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임금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찾으라고 베티 프리단이 말했을 때, 그 말을 실현할 수 있었던 백인 중산층 이성애 가정의 전업주부들에게 남겨진 선택은 가사노동의 ‘외주화’였다. 가사노동을 외주화 시킬 수 있는 여성, 그런 경제력을 갖춘 여성들만이 자기 실현의 장소인 ‘직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그녀들이 일하는 동안, 다른 여성들이 그녀들이 해야만 하는 일들, 해왔던 일들을 ‘대신’ 해주었다. 대부분 유색인종 여성들이었다. 자신의 아이들을 집에 내버려두고, 아이들끼리 끼니를 때우게 하고, 조금 더 큰 아이가 더 작은 아이의 보호자가 되게 하고는, 다른 여성의 가사노동을 대신해 주었다. 이런 경우, 그들을 그렇게 만든 사회 구조가 아니라, 자기의 아이들을 가정에 내버려두고 직장에 나가면서 유색인종 여성을 고용한 백인 여성들에게 비난이 쏟아진다. 여자가 얼마나 벌겠다고 자기 애들을 내팽개치는 거냐. 이기적인 그녀들 때문에 자기 아이들을 내버려두고 가사 노동에 고용된 다른 여성들은 얼마나 불쌍하냐.
다시 물어야 한다. 만약 베티 프리단에게 국가 기금과 작가 후원 프로젝트가 지원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여성성의 신화』를 집필할 수 있었을까. 그녀가 도서관에서 글을 쓰기 위해 외출해 있는 동안 ‘베이비시터’를 고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여성성의 신화』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가사노동, 베티 프리단의 가정에서 불가피하게 필요한 가사 노동이 전적으로 프리단의 몫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녀의 이러한 외출은 정당하다. 살림도 잘하고, 아이들도 잘 키우고, 남는 시간에 남아있는 힘으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한 여성들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모든 여성들이 그런 건 아니다. 베티 프리단도, 베티 프리단마저도 베이비시터의 도움을 받았다. 베티 프리단에게 글 쓰지 말고 네 아이들이나 돌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다른 여성들도 베티 프리단처럼 자신만의 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어야 한다. 개인에게만 요구할 일이 아니다. 그럼 누가. 생략된 주어를 밝힌다. 국가가 해야 한다. 국가가 그 역할을 해야 한다.
노동시간 단축 요구를 가족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이해(243쪽)했었는데,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관점을 발견했다. 노동시간 단축으로 주어진 ‘더 많은 시간’이 가족 뿐만 아니라, ‘나를 가장 즐겁게 하는 일’에도 쓰여질 수 있다는 것. 여유롭고 자유로운 시간에 이루어지는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활동. 이 즐거움을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누리기 위해서는 충분한 소득이 보장 되어야만 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그저 개혁의 요청이 아니라 관점이자 자극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는 노동시간을 줄여 삶의 질을 높이자는 요구이다. 임금 감소 없는 6시간 근무 요구는 내가 여기서 주목할 공식이다. (239쪽)
임금 감소 없는 6시간 근무와 기본 소득제. 지금으로서는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인 것 같지만, 이런 꿈만 같은 일이 생각보다 빨리 이뤄질 수도 있을 거라 감히 희망을 가져본다. 주5일제 시행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어대던 사람들, 최저임금 만원 되면 기업 전멸한다고 했던 사람들의 메아리가 저 산 너머로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4시에 퇴근한 아빠 손을 잡고 하원하는 북유럽 아이들의 행복을 우리나라 아이들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운용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진다면. 이런 꿈 같은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간다면. 무엇보다, 노동은 신성하며, 난 내가 번 돈으로 먹고 살겠다는 노동의 신화가 점점 더 흐릿해져 간다면.
임금 감소 없는 6시간 근무와 기본 소득제. 가능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임금뿐 아니라 내가 여기서 생각하는 것은 "여성임금"과 "가족임금"이다. 노동시간 역시 역사적으로 가족을 참고로 구성되었다. 다시 말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가 풀타임근무의 표준이 되었을 때, 대개 남자로 그려졌던 노동자는 집안의 여성으로부터 보조를 받는다고 상정되었다(이는 물론 대부분 백인 중산층의 형편이었지만, 사실상 사회적 관습이자 정치적 수단으로서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데 문제는 없었다). 남성노동자가 무급 가사노동을 책임져야 했다면, 그가 하루에 최소 8시간 일해야 한다고 확실히 요구받았을 것으로 상상하기는 어렵다. 줄리엣 쇼어Juliet Schor가 주장했듯이 젠더 분업이 없었고 역사의 바로 그 시점에 가구 내 재생산노동을 풀타임으로 담당하는 여성의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면, 이런 노동시간제는 결코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1997, 49 -50)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노동윤리와 가족윤리가 여전히 일체의 역 사적·경제적·정치적·문화적 타래들로 한데 엮여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무급 재생산노동의 조직화와 분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임금노동의 시간제에 맞서는 시도는 언제나 근시안적인 것이 된다. 또한 가족윤리를 장려하거나 내버려 둔 채 만연한 노동가치를 약화시키려는 노력은 늘 문제적인 것이 된다.
핵심은 노동시간의 계산에 언제나 사회적으로 필요한 무급노동항목이 포함되어야 하며,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모든 운동에는 현재 노동이 조직화되고 분배되는 방식에 맞서는 일이 포함되어야 한다는것이다.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했던 과거의 운동들이 사유화된 재생산노동의 젠더 분업을 현대 가족 이상의 핵심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면, 오늘날의 페미니즘적 노동시간 단축운동은 가사노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의 부족과 젠더 분업 문제 모두를 직면하고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 노동시간 전체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노동시간제뿐 아니라 노동윤리에까지 맞서려는 노력 역시 힘을 잃는다. 가족 중심 접근이 그랬듯이, 임금노동의 도덕화에 맞서려는 이런 노력은 생산 중심주의 가치에 대한 비판을 무급 가사노동으로까지 확장하지 않는 한, 최선의 경우 제약을 받거나 최악의 경우 꺾어질 것이다. 일의 이 같은 도덕화 - 우리 삶을 바쳐야 하는 것으로 일을 정의하는 것-가 공고히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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