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는 시간이 지나가고, 그 다음에는 책을 읽기 싫은 시간이 찾아왔다. 나는 ‘책을 읽지 못 하는 슬럼프’를 겪은 적이 없다. 그런 시간들이 아주 짧게, 가볍게 지나가는 편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최근에, 책을 읽지 못하겠고, 책을 읽기 싫은 짧은 시간을 지나면서 책입맛을 다시 돋우기 위해 고른 책은 『오만과 편견』이다. 나는 그 책이 『제인 에어>일거라 생각했다. 인생의 책, 책 중의 책, 내가 사랑하는 책 『제인 에어』. 그렇게 믿어왔는데 아니었다. 내가 잡은 책은 『오만과 편견』이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5권을 읽고, 대표작 『오만과 편견』이 제일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 이후, 다시 읽는 제인 오스틴은 항상 『오만과 편견』이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제인 오스틴은 좋았다.
첫번째 읽었을 때 제일 좋았던 부분은 이런 문단.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더군요. 애쓴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요. 감정은 어떻게 할 수가 없네요. 제가 당신을 얼마나 열렬히 흠모하고 사랑하는지를 말씀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256쪽)
가슴 속 뜨거운 열정을 고백하는 다아시. 자신의 사랑이 응답될 거라 착각하고 있는 다아시. 구애하는 상황에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못하는 다아시. 안타깝다, 다아시. 그대는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할 것이네. 그리 해서는.
이번에 읽을 때는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카드보다 책을 좋아해요? 거참 특이하네.” 허스트 씨가 말했습니다.
“엘리자 베넷 양은 카드놀이를 경멸하시지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으시고요. 오직 책에서만 즐거움을 찾으신답니다.” 빙리양이 말했습니다.
“저는 그런 칭찬을 들을 자격도 없고, 그런 비난을 들을 이유도 없어요. 저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읽는 사람도 아니고, 책에서만 즐거움을 찾는 사람도 아닌걸요.” 엘리자베스가 소리쳤습니다. (53쪽)
책을 좋아한다는 것, 책을 많이 읽는다는 건 칭찬을 들을 일도 아니지만, 비난 받아야할 일도 아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랑할 일도 아니고, 책을 읽지 않는다고 무시당할 것도 아니다. 이렇게 제인 오스틴의 문장을 저장해 둔다. 책읽기를 좋아한다고 칭찬을 들을 자격도, 비난을 들을 이유도 없어요.
『오만과 편견』을 끝내고는 『잭 리처 어페어』를 이북으로 읽었다. 잭 리처를 사랑하는 그의 팬들에게는 곤혹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잭 리처를 톰 크루즈로 처음 만났던 나는, 190센티의 거구인 잭 리처가 걷고 말할 때마다 자꾸만 ‘톰 크루즈’가 겹쳐져 어색한 듯하면서도 은근 좋았다. 잭 리처 시리즈는 액션/스릴러 소설로 분류되는데 사실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는 아니다. 일단 예쁜 여자들이 나오고, 그리고는 예쁜 여자들이 시체로 발견된다. 살인의 시간과 방법, 그리고 이유를 밝혀내는 과정들이, 살인을 상상하는 과정들이 즐겁게 읽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잭 리처를 찾아 읽는 이유는, 잭 리처가 가진 매력 때문이다. 출판사 광고대로 동물적인 감각, 정확한 판단. 스티븐 킹, 마이클 코넬리, 켄 폴릿, 퍼트리샤 콘웰, 제임스 패터슨 등이 사랑하는 캐릭터. 20초에 한 권씩 팔리는 잭 리처 컬렉션. 나로 말하자면,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러 가기 전, 그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고 생각하는 리처가 좋았다. 그런 조심성,을 나는 좋아한다.
전국의 피서지가 다 그렇겠지만 실내라고 할 만한 모든 곳이 사람들로 북적인다. 111년만의 폭염은 정말 대단하다. 백화점, 도서관, 마트, 대형 쇼핑몰, 어디 하나 한가한 곳이 없다. 휴가는 아니지만, 휴가처럼 제법 멀리 나서 도착한 대형 쇼핑몰도 그러했는데,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간신히 안착했다. 큰 애는 큰 애의 책을, 둘째는 게임 시간 확보를 위해 아빠와 영어 단어 외우기를 시작했는데, 아이들을 등지고 앉아 『잭 리처 어페어』를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다. 읽고 싶은 책, 콜드 브루 그리고 이제는 필수품이 되어가는 에어컨. 더 필요한 게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당장 생각나는 것도 없다.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