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컨닝 페이퍼
I am dying to
to quit. ‘일을 관두다. 때려치다‘
라고 할 때는 quit 이라는 동사를씁니다. 
quit my/this job을 한덩이로 묶어서 알아두세요.
I am dying for - P41

잠깐만요!
I am dying to do ~ vs. I can‘t wait to do ~I am dying to do ~ 가 강렬한 욕구 자체를 나타내는 표현이라면, I can‘t wait to do ~는 이미 앞으로 하기로 되어 있는 일이지만, 한시라도 빨리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기분을 나타낸답니다. 그래서 여친을 한시라도 빨리다시 만나고 싶은 기분은 I can‘t wait to see her again. 이라고 나타내면 되지요. wait for 다음에 명사를넣어서 쓸 수도 있는데, 예를 들어 한시라도 빨리 방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표현하려면, I can‘t wait for myvacation. 이라고 하면 되는 거죠, can‘t wait to do can hardly wait to do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답니다. 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그대와 결혼하고 싶어요."라고 표현하고 싶다면, I can hardly wait to marryyou. 라고 하면 아주 훌륭하죠. - P41

컨닝 페이퍼
I want to · 일을 하다 말고 잠깐
‘쉬다, 휴식을 취하다‘ 라고 할 때는
have a break 또는 take abreak를 써 보세요.
drink beer
leave this world. 괴로울 때나우스개 소리로 곧잘 하는 ‘지구를떠나고 싶다‘는 말은 물리적으로지구라는 행성을 떠나서 다른 행성으로 가겠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살고 있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다‘는 말이니까,  그 속뜻에 맞춰 영작을 해야겠죠?
want to
to find • 우리말로는 올해는 여친/남친을 꼭 만들어야겠다는 식으로 쓰지만, 영어에서는 찾는다는의미의 find 를 써서 find a girlfriend/boyfriend로 쓴다는사실, 꼭 알아두세요. - P39

0컨닝 페이퍼
a new cell phone • 우리말을1:1 식으로 대입해서 ‘새로‘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를 찾고, ‘장만하다‘에  해당되는 영어단어를 찾지는 마세요. 전달하고자 하는 우리말의본질적인 개념과 영어표현의 개념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해요.
I want - P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원공국사탑비
  원공국사 승묘탑비는 돌거북 받침대와 용머리 지붕돌을 모두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비신은 가늘어 날씬한 편인데, 받침대와 지붕돌은 꽤 큰 편이어서 안정감을 주며 조각 기법도 매우 치밀하다. 돌거북의 머리는 거북이 아니라 양의 머리처럼 조각한 것이 특이하고 목을 바짝 세우고 입을 꽉 다물어 야무진 느낌을 준다. - P357

원공국사 승묘탑
  원공국사 승묘탑(보물 제190호)은일제강점기 때 서울에 살던 일본인이 훔쳐서 서울로 옮겨간 것을 회수해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졌고 현재는국립중앙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다. - P359

어째서 21세기 사람들은 1,000년 전 솜씨를 따라가지 못하느냐고 힐난을 보내니 우리 시대 문화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을 그저 안타까워할 뿐이다. - P361

지금은 제주도에 살고 있는 장선우 감독이 한창 영화에 열을 올리고있을 때 거돈사터를 무대로 영화 한 편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서울대 이애주 교수는 "달밤에 여기서 춤 한번 춰보고 싶다"고 했고, 음악 애호가들은 "여기서 야외음악회가 열리면 환상적일 것 같다"고 했다.
언젠가 석양 무렵 거돈사터에 왔을 때 나도 그런 꿈을 그려보았다. 석축에 관객들이 둘러앉아 불상 좌대를 무대로 삼아 음악회를 열어보는것이다. 그때 내 마음속에 떠오른 레퍼토리는 이생강의 대금산조, 이애주의 살풀이춤, 김덕수의 사물놀이였다. 그리고 서양에서도 한 명 데려올까 생각하니 불현듯 떠오른 것은 야니(Yanni)의 피아노 연주였다. - P361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우리나라의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비석이다. 조각이 섬세하고 비문 글씨도 뛰어나 가히 국보라 할 만하다. - P369

지광국사 현묘탑비의 디테일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걸작이자 천하의 명작이다. 특히 탑비의 조각이 더없이 정교하고 화려하다. 우리나라 조각에 이처럼 섬세하고 화려한 것이 있었던가 싶다. - P371

지광국사 현묘탑
  지광국사 현묘탑비 바로 곁에 서 있었던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은 높이 6.1미터의 승탑으로 팔각당이라는 기본형에서 벗어난 대단히 화려한 2층탑이다. 일제 때 일본에 반출된 것을 되찾아 경복궁에 세워놓았지만 한국전쟁 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이를 다시 짜맞추어 간신히 복원해놓았다. - P373

다산 정약용도 유배객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담배라고 하며 이렇게 읊었다.

요즘 새로 나온 담바고
유배객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지
살짝 빨아들이면 향기 그윽하고

淡婆今始出
遷客最相知
紐吸涵芳烈 - P378

슬그머니 내뿜으면 실처럼 간들간들
객지의 잠자리 언제나 편치 못한데
봄날은 왜 이리도 길기만 할까

微噴看裊絲
旅眠常不穩
春日更遲遲 - P379

그리고 고별연 마지막 연기를 내뿜으면서 소월이 애절하게 노래한「담배」라는 시를 아련히 그려보았다.

나의 긴 한숨을 동무하는
못 잊게 생각나는 나의 담배!
나의 하염없이 쓸쓸한 많은 날은
너와 한가지로 지나가라. - P379

비두리라는 시골 동네
길이란 묘해서 나올 때보다 들어갈 때 멀게 느껴진다. 초행일 때는 특히나 심하다. 나올 때는 길을 잃지 않지만 찾아 들어갈 때는 행여 길을 잃을까 어리벙벙해지기도 한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있고, 길도 잘 닦여답사 다니면서 헤매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1980년대만 해도 지방도로는 비포장길이 많았고 특히 폐사지 가는 길은 거의 다 흙먼지 날리는 비좁은 길이었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어 길을 잃기 일쑤였는데 한번 길을 잘못 들어서면 큰 버스를 되돌려 나오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 P381

"우리는 비두네미라고 하는데 군에서 저렇게 써 붙여놓았구먼. 동네이름은 비두리라고 합니다."
"왜 비두리라고 해요?"
그러자촌로는 길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에 비석받침돌거북이가 하나 있어서 비석 비(碑) 자에 머리 두(頭) 자를 써서 비두리(碑頭里)라고 불렸다오." - P382

비두리 귀부와 이수
  비두리 귀부와 이수(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0호)는 규모도 웅장하거니와 귀부의 귀갑문과 이수의 운룡 조각이 매우 뛰어나다. 우람한 몸체의 목에 돋은 비늘이 선명하고 고개를돌린 모습까지 사실적이다. - P383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한 진공대사탑비
 진공대사 탑비에는 당 태종글씨의 멋이 잘 드러나 있다. 신운이감도는 듯한 리듬이 있다. 이런 명비이건만 크게는 두 동강으로 잘려나가원주 반절비라고 불리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 P397

자신을 낮춰 말했지만 그것은 겸손이었다. 왕건은 진공대사의 행적을 일일이비문에 밝히고 난 뒤 대사의 열반을 애도하는 대목에서는 이런 비유로표현했다.
지금 비록 스님의 육체는 사라졌지만 그 진실인 법제(法體)는 길이남아 있도다. 전에는 물이 고이니 고기가 찾아옴을 기꺼워했건만 이제는 숲이 없어지니 날아가는 새를 슬퍼하도다.
학식이 얕은 사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아니다. 그리고 왕건은 대사를추모하는 명(銘)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글을 맺었다.
보배를 감추고 법인(法印)을 알았도다.
자비의 그 배는 풍랑에 빠졌고지혜의 등불은 그 빛을 잃지만은빛 석등의 불꽃은 영원히 비추리. - P399

염거화상 승탑
  일제강점기 한 일본인이 흥법사터에서 불법 반출해 일본으로 가져가려다 실패한 후회수돼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이 승탑은 흥법사터에서 옮겨왔다고 전하지만 절터에서는 그 원래 자리가 확인되지 않았다. - P401

조선 초기 성종 때 대학자인 서거정은 우리가 다녀온 법천사와흥법사 등 남한강변의 사찰을 여행하면서 지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법천사의 뜰에서는 탑을 보며 시를 읊고
흥법사의 대 앞에선 비석을 탁본하네

法泉庭下詩題塔
興法臺前墨打碑 - P402

문막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영동고속도로에 문막휴게소가 생기고부터다. 그러나 문막은 본래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선상에서 원주의 초입이 되는 오래된 마을이다. 문화재 조사에서 첫 단계인 지표조사를 할 때는 우선 나무부터 살펴본다. 근처에 오래된 느티나무가있으면 마을이 있었다는 증거이고 감나무가 많으면 민가가 있었다는증거다. 그리고 해묵은 은행나무가 있다면 마을 역사가 그 나이만큼 올라간다는 뜻이다. 문막에는 흥법사의 연륜과 맞먹는 은행나무가 있다.
바로 천연기념물 제167호인 ‘반계리 은행나무‘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1495-1번지)다. - P402

아쉬움이 있다면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인지라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은 내가 답사객들에게 그것을 아쉬움으로 말하자 곁에서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던 동네 어른이 내 말을 가로채면서 나섰다.
"이 은행나무가 수나무라는 건 맞는 말이여. 그래서 은행을 맺지 않는다는 것도 맞는 말이여. 그러나 이 은행나무가 있어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은행나무 암컷 100여 그루가 실한 은행을 맺고 있으니 그게 얼마나고마운 일인감, 서운키는 뭐가 서운하단 말이여!"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동네 신목에 와서 흠을 잡느냐는 호통이었다. 그때 답사회원들은 반계리 촌로에게 우레 같은 박수를 보냈다. 그박수는 분명 깊은 향토애를 나타내는 촌로에게 존경의 뜻으로 보냈음이틀림없다. 그러나 항시 답사 질서를 지키라고 회원들을 야단치면서 엄하게 굴던 인솔자가 보기 좋게 녹다운된 모습이 고소해서 박수 소리가 더커졌다는 것도 내가 잘 안다. - P405

비두리나 문막에서 겪었듯 시골 촌로들의 향토애는 참으로 귀하고 존경스러운 것이다. 반계리 촌로의 일갈 이후 나는 그동안 언필칭 객관적으로 말한답시고 그야말로 ‘남의 동네 얘기하듯‘ 해온 걸 미안하고 죄스럽게 생각하며 다시는 답사길에 남의 동네 가서 아쉽다느니 어디 있는무엇에 비해 못하다느니 하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아는 데까지 30년이 걸렸다. - P405

나옹선사가 지었다는 「참선곡」은 오늘날까지 널리 수행의 지침으로 되어 있다.

하하 우스울사 허물 말 우스울사
엇지하야 허물인가 본래공적 무상(無常事)를
누설하야 일렀으니 엇지 아니 허물인가 - P430

나옹선사 진영
  고려시대 마지막 고승이었던 나옹선사의 영정이 여러 폭 전하는데 그중 가장 우수한 것은 현재 평양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된 것이다. 나옹선사의 사리는 둘로 나누어 나옹선사가 주석했던 양주회암사와 신륵사에 승탑으로 모셨다. - P431

나옹선사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청산은 나를 보고(靑山要我)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靑山兮要我以無語
蒼空要我以無垢聊
無怒而無惜兮
如水如風而終

(이 시는 다른 스님이 지은 것이라고도 하고 중국 한산(山)스님이지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나옹선사가 지은 것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 P4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타는 소장욕구를 🚗 ㅁ지 못하고 지르다.
민음사 한국 산문선 전 10권
지금 못 읽더라도 퇴직후 읽겠다는...

한국산문선 1권 이규보 우렛소리
5페이지 <책을 펴내며>

조선 초에 정도전은 ˝해달별은 하늘의 글이고, 산천초목은 땅의 글이며, 시서예악은 사람의 글이다.˝라고 말했다. 해와 달과 별이 있어 하늘은 빛나고, 산천초목이 있어 대지는 화려한 것처럼, 시서와 예악의  인문(人文)이 있기에 사람은 천지 사이에서
빛나는 존재로 살아간다.
글은 사람에게 해와 달과 별이요 산천초목이다. 인문은 문화이자 문명이다.  글이 있어 문화가 빛나고, 글이 있어 문명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글로 인재를 뽑고,  글하는 선비가 나라를 이끈 문화의 나라, 문명의 터전이었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인문이 글 속에서  찬연히 빛났다. 글로 자신의 위의를 지켰고, 세계에서 문명국의 대접을 받았다. 글로 빛나던 선인들의 인문 전통은 명맥이  끊긴 지 오래다. 자랑스럽게 읽던 명문은 한문의 쓰임새가 사라지면서 소통이 끊긴 죽은 글로 변했다. 오래도록 한문산문은 동아시아 공통의 문장으로 행세했다. 말을 전혀  못해도 필담으로 얼마든지 깊은 대화가 오갈 수 있었다. 국경과 언어 장벽을 넘어선  소통이 이 한문을 끈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그 전통이 단절되었다 하여 해와 달과 별처럼 빛나고, 산천과 초목인 양 인문 세계를 꾸미던 명문의 전통을 없던 일로 밀쳐 둘 수  있을까? 한문으로 쓰인 문장은 오늘날  독자에게는 암호문처럼 어렵다. 그러나  그 안에담긴 인문 정신의 가치는 현대라도  보석처럼 빛난다. 그 같은 보석을 길 막힌  가시덤불 속에 그냥 묻어 둘 수만은 없다.  이에 막힌 길을 새로 내고 역할을 나눠, ‘글의 나라‘ 인문 왕국이 성취해낸 우리 옛글의  찬연한 무늬를 세상에 알리려 한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09-06 22:46   좋아요 3 | URL
와 진짜 간지작렬!!! 색깔도 책 만듦새도 너무 멋지네요.
가격도 후덜덜.....ㅠ.ㅠ
소장욕구 막 올라오지만 당분간 휴직중에는 자제 자제 모드 중입니다. ㅠ.ㅠ 대장정님 사진 보면서 대리만족!!!

대장정 2022-09-07 00:29   좋아요 2 | URL
네, 간지작렬입니다. 포스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거 사려고 벼르고 벼르다 네이버페이 할인도 해주고 해서 좀 참지 못하고 질렀습니다. 감사합니다 😂 ~~

대장정 2022-09-07 06:45   좋아요 3 | URL
네, 간지작렬입니다. 포스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이거 사려고 벼르고 벼르다 네이버페이 할인도 해주고 해서 좀 참지 못하고 질렀습니다. 감사합니다 😂 ~~

얄라알라 2022-09-07 00:27   좋아요 2 | URL
대장정님 글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정말 책에 진심이십니다. 북플 친구분들 사실상 모두 책에 진심이시지만요....전집 위풍당당하네요^^ 네이버페이 할인 받으셨어도 상당했을..^^ 음미하시며 읽어나가시기를 응원드려요 대장정님

대장정 2022-09-07 00:32   좋아요 2 | URL
네, 뿌듯합니다. 무이자 할부라는 무기가 또 있습죠. 아마 퇴직하고나서야 읽기 시작할듯 합니다ㅠㅠ ㅎㅎ 응원 감사합니닷 용맹정진하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2-09-07 06:48   좋아요 2 | URL
ㅎㅎ 이미 가지고 있는 책입니다 역시 이런 책은 세트가 제맛이죠^^*

대장정 2022-09-07 08:03   좋아요 2 | URL
보리에서 나온 겨레고전문학선집도 모으고 있는데 힘드네요. 가격, 공간~~^^

mini74 2022-09-07 20:37   좋아요 1 | URL
ㅎㅎ 맞습니다 모름지기 미래를 준비해야죠 ㅎㅎ책들이 넘 멋집니다 책이 ㅎㅎ

대장정 2022-09-07 22:22   좋아요 1 | URL
100살까지는 살아야 될 듯합니다. ㅋㅋ~~^^

이하라 2022-09-08 13:44   좋아요 2 | URL
대장정님 즐겁고 행복한 추석연휴 되세요.^^

대장정 2022-09-08 15:00   좋아요 1 | URL
네, 이하라님도 즐거운 명절되세요. 감사합니다 ~~^^
 

충주의 상징
충주라고 했을 때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람마다, 경우에 따라 제각기 다를 것이다. 나이 드신 분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자유당 시절에 처음으로 공장다운 공장으로 기공한 충주비료공장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반드시 나와 그것부터 생각날 것이고, 물산으로 얘기하자면 충주 사과가 유명하고, 산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하늘재라 부르는 계립령(鷄立嶺)이, 물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충주호유람선, 관광지로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분은 수안보온천, 역사의 자취를 찾아다니는 분은 중원고구려비가 먼저 떠오를 것이다. - P301

그러나 목계나루는 충주 답사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거리로도 그렇고,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정서적으로도 여기서 충주로 들어가야 충주에 온것 같다. 목계나루 강 건너 저편에는 고려와 조선시대 최대의 조창(漕倉)인 가흥창(可興倉)이 있었다. 여기는 그 옛날에 남한강 물류의 허브였던곳이다. - P302

중원고구려비
  한반도에서 발견된 유일한 고구려비로 5세기 말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2미터, 폭은55센티미터, 두께는 33센티미터이고 충주시 중앙탑면 용전리 입석마을에 있었다. 발견 당시 행정구역이 중원군이었기 때문에 ‘중원 고구려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충주고구려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 P313

중앙탑
 중앙탑공원은 근래에 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이름이고 본래 이곳은 중원군 가금면 탑평리이다. 강변 한쪽 들판에 우뚝 서 있는 이 탑은 ‘탑평리 칠층석탑‘이라고 불리며 일찍이 국보 제6호로 지정되었다. 이 탑은 통일신라전성기에 세워진 것으로 동시대에 유행한 삼층석탑과는 달리 7층 구조이고 높이도 14.5미터로 가장 높다. - P324

이를테면 선덕여왕이 황룡사구층탑을 세운 것도 신라가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것으로 신라에 무릎을 꿇어야 할 아홉 나라로 1층은 일본, 2층은 중화, 3층은 오월, 4층은 탁라(탐라), 5층은 응유, 6층은 말갈, 7층은 단국, 8층은 여적, 9층은 예맥을 상징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또 여주 신륵사 강변 절벽에 높이 세운 다층전탑도 남한강 뱃길의 이정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고 있다. - P324

이러한 우륵의 전설이 깃든 곳은 제천 의림지의 우륵정, 경북 고령의금곡(琴)을 비롯하여 아주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그가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탄금대이다. 다산 정약용도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우륵이 노닐던 곳으로는 충주의 탄금대와 사휴정(四亭)이 있다고하였다. 그래서 충주를 답사하면 자연히 탄금대를 한번 가보게 된다. - P329

신립은 당시 여진족의 침범을 막아낸용장(勇將)이었다.
그러나 그가조령을 지키지 않고 이곳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전멸한 것은 뼈아픈실책이었다. 1801년 다산 정약용은 유배를 떠나는 길에 탄금대를 지나면서 이렇게 읊었다.(「탄금대를 지나며(過彈琴臺)」) - P334

강복판에 불쑥 탄금대가 튀어나왔네
신립을 일으켜서 얘기나 좀 해봤으면
어찌하여 문을 열고 적을 받아들였는지

江心湧出彈琴臺
欲起申砬與論事
啓門納寇奚笃哉 - P334

그 사람이 그 자리(관직)에 있을 만한 인물이 못 되면, 이는 하늘을 어지럽게 하는 일이 된다.
(非其人居其官 是謂亂天事)

석양의 탄금대 아래로는 검붉게 물든 남한강이 그 모든 사연을 담고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 P338

폐사지에 이는 서정
깊은 산골의 폐사지(廢寺址).  절도 스님도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적막한 빈터, 뿌리째 뽑힌 주춧돌이 모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무성히 자란 잡초들이 그 옛날을 덮어버린 폐사지에 가면 사람의 마음이 절로 스산해진다. 단청 화려한 건물에 금색 빛나는 불상을 모셔놓은 절집에서는느낄 수 없는 처연한 정서의 환기가 있고, 고요한 절터에는 사색으로 이끄는 침묵이 있다. - P341

그래서 나는 "마음이 울적하거든 폐사지로 떠나라"고 권했는데 정호승 시인은 "폐사지처럼 산다" 라는 시에서 아예 폐사지에 살듯 하라고 했다.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 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
부서진 석등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 P342

불상 좌대에서 사위를 둘러보면 거돈사터는 더없이 아늑하게 다가온다. 옛 절집 자리는 하나같이 명당이라는 감탄을 말하게 된다. 그러나 명당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방향에 맞추어 석축을 쌓고 높낮이를 감안해 단을 쌓음으로써 얻어낸 것이니 차라리 자연을 경영하는 옛분들의 안목이 그렇게 높았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 P3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황사영 백서
‘황사영 백서‘는 길이 62센티미터, 너비 38센티미터의 흰 비단에 극세필 붓을 사용하여 먹으로 쓴 깨알 같은 글씨 1만 3,311 자로 이루어진 장문의 편지이다. 누구든 이 편지를 보면 내용은 둘째 치고 그 정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2013년 울산대곡박물관에서는 ‘천주교의 큰 빛, 언양‘이라는 기획전을 하면서 이 황사영 백서의 정밀 복제본을 전시했는데 박미연 학예사의 말에 의하면 천주교인들은 그 내용보다 깨알 같은글씨를 보면서 울먹이며 기도하더라는 것이다.
황사영이 얼마나 걸려서 썼을까. 그가 토굴에 들어온 것은 1801년 음력 2월이었다. 그는 여기서 각지의 천주교인 박해 상황에 관한 정보를수집하고 토굴로 찾아온 교우 황심(黃沁)과 조선 교회를 구출할 방법을상의한  끝에 백서를 썼다고 하는데 완성된 날이 음력 9월 22일이니 7개월 이상 걸렸다는 얘기다. - P285

그 방안으로서 그는 첫째로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조선도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둘째로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거나, 셋째로 서양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 호소하여 군함 수백 척과 5, 6만 군대를 데리고 오거나, 그렇지 못하면 수십 척의 군함에 5, 6천 명의 군대라도 가능하다고 했다. - P286

비록 이 나라를 섬멸한다 하여도 성교의 명분에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다급한 심정을 토로한 이 문장은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두고두고 황사영 개인의 신앙과 사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천주학의도덕성에 상처를 주게 되었다. - P287

세월이 90여 년 지난 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894년 갑오개혁 후 옛 문서를 파기할 때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 주교가 인수했고1925년 한국순교복자 79위 시복식,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공식적으로 복자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행사) 때 교황에게 전달되었다. 그래서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다. - P289

박달재
제천에서 충주로 가자면 봉양면에서 백운면으로 넘어가는 박달재를넘어야 한다. 산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생긴 이름이겠건만 사람들은 박달이와 금봉이의 이루지 못한 사랑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옛날에 박달이라는 청년이 과거 보러 가는 길에 고개 아래 마을 금봉이와 눈이 맞아 사랑을 했는데 급제해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고 떠나서는 낙방하여 돌아오지 못했고 기다리다 지친 금봉이는 가슴앓이하다 죽고 금봉이를 끝내 못 잊어 뒤늦게 찾아온 박달이는 금봉이의 허상을 보고 껴안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 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 등 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고갯마루를유행가 가사로 많이 쓴 반야월(半夜月, 1917~2012)이 1948년에 울고 넘는 박달재」를 발표해 크게 히트하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갖게 되었다. - P293

유행가의 파워는 대단하여 박달재 고개에는 커다란 노래비가 새겨져있고 금봉이와 박달이 동상도 서 있다. 그런 것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데 강만길 선생님이 이것 좀 보라며 나를 부른다. 제법 오래된 ‘박달재비‘였다. 비문을 읽어보니 문장이 유장하다. 그리고 "1216년 고려의 김취려장군이 거란의 대군을 여기서 물리쳤고 1268년에 고려의이 고장 별초군(別抄軍)이 또한  여기서  몽고의 군사를 막아냈다"는 구절이 눈에 띄었다. 언론인 천관우의 글이었다. 그분은 제천 출신이었다. - P295

철수네 화실에서
우리는 박달재를 떠나 박달이가 금봉이를 만났다는 아랫마을, 을미년제천의병들이 충주로 쳐들어가기 위해 박달재 너머 하룻밤 야영하며진을 쳤다는 평동 마을에 있는 ‘철수네 화실‘로 향했다.
이철수는 1980년대 초 ‘현실과 발언‘ ‘임술년‘ 그룹 등 민중미술의 소집단들이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을 때 단기필마로 등장하여 오윤吳潤)의 뒤를 잇는 목판화가 중 한 명으로 맹활약을 했다. 나는 그의 개인전때마다 팸플릿 서문을 썼다. 그것이 세 번이나 된다. - P2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