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노, 자네 이 지도를 어떻게 생각하나?" 리비에르는 가끔 명상에서 깨어나며 밑도 끝도 없는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이 지도는 본부장님……."

‘이 항공로는 아름답지만 가혹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그것도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갔던가. 지금이야 이 항공로가 그간 일궈낸 성과로 말미암아 위용을 뽐내고 있지만, 문제도 정말 많았지.’

"몸이 약해 잠을 못 잔다면 대신 일을 하면 되겠군 그래."
이 정도는 약과였다. 리비에르는 언제나 한 번 더 확인사살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 불면증이 어떤 음악가에게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게 한다면, 그 불면증은 아름다운 것이지."

르루가 갖고 있는 고결한 매력은 그의 타고난 못생긴 얼굴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얼굴이 일생을 오로지 일에만 전념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리비에르는 매일 밤 하늘에서 한 편의 드라마가 펼쳐진다고 생각했다. 조금이라도 해이한 정신 상태로 있다가는 참패를 면치 못할 것이고, 지금부터 새벽까지 엄청난 사투를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자네는 자네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네."

"사람들의 목숨이 거의 자네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네. 자네보다 더 값어치 있는 사람들의 생명이 자네에게 달려 있다는 얘기야……."

"만약 그들이 우정 때문에 자네에게 복종한다면, 자넨 그들을 기만하는 것일세. 자네 자신은 개인적으로 그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할 어떤 권리도 없지."
"그야…… 물론이죠."
"그리고 만약에 그들이 자네와의 우정을 믿고 어떤 허드렛일을 면하게 되려니 생각한다면, 그 또한 자네가 그들을 기만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그들은 복종을 해야 하기 때문이지. 자, 거기 앉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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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회사에게 있어서는 다른 운송수단과 속도 경쟁을 한다는 게 관건이었다. 이 책에서 경탄할 만한 인물로 그려지는 항공사 본부장 리비에르가 주안점을 두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다.

처음에는 이러한 야간 정기 운항이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지만 차츰 허용이 되었고, 일단 초기의 시험 비행을 거친 후부터는 하나의관행이 되었다. 하지만 이 소설이 쓰인 그 당시에는 대단히 위험한 모험이었다.

우리는 모두 인간의 나약함과 포기, 타락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고, 이 시대의 문학은 그런 것들을 비난하는 데에만 과도하게 치중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보여주었어야 하는 것은 바로 끈질긴 의지의 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기 초월이다.

그러나 항공분야에서도 처음에는 미지의 땅에 대한 탐험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웅시대가 있었다.

"사랑받고 싶다면 동정심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나는 결코 동정심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를 어디에 감추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끔은 나 스스로의 힘에 나도 놀랄 때가 있다."

개인적인 견해로 보자면, 비행사보다도 그의 상사 리비에르가 내게는 더 놀라워 보인다.

리비에르를 지배하고 있는 건 의무감이다. "의무라는 것의 막연한 느낌, 그건 사랑의 느낌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얼핏 보아선 그의 엄격함이 비인간적이며 과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리비에르가 단련시키고자 하는 건 사람의 불완전함이지, 사람 그 자체가 아니다.

"네 부하들을 사랑하라. 하지만 그들에게는 이를 말하지 말라."

즉, 인간의 행복은 자유가 아닌 의무를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내게 있어 이는 심리적으로 상당한 중요성을 띠는 진리이다.

이 위험한 업무의 수행에 온몸을 바치면서 이 일을 완수하는 것만으로도 아늑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렇다고 리비에르가 결코 무정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도 엿보인다. (실종된 조종사의 아내가 그를 찾아 왔을 때보다 더 감동적인 건 없었다.)

또한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서의 리비에르가 이를 시행해야 하는 조종사보다 용기가 덜 필요하다고도 보기 힘들다.

"우리는 마치 뭔가 인간의 생명보다 더 값진 것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이는 내 ‘프로메테우스‘에게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사람을 집어삼키는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어째서 용기를 덕목들 중 최하위에 놓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용기는 그다지 좋은 감정이랄 수 없는 것이지요. 그저 약간의 광기와 허세, 완강한 고집, 천한 스포츠적 유희가 뒤섞인 것 같습니다.

특히 물리적 힘에 열광하기도 하지요. 아무 상관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슴팍까지 셔츠를 풀어헤치고 팔짱을 낀 채배에 힘을 주지요. 그것이 어느 정도 기분 좋은 효과를 얻게도 합니다만, 만약 그런 짓을 밤에 한다고 칩시다. 너무도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기분에 사로잡히겠지요. 이제 나는 가진 거라곤 오로지 용기 하나밖에 없는 사람을 다시는 우러러보지 않을 생각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자기의 선행을 숨기듯 용감한 사람은 자신의 용감한 행위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들은 이를 위장하거나 다른 핑곗거리를 댄다."

캥통이 철학자의 말에 내가 무조건 동감하는 것은 아니지만)의 책에서 발췌한 격언을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을 숨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용기 있는 사람은 용기를 감춘다."

내가 문학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하는 이 책은 사실성이라는 가치 또한 갖고 있다. <야간 비행>이 특별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바로이런 두 가지 측면, 즉 문학적 가치와 사실적 가치를 보기 드물게 잘 결합시켰다는 이유 때문이다.

비행기 아래 언덕들은 벌써 황금빛 황혼 속에 여기저기 그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지구 최남단의 땅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하여 파타고니아 노선 우편기를 조종하고 있는 파비앵은 어떤 항구에 비치는 물 같은 신호만 봐도 곧 밤이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늘은 수족관처럼 고요했고, 그들이 향하는 모든 기항지 비행장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날씨 맑음, 바람 없음.‘이라고 통보해 오고있었다. 그는 대답했다.
"그대로 계속 가세."

때로는 바다보다 더 인적이 드문 초원지대를 100km나 지난 뒤에 외딴 농가 한 채를 만나기도 했다. 농가는 대초원의 출렁이는 파도에 휩쓸려 그 안의 사람들이 통째로 쓸려가 버리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그는 그 배처럼 보이는 농가를 향해 인사라도 하듯 비행기 양 날개를 살짝 흔들었다.

마젤란 해협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2,500km 이상의 항공로에는 고만고만한 기항지들이 군데군데 널려 있었다. 그러나 이산 훌리안 기항지는 밤의 경계선에 자리 잡고 있어, 흡사 아프리카에서 마지막으로 정복당한 부락이 낯선 미지의 세계를 향해 마지못해 문을 열어 주는 것 같았다.

사람이란 고통으로부터, 그리고 창밖의 변함없는 풍경을 바라보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으로부터 풍요로워지는 법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선택하고 난 뒤에는 스스로의 운명에 만족하고, 이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무선사는 과일 속에 벌레가 들어 있듯이 뇌우가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밤하늘은 아름답지만 어딘가가 썩어 있었다.

"계기판이 보이지 않는다. 불을 켜야겠어."
그는 살짝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나 켜진 조종실의 빨간 램프는 몹시 희미했기 때문에 지침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철골을 만져보고, 그 금속 덩어리 안에 생명이 흐르고 있음을 느꼈다. 금속은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었다.

"칠레발 우편기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불빛이 보인다는 전신입니다."
"좋아."

파타고니아, 칠레, 파라과이에서 출발한 우편기 3대가, 남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이곳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자정 무렵 유럽행 우편기를 출발시키기 위해서 이 3대의 우편기들이 실어오고 있는 우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리비에르는 긴장된 어깨로 오랜 기간 지탱해 온 너무나도 무거운 짐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휴식도, 희망도 없는 노력이라는 짐이었다.
‘내가 나이를 먹은 모양이군.‘

잠시 후에는 나머지 두 대도 내어줄 것이다. 그러면 그날의 일과는 끝이 난다. 그런 후 피곤에 지친 승무원들은 숙소로 향하고, 새교대조가 그 자리에 앉을 것이다. 그러나 리비에르에게 휴식이란 있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유럽행 우편기가 그를 불안하게 했기때문이다. 언제나처럼 늘 그런 식으로 반복될 것이다.

하지만 평온함은 없다. 어쩌면 승리도 없을 것이다. 모든 우편기들의 최종 도착이란 것도 없지 않던가.

"르루,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나?"
"사랑이라뇨, 본부장님!"
"하긴 자네도 나처럼 그럴 시간이 없었겠군."
"그렇죠, 뭐......."

마침내 비행기가 격납고 앞에 멈췄을 때, 정비사와 일꾼들이 분주히 우편물을 내려놓고 있었지만, 조종사인 펠르랭은 꼼짝도 하지않았다.

아득하게 들리던 엔진 소리가 점점 더 커진다. 소리는 무르익어갔다. 사방으로 불이 환하게 켜졌다.

"술이나 한잔 사주시오."
펠르랭은 안데스 산맥의 코르디예라 산계를 넘어가고 있었다. 겨울에 내린 눈은 평화로운 분위기로 산 전체를 뒤덮었다.

"오늘 비행이 어땠는지 당신들이 알기만 한다면.......!"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가죽 비행복을 갈아입으러 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계속 달려가면서 잇따라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바로 그때, 난기류(亂氣流)와 함께, 그를 둘러싼 산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폭풍우 속에서의 한 판 승부, 그건 적어도 현실적이었으며 솔직했다.

이어 먼지 한 줌이 대기 중에 섞여 마치 한 대의 범선처럼 눈길을 따라 부드럽게 유영하여 위로 올라왔다. 그는 필요할 경우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힐끗 보고는 몸서리를 쳤다. 그의 뒤에 있는 산맥 전체가 부글부글 술렁이고 있었다.

그건 투풍가토(Tupungato) 산의 정상 부근이었다.
너비 200km의 산맥에는 사람 하나, 생명체의 숨결 하나, 그 어떤 기력 하나 없었다. 오직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해발 6,000m 수직으로 솟아오른 산등성이,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암벽, 무시무시한 정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분노가 바위틈에서 새어 나오고, 눈 속에서 솟아 나온다는 것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사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뭔가가 불편한 듯한 느낌이 들 뿐이었다. 혼자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갖게 되는 거북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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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ㅣ 세계문학그림책
조은교 그림, 정아원 글,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원작 / 고래의숲 / 202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안나 카레니나

—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어디까지 용서받을 수 있는가 —

레프 톨스토이 원작 『안나 카레니나』 그림책을 읽고

세계문학의 걸작이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안나 카레니나』를 그림책으로 만났다. 톨스토이의 대표작이자 인간의 사랑과 삶을 깊이 있게 그려낸 작품이라는 평가를 익히 들어왔기에 나름의 기대도 있었다. 그러나 책을 덮은 뒤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감동이나 찬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혹감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것일까.

남편과 자식이 있는 여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을 위해 가정을 떠나며, 결국 자신의 삶마저 비극으로 끝내는 이야기. 나는 안나의 선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래전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세상이 위대한 작품이라고 칭송하는데, 정작 책을 읽는 나는 주인공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위대한 작품이라고 해서 그 안의 인물에게 반드시 공감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 의문을 안고 안나의 삶을 다시 생각해 보았다.

1. 사랑에 빠진 것이 죄는 아니지만

안나 카레니나는 남편 카레닌과 아들을 둔 귀족 여성이다. 사회적 지위가 있고,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겉으로 보기에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환경이다. 물론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가정이라고 해서 그 안에 사는 사람까지 행복하다는 보장은 없다. 안나가 남편과의 관계에서 느꼈을 답답함과 외로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그녀 앞에 젊은 장교 브론스키가 나타난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고, 결국 안나는 그와의 사랑을 선택한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이성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혼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움직이는 것과 그 마음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안나에게는 남편이 있었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었다. 그녀가 새로운 사랑을 선택한다면 그 선택으로 인해 상처받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나는 브론스키를 향해 나아간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선택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충분히 감당하지 못했다. 나는 이 지점에서부터 안나에게 공감하기 어려웠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지 몰라도, 그 사랑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누구에게 상처를 줄 것인지는 스스로 책임져야 할 문제다.

사랑이라는 이름이 모든 행동을 정당화해 주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2. 자신의 행복을 위해 다른 사람의 불행을 감수할 수 있는가

안나는 브론스키와 함께하기 위해 기존의 삶을 떠난다. 그러나 새로운 사랑을 선택했다고 해서 그동안 쌓아온 관계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남편 카레닌에게는 아내와의 관계가 무너지는 일이었고, 아들에게는 어머니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고통이 따랐다. 안나 자신도 아들을 그리워하며 괴로워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묻고 싶었다.

그토록 소중한 아들이 있었다면, 브론스키라는 남자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을까.

그렇다고 이 모든 책임을 안나에게만 물을 수는 없다. 브론스키 역시 그녀에게 남편과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선택한 사랑이었다면 그 선택에 따르는 책임도 두 사람이 함께 져야 한다. 사랑은 함께 시작했는데 그 대가가 한 사람에게만 돌아간다면, 그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

사람마다 사랑의 크기와 방식이 다르니 내 기준으로 두 사람의 감정을 재단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이 아무리 강렬하더라도 그 선택으로 상처받는 가족의 존재까지 지울 수는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이 원하는 것과 지켜야 할 것 사이에서 수없이 갈등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해서 모두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이 있고, 책임져야 할 일이 있으며, 자신의 선택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방법을 찾아 타협하기도 한다. 그것이 특별히 고결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안나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무조건 참고 견뎌야 했다는 뜻은 아니다.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었다면 다른 선택과 방법을 고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사랑을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사랑이 자신의 삶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무너뜨리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점이다.

행복을 추구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그러나 자신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세워질 때는 그만큼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3. 안나의 비극,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은

안나의 삶은 브론스키와 함께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는다. 사회적 비난과 고립이 깊어지고, 브론스키의 사랑이 변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커진다. 자신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한 사랑이기에 그 사랑마저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가 여성에게 유독 가혹한 도덕적 기준을 적용했다는 점도 외면할 수 없다. 남성의 잘못에는 비교적 관대하면서 여성에게는 엄격했던 사회의 위선은 안나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런 점에서 안나는 비난받아야 할 행동을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불공평한 사회적 관습으로 고통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마지막 선택만큼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안나는 결국 달려오는 열차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이 장면에서 안나의 절망과 비극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열차를 운전하던 기관사는 무슨 죄인가.

갑자기 눈앞에서 벌어진 사고를 마주해야 했던 기관사는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을까. 사고를 수습해야 했던 철도 관계자들은 또 어떠했을까. 열차에 타고 있던 승객들에게도 그날은 평범한 하루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안나가 그러한 피해를 의도했다고 볼 근거는 없다. 극심한 절망 속에 있던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미칠 영향까지 차분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리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 선택으로 영향을 받았을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잊어서도 안 된다.

나는 안나가 얼마나 절망했을지 함부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녀의 죽음을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의 완성처럼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다. 한 사람의 비극을 이해하려는 마음과 그 비극으로 인해 상처받았을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은 함께 존재할 수 있다.

안나의 고통이 깊었다고 해서 그로 인해 발생한 다른 사람들의 고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4. 감정과 원칙 사이에서

사람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원하는 것이 생겼다고 해서 모두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다.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도로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현장에서는 공사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과 안전을 위해 작업을 멈춰야 한다는 판단이 충돌할 때가 있다. 공사를 진행하면 당장의 일정은 지킬 수 있다. 그러나 위험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채 서두르다 사고가 발생하면 그 피해는 작업자와 가족들에게 돌아간다. 그렇기에 현장에서는 무엇을 먼저 지켜야 하는지 판단할 원칙이 필요하다.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랑이든 일이든 자신의 감정과 욕망만으로 결정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원하는 것을 얻는 일이 다른 사람의 삶을 흔들 수 있다면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 당장의 만족보다 오래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인문정신의 중요한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인문정신이란 어려운 철학책을 많이 읽거나 거창한 사상을 논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삶에 대해 고민하고, 자신의 선택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살피며, 옳다고 믿는 가치를 실제 생활에서 지켜가는 태도이기도 하다.

물론 안나에게 그런 기준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녀 역시 자신의 사랑이 진실하다고 믿었을 것이고,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감수했다. 그러나 한 가지 가치에 모든 것을 걸어버리면 다른 소중한 가치들이 보이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안나가 자신의 사랑을 지키려는 과정에서 가족에 대한 책임과 타인에 대한 배려를 어떻게 함께 지킬 수 있었을지 묻고 싶다.

삶의 원칙은 평온할 때 말로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에도 무엇을 지킬 것인지 선택하는 데서 드러난다.

5. 그런데 왜 이 작품은 걸작이라고 불리는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처음의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이렇게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의 이야기가 어째서 세계문학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다.

위대한 문학작품이라는 것과 그 작품 속 주인공의 삶이 위대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톨스토이는 안나의 행동을 모두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의 사랑을 무조건 찬양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사회적 관습, 가족에 대한 책임 사이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독자가 안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녀의 행동에 분노하는 것 역시 작품을 읽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다.

오래전 『돈키호테』를 읽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도 떠올랐다. 돈키호테는 기사도 소설에 빠져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하며 달려든다. 독자인 나는 그의 터무니없는 행동을 보며 도대체 왜 저러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 보면 『돈키호테』가 단순히 어리석은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험만을 그린 작품은 아니었다.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안나 카레니나』 역시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안나의 행동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해서 작품 전체의 가치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인간의 욕망과 책임, 삶의 의미를 더 깊이 고민하게 만들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읽은 것은 방대한 원작 소설을 그림으로 압축한 책이다. 원작의 복잡한 인물 관계와 사상적 깊이가 그림책에 모두 담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이번 독서에서 느낀 당혹감을 톨스토이의 원작 전체에 대한 최종 평가로 삼을 생각은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하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독자가 반드시 감동해야 할 의무는 없다.

6. 내가 더 공감한 사람은 레빈이었다

『안나 카레니나』에는 안나와 대조되는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 있다. 바로 레빈이다.

레빈은 화려한 사교계의 중심에서 사랑과 욕망을 좇는 인물이 아니다. 농촌에서 땅을 일구고, 농민들과 함께 일하며, 결혼과 가족, 노동과 신앙의 의미를 고민한다. 물론 레빈의 삶도 평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사랑 앞에서 망설이고, 결혼생활에서 갈등하며, 자신의 삶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질문한다.

그러나 그가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곳은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사랑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이다. 나는 오히려 레빈의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모습과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하루의 일을 시작하고, 맡은 일을 책임지고, 가족과 함께 밥을 먹으며, 때로는 다투고 화해한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인생이다. 그 삶에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처럼 극적인 장면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삶의 가치가 작은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오랫동안 맡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 하루의 일을 무사히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특별한 성취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 평범함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는 지루해 보일지 모르는 일상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삶이다.

레빈의 이야기는 그런 삶에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안나가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느꼈던 행복을 새로운 사랑에서 찾으려 했다면, 레빈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과 의미를 발견하려 했다. 나는 후자의 삶에 더 마음이 갔다.

7. 사랑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안나의 사랑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또 하나의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모습이 그녀와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젊은 날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느끼는 설렘이 사랑인지, 보고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이 사랑인지, 아니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가며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사랑인지 선뜻 정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내 인생에서 여자는 아내 한 사람뿐이었다. 손목을 잡아본 여자도 아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고결하거나 남다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저 한 사람을 만나 함께 살아왔고,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야기다.

사랑이 언제나 가슴이 뛰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생각이 다를 때는 양보하고, 힘든 일이 생기면 함께 견디는 것. 그렇게 하루하루를 쌓아가는 것도 사랑이다.

나는 안나처럼 모든 것을 내던질 만큼 격정적인 사랑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가 아내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감정의 크기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오랜 세월을 함께하고, 어려운 순간에도 서로를 지키며,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 역시 사랑의 중요한 모습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말로 설명하지 못해도, 한 사람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그 대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8. 책을 덮으며 —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도 나는 여전히 안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가 브론스키에게 느꼈던 사랑의 크기를 짐작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을 위해 가족과 기존의 삶을 무너뜨린 선택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생을 끝낸 일도 안타깝지만, 그로 인해 상처받았을 다른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무겁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작품을 읽은 시간이 무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안나에게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랑과 책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레빈의 삶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돌아보게 되었다.

어쩌면 문학의 가치는 독자를 반드시 감동시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을 만나고, 그 행동에 반감을 느끼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따져 묻는 과정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평소 **사와생보(死臥生步)**라는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간다.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있으니 걸어라.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할 수 있는 일을 미루지 않고,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가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제 그 말에 한 가지 생각을 더하고 싶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안나는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향해 달려갔지만, 결국 삶을 지탱하던 많은 것들을 잃었다. 반면 레빈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갔다. 나는 어느 쪽의 삶을 살고 싶은가. 그 대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안나의 격정적인 사랑보다 레빈의 평범한 삶을 선택하고 싶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랑의 방식이 있겠지만, 내가 선택한 사랑은 한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젊은 날 처음 손을 잡았던 그 사람과 세월을 함께 보내고, 서로의 주름이 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살아 있는 동안 같은 길을 걸어가고 싶다.

사랑이 무엇인지 아직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누구를 사랑하는지는 분명히 안다.

내 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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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ㅣ 세계문학그림책
이산호 지음, 구남훈 그림,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원작 / 고래의숲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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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비행

— 안전과 실행, 그 어려운 선택 앞에서 —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원작 『야간 비행』 그림책을 읽고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개척해 왔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에 도전하고, 위험을 감수하며, 때로는 자신의 생명까지 걸면서 오늘날의 문명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어디까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위험을 감수하도록 결정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책임이 따르는가.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은 바로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생텍쥐페리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재구성한 그림책이다. 석양이 물든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기, 어둠 속에서 몰아치는 폭풍우, 조종석의 작은 계기판, 지상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강렬한 색채로 펼쳐진다. 아름다운 그림이지만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늘을 나는 사람들의 용기와 그들을 지휘하는 사람의 책임, 그리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희생과 갈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도로건설 현장에서 사업을 추진하고, 지금은 도로안전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는 나에게 이 작품은 단순한 항공 모험담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안전과 실행. 말로는 간단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느 하나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두 가지 가치가 떠올랐다.

1. 어둠 속으로 날아오르는 사람들

이야기의 배경은 항공우편 사업이 막 발전하던 시기의 남아메리카다. 당시 비행기는 오늘날처럼 정교한 항법장비나 기상정보를 갖추지 못했다. 특히 야간 비행은 낮보다 훨씬 위험했다. 조종사는 어둠 속에서 지형을 분간하기 어려웠고, 갑작스러운 악천후를 만나면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의존해야 했다.

그럼에도 항공우편 사업을 이끄는 리비에르는 야간 비행을 계속 추진한다. 우편물을 더 빠르게 운송하기 위해서는 밤에도 비행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밤이라는 이유로 비행을 중단한다면 항공운송이 가진 속도의 이점을 충분히 살릴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에게 야간 비행은 단순히 운송 시간을 단축하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아직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넘어서는 도전이었다.

그러나 그 도전의 최전선에는 실제로 비행기를 조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파비앵이다. 파비앵은 밤하늘을 날다가 거센 폭풍우를 만난다. 사방은 어둠에 잠기고, 구름과 바람은 비행기를 위협한다. 그는 어떻게든 항로를 유지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거대한 소용돌이와 그 속의 작은 비행기는 인간과 자연의 압도적인 힘의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면서 인간이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졌더라도 자연 앞에서는 여전히 한없이 작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과연 이 비행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을까.

2.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리비에르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그의 결정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새로운 기술과 제도는 처음부터 완벽한 안전이 확보된 상태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드물다. 누군가 먼저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경험을 축적하면서 발전해 왔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이용하는 항공교통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와 기술적 도전의 결과다.

도로건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고, 바다를 건너 교량을 놓으며, 험준한 지형에 새로운 길을 내는 일에는 언제나 어려움과 위험이 따른다. 공사를 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한 지반 조건이 나타나고 기상이 악화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모든 위험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다. 공사를 마냥 중단할 수도, 무리하게 밀어붙일 수도 없으니 제한된 예산과 공사기간, 기술적 여건 속에서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리비에르가 추구했던 실행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할 위험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실행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준비와 판단을 거쳐 실행할 것인가에 있다. 도전에는 위험이 따르지만, 그렇다고 모든 위험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3.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의 무게

파비앵 못지않게 깊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리비에르였다. 파비앵이 실제 위험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라면, 리비에르는 그 위험을 감수할 조직의 방향을 결정하는 사람이다.

리비에르는 규율을 엄격히 하고 개인의 감정보다 조직의 사명을 앞세운다. 그러나 조종사들의 위험을 모르는 것도, 그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도 아니다. 그는 엄격한 규율과 책임감이 위험한 비행을 가능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조직과 조종사를 지탱한다고 믿었다.

현장의 사람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만, 관리자는 그 임무를 계속할지 멈출지를 정한다. 그 판단이 틀리면 결과는 현장의 사람에게 먼저 닿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공사감독 시절을 떠올렸다.

장마철, 국가하천을 가로지르는 공사용 가교의 복공판(가교 위에 깔아 둔 철판)을 언제 철거할지 결정해야 했던 적이 있다. 현장에서는 하루라도 더 작업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비 예보를 근거로 철거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서로 이유가 분명했기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고, 결국 하루만 더 작업한 뒤 철거하기로 타협했다.

다행히 비는 예보보다 늦게 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운이 따랐을 뿐이다.

결과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결정해야 하는 것, 그것이 관리자의 자리다.

공사 진척도, 공사기간도 중요하다. 국민에게 약속한 사업을 적기에 완공하는 것도 공공사업을 맡은 사람의 책임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는 것은 사람의 생명이다. 그렇다고 안전만 앞세워 모든 일을 멈출 수도 없다. 사업이 멈춰 생기는 사회적 손실과 국민의 불편도 무겁기 때문이다. 결국 관리자는 실행의 필요성과 위험의 정도를 함께 저울질해야 한다.

실행을 결정하는 용기도 필요하지만, 위험하다고 판단될 때 멈추라고 명령하는 용기 역시 필요하다.

그것이 책임 있는 관리자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4. 한 사람의 희생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파비앵은 결국 폭풍우 속에서 돌아오지 못한다. 그의 비행은 항공우편 사업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치러야 했던 희생처럼 그려진다. 그러나 나는 그 희생을 단순히 숭고한 도전의 결과로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파비앵에게도 삶이 있었고, 그를 기다리는 아내가 있었다. 그림책에 등장하는 실내의 따뜻한 불빛과 기다리는 사람의 모습은 어둠 속의 비행기와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하늘에서는 한 명의 조종사가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지상에서는 누군가의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형 사업을 이야기할 때 사업비와 공사기간, 추진 실적과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몇 킬로미터의 도로를 개통했는지, 얼마나 많은 예산을 집행했는지, 공사기간을 얼마나 단축했는지가 중요한 지표가 된다. 물론 이러한 성과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 숫자 뒤에는 수많은 사람의 노동과 땀이 있고, 때로는 위험한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공사 현장에서 발생한 사고를 단순히 통계상의 숫자 하나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사고 한 건은 누군가에게는 평생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가 될 수 있다.

리비에르가 야간 비행을 계속 추진한 것은 항공운송의 미래를 위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의 무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파비앵의 희생뿐 아니라 그를 기다렸던 사람들의 슬픔까지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조직의 성과는 숫자로 평가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생명은 어떤 숫자로도 환산할 수 없다.

5. 안전과 실행, 그 사이에서 길을 찾다

『야간 비행』의 결말에서 리비에르는 파비앵이 돌아오지 못했음에도 다음 비행을 계속하도록 한다. 한 사람이 희생되었는데도 같은 일을 계속하는 것이 옳은가. 그렇다고 희생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도전을 포기해야 하는가. 어느 한쪽을 택한다고 풀리는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판단은 더욱 흐릿하다. 정보는 불완전하고, 시간은 부족하며, 이해관계는 복잡하다. 복공판을 두고 고민하던 그날처럼, 우리는 결과를 모른 채 결정해야 한다. 그래서 책임자의 자리는 어렵다.

결정하지 않는다고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결정했다고 책임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리비에르의 결정을 모두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짊어진 고뇌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도로안전 업무에서도 마찬가지다. 위험한 도로를 고치려면 공사를 해야 하고, 공사에는 또 다른 위험이 따른다. 그렇다고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기존의 위험이 그대로 남는다. 안전과 실행 사이에서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정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결국 중요한 것은 결과가 좋았는지가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릴 당시 위험을 얼마나 충실히 검토하고 책임 있게 판단했는가일 것이다.

6. 어둠 속에서도 비행은 계속되어야 하는가

그림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둠과 빛이 교차하는 하늘을 바라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작은 비행기는 인간의 도전정신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비행기가 얼마나 위태로운 존재인지도 보여준다.

생각해 보면 길을 만드는 일도 결국 사람을 위한 일이다. 사람들이 더 빠르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들지만, 그 길의 궁극적인 가치는 속도나 규모에만 있지 않다. 사람들이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하고, 다시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길을 만드는 이유이며, 도로안전이라는 업무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파비앵이 돌아오지 못한 밤에도 리비에르는 다음 비행을 준비했다. 나는 그 선택을 쉽게 비난할 수도, 무조건 찬양할 수도 없다. 다만 우리가 같은 자리에 선다면, 다음 비행을 계속할지 정하기에 앞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떤 위험을 줄일 수 있는지부터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과거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야간 비행』은 내게 도전과 용기의 아름다움만을 보여준 작품이 아니다. 무언가를 실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수반하는지, 그리고 그 책임의 중심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이야기다. 세상에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러나 그 일을 반드시 지금, 반드시 이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멈추지 않는 것만이 용기는 아니다.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아는 것도 용기다.

어둠 속에서도 비행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비행의 목적은 단순히 더 빨리 도착하는 데 있어서는 안 된다.

그 비행을 시작한 사람이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까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임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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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ㅣ 세계문학그림책
오은 지음, 조아름 그림,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원작 / 고래의숲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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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살아 있는 동안 걸어야 할 이유 —

레프 톨스토이 원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림책을 읽고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먹을 것이 있어야 하고, 입을 옷과 잠잘 집도 있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도 중요해지고, 노후를 위한 경제적인 준비도 필요해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갖춘다고 해서 인간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일까.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아주 가난한 구두장이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 속에는 인간의 삶을 관통하는 깊은 질문이 담겨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이번에 읽은 책은 톨스토이의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엮은 그림책이다. 소박한 사람들의 모습과 어둡고 따뜻한 색채의 그림은 이야기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전해준다. 특히 인간 세상에 내려온 천사 미하일이 세 가지 진실을 깨달아 가는 과정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1.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눌 수 있는 것

구두장이 시몬은 가난한 사람이다. 자신과 가족이 입을 옷조차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런데 그는 길에서 옷도 입지 못한 채 추위에 떨고 있는 낯선 남자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앞선다. 자신도 먹고살기 어려운데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사람을 도와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지만 시몬은 그를 외면하지 못한다. 자신의 옷을 벗어 입히고 집으로 데려온다.

집에 돌아온 아내 마트료나는 낯선 사람을 데려온 남편에게 화를 낸다. 당장 가족이 먹을 것조차 부족한데 식구 하나를 더 늘렸으니 당연한 반응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 역시 결국 낯선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내어준다.

사람은 흔히 자신에게 여유가 생기면 남을 돕겠다고 말한다. 돈을 많이 벌면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시간이 남으면 봉사하고, 내 형편이 좋아지면 주변을 돌아보겠다고 한다.

하지만 시몬과 마트료나는 여유가 있어서 남을 도운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들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어려운 처지였다. 그럼에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어쩌면 사랑과 나눔은 가진 것의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2. 내일을 안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이야기에는 부유한 신사가 등장한다. 그는 값비싼 가죽을 가져와 오랫동안 신을 수 있는 튼튼한 장화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자신이 앞으로도 오래 살아갈 것처럼 장화의 품질과 수명을 따진다.

그러나 미하일은 장화가 아니라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신발을 만든다. 그리고 그 신사는 자신이 주문한 장화를 신어보지도 못한 채 세상을 떠난다.

이 장면은 인간이 얼마나 불확실한 존재인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내일도 당연히 오늘처럼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음 달의 계획을 세우고, 내년의 여행을 준비하며, 몇 년 뒤의 삶까지 계산한다. 물론 계획을 세우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아무리 치밀하게 준비하더라도 우리에게 내일이 반드시 주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이 대목에서 내가 평소 마음에 새기고 있는 말 하나가 떠올랐다.

사와생보(死臥生步). 죽어서야 누울 것이니 살아있으니 걸어라.

언젠가 우리 모두는 영원히 누울 날을 맞이한다. 그렇다고 그날을 미리 걱정하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미뤄둘 이유는 없다.

건강하게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찾아가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을 때 그 시간을 누려야 한다.

젊었을 때는 돈과 성공, 사회적 지위가 삶의 중요한 목표였다면, 세월이 흐르면서 건강하게 걸을 수 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 가보고 싶은 곳을 직접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게 된다.

부유한 신사는 좋은 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을 날을 준비했지만, 정작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미래를 준비하되,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위해 오늘의 소중한 삶을 지나치게 희생하지 말라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3.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

내게 가장 따뜻하게 다가온 장면은 두 아이를 데리고 찾아온 여인의 이야기다.

여인은 아이들을 직접 낳은 어머니가 아니다. 아이들의 친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여인은 남겨진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돌보며 살아간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에는 혈연이라는 조건이 없다. 누군가의 부탁을 받아 잠시 보살피는 것도 아니고,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아이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자신이 그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을 흔히 피로 맺어진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가족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것이 반드시 혈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다. 누군가 먹이고 입히고 보살펴 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아이들을 살아가게 한 것은 재산도, 지위도, 특별한 능력도 아니었다.

한 여인의 사랑이었다.

이 장면에서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고, 또 다른 누군가를 보살피며 살아간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 부지런히 걷는다는 것도 단순히 먼 거리를 이동하거나 많은 곳을 다녀오는 일만을 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얼마나 멀리 걸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걸었고, 그 길에서 누구의 손을 잡아주었느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4. 세 가지 깨달음,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

미하일은 인간 세상에서 세 가지 진실을 깨닫는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으며, 인간은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알 수 없고, 결국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깨달음은 각각 다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결론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유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살아갈 수는 없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언젠가는 누군가의 보살핌이 필요한 순간을 맞는다. 반대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시몬이 미하일을 도왔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지금까지 걸어온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알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 잘났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부모님의 희생이 있었고, 가족의 기다림이 있었으며,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때로는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의 작은 친절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도 결코 혼자만의 걸음은 아니었다. 내가 두 발로 세상을 걸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수많은 사람의 사랑이 그 걸음을 지탱해 주었던 것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이루어 낸 것들만 생각했지, 그 과정에서 누가 나를 도왔고 누가 나를 기다려 주었는지 충분히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사와생보가 살아 있는 동안 멈추지 말고 걸으라는 다짐이라면, 톨스토이의 이야기는 그 걸음을 가능하게 해 준 사람들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처럼 다가온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내가 남긴 발자국의 수가 아니라, 그 발자국 곁에 함께했던 사람들의 온기인지도 모른다.

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미하일이 자신의 깨달음을 얻고 본래 천사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어두운 색채로 표현되던 그림은 점차 밝아지고, 인간 세상에서의 깨달음은 하나의 빛처럼 그려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 등장했던 가난한 구두장이 시몬을 다시 떠올렸다.

시몬은 자신이 데려온 낯선 사람이 천사라는 사실을 몰랐다. 그를 도와주면 어떤 좋은 일이 생길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을 차마 외면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쩌면 인간의 선행이란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거창한 명분이나 대단한 결심이 없어도,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시작일 것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는 오래전에 쓰인 이야기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거보다 훨씬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해서 인간의 외로움과 불안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면서 정작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이제는 삶의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떤 사람으로 살아왔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가보다 누구와 무엇을 나누었는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돌이켜보면 사와생보와 톨스토이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질문에서 출발해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사와생보는 살아 있는 동안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톨스토이는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지 묻는다.

하나는 삶을 미루지 말라는 가르침이고, 다른 하나는 그 삶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살아 있는 동안 부지런히 세상을 걷되, 그 길에서 사람을 잃지 말라는 것.

사람은 돈으로 생활을 유지할 수 있고, 음식으로 생명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인간다운 삶이 완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사랑으로 오늘까지 살아왔고, 또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내일을 살아갈 이유를 얻는다.

살아 있으니 걸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있으니 그 걸음에는 의미가 있다.

톨스토이가 던진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제 분명하다.

사람은 결국 사랑으로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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