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 잘하는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인 것을 중학교 즈음에 알아챘다. 그 때 당시 내가 좋아하던 사람은 말 잘하는 남자가 아니었는데도, 난 그걸 알았다. 사람의 매력을 발견하는 각각의 특별한 지점이 있을 테지만, 영화 또는 드라마의 캐릭터이든 실제에서든 나는 말 잘하는 남자를 한결같이 좋아했다. 내가 말하는 말 잘하는이란 청산유수 같은 언변, 위트 가득한 농담을 넘어서서 말이 통하는을 의미한다. 하지만 말이 통한다는 건 어떤 뜻일까. 그건 그 사람이 하는 말을 내가 알아듣는다는 의미이고, 동시에 내가 하는 말을 그가 알아챈다는 뜻이다. 의사소통. 커뮤니케이션.

 


내가 사랑했던 동시에 나를 절망에 빠뜨렸던 필립 로스의 소설유령 퇴장』에는 이런 문단이 있다.

 


그녀     제 어떤 점에 그토록 끌리시는 거예요?

 

        자네의 젊음과 아름다움. 우리가 소통에 들어선 속도. 자네가 말로 만들어내는 에로틱한 분위기


(『유령 퇴장』, 178)

 


사랑에 빠진 사람이 말한다. (당신의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가 나누는 소통과 당신이 만들어내는 에로틱한 분위기 때문에, 나는 당신과 사랑에 빠졌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나는 이게 사랑을 말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걔랑은 말이 안 통해라는 말은 얼마나 모욕적인가. 사랑하는 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비극적인가. 이 책 『The Love Hypothesis』에서는 서로에게 처음인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질문과 답을 통해, 그리고 따뜻한 마음과 친절함을 통해 어떻게 사랑을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만큼이나 로맨틱하고 예쁜 사랑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사람은 페미니스트 벨 훅스다.

 


여성들은 내게 반복해서 경고했다. 내 남자 파트너는 내가 자신의 섹시하고 반항적인 후배인 한, 그리고 자기가 우월한 멘토가 될 수 있는 한 내 지성에 신경 쓰지 않지만, 내가 그를 능가하고 추월하면 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정말로 지지를 거둬들였고, 나는 내가 뭔가를 잘못했다고 느끼는 등 비이성적인 생각에 사로잡혔다. (『사랑은 사치일까』, 187)

 


벨 훅스의 상황과 이 책의 주인공 올리브의 상황은 다르다. 벨 훅스가 실제 상황을 맡고 있었다면, 올리브는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답게 해피 엔딩을 맡고 있다. 벨 훅스와 올리브의 연구 분야도 다르다. 그럼에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academia에 몸담고 싶어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으로서, 정확히는 그런 열망을 가진 여성으로서 두 사람이 겪어야만 하는 경험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기간의 교습과 훈련,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환경과 그 과정 가운데서 지도 교수에 대한 강요된 충성 같은 부분들이 언뜻 보이기도 했다. 이 세상 어떤 직군이든 경쟁이 치열하지 않을까 마는, 학계 내의 정치와 갈등, 그리고 암투가 흥미롭게 그려진다.

 


fake relationship이라는 장치는 요즘에 흔하게 차용된다. 처음에는 가짜였다가 나중에 진짜가 된다는 설정인데, 평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오히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가면서 나누는 대화가 흥미롭다. 맞.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 만들어가는 에로틱한 분위기. 신경과학자의 언어로 풀어가는 절묘한 대화. 함께 한 추억을 통해 만들어가는 두 사람만의 농담들. 그걸 읽는 재미가 솔솔하다.

 

몇 가지 아쉬운 부분을 뒤로하고 별 다섯을 주었다. 내게 준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소소한 감사 표시다. 페미니즘을 알고 로맨스를 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하지만 이번에는 이해와 판단을 잠깐 뒤로하고 읽었다. 외출도 잠깐 뒤로하고, 재활용도 잠깐 뒤로하고, 빨래도 잠깐 뒤로 하고, 설거지도 잠깐 뒤로하고.

 

 


하여 나는 책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시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이 책의 리뷰를 마쳤다. 여자 주인공은 Olive이고, 남자 주인공은 Adam이다. 표지에 보이는 대로 Olivelab girl이고 Adam은 교수님, 표지가 작품의 8할을 맡고 있다. 과학적 연구법에 대한 부분은 지극히 심오하여, 나오는 족족 건너뛰었다. 좋은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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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5 0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1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psyche 2022-01-25 0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교수와 학생이라니 살짝 멈추게 되었습니다만 책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없이 ‘대화를 통한 에로틱‘ ‘두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 이렇게 말씀하시니 막 꼭 읽어야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마구마구 올라오네요.

단발머리 2022-01-25 01:21   좋아요 4 | URL
같은 과이기는 한데 담당 교수는 아니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교수/학생간의 권력 관계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습니다만은, 로맨스 소설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저는 며칠동안 파묻혀서 재미있게 읽었는데 혹 읽으실 분들 계실까 내용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쓰고 싶군요. 푸하하하하.

바람돌이 2022-01-25 02: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표지보고 만화인줄 알았어요. 재밋어 보이지만 원서니 무조건 패스... ㅎㅎ
그보다는 사랑은 사치일까가 관심이 가네요. 이론서 공부는 못하겠고, 저런 에세이가 더 맘에 훅 들어온다는.... ^^

단발머리 2022-01-25 09:08   좋아요 2 | URL
만화는 아니고 로맨스 소설입니다.
저는 벨 훅스 책이 다 좋더라구요. 어렵지 않게 쓰셔서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되고요. 벨 훅스가 맘에 훅 들어오실것입니다^^

다락방 2022-01-25 06: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교수와 학생이라니 저도 잠깐 멈칫 하게 되네요. 과학적연구법 이야 그렇다쳐도 그들 사이의 소통.. 을 제가 번역서 없이 읽을 수 있을까요? 오고가는 핑퐁같은 대화를 저는 보고싶은데 말예요. 그게 원서 읽는 재미일 것 같은데.. 그런데 집에 사두고 안읽은 원서가..
그런데, 이 책이 그렇게 야하다면서요? 🙄

단발머리 2022-01-25 09:12   좋아요 2 | URL
교수와 학생이라는 관계가 좀 그렇기는 해요. 대학원생도 학생은 학생이죠.
많이 어렵지는 않아서 괜찮을 듯 해요. 특히 핑퐁같은 대화는 아주 짧아서 이해가 더 잘되기도 하구요.
이 책이 야하다는 소식을 어디서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뒷부분에 좀 야한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다만 그걸 다 이해하기에는 제 영어실력이 좀 부족해서 저는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폈습니다. 하하하하.

책읽는나무 2022-01-25 07: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야해요??
그럼 읽어야 되겠네요?
아...언제쯤 읽게 될까요??ㅋㅋㅋ
교수와 학생..갑자기 빛과 물질에 관한 상대성 이론이란 단편소설 생각나네요? 거긴 교수가 나이가 좀 있어 보이던데 책 표지는 교수가 좀 젊군요!!!
군옥수수 꼬깔콘에 담백한 베지밀 같은 사랑이려나??

단발머리 2022-01-25 09:15   좋아요 4 | URL
읽으신다고 하신다면 제가 뭐, 말릴 수는 없겠습니다만은 주요한 장면들은 ‘핑퐁 같은 대화‘ 속에서 만들어진다는 점 밝혀드립니다.
젊은 교수입니다. 하하하하.
꼬깔콘 군옥수수맛에 베지밀 에이 같은 사랑이라기 보다는 스*** 스콘과 호박 라떼 같은 사랑입니다. 참고 부탁드려요^^

독서괭 2022-01-25 13: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에 분들처럼 저도 교수라는 말에 멈칫 하였으나. 에로틱이라는 말에 또또.. 관심이??ㅋㅋ 핑퐁같은 대화라니 그것도 궁금하네요. 티키타카라고도 하는데 저는 로맨스에서 그런 대화장면 잘 쓰는 작가가 좋더라구요^^

단발머리 2022-01-25 13:16   좋아요 4 | URL
저는 주인공들이 싸우는 장면에 크게 감정몰입하는 1인이며, 말싸움에서 지지 않는 남자를 좋아합니다. (뭐라나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핑퐁 같은 대화와 티키타카에 더해 여주인공 속마음 토크까지 준비되어 있습니다.
교수와 대학원생(박사과정)의 일이라 사실 좀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미혼의 34세 남주와 역시 미혼의 26세 여주라는 것을 소심하게 밝혀드립니다.

라로 2022-01-25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유령퇴장 안 읽어봤는데 저런 구절이 있군요. 읽어볼까? 싶어지는 궁금한 대화에요.^^;; 저같은 늙은이도 이 책 넘 재밌게 읽었어요,, 그런데 정말 페미니즘을 알고 로맨스를 읽는 것은 정말 너무 힘든 일이라는 말씀 너무 공감합니다. 저는 정말 아담이 올리브 부를때마다 좀 짜증났거든요. 하지만 또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쭈욱 읽게 만드는 작가의 힘.

단발머리 2022-01-25 15:47   좋아요 2 | URL
필립 로스에 대해서라면, 특히 저 <유령 퇴장>에 대해서라면 읽은 분들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는 점 알려드려요. (저는 호감 쪽입니다.) 이 책 속의 여러가지 반박하고 싶은 지점들이 있는 건 사실이에요. 그걸로도 두쪽은 쓸 수 있을 것 같네요. 근데 저도 너무 재미있게 읽어서요. 푹 빠지게 하는 작가의 힘,에 공감합니다.

mini74 2022-01-25 23: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왜 아무도 꼬깔콘과 베지밀 이 중요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건가하다가 나무님이 언급하셨군요 ㅎㅎ 야한 사랑보다 먹는 거에 진심인 ㅠㅠ

단발머리 2022-01-27 15:22   좋아요 1 | URL
꼬깔콘이 군옥수수맛이라는 것, 그리고 베지밀 에이가 아니라 ‘B‘라는 점도 중요하거든요. 그나마 책나무님이 알아봐주셔서 감사하네요. 야한 사랑보다 먹는 거에 진심이시라는 거, 꼭 기억해두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