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이웃님이 극찬해 마지않는 『보이지 않는 잉크』를 읽고 있다. 알라딘 이웃님은 여러 번 ‘모리슨 읽기’를 권했는데, 사고의 폭과 깊이에 크게 감명받은 듯했다. 내게는 좀 어렵다. 그리고 ‘생각보다 더 어렵네’라고 말하는 순간, 내 안의 편견도 같이 드러난다. 토니 모리슨의 말, 인터뷰, 에세이는 어렵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추정. 그녀가 흑인 여성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하고 내가 이렇게 예상할 수 있었을까. 나는 어려운 책을 읽고 있다.
2011년 3월 1일,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의 특강 프로그램의 강연 제목이 ‘보이지 않는 잉크’다. 토니 모리슨은 알아보는 독자가 발견하기 전까지 행간에 그리고 행의 안팎에 숨어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 잉크’라고 말한다. 또한, 쓰이지 않은 것이 쓰인 것만큼 의미심장하기에 의도적인 공백, 의도적으로 유혹하는 공백을 ‘알맞은’ 독자가 채워가며 텍스트를 온전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21쪽) 능동적이고 활성화된 독자를 ‘쓰기’에 참여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독자와 함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방식이다.
‘보이지 않는 잉크’가 행간에 숨겨져 있어 독자의 ‘발견’을 기다리는 데 반해, ‘흰 잉크’는 이미 쓰여 있되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의미한다. 엘렌 식수가 말하는 그대로다.
여성 안에는 언제나 최소한 약간의 좋은 모유가 늘 남아 있다. 여성은 흰 잉크로 글을 쓴다. (21쪽)
글을 쓴다는 것은 행위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에게 자기 고유의 힘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여성과 그 성, 여성과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존재와의 탈-검열화된 관계를 ‘실현’시킬 것이다. (19쪽)
인류의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며, 백인의 역사이고, 서구의 역사이며, 남성의 역사임을, 사람들은 모른 척한다. 여성에게는 자신의 역사를 기술할 기회가 없었다.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쓸 수 없었고, 종이가 없었고, 잉크는 흰색이었다. 써라. 글을 써라. 너 자신의 글을 써라. 너 자신의 육신을 글로 써라. 남자들의 규칙과 코드를 무너뜨리는 새 언어로 써라. 엘렌 식수의 명령이 귓가에 울린다.
2013년이니까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도서를 읽기 전에 이 책을 읽었다.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여자, 여자로서의 삶, 여자의 일생, 어머니, 어머니라는 이름, 어머니의 위대함 그리고 엄마. 이런 류의 책에 딱 질색인 내가 그림(그림: 장차현실)에 끌려 무심코 책을 펼쳤고, 내 처지에 딱 맞는 문장을 만났다. 반가웠고 한편으론 절망했다.
다음날 아침이 지나면 집은 다시 거짓말처럼 어질러져 있다. 벽에 기대 앉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다. 어디부터 또 손을 댈까. 아기는 자기만 보아달라고 소리를 지르다가 옆에서 머리를 바닥에 박아댄다. 집이 나에게도 쉬는 곳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나는 집을 나가서 쉬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게 되는 것이다. (30쪽)
이런 책, 이런 문단은 또 어떤가.
아이에 대한 사랑과 직업적 성취 사이에서 자아가 찢기면서 날마다 울었습니다.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했습니다. 내가 내 경력을 만신창이로 만들면서 고통받을 때, 남편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니까요. 같은 학교에서 같은 공부를 하고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데, 저는 만신창이가 되고, 남편은 아무런 손실도 입지 않은 책 어엿한 4인 가구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제 모성애로부터 막대한 수혜를 입었습니다. 남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토록 강력한 권력이라는 것을 저는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모성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서 아이를 24시간 어린이집에 맡겨도 괜찮으면 좋으련만,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엄마가 경력 단절 여성이 되는 이유이고, 절차입니다. (『소녀,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 59쪽)
나는 아이를 둘 낳아 기르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했다. 부모님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알게 됐고 이 세상을 살 동안에는 도저히 바다와 같은 그 은혜를 되갚아 줄 수 없음을 알게 됐다. 이미 성숙한 상태로 부모 혹은 엄마가 되는 사람도 있다는 걸 안다. 난 그러지 못했다. 축복받은 결혼이었고 예정된 임신이었고 기다리던 출산인데도 그랬다. 포기하되 기쁘게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꾸 행복하다고 말했다. 행복했다. 그 자체로는 진실이다. 하지만 그 시간, 길지 않은 육아의 시간 동안, 남편과 양가 부모님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와중에도 나는 외롭고 슬펐고, 방황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내가 읽었던 책 어디에도 그때 내 실존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답이 없었던 게 아니라, 질문이 없었다. 답변이 미흡한 게 아니라 의문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저번 주에 도서관을 거닐다가 책 제목에 ‘엄마’와 ‘도서관’이라는 단어를 포함한 책을 보게 됐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이고, 도서관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반가운 마음에 일단 대출해서 가져왔다. 집에서 살살 넘겨보는데, 내용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도서관’의 ‘책’을 통한 ‘육아’가 중심이었다. 좀 아쉬웠던 건 도서관 영어책을 통한 아이 영어교육 챕터였다. 이런 구성이 일면 이해되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니까, 전업주부가 도서관에 열심히 출입하고 부지런히 책을 찾아 읽는 것은, 책 육아를 통해 아이를 잘 교육하고, 영어도서를 통해 아이에게 효과적인 영어 학습을 하기 위해서라는 뻔한 결론이, 여기 하나 더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쓰기’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전업주부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그것뿐인 사회라면 개인으로서는 실내 인테리어, 부동산 투자와 더불어 자녀 교육이라는 ‘임무’에 매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쉬움이 남지만, 이것마저 여성의 일이며, 여성에게 맡겨진 것이고, 여성이 기록으로 남겨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젯밤부터는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를 읽는다. 작가 스스로는 소설로 명명했지만, 독자들은 모두 자전적 이야기로 읽는다는 소설 아닌 소설. 원피스를 입고 나무를 타는 자유로운 에르노는 ‘공부에만 신경 쓰라’는 어머니의 격려 속에 자라나지만, 결혼 이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빠진다. 공부하는 여자가 겪는 사소하고 거대한 고민들. 여자가 ‘제대로’ 공부할 때 일어나는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일들을. 에르노는 썼다. 에르노는 자신을 글로 써서 자신이 겪은 불합리함을 세상에 내보였고, 그리고 똑같은 일을 겪고 있는 이 세상의 수많은 여성들에게 그것이 그들’만’의 일이 아님을 밝히 보여주었다. 에르노가 써서 가능했다. 에르노가 보여줬다. 자신을 글로 써서, 에르노가 보여줬다.
소꿉장난 같은 식사 때문에. 대학 식당은 여름에 문을 닫았다. 정오와 저녁에 나는 냄비 앞에 혼자가 된다. 나는 그보다 더 요리를 잘하지 못했다. 그저 빵가루 묻힌 송아지고기 커틀릿, 초콜릿 무스나 할 줄 알았지, 특별한 것은 할 줄 몰랐다. 그나 나나, 어머니 치마폭에서 요리를 도운 과거가 없었다. 왜 둘 중에서 나만 이것저것 해봐야 하나, 닭은 얼마나 오랫동안 삶아야 하는지, 오이의 씨는 제거해야 하는지, 그런 걸 알아보려고 왜 나만 요리책을 탐독해야 하고, 그가 헌법을 공부하는 동안 당근 껍질을 벗기고, 저녁을 먹은 대가로 설거지를 해야하는가? 어떤 우월성의 명목으로 이런 일이 가능한가? (1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