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할 때 들고나온 책은 아니 에르노의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버스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금방 마음이 거시기해졌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아니 에르노의 이 책은 어렵지 않다. 화자 ‘나’는 에르노이고 기억을 잃어가는 노년의 어머니와의 일을 일기처럼 시간순으로 기록했다. 앞부분을 겨우 몇 페이지 읽었는데도 힘들어서 결국 책을 닫고 말았다.
어머니는 필립에게 “내 딸과 어떤 관계시우?”라며 근심스럽게 물었다. 필립은 웃음을 터뜨리며 “남편인데요!”라고 말한다. 어머니도 웃는다. (12쪽)
인간 의식에 대한 이해라면 사람마다 각각이겠지만 “(나의) 기억이 곧 나다”라는 명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렇다면 과거를 잃어버린 사람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나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그 사람을, 딸을 잊어버린 내 어머니를 돌보는 에르노의 괴로움이 너무 가깝게 보인다. 돌아가시기 직전에 치매 증상을 보이시며 엄마를 ‘성님(형님)’이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셨던 외할머니가 자꾸 떠올라 더는 읽을 수 없다. 읽을 수 없었다.
외출할 때, 책을 한 권만 가지고 나오지 말지니. 아니 에르노의 책을 읽지 못해서 커피숍에서 다운받아 읽은 책은 『Mr. Wrong Number』. (커피숍 사진의 주인공은 아니 에르노) 로맨스 소설이 대부분 그러하듯 제목이 소설의 70% 이상을 설명해 준다. 잘못 걸려 온 전화로 인해 시작된 인연이 사랑(아무렴), 섹스(그럴 줄), 실수(어쩌나), 오해(그럼 그럼), 화해(당근이지)의 순서로 전개된다. 정직한 소설 독자가 아닌 나는 맨 뒤의 챕터 3-4개를 먼저 읽어버렸고, 두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더랬다, 는 결론을 확인했다. 중요한 장면은 여기.
남주의 실수로 그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여주가 절교를 선포하고, 관계를 복원시키려는 남주의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이사 가려는 남주, 시카고로 도망가려는 남주 소식을 듣고 드디어 여주가 자기 마음을 확인한다. 진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시카고로 가려고 했어? 내가 왜 너한테 말해야 하는데? 그게 중요해? ‘사라짐’이라는 극약 처방으로 결국 여주의 마음을 돌려놓은 남주. 성공인가?
도서관에서 읽은 책은 『사랑은 왜 끝나나』. 대출 기간이 3주인데 완독 못 하는 나를 어쩌면 좋으랴. 송구하오나 반은 읽었사옵니다, 라는 변명을 목에 걸고 치열하게 밑줄긋기에 나선다. 기막힌 타이밍에 핸드폰 배터리는 6%. 어쩔 수 없이 급하게 사진만 찍어 둔다.
어떤 느낌을 가지고 무엇을 희망하며, 어떤 목표를 선택할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다. 감정의 자유는 누구와 신체적 접촉을 갖고 성관계를 맺을지 스스로 결정하고 정당화할 수 있는 특수한 형태의 권리다. 이런 형태의 자기결정권이야말로 내가 감정 중심의 근대라고 부르고 싶은 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징이다. 감정중심의 근대가 본격적으로 알을 깨고 나온 것은 18세기 이후지만, 그 완벽한 실현은 1960년대에 와야 비로소 이루어진다. 이 시기에는 성적선택을 순전히 주관적 감정과 쾌락에 따른 것으로 정당화했다. 오늘날 그 최신 형태는 인터넷 섹스 포털과 '데이트 앱'이다. (19쪽)
섹슈얼리티 시장의 남성 통제는 누가 보아도 하나 그 이상의 방식으로 분명하다(또 숨겨져 있다). 첫째,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 대부분의 시각적 섹슈얼리티 산업을 좌우하는 손은 남성의 것이다. 이는 곧 여성의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지 결정하는 쪽은 남성임을 의미한다. 남성이 여성의 무엇을 높이 평가하느냐에 따라 여성은 자신을 평가한다. (207쪽)
공개적인 남성의 구애 과정과 여성의 승인을 통해 연애와 교제가 결혼으로 확정되었던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감정의 자유에 근거한 개인의 자율적 선택권이 강조되었다. 하지만, 실제 섹슈얼리티 시장을 남성들이 통제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은 남성의 평가’대로’ 자신을 평가하는데 이르렀다. 도덕적 엄숙주의와 성별에 따른 이중적 성 관념에서 탈출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캐주얼섹스로 인해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한 것이 ‘여성’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집안끼리의 동맹 혹은 인수합병 절차 중 하나로서 결혼이 이루어질 때 여성은 ‘교환’되었고, 이제 여성은 그런 위치에서 벗어나 ‘자기 결정권’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터넷 섹스 포털과 데이트 앱의 상용화는 결과적으로 남성에게는 더 많은 기회를, 여성에게는 더 깊은 불안감을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리뷰는 재대출 이후에.
밤에 읽은 책은 『Crying in H Mart』. 7월부터 읽은 책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밀리고 치이고. 하지만 마쳐야 하기에 다시 또 펼치는.
암이 발견된 저자의 어머니는 치료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치료를 잠시 중단하고 서울과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다. 하지만 한국을 방문하자마자 열이 오르면서 상태가 악화되어 결국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시간은 흐르고 병세는 계속해서 나빠진다.
It used to be so clear to me, the difference between living and dying. My mother and I had always agreed that we'd rather end our lives than live on as vegetables. But now that we had to confront it, the shreds of physical autonomy torn more ragged everyday, the divide had blurred. She was bedridden, unable to walk on her own, her bowels no longer moving. She ate through a bag dripped through her arm and now she could no longer breathe without a machine. It was getting harder every day to say that this was really living. (125)
미셸은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우리, 결혼해야겠어. 죽음을 앞둔 어머니를 앞에 두고 결혼을 준비하는 미셸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물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쪼금 알 것 같고. 알쏭달쏭 무지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