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저자 룰루 밀러는 자신의 삶을 뒤흔드는 혼돈 속에서 자기 손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망쳐버린 뒤, 남겨진 삶을 어떻게 다시 복구할 것인지 고민하던 때에 다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찾는다. 20대 초반에 그의 업적과 행동에 대해 들었을 때 오만한 어류 수집계의 이카로스처럼 느꼈던 것과 달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무한 전진하는 그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다. 막막하고 암담한 자신의 상황을 헤쳐 나갈 의지를, 자신에 대해 가당치 않은 믿음의 표본을 그에게서 찾고 싶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에 대한 기나긴 탐구는 그렇게 시작된다. 조던의 삶에서 불굴의 의지가 가능한 이유를 나는 이 문단에서 찾는다.
그리하여 1970년대부터 연구자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기 위해 실험을 시작했다. 실제로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고, 남들을 더 잘 도우며, 더 지적이고, (주사위를 던지거나 복권 번호를 뽑는 것 같은) 우연한 사건들을 가능한 정도보다 훨씬 더 잘 통제하는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것이 꾸준히 확인됐다. 그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볼 때도 자기가 실패한 것보다 성공한 것들을 훨씬 더 쉽게 기억해냈다. 미래를 내다볼 때는 친구들이나 급우들보다 자신이 성공할 가능성을 훨씬 더 크게 잡았다. (138쪽)
장밋빛 자기기만. 자신이 더 착하고 더 매력적이고 남들을 더 잘 도우며 더 지적이라고 믿는,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더 건강한 사람들이다. 자신의 매력을 믿는 사람. 정확한 이유 혹은 근거를 댈 수 없지만, 불굴의 의지와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함에서 나도 모르게 MB를 떠올린다. 낙천성의 방패와 자기 기만(202쪽). 자기 확신의 결정체. 조던 그리고 MB.
그렇다면 데이비드 스타 조던을 통해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 했던 저자의 시도는 실패했던가. 그렇지 않다. 조던의 삶은 그녀의 더 근원적인 질문의 일부분일 뿐이다. 이 책의 진짜 질문은 무엇일까. 나는 일곱 살 룰루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그녀의 아버지가 대답한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 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54쪽)
인생의 의미에 대해, 삶과 죽음에 대해 우리는 대부분 모른 척하고 산다. 그런 삶을 받아들인다. 그것 외에도 우리 주변에는 골치 아픈 일들이 너무 많다. 카드값, 부모와의 갈등, 신경을 거스르는 직장 상사, 그리고 약해 빠진 몸. 잊어버린다. 잊어버리고 살려고 한다. 당장 오늘 할 일, 지금 바로 해야 할 일에 매여 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밤에, 혼자 깨어 있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산다.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산다.
중세 시대를 살았던 유럽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선조들도 내세를 믿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믿었다. 현재의 삶은 미래의 일부, 그것도 아주 적은 부분이라고 여겼다. 내세를 믿었던 과거의 사람들과는 달리 요즘에는 내세를 믿는 사람들이 훨씬 더 적다. 많은 사람이, 룰루의 아버지처럼 생각한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다. 우리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어서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믿었던 우리 인간은 우리가 속한 태양계, 우리 태양계가 속한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 그것도 아주 구석이라는 걸 비교적 최근에서야 알았다. 무한의 우주 속에서 우리는 너무 미미한 존재다. 백 년을 살지 못하는 인간. 그 무한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먼지 같은, 딱 먼지 같은 존재이다.
룰루의 아버지는 신, 내세, 운명, 계획이 모두 겁 많은 사람들의 상상이라고 말한다. 『철학 vs 실천』에서 강신주가 옮긴 포이어바흐의 말과 같다. “그렇다면 신을 만든 자는 누구일까? 포이어바흐는 단호하게 답한다. 바로 인간이라고.”(107쪽)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상상해 낸 것이다.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계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우리의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들이 말하는 진실은 명확하다. 우리는,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면 ‘그래도 사는 동안 삶은 의미 있다’는 말은 모순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병문안을 온 사람들과 안부 전화에 대해 말해주자, 엄마가 말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엄마는 마음속에 품고 있던 두려움을 거듭거듭 꺼내놓았다. (『아주 편안한 죽음』, 170쪽)
내가 살아있을 때 존재했던 의미가 나의 죽음으로 인해 없어진다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의 삶은 더 오랫동안, 더 많은 사람에게 기억될 수도 있다. 훌륭하고 특별한 일부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과 말과 업적이 나름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겠지만, 100년 혹은 2,000년을 갈 수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들은 모두 없어진다. 한편으로는, 이제 죽어버린 나는, 내가 만들었을지도 모를 ‘의미’의 존재 여부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존재했을지도 모를 그 어떤 의미는 없어진다, 나의 죽음과 같이.
이건 논의와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안다. 나는 한쪽 편에 치우쳐진 사람이다. 나는 내세를 믿고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믿고 예수를 통한 구속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내가, 내 믿음을 강제하지 않은 위치에서 다른 사람들을 보았을 때, 나는 사람들이 이 슬픔을, 이 무게를, 이 암담함을 어떻게 안고 사는지 모르겠다. 6월 초에는 큰외숙모가, 지난주에는 아빠의 오십년지기 친구분이 돌아가셨다. 영원한 이별.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작은 단지에 담겨,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삶. 우리의 삶은 결국 그렇게 끝나고 만다.
불멸을 원하는 건 진시황제와 일론 머스크만이 아니다. 일반인들은 돈이 없어서 하지 못할 뿐이다. 삶이 끝나는 걸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생명의 비밀을 풀지 못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죽지 않는 것이다. 필멸의 인생이 원하는 불멸의 삶. 사람들이 건강에 미쳐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다.
저자의 답은 무얼까. 그녀의 답은 민들레다.
그리고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다. 별이나 무한의 관점, 완벽함에 대한 우생학적 비전의 관점에서는 한 사람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금세 사라질 점 위의 점 위의 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무한히 많은 관점 중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버지니아주 린치버그에 있는 한 아파트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그 한 사람은 훨씬 더 많은 의미일 수 있다. 어머니를 대신해주는 존재, 웃음의 원천, 한 사람이 가장 어두운 세월에서 살아남게 해주는 근원. (227쪽)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바로 그 사람을 사랑한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유일하고, 그리고 완벽하다. 그와 같은 학교를 나왔고, 그와 키가 똑같고, 그와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대신’ 사랑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그 사람, 이 우주에 딱 한 사람, 바로 그 사람이다. 그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 딱 그 사람뿐이다.
우리는 별에서 온 원자들이 우리 몸으로 모였다가 다시 흩어진다는 과학의 진실을 안다. 인간은 필멸이라도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는 불멸임을 안다. 이 사실은 위안을 준다. 그러나 필멸의 생명이란, 원자들을 기계적으로 단순하게 조립한 장난감에 불과한 것이 아님도 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주 속 유구한 생명의 흐름은 지속될 것을 알고도 개체의 소멸을 애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뉴턴의 아틀리에』, 134쪽)
나 같은 조합은, 이런 조합은 이 세상에 나 하나밖에 없다. 나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내게 대시하지 않았던 어떤 남자는 내게(간신히 모솔탈출해 막 연애를 시작한 내게) ‘너 같은 여자’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나 같은 여자는, 나 같은 조합은 이 세상에 나 하나뿐이다. 온 세상을 다 뒤져도 나 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 의미 없다는 말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우주가 만들어진 이래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다시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한 나라는 조합이, 어떻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결국 싸움은 지어낸 말과 믿을 수 없는 말 사이에 있다. 단독자로 설 수 없어 신에게 자신의 영혼을 기대는 연약한 인간과 불안하지만 당당하게 일어서서 자신의 무의미함을 인정하는 자신감 넘치는 인간 사이에, 의미의 싸움이 존재한다.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연약한 인간 쪽이다.
하나님, 내 삶을 샅샅이 살피시고
모든 사실을 직접 알아보소서.
나는 주님 앞에 활짝 펼쳐진 책이니,
멀리서도 주께서는 내 생각을 다 아십니다.
주께서는 내가 떠날 때와 돌아올 때를 아시니,
내가 주님의 시야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운을 떼기도 전에
주께서는 내가 하려는 말을 모두 아십니다.
내가 뒤돌아보아도 주님은 거기 계시고
앞을 내다보아도 주께서는 거기 계십니다.
어느 곳에 가든 주께서 함께하시니,
내 마음 든든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 크고 놀라워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시편 139편 1-6절/메시지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