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찾기와 민들레 법칙
며칠 전 아이를 데리러 갔다. 차에 타자마자 "엄마 '회전목마' 라는 노래 틀어줘!" 라고 해서 찾았다.
이건 자이언티 목소리? 그런데 소코도모는 누구지? 멜로디가 단순하고 좋은데 신나면서도 어딘가 슬픈 느낌이 든다.
가사를 들으니 이거 초등 애들이 듣고 좋아할 노래가 아닌 것 같은데...
어제 퇴근길에 들으니 더 슬펐다.
(찾아보니 작년에 유행했던 노래였다. 왜 난 들어본 적도 없고 소코도모 이름도 모르지...)
내가 슬플 때마다 이 노래가 찾아와
세상이 둥근 것처럼 우린 동글동글
인생은 회전목마, 우린 매일 달려가
언제쯤 끝나, 난 잘 몰라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빙빙 돌아온 우리의 시간처럼
인생은 회전목마
단발머리님이 쓰신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리뷰 https://blog.aladin.co.kr/798187174/13724270 에서 책 내용과는 별로 관계없는 댓글을 달다가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언제인지 생각하게 됐다. 비오는 퇴근길, 이 노래를 계속 들으면서.
나는 원래 인생이 다 그런거지 뭐- 하며 살아온 사람이다. 사고란 건 저 멀리 위험한 곳에서 날 수도 있지만 집 앞 사거리 앞에서도 날 수 있는 거고, 내일 갑자기 내가 죽는다면 그건 할 수 없는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아이의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특히 그랬고, 이제는 남기고 가는 사람이 있어 나의 죽음에 대해 조금 걱정한다. 기후 위기에 막연한 책임감을 느끼고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하지만, 46억년 지구의 역사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시간은 매우 짧고, 원래 지배종이라는 건 일정 기간이 지나면 멸종하기 마련이니까 인류는 언젠가 멸종해도 할 수 없다 생각한다. 삶에 굳이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즐거우면 된 거지. 그렇게 계속 하루하루 살아왔다. 회전목마를 타고 돌듯.
그런데 어제 댓글을 달고 보니 나는 요즘 즐거운 것 외에 다른 생각도 많이 하며 살고 있다. 괴롭지만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대한 생각도 하고, 책을 읽고, 왜 세상은 바람직하게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내 인생을 바꿀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삶에 의미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게 맞나? 그럼 왜 이러고 있지? 의문이 들었다.
단발머리님이 내가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정치적(?)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뜻으로 말씀하신 건지 알겠지만 정확히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생각해본 적이 없기도 하다. 그래도 내가 언제 어떤 계기로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하루하루 살아가다가 '뭔가 이게 아닌데' 라고 생각하게 된 건 막 아이가 뱃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정규직 취업을 앞둔 소위 '내정자' 였다. 아이가 생겼고, 내가 담배연기를 피하고 술을 안 마시면서 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집 분야를 바꿔버렸다. 마음이 많이 상했지만 다른 선택지를 택하기보단 배우자와 같이 살 수 있는 곳에 취업하기로 마음 먹고 다시 자리가 나기를 기다렸다. 한 번 겪었기에 육아휴직을 쓸 엄두는 내지 못했다. 3개월 출산휴가만 쓰고 복직했고 2년 뒤 결국 같은 자리에 취업을 했다.
그 전에는 살면서 내가 여성이라서 불이익을 본다는 생각을 많이 하지 못했다. 가정 내에서는 남자 형제와 비교하여 불만이 있었지만 큰 불만은 아니었고 나는 잘 참았다. 조금 불편함이 있어도 열심히 하면 답이 있다 생각했고 가끔 소극적으로 여성을 꺼리는 분야, 성추행 전적이 있는 교수를 피하는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임신과 육아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아이를 낳을 생각을 안했을 지도 모르고, 뭘 몰랐기에 그런 결정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요즘 2-30대 여성들의 비혼 비출산 결정에 십분 공감한다. 마이라 스트로버의 <뒤에 올 여성들에게>를 보면 임신 사실을 숨기고 면접을 보러 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굳이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마이라 스트로버는 현명했다. 그러나 내가 숨기고 취업에 성공했다면, 그 괴로운 일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조금 다를 것 같다. 여전히 앞만 보고 가고 있을지도.
모집 분야를 바꿔 다른 남자 직원을 뽑은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출산과 육아를 거치며 업무 공백이 없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를 완전히 대체할 사람이 없다면 그걸 감수하고 사람을 뽑아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출산율을 걱정한다면 특히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나는 취업 전 이미 나의 보스에 대한 충성심 따위는 멀리 던져버렸고, 취업 후에는 적당히 나 하고싶은 만큼 하며 살아왔다. 그 전처럼 열심히 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육아도 하고 삶도 즐기고.. 그리고 지금은 페미니즘 공부도 하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퇴근 후에도 일 생각만 하겠지만 나는 퇴근 하면서 머릿 속에서 일 생각의 스위치를 꺼버린다. 같은 직장의 혹자, 특히 남자 직원들은 나를 이해하기가 힘들 거다.
아이를 낳고서부터 인문학 책에 관심이 많아져 잘 읽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사들였다. 그때는 페미니즘과 관련한 대중서는 별로 없고 학술서만 많아서 읽을 엄두를 잘 내지 못했다. 2016년 강남역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사건 이후 페미니즘 붐이 일었지만 사는게 너무 피곤했던 때라 동참하거나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코로나가 시작될 무렵 육아휴직을 냈다. 육아휴직을 쓸 수 있는 마지막 해였고 일년 전부터 팀원들에게 미리 여러 번 말했다. 보스는 놀라며 둘째가 생겼냐 물었고 (위에 그 보스 맞다), 아이가 이제 많이 컸는데 왜 쓰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도 많았다. 써도 괜찮겠냐, (업무 공백에 대해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나의 개인적 성취에 공백이 생길까봐 우려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휴직기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마음 먹었다. 그동안 아이와 못 가본 곳도 (평일에) 많이 가고, 아이 친구들과도 놀게 해주고... 방학 때는 여행도 좀 먼 곳으로 가볼까? 제주도? 영어를 이제 조금 읽을 수 있으니 영어권 국가에 가볼까? 돈도 일년 전부터 미리 모아놨다.
그런데 아이는 학교도 안 가고 나와 집에만 있었다. 그 해 내가 한 건 하루 세 끼 식사와 간식 챙기기, 아이와 산책하기, 온라인 수업 등 챙겨주기, 불안한 사람들과의 메신저 대화, 그리고 책 읽기 뿐이었다. 잠시라도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당시 상황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인 줄 알면서도 <자기만의 방> 을 읽었다. 그리고 정아은의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읽었다.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읽었다. 내가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페미니즘 책이 많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그리고 작년에는 페미니즘 책을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만들었다. 줌이란 프로그램이 각자 먼 곳에 있는 (다른 나라에 있는 사람까지도)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작년에 내가 한 일중 그 일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고 난 후로는 성별 때문에 부당한 취급을 받고있다는 생각이 들거나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을때 참다가 한 번 울컥하거나, 짜증을 내는 일이 적어졌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내가 잘못해서 그런게 아니고 인간 사회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전에도 몰랐던 건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이 그걸 설명하는 걸 보면서 이게 언제부터 어떻게, 왜 그렇게 되어왔고 왜 바꾸기 힘든지를 이해하게 되니까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그리고 나의 행동 양식도 조금씩 바뀌었다. 다른 사람의 기분에 무조건 맞추기보다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 살펴보게 되고, 남편이나 아이에게 무리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무리와 최선.. 상충하는 단어인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싶은 만큼 해도 충분히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전에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곳에서 나의 목소리도 내고있고, 그걸 더 확장시키려고 생각하고 있다.
전에는 내가 여성이라는 사실에 불만이 많았는데, 이제 나를 좀더 사랑하게 된 것 같다.
아, 나는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