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슬픔이여 안녕


 

시릴이 나를 향해 성큼 걸어와 내 팔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가 멋지고 매력적이라고 여겼을 뿐이다. 나는 그가 내게 준 쾌락을 사랑했을 뿐 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는 떠날 터였다. 이 별장을, 이 청년을, 이 여름을.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내 팔을 잡았다. 우리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183)

 


감각적이다,라는 말이 이 소설처럼 잘 어울리는 소설이 있을까. 열 일곱의 세실과 젊은 아버지, 아버지의 애인 엘자와 죽은 엄마의 친구였던 안이 별장에 모인다. 한국의 가장 추운 겨울날, 뜨거운 햇빛과 바다 수영, 모래사장에서의 해수욕을 마음껏 즐겼다. 무책임하다고 말하고 싶은 구절에는 형광펜을 쭉 그었다. 안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내는 장면과 시릴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세실에게 실망했다. 세실이 평생 동안 괴로워하며 살기를 바란다. 죄책감과 후회, 부끄러움 속에서.


 















2.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7<페티시스트 : 사랑의 존재론 혹은 페티시즘으로의 초대>를 읽었다. 페티시즘의 시작을 유기체의 경계를 살피는 일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이 흥미롭다. 매혹은 나의 외부에 있는 무언가가 인접한 거리에서 나에게 손을 대는 것으로서, 매혹에 의해 는 그것에 말려들고 끌려들어간다(254). ‘사랑은 이러한 매혹을 표현할 때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데, 다시 말해 사랑이란 매혹에 의해 야기된 감정이다(256). 무언가에 매혹되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감정을 고양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상승과 고양의 운동이 아니라 하강과 침몰의 운동이다.(256) 하강과 침몰의 운동으로서의 사랑. 모두 피하고 싶은,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리 되고 마는. 섹스와 젠더에 대한 설명도 아주 풍부하고 쉽게 쓰여있지만, 이런 구절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버틀러의 말대로 젠더적 실천이 우리를 젠더적 주체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젠더적 실천의 수행을 통해 젠더적 주체로 만들어지는 이 과정 속에서 권력의 작동을 발견하는 것은, 푸코를 읽었다면 아주 쉬운 일이다. (267)

 


푸코를 두 권 읽었지만 이해가 쉽지 않은 1인은, 푸코를 시작으로 대머리 사랑의 별천지 세상을 열어가고 있는 똑똑이 친구에게 물어볼 참이다. 젠더적 실천의 수행을 통해 젠더적 존재로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권력의 작동은 잘 발견되고 있나요?

 

페티시즘에 대한 정리도 귀담아 들을 만하다. 저자에 따르면, 남성들의 페티시즘은 사물조차 생식기로 귀착시켜 인간 신체의 대체물로 느끼고, 이를 움켜쥐고 주무르면서 자신의 소유물임을 확인하는 능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데 반해, 여성들의 페티시즘은 인간이라는 인격과 무관하고 신체와도 무관하며, 성적 대상과 상대방의 성기에도 관심이 없기에 무성적이라는 것이다. (287)

 

이진경의 책은 어려워서 끝까지 다 읽은 적이 없는데, 이 책에서는 그래도 한 챕터를 건졌다는 생각에 나름 뿌듯하다.




 















3. 슬픈 열대를 읽다  

 


고전 읽기 전문가 양자오의 『슬픈 열대를 읽다』. 『슬픈 열대』는 학술서라고 할 수 없는 글로서, 특정 장르로 규정될 수 없다고 한다. 어느 정도는 일기이고 어느 정도는 여행기이며 어느 정도는 민족지이지만, 산문은 아니고 수필도 아니다. “나는 여행을 혐오한다. 그리고 탐험가 또한 싫어한다.”라고 시작되는 여행기. ‘정상적인 학술 문헌에 어울리지 않는 정신과 유달리 활달하고 거리낌 없는 스타일(67)슬픈 열대』는 도전을 부르는 책이기는 하다.

 

레비스트로스는 직접 원주민 사회로 들어가 자료를 축적하는 것보다 인류 사회에 보편적이고 선험적인 구조가 존재하는지 연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연구를 바탕으로 친족 연구 영역에서 언어학의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인류학에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기도 하다(91). 박사 논문인 <친족의 기본 구조>에서는 근친 상간 금지집단간 여성 교환법칙을 발견했다. 어김 없이 푸코 선생 등장한다.

 



 



내가 읽는 모든 책들이 푸코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나는 그를 사양한다. 반사!!!

 


레비스트로스는 고백한다. 진정한 인류학자는 첫 번째 현지 조사를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후 다시 현지 조사를 떠나지 않는다고. 한 번은 꼭 가 봐야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한 번의 여행을 특별한 현상에 대해 가졌던 매혹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현상의 한계와 시시함을 냉정하게 꿰뚫어 보고 인류학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했다면, 그는 앞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을 원래 살던 환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즉 그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익숙한 환경에서도 구조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재능을 갖추게 된 것이다. 그러니 다시 여정을 떠날 이유가 있겠는가? (230)

 


제일 좋았던 구절은 여기. 낯설기 위해 반드시 떠날 필요는 없다는 것. 떠나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는 것. 진정한 인류학자가 아니어서 그런가. 나는 떠나고 싶은데. 집을 나가고 싶은데.

 
















4. 다락방의 미친 여자

 

알라딘의 좋아하는 이웃님이 추천해 주신 책이다. 품절 상태인데 도서 예약 서비스를 통해 만났다. 산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의 공동 작업이라는 점이 인상깊다. 서로를 대상으로 말하고 쓰고 고쳐 쓰고 다시 말하는 과정이 하나의 결과물로 탄생했다는 것이 그러하고, 두 사람의 노력이 11의 합 2가 아닌, 3 혹은 5 혹은 9 정도로 도약할 수 있음을 여는 글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집안의 천사로 남편의 즐거움을 위한 안식처가 될 것을 요구 받는 여성의 이미지는 천사-여자에서 결국에는 죽음-천사로 종결된다(94-5). 자신의 개성과 가능성을 죽이고, 이야기가 없는 삶으로 들어가야만 그녀는 희생할 수 있는데, 이는 죽어있는 삶을 살기에 가능하다. 죽음의 삶, 삶 속의 죽음만이 이를 실현해준다. 2<전염된 문장>여성 작가가 된다는 것의 불안에 대해 말한다.

 


포기하도록 훈련받는다는 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나쁜 건강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인간이라는 동물의 욕구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강렬한 것은 자신의 생존, 쾌락, 그리고 자기주장이기 때문이다. (142)

 


19세기 문화가 사실상 여성들을 병들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빅토리아 시대 여성들이 고통을 받았던 여성의 질병은 반드시 여성성에 대한 훈련의 산물만은 아니었다. 그 질병이 바로 그러한 훈련의 목표였다. (143)  

 


이상적인 여성은 아픈 여성’, 이상화된 여성은 죽은여성이다. 이것은 19세기만의 일은 아니다.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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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1-01-16 17: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 저도 떠나고 싶어요. 바다 보고 싶습니다.ㅠㅠ
2. 세실... 동감이고요.
3. 푸코 두 페이지 읽고 포기한 자로서 반사! 동참하고 싶네요.
4.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여기에도 한 명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책도 사야 겠습니다.

단발머리 2021-01-18 10:29   좋아요 0 | URL
1. 저는 집만 나갈 수 있어도 감사합니다.
2. 세실은.... 아, 이 애증의 감상
3. 푸코는 현재진행중입니다 ㅠㅠ
4.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쩜쩜쩜..... 저도 포함됩니다.
5. 아픈 여성, 죽은 여성 말고 차라리 시끄러운 여성으로.....
<다락방의 미친 여자> 현재는 품절 상태이고요. 구하시려면 차라리 원서가 빠를 수도 있을 거 같아요.

미미 2021-01-16 1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퍼가렵니다 냠냠^^*

단발머리 2021-01-18 10:29   좋아요 1 | URL
헤헤헤! 퍼갈내용이 있을까요?*^^*

수이 2021-01-16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다락방의 미친 여자 엄청 벽돌책 아닌가요?! 스리슬쩍 지나가면서 우와 두꺼워 어마어마해 그랬던 기억이 살짝..... 세실은 사강만이 창조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닌가 싶어요. 나이든 여자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라면 안의 입장에서 슬픔이여 안녕_을 구술하는 걸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퍼뜩! 오 그대는 천재야!!!

단발머리 2021-01-18 10:31   좋아요 1 | URL
네 벽돌책이 맞습니다. 다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작만은 호기로웠습니다.
전, 뭐랄까. 세실은 별로지만 이 소설은 너무 맘에 들어요. 자주 자주 꺼내보고 싶을 것 같아요. 열일곱의 목소리가 듣고 싶을 때마다요. 좋은 책 추천 감사해요, 천재 수연님!!!

syo 2021-01-16 2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묵묵하고 꼼꼼한 독서중인 단발님!

단발머리 2021-01-18 10:32   좋아요 1 | URL
묵묵하고 꼼꼼하게 읽어야겠어요!!!! 쇼님이 쓴대로, 그렇게!

붕붕툐툐 2021-01-16 2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번 제가 쓴 줄.. 사랑 받고 싶어서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게 요즘 깨닫는 저의 모습입니다. 진정한 사랑을 해야 할텐데요~ 푸코 반사에서 웃고 갑니다!!^^

단발머리 2021-01-18 10:33   좋아요 1 | URL
사랑 받고 싶다는 마음이 전, 자연스러운 거라 생각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사랑과 관심과 인정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ㅠㅠㅠ 푸코는 반사입니다. 명심해주세요. 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