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틸다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도서관 책을 찢어버리는 아버지와 자녀에게 완전히 무관심한 엄마, 그리고 오빠와 함께 산다. 혼자 글을 깨치고, 찰스 디킨스, 제인 오스틴, 조지 오웰을 읽는다. 복잡한 계산을 간단히 암산으로 해결하던 이 슈퍼 소녀는 후에 자신에게 물건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이 있음을 알게 된다. 초능력을 이용해 절대악이었던 교장 선생님을 학교에서 쫓아낸 마틸다. 그녀의 착한 심성과 특별함을 알아채고 응원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 허니 선생님은 마틸다의 도움으로 교장 선생님의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탈출한다.
여러 번 읽었던 책인데, 이번에는 이런 구절이 맘에 와 닿았다.
...… “Something strange has happened to me, Miss Honey.”
“Tell me about it,” Miss Honey said.
“This morning,” Matilda said, “just for fun I tried to push something over with my eyes and I couldn’t do it. Nothing moved. I didn’t even feel the hotness building up behind my eyeballs. The power had gone. I think I’ve lost it completely.” (229)
마틸다의 초능력은 저절로 생겨났다. 마틸다는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해 허니 선생님을 괴롭히던 교장 선생님을 학교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그 후. 두 사람의 성정 상 마틸다의 초능력으로 두 사람이 옳지 않은 일을 하지는 않겠지만, 그 초능력을 이용해 두 사람이 더 행복해졌으면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평생을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물질적 여유,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의 완벽한 행복, 교장 선생님에 대한 더 강력한 응징. 내가 바랬던 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나라 동화에서도 우연히 얻게 된 도깨비 방망이에 대해서는 반영구적 이용이 용인되지 않던가.
하지만 마틸다의 초능력은 사라진다. 이제 두 사람은 초능력 없이 살아간다. 마음껏 공부할 수 있고,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가 있고, 그리고 따뜻한 차를 편안히 앉아 마실 수 있고. 이만큼의 행복 어디쯤에서 마틸다의 초능력이 사라진다. 마틸다의 초능력이 사라진 일이 마틸다와 허니 선생님에게 아쉬운 일인지, 아니면 더 잘 된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라면 아쉽다는 데 한 표를 솔직히 표시해 본다.
마틸다를 끝내고 『Diary of a Wimpy Kid 12 : The Getaway』을 읽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나는 로알드 달의 다른 책 『James and the Giant Peach』를 읽고 있어야 하는데. 아니지, 진짜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나는 지금 잭 리처의 『The Midnight Line』를 읽고 있어야 하는데.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아 오히려 매력적이다. 지금 읽는 책은 도서관 서가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책이다.
집에는1권이 있는데, 전체 시리즈를 다 찾아 읽는 정도는 아니고, 새로운 시리즈가 나오면 알고 있는 정도였는데, 12권은 처음 본다. 크리스마스에 휴가를 떠난 그레그 가족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크리스마스 즈음의 교통 정체, 비행기 연착, 공항에서의 대기 모습들이 특별한 유머 없이 있는 그대로 펼쳐지는데도 소소하게 재미있다. 1권을 읽을 때부터 생각했던 대목은 여기.
호텔에 체크인을 하려고 그레그 가족들이 줄을 서 있다. 맨 왼쪽에 호텔 직원, 그 앞에 그레그, 동생 매니, 형 로드릭, 아빠 그리고 엄마. 단번에 알아챌 수 있겠지만 아빠, 형, 그레그의 모습이 똑같다. 같은 사람을 그린 후, 작은 특징만을 삽입한 모습이다. 아빠, 형, 그레그. 그레그가 추구하는 인간상, 그레그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모습이 약간의 차이가 있더라도 결국은 같은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인간 남자 혹은 남자 인간. 남자이기는 하되 아이인 매니는 아주 작게 그려져 있다. 엄마는 외계인이다. 전체적으로 엄마는 가정의 1인자, 폭군 이미지이다. 아들 셋 키우려면, 특히 로드릭이나 그레그 같은 아들들을 키우려면 폭군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엄마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여자여서 그럴 수도 있고, 엄마여서 그럴 수도, 강한 성격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차라리 엄마를 호텔 직원처럼 그렸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본다. 그게 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두꺼운 안경과 특이한 헤어스타일의 엄마에게는 아무래도 감정이입이 쉽지 않다. 심지어 내가 엄마라 불리는 사람인데도.
지금 이 순간, 시몬 드 보부아르와 아가생스키, 그리고 정희진을 떠올렸다면 내가 오버인가.
사실 남자는 오늘날 ‘적극적’인 것과 ‘중성적’인 것, 즉 남성과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 한편 여자는 단지 소극적인 것, 즉 여성적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여자가 인간적인 존재로서 행동할 때마다, 세상은 여자가 남성에 동화한다고 말한다. 여자의 스포츠적, 정치적, 지적 활동과, 여자의 다른 여자에 대한 욕망은 ‘남자다운 항의’로 해석된다. (<제2의 성>, 516쪽)
바사랑 그렇다면 선생님 같은 젊은 여성 철학자는 한편으로 ‘생식’이라는 별로 고상하지 못한 방법의 세속적인 아프로디테와, 다른 한편으로 더 고결하지만 소년에게만 허락된 천상의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요?
아가생스키 흥미로운 질문이군요. 여성은 현자 사이에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성 철학자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육체, 출산의 역할을 포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여성성’을 버려야 합니다. 얼마 전까지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남성 철학자가 남성으로서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전혀 여성 혐오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전 텍스트에 남성만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너무도 당연하게 남성과 보편적 인간을 동일시합니다. 이것을 ‘남성적 보편’이라고 부릅니다. (<페미니즘의 역사>, 89쪽)
이분법은 반반으로 분리된 상황을 묘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체와 타자가 하나로 묶인 주체 중심의 사고다… 주체(one)가 자신의 경험을 중심으로 삼아 나머지 세계인 타자(the others)를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 명명하는 자와 명명당하는 자의 분리, 이것이 이분법(dichotomy)이다. 즉 이분법은 대칭적, 대항적, 대립적 사고가 아니라 주체 일방의 논리다. … 젠더(gender)는 남성의 여성 지배를 의미한다. 양성은 두 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성성 하나만 존재한다. 남성성은 젠더가 아니다. 남성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 33쪽)
책을 다시 읽고 있다. 다시 읽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