다, 과하게 열심이다, 라고 말하는 서구의 기자에게 ‘(너희 나라들의) 제국주의 침략으로 인해 우리는 파괴되었다. 개인의 삶을 희생하고, 극한의 스트레스와 압박을 이겨냄으로써, 우리는 이러한 성과를 이루어냈다라고 대답하는 젊은이. RM을 평범한 사람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다. 이 정도가 한국 20대의 인식이다.

 


RM에게 미안하다. 여기에 윤대통령을 엮어야 하다니. 윤대통령의 자기 인식을 고려해볼 때, 그러니까 이런 기사를 읽게 되었을 때.

 


윤 대통령은 한-일 관계가 꼬인 것이 역사문제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아닌 2018년 대법원 판결 때문이라는 인식을 보였다. 그는 “강제징용과 관련해 1965년 협정이나 양국 정부의 조치를 문제 삼아 한-일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2018년 대법원 판결로 한-일 관계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고 진단했다 (https://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083682.html)

 


윤대통령은 한국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총리가 되었어야 맞다, 고 생각한다. 독도를 지키지 않으면, 돈까스 한 접시와 오무라이스 한 그릇에 독도까지 팔고 올 거라 예상되어. 나는 심히 불편하고, 걱정스러우며. ㅆㅂ. (생각하시는 그거 맞습니다. ㅆ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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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15 20: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심히 걱정됩니다….

RM은 예전에 UN 연설문도 심상치 않았는데.. 목소리를 내는 멋진 청년이네요.

단발머리 2023-03-15 21:43   좋아요 2 | URL
수하님도 그렇게 보시죠... 휴우....

RM은 영어할 때 매력 터집니다. 물론 한국말 할 때도 매력 철철 ㅎㅎㅎㅎㅎ 이 무슨 댓글입니까. 굿나잇^^

책먼지 2023-03-15 23: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에 BTS의 인문학적 소양은 다 알엠에게서 나온다는 댓글 보고 물개 박수쳤던 적이 있는데.. 단발님의 이 페이퍼에서는 주해 다는 사람의 품위마저 느껴집니다..💕

저는 저 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ㅠㅠ 가슴이 너무 답답합니다 진짜

단발머리 2023-03-16 19:22   좋아요 1 | URL
BTS의 인문학적 소양은 다 알엠에게서 나온다는 댓글에 저도 박수를 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무라이스만 먹고 오면 좋겠는데요. 그러지 않을 거 같아요, 그죠? ㅠㅠㅠ

책먼지 2023-03-17 08:42   좋아요 0 | URL
구상권 행사 안한다고 그사이 촘촘히 일 저질렀더라고요..??? 화딱지 나서 자세히 안 읽었는데 들여다봐야겠죠..? ㅠㅠ

은하수 2023-03-15 2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래요. 가만히 있다 가면 참 즣겠어요 가슴이 답답!

단발머리 2023-03-16 19:23   좋아요 0 | URL
전 어제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차라리 술 먹고 뻗었으면 ㅠㅠㅠ 다른 일 안 하고 먹고 놀고 왔으면.....

독서괭 2023-03-16 04: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bts 잘 모르는 저도 rm 은 많이 들어봤는데, 자세히 몰랐어요. 존경스럽네요. 아들 키우는 데 롤모델로 삼아야겠습니다 ㅎㅎ
누구랑 넘 비교되네요 ㅠㅠ

단발머리 2023-03-16 19:24   좋아요 1 | URL
좋은 롤모델이 될 것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물론 인생에는 ‘반면교사‘라는 게 존재하니까요.
그 쪽을 반면교사로 삼아... 아, 슬프네요.

책읽는나무 2023-03-16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RM은 참....♡
알쓸인잡을 보면서 RM은 어쩌면 내가 모르게 더 훌륭해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종종 했었거든요. 고 부분을 단발님이 똭!!!!
얘기해 주시네요^^
RM 짱이에요ㅋㅋㅋ

단발머리 2023-03-16 19:25   좋아요 1 | URL
전, 일단 알엠이 머리가 좋다고 생각해요. 근데 노래 만드는 일/랩에 재능이 있다고 했을 때 부모님이 믿어준 거니까요. 그런 면에서 부모님도 큰 일 하셨다~~ 생각합니다. 결론은, 알엠 짱!!

책읽는나무 2023-03-16 19:52   좋아요 0 | URL
근데.....단발님 화가 많이 나셨군요? 욕도 하시공~ㅋㅋㅋ

단발머리 2023-03-16 20:42   좋아요 1 | URL
저 요즘에 욕해요, 책나무님.... 뉴스 보다가 불현듯 확!! 빠바바바바바바박!

공쟝쟝 2023-03-17 06: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엠씨가 하는 유엔 연설문 듣고 감격해서 한동안 bts 열심히 이름외웠던 기억이납니다. 잊고 있던 국뽕을 차오르게 만든 알엠 너란 남자....못생겼지만 내가 좋아해. 하지만 얼굴은 뷔가 제일 좋앙... 응? ㅋㅋㅋㅋ
좋았어! 이 글을 읽고 오늘 저는 스피박 갑니다. (마감 하루 앞당겨 한 자의 여유) 후훗!!!

DYDADDY 2023-03-17 08:12   좋아요 3 | URL
드디어 프로젝트를 끝내셨군요. 무사히 끝내신 것을 축하드려요. 그동안 못 읽으신 책도 보시고 홉스와도 놀아주시고 무엇보다 지친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시기를 바라요. ^^

단발머리 2023-03-17 18:49   좋아요 0 | URL
쟝쟝님 / 비티에스 얼굴 보고 이름 맞추기, 담에 만나면 해봅시다요 ㅎㅎㅎㅎㅎ 난 완벽합니다.
저도 알엠 좋아하고 얼굴은 뷔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스피박 말고 마리 쪽으로 간거 맞죠?

DYDADDY님 / 저도 축하해 주세요ㅋㅋㅋㅋㅋㅋ 저도 이번 일주일 무사히 잘 마쳤습니다^^ DYDADDY님도 축하드리구요!!

공쟝쟝 2023-03-17 18:56   좋아요 1 | URL
네 마리루티 69페이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사랑해요 단발머리 ㅠㅠㅠㅠㅜ 난 내 영혼의 지문의 일부가 같은 것으로 구성된 듯한 루티를 루티를 루티를 선물해준 단발머리 감사합니다 ㅠㅜ 피박온니 미안 ㅠㅠㅠ 루티랑 같아요 난 ㅜㅜㅜㅜㅠㅠㅠㅠㅠㅠ

단발머리 2023-03-17 18:59   좋아요 2 | URL
나도 이 책 넘나 은혜로워서 리뷰를 못 썼음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선물해 준 내 안목을 나도 칭찬합니다 ㅋㅋㅋㅋㅋㅋ
나가 나를 칭찬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3-03-17 19:01   좋아요 1 | URL
은혜다 ㅠㅠ 은혜 ㅠㅠㅠ 아니ㅜ이 시점에서 이거 읽어버리면 이건 세상이 나를 사랑한다는 근거없는 확신에 휩싸이게 되고 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3-03-17 19:04   좋아요 1 | URL
한량없는 은혜와 끝없는 감탄은 감사와 기쁨으로 마무리되어 겁나게 긴 페이퍼를 탄생시키며,
새 생명 새 인생 새로운 나로, 나를 이끌어가는데....

DYDADDY 2023-03-17 19:29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 이번주 무사히 보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
저는 축하받을 일이.. 단발머리님과의 첫 대화인 것 같아 축하 받고 싶어요. 전부터 같은 정치 성향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서 내적 친밀감은 있었지만 제가 수줍음을 타다보니 그동안 답글을 못달았어요. 처음으로 직접 인사드려요. ^^

단발머리 2023-03-19 20:15   좋아요 0 | URL
DYDADDY님 / 에고!! 첫 대화 당연히 축하드려야죠. 저도 축하받고 싶고요 ㅎㅎ 내적 친밀감 숨기지 마시고 앞으로도 자주 뵈어요^^
저도 인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