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굴욕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는 아시아인은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에 주눅이 들어 있다. 근면성을 발휘하면 존엄성으로 보상 받으리라 믿고 묵묵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근면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뿐이다. 우리가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 우리의 수치심은 억압적인 아시아 문화와 우리가 떠나 온 나라가 초래한 것이 되고 미국은 우리에게 오로지 기회를 주었을 뿐이라는 신화를 영구화하게 된다. 아시아인이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은 너무나 은근히 퍼져 있어서,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도 남들에 비하면 나쁜 처지가 아니었다는 의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인종적 트라우마는 누가 앞서고 뒤지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문제는 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이례적이 아니라 실은 오히려 전형적이었다는 데 있다. (112)

 


저자 캐시 박 홍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 이민자 2세대로, 그녀의 삶을 지배하는 아시아인에 대한 차별과 편견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이 책에 담아냈다. 지하철에서 혐오 발언을 서슴지 않는 백인 남성과 뜨거운 한 판 승부는 저항의 중심에 분노가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백인 중심 사회에서 순종적이고 체제 순응적으로 행동하라고 요구받는 아시아인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얼마나 소리치고, 반항하고, 저항했을까.

 

비극의 경중을 따지는 것이 바보 같은 일이지만 가끔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하게 된다. 머릿속으로만 하는 일이라 무해하지 않을까 생각할 뿐이다. 인종 차별과 성차별 중에 어떤 것이 더 괴로울까.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의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는 사람들은 인종 차별보다 내가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더 불편해한다고 말했다. 이 세상을 사는 한 명의 흑인 여성으로서, 흑인으로서의 억압과 여성으로서의 억압 중에, 여성으로서 받게 되는 억압의 표출에 사회가 더 적대적이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나는 오랫동안 성차별보다는 인종 차별이 훨씬 더 근원적인 차별이라고 생각했다.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는데,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의 투표권 획득 역사를 알게 되면서 그 생각이 확고해졌다. 남북전쟁 직후인 1870년 수정헌법 제15조에 의해 흑인 노예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데 반해, 여성들의 투표권은 1920년 인준된 수정헌법 제19조에 의거 공식적으로 도입(와이오밍주, 아이다호, 콜로라도, 유타주 등 일부 주에서는 20세기가 되기 전에 여성 투표권을 인정하기는 했다) 되었다. 농장주의 아내인 백인 여성의 권리보다 흑인 남성 노예의 권리가 훨씬 더 중요하고 의미 있었다는 뜻으로(그것 말고 다른 무슨 뜻이 있을까) 이해된다.

 


또 하나는 오바마와 힐러리의 대조 비교다. 나는 미국에 살지 않았으니 내가 가진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고, 나의 판단도 미국과 우리나라 언론 보도를 통해 만들어진 것일 테다. 오바마가 가졌던 장점과 가능성, 힐러리가 가졌던 단점과 한계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나는 오바마와 힐러리 두 사람 중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오바마가 힐러리를 누르고 대선후보가 되었지만, 두 사람 다 민주당 소속이라는 것, 당연히 동원할 수 있는 인재풀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정책에 획기적인 차이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힐러리의 상대가 트럼프였다는 것이고, 힐러리가 트럼프에게 실패했다는 점이다. 오바마가 흑인이고, 힐러리가 백인이라는 측면에서만 볼 수 없겠고, 오바마가 남성이고, 힐러리가 여성이라는 측면에서만 볼 수 없겠으나, 오바마가 흑인이라는 약점을 극복했음에도 불구하고 힐러리가 끝내 여성이라는 약점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게, 여전히 아쉽다. 힐러리와 똑같은 배경, 다방면의 전문적인 국정 경험, 비슷한 성품을 가진 백인 남성이 트럼프에게 패했을까를 상상하면 더욱 그렇다.

 

차별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어서, 인종 차별과 성차별은 만나고 결합되고, 세분화되고 구체화되면서 백인 남성이 아닌 모든 인간 유형을 억압하고 구속한다. 인종이라는 면에 중심축을 둔 서술이지만, 그녀가 여성으로서 겪어냈던 어려움 또한 그녀를 처지를 더욱 곤궁하게 했을 거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책을 다 읽지 않은 지점에서 한 가지만 더하자면. 나는 이 책을 너무 좋아하고 또 그녀가 자신의 아픔과 감정과 정서를 이토록 치열하게 그려냈다는데 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결국은 미국인이라는 점을 모른 척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가정에서 한국어로 말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영어를 배우게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으며, ‘아시안 억양때문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바로 지금, 소수자로서 그녀의 말이 그 사회에서 의미를 획득한 건, 그녀가 영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영어는 그녀를 괴롭히고 그녀의 삶을 한계 짓는 살인 도구와 같았지만, 마침내 그녀는 날카로운 칼날 뒤에 자루를 심어 영어를 자신의 도끼로 만들어냈다. 나는 영어가 세계 공용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구 상에서 영어 이외의 다른 언어는 이미 외계어가 되어 버렸다고 말하는 중이다. 어떤 울림은, 어떤 포효는, 어떤 메아리는 결국 자리를 찾지 못하고 흩어질 뿐이며, 그것을 언어로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녀는 승리자다. 마이너가 분명하지만 메인 스트림에 큰 울림을 주었고, 마이너이지만 성공 신화의 한 페이지가 되고야 말았다. 자신을 괴롭히는 그 언어를 정복해 자신의 무기로 삼은 것. 그건 쉬운 일도 뻔한 일도 아니어서 나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감탄하게 된다.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이미 이 책은 별 다섯이다. 가능하다면 별 여섯도.




아무 생각 없는 백인에게 인종 문제를 참을성 있게 가르치기란 정말 고되고 피곤하다. 내가 가진 설득의 능력을 있는대로 끌어모아야 한다. 인종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히 수다로 끝날 수가 없다. 그것은 존재론적이다. 그것은 남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내가 왜 아픔을 느끼는지, 나의 현실이 그들의 현실과 왜 별개인지를 설명하는 일이다. 아니, 실상은 그보다도 훨씬 더 까다롭다. 왜냐하면 서구의 역사, 정치, 문학, 대중문화가 죄다 저들의 것이고, 그것들이 내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 P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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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10-01 0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단발머리님...생각 백프로 공감합니다! 저도 지금 저 책 읽고 있는데요..성차별이 인종차별보다...더 근원적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습니다...단발머리님이랑 비슷할 수 도 있는데요..완전 같지는 않을 수 있을 것 같아요...정리가 되는데로 요것에 대해서 빠른시일내에 써볼게요.(약속!) ㅎㅎㅎ

단발머리 2021-10-01 07:32   좋아요 1 | URL
han님, 반갑습니다^^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않는 생각 꼭 풀어내주세요. 저도 이것저것 생각은 많았는데 어제 밤 늦게 풀어내다 보니 빼먹기도 했고요, 더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따로 페이퍼로 써주셔도 좋고요. 먼댓글도 좋고요, 댓글도 환영합니다.
기다리고 있을께요, han님~~~~~~~~

han22598 2021-12-31 15:14   좋아요 1 | URL
이 답글을 찾기위해서.....머어먼..길 왔습니다. 너무 늦게 돌아와서 죄송합니다. 단발머리님...그래도 해는 넘기지 않았으니 스스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ㅎㅎ사실 제가 대답을 미뤘던 것은 제 생각의 근거가 되는 자료들을 좀 찾아보고 좀 멋드러지게 답변을 달아보려고 했는데, 결심은 실행치 못하고 지금 현재의 저의 수준으로하고 ...혹시 기회가 되면 계속 업데이트 해가면서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단발머리님이 인용하신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가 언급한 내용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치마만다가 말하는 인종차별에는 아마도 백인vs흑인의 대립구조의 인종차별만 포함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즉, 그 인종의 분류에는 동양인이나 다른 인종은 포함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생략된 분류는 과연 그것은 차별이 있다고 해야할까요? 아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을 까요? 여러 책에서 언급하는 차별의 종류 중 ˝생략의 차별˝도 차별이라고 했으니...아마 차별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팬더믹 이후로 애시언 혐오로 인해서 생략의 차별 정도에서는 벗어난 정도의 수준은 되긴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치마만다가 만약 아시안 여자였다면 그리고 대화의 상대가 흑인이었다면 인종에 대한 이야기가 성차별에 대한 이슈보다 더 불편했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아요. 사실 차별과 불평등이라는 문제는 상당히 상대적이고 유동적인 요소가 매우 강하기 때문에 층위를 가늠하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반은 동의하고 반은 동의하지 못한다고 했어요 ...

첨부, 사실 오바마의 당선이 매우 유의미한 사건인 것 맞지만, 그 이면에 흑인들의 각자의 무능력과 사회의 부적응의 책임을 개인들에게 돌리는 데 쉽게 거론되는 하나의 좋은 근거가 된다고 생각해요. 미국사회 구조상 흑인이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남기 힘든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데, 시스템 변화에 대한 노력들은 미미한테, 마치 너도 오바마처럼 저렇게 ‘열심히‘ 살아서..훌륭한 사람이 되어바라...그러면 대통령까지 될 수 있다라는 채찍을 내세우며..개인을 탓하는 시선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부작용도 있다고 저는 생각해요.

수이 2021-10-01 0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어에 대해서 말씀하신 부분에 저도 강하게 공감해요. 자신을 괴롭히던 그 ‘말’로 그 ‘감정’들을 세세하세 펼쳐놓는데 감탄했습니다. 더불어 한글 번역도 감탄하면서 읽었어요. 이 글 읽으니 다시 얼른 읽고 싶어지네요. 별 다섯 말고 여섯, 저도!!

단발머리 2021-10-01 07:35   좋아요 1 | URL
vita님 올해의 책 후보라 해서 급하게 구매해서 읽었는데요. 놀랍고 신기한 이야기가 가득하네요. 마냥 동경하는 미국인의 삶, 미국에서의 삶에 대해 전 좀 다르게 생각하게 됐구요. 코로나 이후 아시안 혐오에 대한 이야기도 이젠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한 번쯤 우리도 뉴욕에 가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ㅎㅎㅎ

붕붕툐툐 2021-10-01 08: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으앙으앙~ 저 이 책 꼭 읽어볼래요!!!!

단발머리 2021-10-01 08:40   좋아요 0 | URL
제가 완독 못한 처지라 ㅋㅋㅋㅋㅋㅋㅋㅋ 뭐라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ㅋㅋㅋㅋ 여러가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라 저는 아주 잘 읽고 있습니다. 툐툐님 감상도 궁금합니다^^

2021-10-0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02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21-10-01 10: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읽어 보고 싶네요.
차별이란 단어가 무색해지는 그날이 과연 올 수 있을까?란 생각에 한숨 절로 나옵니다.

단발머리 2021-10-02 08:29   좋아요 1 | URL
일단 분홍색이 엄청 이쁜 책입니다. (분홍 좋아하는 1인) 주제 자체는 무겁고 어렵지만 글쓴이의 문체가 흡입력이 있어서 막 술술 넘어갑니다. 차별이 없어지는 날이 올까요? 에휴... (먼 산)

난티나무 2021-10-0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와 걱정이 동시에 업! 저도 이번달 읽을 책 목록에 올려두었어요.^^

단발머리 2021-10-02 08:33   좋아요 0 | URL
난티나무님은 좀 다르게 읽으실것 같아요. 전 아무래도 먼 나라의 이야기이고, 또 매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이야기라서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주위에 이민 가신 분들은 모두 잘 적응하고 해피 라이프 이런 이야기만 해 주시니까 이 책은 또 조금 다르게 읽히더라구요. 난티나무님과 이 책도 <같이 읽기>네요^^

독서괭 2021-10-01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리뷰예요. 인종차별은 제가 피부로 느껴본 적이 없어서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이중으로 겪어야 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감히 짐작하기 어렵네요. 그래서 주류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유색인 페미니즘도 등장하고 그런 거겠죠? 이책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10-02 08:40   좋아요 1 | URL
이 땅에 태어나서 여기서 계속 살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좀 다른 이야기죠. 미국이 백인의 나라가 아닌데도 백인의 나라처럼, 백인이 주인인 것처럼 여겨지는 세상이고 그 세상에서 들리는 아시안의 목소리니까요. 저는 ‘소수자로서 느꼈던 자신의 정서를 자신의 작품에서 감춰야했던 사람들에 대해 안다. 대부분 아시안이다˝ 이 부분이 놀랍더라구요.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이중으로 겪는 여성에 대한 이론서로는, 저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이 좋더라구요. 헉, 하는 순간이 종종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