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책을 다 읽지 못했다. 472쪽이니, 60쪽 정도 남았다. 이 문장이 이 책의 주제를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대다수의 여성은 ‘미치지’ 않았다. (328쪽)
미치지 않은 여자를 정신 병원에 강제로 입원시킨다. 정신 병원에서 강제노역, 구타, 성희롱, 지인과의 연락 금지, 약물 주사, 전기 충격 요법 등이 ‘적법하게’ 이루어질 때,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상인 여자는 그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여자는 진짜로 미쳐 버리고, 그래서 미친 여자가 된다.
책을 읽으며 제일 먼저 생각난 여성도 그런 여성이었다. 미치지 않았는데도 가족들에게 ‘미쳤다’는 말을 듣고 지하실에 구금되었다가 강제로 정신 병원으로 보내지던 중, 간신히 친정으로 탈출한 여성. 그러나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던 그 여성.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1704061125011
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그 여성은 평범한 가정의 여성이 아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재력을 가진 남자와 결혼했다. 서울의 근사한 호텔 사장의 아내였던 그녀가 남편과 자식들로부터 ‘미쳤다’고 판정받았을 때, 그녀는 도망갈 수 없었다. 잔인하고 뻔뻔하기 그지 없는 그들만의 독특한 습성을 고려한다 해도 그녀는 극도로 취약한 위치에 처해있었다. 이른바 최상류층에 속한 여성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언제든 쉽게 추락할 수 있다.
‘여성‘을 ‘노예‘에 빗댄 것은 결코 완벽한 비유가 아니다. 하지만 이 비유는 여성이나 성별 계급제(sex-caste system)를, 이후의 모든 계층과 인종 노예제의 원형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이론적인 정당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 여성들은 아마도 또 다른 집단에 의해 노예화된 최초의 인간 집단일 것이다. (161쪽)
성별로 세계를 설명할 때, 인류 역사 최초로 다른 집단에 의해 노예화된 ‘여성’이라는 계급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성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는 여성들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을 약자라고 부르는 데에, 남성과 여성 모두 불편함을 느낀다.
최근 들어 ‘이별’을 통보한 아내와 여자친구, 그리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강력 범죄가 자주 보도되고 있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에 ‘안전이별’을 검색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친밀한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여성은 직장에서도 거리에서도, 그리고 가장 안전해야 할 가정에서도 ‘안전’하지 않다.
오늘 오후에는 ‘대형매장 화장실에서 10대 여학생 두 명을 성폭행한 남성에게 1심 재판부가 징역 3년,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https://www.mbn.co.kr/news/society/4669459
“범행 과정에서 행사한 힘의 정도가 중하지 않고, 합의한 피해자들이 선처를 탄원한 점을 고려했다”는 게 감형 이유였다.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
<한겨레 21> 제1394호, <함께 떠난 두 소녀, 살릴 수 있었던 세 번의 기회> 중 일부다.
충북 청주시 한 아파트 단지의 화단. 가지가 부러진 나무 아래 두 소녀의 주검이 발견됐다. 초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소녀, 아름이와 미소(가명)는 군것질을 좋아하는 14살이었다. ‘넌 죽지 말아. 살아서 행복해져. 그게 좋을 거 같아.’(아름) ‘너가 내 옆을 먼저 떠나면 나 되게 아플 거 같아.’(미소) 죽음을 선택한 그날 이전부터 둘은 메신저를 통해 여러 말을 주고받았다. 위로보다 좌절의 말이 많았다. 그리고 2021년 5월12일 오후 5시, 두 소녀는 함께 세상을 등졌다. 미소는 그해 2월 초, 아름이는 2월 말에 아름이의 의붓아버지 ㅇ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신고했지만, 영장이 두 차례 반려된 뒤였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사건이 이어졌다. 2021년 3월8일 10년간 친아버지로부터 성폭행당한 여성이 피해 사실을 신고했지만 임시거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5월31일 상관으로부터 성추행당한 공군 부사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월31일 인천에서도 4년 전 상사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은 여성 공무원이 자택에서 숨졌다.
여성은 강간당해도, 맞아 죽어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이 세상이 그렇게 미쳐 돌아가고 있기에 그렇다. 미치지 않고서는 이런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 체념하고 단념하고, 침묵하고, 그리고 그런 사회의 질서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고려 신종 때인 1198년, 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노비 해방 운동이 일어났다. 개경 북산에서 노비를 모아 놓고 반란을 준비하며 만적이 했다는 연설 중,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은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하다. 남북전쟁의 와중에 있었던 노예해방선언과 이후 헌법 수정 등의 제도 개혁으로 흑인들은 해방을 맞이했다. 현재까지도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인종 차별의 흔적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제 누구도 ‘흑인이 백인보다 열등하다’는 말을 ‘공개적으로는’ 할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여성은? 여성의 지위는 여전하다.
여성의 삶은 여전히 위협받고 있으며, 여성의 목숨은 남성의 목숨보다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겨진다. 여성의 죽음은 사소하게 다루어지며, 강간에 대한 처벌은 극히 미비하게 이루어진다. 제2계급, 남성보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미치지 않을 수가 없다. 남성과 똑같은 것을 요구하는 여성에게 주어지는 ‘미친 여자’라는 훈장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여성들은, 이 사회를 그냥 이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가 미친 여자인가. 이런 미친 사회에 적응하는 여자인가. 아니면, 이 사회가 미쳤다고 말하는 그 여자인가. 누가 미친 사람인가. 도대체, 누가, 진짜 미친 여자인가.
나는 가부장제 문화와 의식이 수백 년에 걸쳐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형성해왔는가를 자료로 입증해나갔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여성은 생산 수단과 재생산 수단을 통제할 수 없었으며 게다가 꾸준히, 성적으로 또는 다른 측면에서 치욕을 당했다. 나는 그런 여성의 심리를 기록하고 정리했다. 특히 식민화된 여성들에게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 심리적으로 어떤 현상을 수반하는지에 관해 이해하고자 했다. - P25
일반적으로 여성은 서로에게 심리적·사회적으로 중요하다. 그래서 서로에게 너무 많이 바라는 경향이 있다.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하찮은 실수, 가장 사소한 실망은 종종 확대되어 분개로 이어진다. - P35
식민화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성은 스스로에게 더욱 가혹하다. 여성들은 서로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면서도 그런 기대에 조금만 모자라거나 그런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다른 여성들을 좀처럼 용서하는법이 없다. 여성들은 정서적으로 서로 친밀하지만 그런 친밀성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종종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겉으로 보기에 모순된 일이 진실이다(프로이트 박사님 감사합니다). 여성은 주로 다른 여성과 경쟁하고 주로 다른 여성에게 기댄다. 여성은 비방, 험담, 따돌림을 통해 서로를 시기하거나 방해하는 동시에 다른 여성의 존경과 지지를 원한다. - P49
‘광기‘라는 것은, 남자에게 나타나는 여자에게 나타나는 간에, 과소평가된 여성 역할을 수행하거나 혹은 개인에게 부과된 상투적인 성역할을 총체적 혹은 부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조건화된 여성의 역할을 완전히 수행하는 여성들은 임상적으로 ‘신경증적‘이거나 ‘정신병적‘이라고 간주되었다. - P182
여성은 여성적 역할을 수행할 때(우울해하고, 무능하고, 무감하고, 불안해할 때)도 여성적 역할을 거부할 때(적대적이고, 성공 지향적이며, 성적으로 적극적일 때 - 특히 다른 여성에게)도 ‘아프다‘고 간주된다. - P266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서 천명하건대, 미국에서 흑인 여성은 ‘노예의 노예‘라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 P397
이 공동체의 결속력은 페미니즘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역할 모델이 되어준다. 말하자면 페미니즘 전문가로서의 역할 모델이다.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일터에서는 거의 얻기 힘든 것이다. 우리는 서로의 성공을 동일시할 수 있다. "남성지배 사회에서 여성에게 좋은 일이 일어난다면, 나에게도 희망이 있을 수 있다." - P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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